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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876화 (876/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76)

107. 선발 (6)

향록의 말에 황지호가 기뻐하고, 백호군도 눈을 조금 크게 떴다.

황지호가 확인하듯 물었다.

“정말인가? 운사가 곧 눈을 뜬다고?”

“응, 언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아. 신체 반응이나 이능파의 상태를 봤을 때, 갑자기 좋아진 것 같은데…….”

향록이 작은 손가락을 놀려 운사의 이마를 짚었다.

손가락 끝에서 흘러나온 빛이 운사의 이마로 빨려 들어갔다.

향록은 오랫동안 집중했다가 입을 열었다.

“사기(邪氣)가 머문 흔적이 있어.”

그 말을 듣자 머리가 아파졌다.

흑막이 운사에게 무슨 짓을 했을 가능성은 생각했는데, 좀 더 철저히 살펴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막연히 호족에게 맡겨 버리고 말았다.

‘곱게 보낸 게 아니었구나. 그 생각을 했어야 했는데. 일부러 심어 둔 건지, 아니면 그냥 흑막 측에 있다 보니 저절로 그렇게 된 건지…….’

흑막의 철저함을 생각하면 전자일 가능성이 컸다.

설령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눈에 안 띄게 천천히 망가지도록 삿된 기운을 깊숙하게 숨겨 뒀을 거다.

어떤 이유로 갑자기 운사가 좋아지고, 그 원인을 궁금해한 향록이 더욱 공을 들여 살피지 않았다면 묻혔을지도 모른다.

황지호도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런 게 운사의 몸에 있었다고? 이 몸이 살폈을 때에는 그런 걸 느끼지 못했다만.”

“황호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철저하게 숨겼나 봐. 음, 나도 바로 못 알아볼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사기가 씻겨 나가고 있어.”

향록이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원인을 찾으려 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굳이 둘러보지 않아도 그 원인을 알 수 있었다.

바로 안다인이었다.

‘안다인의 특이 체질 덕이야.’

향록의 시선이 안다인 앞에서 멈췄다.

처음에 안다인을 만났을 때, 향록은 특이 체질에 관해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향록도 운사가 회복한 원인을 찾아낸 듯하다.

“오늘 안다인을 데려와서 다행이네!”

향록이 밝게 말했다.

안다인에게는 독과 사기(邪氣)를 정화시키는 특이 체질이 있다.

안다인의 특이 체질은 독과 사기(邪氣)를 정화시킨다.

이번에 그 특이 체질이 빛을 발해 운사를 구했다.

황지호가 안다인에게 감사를 표했다.

“네 덕이다. 고맙다.”

“내가 도움이 된 것 같아서 기뻐.”

타이틀 히로인의 대활약에 감탄하면서도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기껏 플레이어의 궤적을 사용할 수 있는데, 나는 대체 뭘 했던 건가.

‘나도 안다인의 힘을 쓸 수 있으니 알아채고 운사를 바로 회복시켰어야 했는데…….’

또 이렇게 무언가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당분간 수를 재점검하는 게 좋지 않을까?

기숙사에 돌아가면 어느 수부터 되짚어 보고 살펴야할지 생각이 많아졌다.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안다인이 갑자기 나를 보며 말했다.

“이게 다 의신이가 내 가족을 찾아준 덕이야. 그렇지?”

“그렇다. 조의신이 없었다면 안다인은 물론이고 운사도 이 자리에 없었겠지.”

안다인과 황지호가 내 쪽을 보며 여러 말을 쏟아 냈다.

저 둘은 민망할 정도로 칭찬을 쏟아 내고 향록은 멀뚱멀뚱 지켜보았다.

백호군도 맞장구치듯이 가끔 고개를 끄덕였는데, 호랑이들의 말이 길어질수록 민망함이 치솟았다.

“그럼 먹는 영약을 만들게!”

“그렇게 하도록.”

향록 덕에 겨우 뜬금없는 칭찬 세례가 끝났다.

나는 안심했지만, 이번엔 운사가 걱정되었다.

‘일어나자마자 향록이 만든 영약을 먹어야 하다니.’

운사가 눈을 뜬다는 건 기쁜 일이긴 해도 안쓰러워졌다.

아직 몸과 마음이 정상이 아닌데 그런 걸 먹으면 다시 잠드는 게 아닐까?

나라면 제정신을 못 차릴 것 같다.

