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875화 (875/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75)

107. 선발 (5)

향록의 존재를 확인하자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호랑이 저택의 한옥식 별채에 향록이 있을 때마다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하면 차마 저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의신아?”

안다인의 말에 발이 멈췄다.

안다인이 부르는데 그냥 갈 수는 없었다.

안다인이 납득할 만한 핑계를 떠올리고 설득한다면 보내 주지 않을까?

내가 당장 밖으로 나가야 하는 이유에 관해 말하려 할 때였다.

“어서 와! 기다리고 있었어!”

입을 열기 전에 향록이 마중 나왔다.

향록이 가까이 오자 알싸한 약초 냄새가 났다.

약초 하나하나의 향은 나쁘지 않지만, 향록은 지옥의 맛과 향을 조합하는 법을 알고 있기에 마음을 놓아선 아니 되었다.

인사를 하고 물러나려 했지만, 그 전에 향록이 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 들어와!”

황유호 정도 되는 체구의 향록이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향록의 눈이 아주 초롱초롱했는데, 내 왼눈을 보는 것 같았다.

착하고 호기심 많은 향록은 내 왼눈에 관심이 있어서 저리 반기는 걸지도 모르겠다.

멍하니 향록이 안내하는 대로 이동하려다가 영약의 맛을 떠올리고 우뚝 멈춰 섰다.

‘향록이 만드는 영약은 착하지 않아……!’

향록과는 다음에 이야기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렇게 갈등하고 있을 때, 황지호가 향록에게 말했다.

“향록, 오늘 만들어야 할 양이 많다는 건 잘 기억하고 있나? 의뢰한 대상은 하나가 아니다.”

많다고……?

희생자는 나 하나만 있는 게 아니었단 말인가.

대체 누구를 희생자로 만들지 모르겠다.

그 많은 양 중 일부가 황지호 몫이라면 참 좋겠지만, 맛에 까다로운 늙은 호랑이가 곱게 먹겠다고 할 것 같진 않았다.

“응, 물론이지! 지금 온 인간 둘의 몫을 준비하고 있었어.”

인간 둘의 몫?

나를 제외한 희생자는 당연히 호족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이 어긋났다.

답은 가까이에 있었다.

“오늘 의신이와 제 몫의 영약을 만들어 주신다고 들었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맡겨 줘! 네 주변의 공기가 엄청 맑고 깨끗한데, 스킬을 쓰는 중이야? 아니면 체질이야?”

이럴 수가, 향록의 영약을 안다인에게도 먹일 셈인가?

그야 향록이 만드는 영약이 몸에 좋긴 하고, 호족이 안다인을 챙겨 준다면 참 기꺼운 일이다.

하지만 안다인이 그런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영약을 먹어야 할까?

지금도 안다인은 충분히 강하고 건강한데…….

‘……안다인은 더 강해지고 싶다고 했었지.’

주수혁, 맹효돈과 함께 강해지겠다고 말하던 안다인이 떠올랐다.

안다인은 강해지기 위해 호족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 도움의 일환이 영약인 듯했다.

나도 안광 스킬을 얻기 전에 녹족의 영약을 먹었던 게 떠올랐다.

“영약을 먹는 게 호족다운 능력을 키우는 데에 도움이 될 거라고 들었어. 내 혼이 호족에 가깝다고 해도 몸은 아니잖아. 호족다운 스킬을 빠르게 얻을 수 있도록 몸의 상태를 조정할 거야.”

안다인의 저 말로 퇴로가 완전히 막혔다.

안다인 혼자서 영약을 먹게 할 수는 없었다.

가만히 보고만 있던 황지호가 그제야 끼어들어 말했다.

“잘 생각했다, 조의신. 네가 도망가면 나는 너를 차마 잡지 못했을 거다. 그렇게 되면 안다인은 홀로 영약을 먹어야 했겠지.”

내가 도망갈 준비를 하는 걸 저 눈치 빠른 늙은 호랑이가 몰랐을 리가 없는데, 방치하는 이유가 저거였나 보다.

내가 안다인을 두고 갈 리가 없다는 걸 잘 알았던 거다.

그야 그렇긴 했다.

나는 포기하고 향록이 안내하는 대로 별채에 올랐다.

“오늘은 영약만 있는 게 아니야. 큰 거래를 했거든!”

영약 말고 뭐가 또 있다고……?

제발 하나만 했으면 좋겠다.

향록은 주방을 등지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오늘은 특별히 내가 약선(藥膳)을 선보일 거야!”

약식동원(藥食同源)이라 하여 약과 음식의 근본은 결국 동일하다는 말이 있다.

