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79)
107. 선발 (9)
풍백과 우사가 웅족에게 협력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운사를 이를 두고 공공연하게 지적하지 못했다.
여전히 호족과 웅족은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니 호족의 관리가 웅족의 정예를 돕는 것은 딱히 흠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운사는 고심한 끝에 풍백과 우사에게 협력 건에 관해 물었다.
“곰들과 무언가를 만들고 있는 것을 보았어. 신인께서 허락하셨어?”
운사의 말에 풍백과 우사는 당당한 태도로 말했다.
“웅족들이 괜찮은 무기를 만들고 있기에 조언을 좀 해 줬지.”
“고작 조언 하나 때문에 바쁜 신인을 번거롭게 할 필요가 있겠어?”
거리낌 없어 보이는 모습에 운사는 조용히 안도했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저렇게 숨김없이 말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운사는 배신자가 진의를 감추기 위해 어떤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풍백과 우사가 이어서 말했다.
“신인과 호족에게는 비밀로 해. 놀라게 해 줄 거니까.”
“비장의 무기는 비밀로 해 둬야 더 의미가 있어.”
풍백과 우사의 장난기 어린 태도는 운사가 잘 알고 있는 친우의 모습 그대로였다.
운사는 한껏 긴장했다가 마음이 풀려서 저도 모르게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운사는 의심을 접고 근심 없는 얼굴로 답했다.
“신인께서도 너희가 직접 그 무기를 소개해 주면 기뻐할 거야. 나도 기다리고 있을게.”
풍백과 우사가 잠시 신인에게 서운해하긴 했지만, 위기 앞에서 다시 마음을 고쳐먹은 것이라고 믿었다.
운사가 풍백과 우사에게 품은 위화감을 조금씩 지워 가고 있을 때였다.
신인이 셋을 불렀다.
“풍백과 우사, 운사와 할 이야기가 있다. 자리를 비워 주겠느냐?”
셋이 도착하자마자 신인이 청호에게 말했다.
청호는 한시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아 했으나, 신인의 명을 어길 수 없었고 저 셋을 믿고 있었기에 순순히 물러갔다.
청호가 자리를 비우자 신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풍백, 우사, 운사. 너희에게 할 말이 있다.”
신인이 낭랑한 음성으로 이름을 불러 주는 것만으로도 운사는 기쁜 마음이 들었다.
저 힘 있는 다정한 목소리를 멀리서 듣기 싫어 운사는 기꺼이 지상으로 향하겠다고 결정했다.
마침 친우인 풍백과 우사도 운사와 같은 뜻이었고, 지상에서 만난 호족들과 금방 가까워졌기에 이 결정을 후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외적에게 목숨을 위협당하는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내가 죽거나 더는 명령을 내릴 수 없는 때가 오면, 그때는 호족의 수장을 믿고 따라 주길 바란다.”
운사는 가슴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신인은 그들에게 유언을 남기려는 듯했다.
풍백과 우사가 아연실색하여 중얼거렸다.
“어째서…… 그런 유언 같은 말을…….”
“호족의 수장을 따르라니…….”
신인이 그들을 달래듯이 말을 이었다.
이 말은 유언에 가까우나 자신은 쉽게 죽을 생각이 없다는 것.
자신이 죽으면 천신이 한반도에 내리는 은혜가 닿기 어려워질 테니 희생자가 나오더라도 생존을 위해 최선을 다하리라는 것.
하나 인간의 앞날은 장담할 수 없으니 대비를 해 두겠다는 게 신인이 한 말의 요지였다.
풍백과 우사가 신인에게 따지는 것처럼 말했다.
“인간의 앞날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당신은 천신의 아들입니다.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잊었느냐? 나는 인간의 아들이기도 하다. 이 땅에 내려왔으니 인간이나 다름없지.”
“마치 인간이 되고 싶다는 말처럼 들립니다만.”
신인은 ‘인간이 되고 싶냐’라고 돌려서 묻는 말에는 답하지 않고 그들을 달랬다.
신인은 끝까지 자신의 뜻을 바꾸지 않았다.
신인은 호족의 수장이 바뀌는 한이 있더라도 제 유언을 따라 달라 명했다.