향록이 영약을 만드는 것을 지켜보느라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을 때였다.

“……운사.”

백호군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백호군은 운사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운사의 눈꺼풀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황지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운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운사가 가늘게 눈을 뜨자 먹구름을 품은 듯한 흐린 눈동자가 보였다.

“황호…….”

꺼질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는 힘이 없었지만, 부드럽고 다정하게 들렸다.

오랜만에 만난 친우를 반가워하는 마음이 묻어났다.

황지호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운사를 내려다보았다.

운사는 눈을 느리게 깜빡이고선 황지호 뒤로 보이는 백호군의 이름을 불렀다.

“백호…….”

백호군이 말없이 운사를 응시했다.

운사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안면 근육을 움직이는 게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거의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기뻐하는 건 잘 느껴졌다.

옛 친우의 재회 장면에 눈치 없이 끼어들지 않도록 눈에 안 띄게 기척을 죽이려 했을 때였다.

운사가 내 쪽을 보았다.

“……조의신.”

여기에서 내 이름을 부른다고?

어떻게 나를 알지?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주변의 반응을 보니 나만 들은 게 아닌 듯했다.

운사가 내 이름을 부른 게 확실했다.

‘어째서 내 이름을 알고 있을까, 그리고 이 중요한 순간에 하필 나를 부른 이유가 뭐지?

운사와 나의 접점을 빠르게 되짚어 보았다.

떠오르는 게 있었다.

도철이 운사와 성형우의 힘을 활용해 내 과거와 공포를 들여다봤을 때였다.

‘내 과거를 봤다면 이름을 알 수 있겠지. 설마 운사는 그걸 다 보고 기억한 건가?’

불가능한 건 아니다.

도철은 보지 못했더라도 운사는 그걸 봤을 가능성이 있다.

사실상 운사의 힘이 성형우의 광림을 움직인 셈이니까.

봤을 가능성을 생각했지만, 운사가 나를 기억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오랜 기간 화로에서 불타며 고통받느라 이성을 거의 상실했을 텐데, 인간 하나의 기억에 집중하고 기억할 리가 없을 거라고 여겼다.

운사의 정신력은 내 짐작보다 더 강한 게 틀림없었다.

“미안해…….”

대체 무엇을 사과하나 했는데, 운사가 내 왼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운사의 먹구름이 내 왼눈을 빼앗은 순간도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사과의 말을 한 운사의 눈이 젖어 있었다.

내 눈을 빼앗은 건 뒤에서 움직인 도철, 더 크게 보면 흑막이 한 짓이다.

운사는 관계가 없었다.

그 점을 설명하려고 했는데, 뭐라고 해야 운사의 마음에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납득시킬 수 있을지 말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운사의 심신은 그만큼 약해 보였다.

“울면 안 돼. 기력이 떨어져. 몸 생각부터 해!”

향록이 내 고민을 끝내 주었다.

향록의 말대로 지금 운사는 사과 같은 것보다는 몸의 정양에 신경 써야 할 때였다.

‘그런데 향록은 정말 환자 생각만 하는구나.’

호족의 거침 없는 행보 덕에 향록 앞에서 많은 비밀이 드러난 상태다.

안다인의 존재도 그렇고, 운사도 그렇다.

전후 사정을 전혀 몰라도 아마 짐작 가는 바가 많을 거다.

조금 흥미진진해할 법도 한데, 향록이 관심을 보이는 건 안다인의 특이 체질과 운사의 상태뿐이었다.

향록이 저런 존재라서 호족도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 데려온 걸지도 모르겠다.

향록은 운사를 보며 해맑게 말했다.

“우선 내 영약을 먹고 건강해지는 게 좋겠어. 저작, 연하, 섭식에 장애가 있어도 쉽게 먹을 수 있도록 만들었거든? 먹어 봐!”

권유의 말을 하긴 했지만, 향록은 바로 먹일 생각이 넘쳐 보였다.

이미 향록의 손에는 완성된 영약이 들려 있었다.

영약은 유리 스포이드 용기에 담겨 있었다.

조금 용량이 커 보이는 스포이드에는 불길한 빛깔과 향을 품은 영약이 담겨 있었다.

향록은 스포이드의 끝을 운사의 입 바로 앞에 가져가며 황지호를 보았다.

운사의 의사보다는 의뢰주인 황지호의 허락을 우선시할 생각인 듯했다.