음식을 통해 병을 낫게 한다는 식치(食治)라는 말도 존재할 정도다.

그런 맥락에서 약선도 약이라 볼 수 있을 거다.

‘그런데 플마고 속 녹족의 비밀 상점에서도 약선 메뉴는 없었던 것 같은데.’

플마고에는 ‘녹족의 비밀 상점’ 시스템이라는 게 존재했다.

아주 길고 번거로운 퀘스트를 깨면 열리는 상점인데, 상점 이용 횟수가 어느 정도 쌓이면 숨겨진 메뉴도 열린다.

하지만 그 메뉴에 ‘맞춤 영약’은 있어도 저 약선이라는 건 없었다.

망겜에서 아무리 애써도 얻을 수 없는 비밀 메뉴가 또 있었다는 사실에 속이 쓰렸다.

황지호는 내 속도 모르고 자랑하듯이 말했다.

“향록의 약선이 지닌 효능은 매우 뛰어나지. 현대에 이르러 향록의 관심은 약선에서 영약과 실험으로 바뀌었지만 말이다.”

“시대가 변했잖아. 현대 의학과 이계 충돌 이후의 이능이 참 매력적이지 않아? 오랜만에 만드는 약선도 즐겁지만 말이야.”

“향록이 다시 약선을 만들었다는 걸 알면 다른 진족들이 줄을 서서 한 입 먹으려 들 거다.”

그놈의 약선이 무슨 맛일 줄 알고 줄을 서서 먹는다는 건지 모르겠다.

향록은 오랜만에 약선을 만드는 게 정말로 즐거운지 환하게 웃으며 나와 안다인에게 말했다.

“호족이 보내 준 정보를 토대로 재료 밑작업은 끝냈어. 그래도 미세한 조정을 위해선 내가 진맥을 직접 해야 해!”

호족이 보내 준 정보와 거래…….

그러고 보니 은호가 뭐 거래에 필요하다면서 내 맥을 짚지 않았나?

그게 약선과 영약을 위한 거였나 보다.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단서가 하나둘 떠올랐다.

그사이에 안다인의 진맥이 끝나고 내 차례가 되었다.

“특별히 눈을 잘 살펴봐 달라고 들었어. 한번 볼게!”

자리에 앉은 상태였지만 키가 작은 향록을 위해 고개를 기울여야 했다.

향록이 맥을 짚으며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향록은 맥을 짚던 손을 놓고도 한참 동안 내 왼눈을 관찰했다.

진맥을 끝내도 왼눈이 뭐가 잘못된 건지 알기 어려운가 보다.

“……봐도 모르겠는데 이거 누가 만든 거야? 미리 말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거야.”

“향록의 눈을 속였다면 문제없겠군.”

“이능파 흘려 봐도 돼?”

“안 된다.”

향록은 은호와 황지호의 합작품인 렌즈를 꿰뚫어 보지 못한 것 같았다.

향록은 아쉬워하면서 내 눈 근처를 매만졌다.

“음…… 이 근처를 만져 보니까 이능파의 흐름이 약해진 것 같기도 하네. 좋아! 이 정도면 만들 수 있겠어.”

향록은 좋아했지만, 나는 별로 좋지 않았다.

향록은 작은 팔다리를 놀리며 분주하게 주방에서 움직였다.

향록이 저렇게 열심히 만드니 그나마 먹을 의욕이 생겼다.

이윽고 향록의 약선이 완성되었다.

‘나와 안다인의 메뉴가 달라. 맞춤 약선이구나.’

어느 쪽이든 메뉴 자체는 평범해 보였다.

한식당 코스 요리집에서 선보일 법한 좁쌀미음, 석이버섯과 다진 쇠고기를 고명으로 얹은 죽순찜 등이 눈에 띄었다.

향록이 기대에 찬 얼굴로 나와 안다인을 보고 있었다.

“자, 먹어 봐!”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향은 좋은데, 맛은 어떨지 모르겠다.

하지만 안다인 혼자 지옥길을 걷게 할 수 없으니 나도 가야 했다.

나는 숟가락을 움직였다.

아주 적게 떠서 한 입 먹은 순간, 그 맛에 의아해졌다.

‘……맛있다.’

이 정도라면 진족들이 줄 서서 먹겠다고 달려들 맛이었다.

한 입을 먹었는데 온기가 온몸으로 퍼져 나가고 상쾌한 기운이 솟아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황지호가 하는 음식도 맛있었지만, 향록의 약선은 먹을수록 배가 부른다기보다는 건강해진다는 느낌이 들어 신선했다.

“맛있어?”

“네, 맛있어요.”