운사는 매우 슬프고 괴로웠으나 신인의 말을 들어주기로 했다.
“저는 당신을 따라 이 자리에 왔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남긴 말도 따르겠어요.”
“고맙구나, 운사.”
그 말만으로도 운사는 보답받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풍백과 우사는 쉽게 긍정의 말을 뱉지 않았다.
점점 그 둘의 말수는 적어지고, 표정이 어두워졌다.
신인은 재촉하는 대신 그들을 기다리기로 했다.
“결심이 서면 말해 다오. 기다리고 있겠다.”
신인의 말을 끝으로 셋이 물러났다.
이동하는 내내 셋은 말이 없었다.
무거운 공기가 입을 막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신인께서 죽음을 생각하시니 슬픈 거겠지. 나도 마음 같아서는 그런 일은 가정하고 싶지도 않고, 그 뒤의 일은 생각하기 싫어.’
운사는 풍백과 우사의 침묵을 그렇게 생각했다.
셋만 남게 되면 어떤 말로 친우들의 마음을 달래 줘야 할지, 운사의 생각은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셋이 같이 머무는 처소에 도착했을 때, 운사보다 풍백과 우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호족의 수장을 신인 모시듯 따르라고?”
“신들의 자비가 없었으면 척박한 땅에서 죽어 갔을 범들에게?”
“천신의 피를 이은 자와 지상의 범 따위를 어떻게 동등하게 볼 수 있냐고!”
풍백과 우사의 말에선 평소 느껴지는 친근함과 장난스러움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운사는 처음에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마치 그들이 호족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처럼 말했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풍백과 우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호족 사이에 섞여 있었고, 그들을 전우로서 대하던 호족에게 웃어 주었다.
운사는 어째서 그 둘이 호족을 멸시하는 것처럼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오늘 신인께서 그런 말씀을 하는 바람에 지나치게 큰 충격을 받은 걸까? 그런 거겠지?’
풍백과 우사가 던지는 칼 같은 말에 운사는 찔린 것처럼 아팠다.
어느 것 하나 운사를 향한 말은 없었는데도 그랬다.
한참 분개하던 둘이 운사를 동시에 바라봤다.
운사는 저도 모르게 놀라 몸을 떨었다.
친우의 시선이 무섭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운사, 너는 신인을 좋아하지? 그래서 냉큼 그 말을 따르겠다고 한 거지?”
“신인은 천신의 힘을 짙게 받았으니,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져. 이해해.”
갑자기 천신의 힘에 관해 이야기하는 친우를 보고 운사는 당혹스러워졌다.
신계에 있을 때부터 신인이 보인 행보, 그가 품은 사상, 운사를 대하는 태도 등에 존경심을 느껴 그를 따르고자 한 것이다.
신인이 타고난 강력한 힘 또한 그를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겠지만, 그것 하나 때문에 신격을 전부 버리고 지상에 내려온 건 결코 아니었다.
‘내 친우들과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믿었지만, 아니었구나…….’
운사가 그 둘을 설득하려 하기 전, 역으로 그들이 운사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풍백과 우사가 간절한 어조로 말했다.
“운사, 잘 생각해 봐. 천신의 저 편애가 언제까지 갈 거라고 생각해? 게다가 지금 상황을 봐. 천신이나 신인의 힘만으로는 외적을 어찌하지도 못하잖아.”
“신인이 죽으면 호족을 따르라고? 신인이 죽을 정도의 상황이 오면 호족은 무사할 것 같아? 신인이 죽었다고 천신이 화풀이로 한반도를 뒤엎지나 않으면 다행이게?”
말의 수위가 점점 올라갔다.
그들은 당장 신인과 호족을 어떻게 하겠다는 말을 직접적으로 하진 않았으나 반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운사는 힘들게 입을 열었다.
“나는 신인의 힘 때문에 그런 게 아니야. 너희도 그런 게 아니었어? 우리는 신인을 따르기 위해 이 땅에 왔잖아.”
운사의 진심이 통했던 걸까, 독한 말을 뱉던 풍백과 우사가 잠시 멈췄다.
그러나 곧 그들의 닮은 얼굴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비웃는 얼굴이었다.