‘황지호는 영약 앞에서 자비가 없는데.’

황지호는 그동안 다른 호랑이들이 아무리 괴로워해도 영약을 꿋꿋하게 먹였다.

그건 운사에게도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황지호는 눈물이 고여 있는 운사의 눈을 가만히 들여보다가 말했다.

“운사가 괜히 기력을 소모하기 전에 건강부터 회복시키는 게 좋겠군. 향록, 운사에게 영약을 먹이도록.”

“그럴게!”

황지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향록은 스포이드를 움직였다.

상황 파악이 안 된 운사가 입을 벙긋거리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향록의 스포이드가 이를 막아 버렸다.

곧 운사의 고통이 시작되었다.

운사는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으나 몸을 움찔거렸다.

정말 맛이 없나 보다.

‘운사 정도 되는 진족이라면 고통을 숨기는 데에 능숙할 텐데, 아직 몸이 정상이 아니라 티가 나는구나.’

안타까웠지만, 약해진 상태에서 나한테 사과하는 것보다 영약으로 고통받고 건강해지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이번만큼은 황지호의 결정을 지지하기로 했다.

스포이드를 두 번 정도 비웠을 때, 운사의 눈이 가물가물했다.

향록이 운사를 응원했다.

“기절하면 안 돼. 정신을 잃으면 깨우게 하는 용도로 만든 약초를 혀에 댈 거야. 그건 더 맛없어!”

향록의 응원 덕분인지 운사는 느리지만 1회분의 영약을 전부 비우는 데에 성공했다.

나와 안다인은 서로 약속한 것도 아닌데 작게 박수를 쳤다.

방금 영약을 맛본 입장에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를 일으켜 줘.”

영약의 효과 덕인지 운사의 몸과 이능파의 상태는 처음 봤을 때에 비해 매우 좋아 보였다.

발음도 분명해졌다.

말이 느릿하지만, 그건 평소의 말투인 것 같았다.

운사의 말을 들은 호랑이들의 반응을 보니 안도하면서도 그리워하는 게 느껴졌다.

황지호는 일으켜 주는 대신 향록 쪽을 봤다.

“약 효과가 아직 다 돌지 않아서 힘들 텐데.”

“앉아서 말하고 싶어.”

운사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지만, 강단이 느껴졌다.

향록과 운사의 말을 듣고 황지호가 고민하고 있을 때, 백호군이 먼저 움직였다.

백호군의 체격이 꽤 큰 탓에 운사가 더 마르고 가늘어 보였다.

황지호는 말리지 않고 백호군이 하는 걸 지켜봤다.

백호군의 부축이 필요했지만, 운사는 침상에 앉는 데에 성공했다.

“황호 님.”

“황호 님이라니, 이 몸은 수장이나 여전히 너의 친우다. 백호나 적호는 여전히 나를 황호라고 부른다. 너도 예전처럼 편히 부르고 말을 놓도록.”

황지호는 기쁨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비록 고등학생 버전의 황지호 모습을 하고 있지만, 호랑이들의 친우다운 모습이었다.

그런데 운사의 표정이 어딘가 이상했다.

황지호처럼 그저 기뻐 보이진 않았다.

운사는 죄책감이 어린 얼굴로 푹 숙였다.

운사는 숨을 몰아쉬다가 말했다.

“저는 친우의 변절을 알고도 이를 막지 못했으며 제 힘이 한반도를 해하도록 방치했습니다. 저를 벌해 주십시오.”

운사가 쏟아 낸 말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저 말을 하기 위해 기력을 모으고, 일으켜 달라고 한 모양이다.

황지호가 웃는 얼굴 그대로 굳었다.

백호군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운사는 말이 없어서 가만히 죄를 밝히고 벌을 기다리나 싶었는데, 또 입을 열었다.

“제가 알게 된 걸 밝힐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나 저는 제가 친우의 마음을 돌릴 수 있으리라 과신했습니다.”

저 말을 듣자 운사에게 뭔가 말을 하려던 호랑이들이 멈칫했다.

운사는 풍백과 우사의 변절을 알고도 바로 밝히지 않았나 보다.

운사의 태도를 보니 풍백과 우사가 호족을 배신한 과정에는 더 많은 비밀이 숨어 있는 듯했다.

신화 저편에 묻혀 있던 과거가 파헤쳐지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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