“맞춤으로 만든 약선이 아니라면 나눠 먹고 싶을 정도예요.”

안다인도 나도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었다.

영약의 효과가 좋다 해도 이걸 남에게 공유하는 건 좀 꺼려졌는데, 이 약선이라면 이야기가 좀 다를 것 같았다.

이 정도라면 올무도 잘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저번에 올무의 동의 없이 신수 맞춤 영약을 만들어 달라고 해서 상처를 줬는데, 약선이라면 올무도 동의할 것 같다.

안다인과 내가 즐겁게 식사를 마쳤을 때였다.

그릇을 전부 비운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설마…….’

황지호가 했다는 큰 거래에는 약선만 포함되어 있던 게 아니었다.

영약도 있었다…….

약선의 맛에 낚여 그만 방심하고 말았다.

어느덧 내 앞에는 약선이 담겨 있던 그릇 대신 영약이 가득 담긴 탕기가 놓여 있었다.

향록이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맛있는 약선으로 혀를 달래 뒀으니 영약의 효과가 올라갈 거야. 약선을 맛있게 먹어서 다행이야!”

향록이 약선을 먹을 때 맛있냐고 계속 물었던 게 저거였나 보다.

아직 지옥의 맛을 보지 않은 안다인이 부드럽게 말했다.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이라고 들었어요. 잘 먹겠습니다.”

안다인은 망설임 없이 영약을 들이켰다!

말릴 틈조차 없었다.

나는 무력하게 안다인에게 닥친 커다란 불행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곧 안다인의 안색이 변했는데, 황지호가 즉각 배숙을 내밀었다.

안다인은 사양하지 않고 배숙을 이어서 마셨다.

안다인의 표정이 편해져서 다소 안심했지만, 지금 남 걱정할 처지가 아니란 걸 뒤늦게 깨달았다.

“조의신의 것은 안다인의 것보다 더욱 맛없게 만들었어! 그동안 영약을 몇 번 먹어서 익숙해졌을까 봐 특별히 신경 썼지.”

조금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런 배려는 전혀 필요 없었지만, 향록이 열심히 만들었다고 하니 됐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영약을 향해 뻗는 손이 조금 떨렸다.

나는 최대한 혀에서 의식을 멀리하며 영약을 삼켰다.

그리고 세상이 잠시 닫혔다.

미각이 잠시 이곳이 아닌 다른 차원에 갔다가 돌아온 듯했다.

“조의신, 너도 배숙이 필요하나?”

안다인한테는 그냥 줘 놓고 왜 나한테는 물어보나.

일단 급했으니 솔직히 말했다.

“어.”

“잘했다. 도움이 필요할 땐 그렇게 말하면 되는 거다.”

아주 달게 만든 배숙을 삼키니 미각이 조금씩 살아나는 것도 같았다.

큰불에 물 한 컵을 뿌린 수준이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내가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쯤, 황지호가 말했다.

“향록이 더 봐줘야 할 상대가 있다.”

황지호가 또 누구를 희생시키려고 하는 건가.

누군지 몰라도 약선도 안 먹고 영약만 먹는 건 아니겠지?

황지호의 말에 향록이 답했다.

“응, 기억하고 있어! 생명수를 썼다고 했지? 어떤 상태일지 벌써 기대돼!”

구체적으로 칭하진 않았지만, 황지호가 누구를 말하는 건지 알 수 있었다.

운사였다.

“향록이 온다고 해서 잠시 별채로 데려왔으니, 너희도 인사하고 갔으면 좋겠군. 호족의 아이와 은인을 보면 운사도 기뻐하겠지.”

방금 영약을 먹여서 입과 속이 쓰린데도 저 말을 들으니 그냥 갈 수 없었다.

결국 그대로 같이 운사를 만나러 가게 되었다.

별채의 가장 안쪽.

넓은 침상 위에 운사가 조용히 누워 있었다.

계속 운사의 곁을 지키고 있던 건지, 백호군이 가만히 서 있다가 우리에게 눈인사를 했다.

짧은 인사를 마치고 운사를 보았다.

‘그때보다는 상태가 좋아 보여.’

운사는 여전히 비쩍 말랐지만, 그전보다는 살이 좀 붙었고 이능파의 흐름도 좋아져 있었다.

향록이 운사의 맥을 짚어 보다가 말했다.

“왜 그러나?”

“음, 당분간 일어나지 못할 거라고 했지?”

“그럴 거다. 혹시 상태가 안 좋은 건가?”

향록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곧 일어날 것 같아서! 직접 삼킬 수 있는 영약이 효과가 더 좋은데, 어떻게 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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