“순진하구나, 운사. 나는 네가 네 속을 잘 감출 정도로 지혜롭다고 생각했어.”
“아니야, 지금도 우리를 믿지 못해서 속내를 감추고 있을지도 몰라.”
운사는 친우를 두고 무언가를 숨기고, 꾸미려 한 적이 전혀 없었다.
그들에게서 느낀 위화감과 당혹감을 표현하지 않으려 애쓴 게 고작이었다.
풍백과 우사가 변덕을 부리듯이 허물없는 태도로 말했다.
“운사, 우리 셋은 오랜 시간 함께했어. 그러니 너는 우리를 이해해 주리라 믿어.”
“다음 싸움에서 우리가 만든 걸 보여 줄게. 보고 결정을 내려.”
무슨 결정을 내리라는 거지?
운사가 되묻기 전에 풍백과 우사가 동시에 말했다.
“어느 쪽을 택할지를.”
* * *
마침내 운사가 풍백과 우사의 변절을 확신한 순간에 대한 언급이 나왔다.
그동안 사소하게 서운함을 표현하고 위화감을 드러냈을 뿐, 풍백과 우사가 직접적으로 적의를 밝힌 건 저 때인 듯했다.
풍백과 우사는 호족들 앞에서 능숙하게 속였고, 운사는 그들의 오랜 친우였으니 대응하기 어려웠을 거다.
자칫하다간 운사가 저 둘과 호족 사이를 이간질한다고 역으로 몰려 당할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하지만 은호나 신인이 풍백과 우사를 의심했을 법도 한데.’
풍백과 우사가 운사와 달리 신인의 유언을 따를지 말지를 두고 지나치게 시간을 들인다면 누군가는 의심하기 시작할 거다.
특히 조직을 이끄는 입장인 은호와 신인은 기민하게 저 둘의 태도를 살폈을 것이다.
그럼에도 풍백과 우사의 배신은 끝까지 드러나지 않았다.
운사의 말이 잠시 멈추자 황지호가 말했다.
“유언에 관해서는 나도 알고 있었다. 신인이 나중에 은호와 이 몸을 불러내어 그 얘기를 했지. 자신이 죽어도 풍백과 우사, 운사에게 따라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더군.”
신인이 황지호와 은호를 불렀다고?
그때 은호는 건강했을 텐데 황지호까지 부른 걸 보니 신인도 진작에 차기 수장에 관해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신인의 철저한 태도를 보니 둘의 배신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게 더욱 아쉬워졌다.
“운사는 그러겠노라고 답했으나 풍백과 우사는 답변을 하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신인은 운사는 몰라도 풍백과 우사는 어찌 나올지 모른다고 호족에게 미리 알려 줬다.
저 말까지 전할 정도로 신인이 신중하게 나왔으니 은호도 이에 관해 어느 정도 생각해 두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을 의심하지 않았다. 아마 신인도 그 둘을 의심하지 못했을 거다.”
왜냐고 되묻기 전에 불현듯 답이 떠올랐다.
풍백과 우사가 이상한 태도를 보였다 해도, 호족들이 조금도 의심하지 않은 이유가 따로 있을 것이다.
황지호가 예상한 대로의 답을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셋이 외적에게 전사했다고 알려졌으니 말이다. 친우를 잃은 슬픔에 잠겨 있는데, 그 누가 친우가 변절했을 거라고 의심했겠는가.”
그야 그럴 것이다.
만약 누가 의심의 말을 입에 담는다면 호랑이들이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생각해 보면 전사했다고 알려진 순간 풍백과 우사는 들키기 전에 발을 빼고, 운사를 처리한 듯했다.
“네, 황호 님의 말씀대로입니다. 저도 제가 그때 죽은 줄 알았습니다.”
“……운사.”
‘황호 님’이라고 불리자 황지호가 대놓고 싫은 티를 냈다.
운사가 황지호에게 존칭을 사용하지만, 다른 호랑이들에게는 그러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운사는 지금 신인의 유언을 따르는 중이었다.
“저희가 전사했다고 알려졌을 때, 풍백과 우사는 선언한 대로 그들의 힘을 보여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