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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891화 (891/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891)

109. 책임 (1)

‘당연한 말을 한 건데.’

황지호 외의 호랑이들의 반응이 묘했다.

다 내 쪽을 보고 있었는데, 고마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호랑이들에게 저마다 사연이 있다 보니 그런 것 같았다.

‘여기에 있는 호랑이들은 황지호한테 책임에 관한 말을 하기 어렵겠지.’

이유가 제각각이지만, 여기에 있는 호랑이들은 황지호에게 긴 시간 홀로 무거운 책임을 지게 했다.

그러니 옛 친우인 운사에 관한 문제를 두고 말을 꺼내기 어려울 거다.

하지만 호랑이들이 생각하는 바가 없는 건 아닌지 내 말에 몇 마디 더 보탰다.

“황호 님께 드릴 말씀이 많지만, 그중에 운사 님이 보낸 메시지에 관한 것은 없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황호가 쓰레기들을 처리하는 건 늦었지만 운사는 구하지 않았습니까?”

“…….”

은호와 적호가 이어서 말하고, 백호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지호는 그 말을 들을수록 표정이 풀어졌다.

다시 입을 열 때쯤에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훌륭한 은인과 좋은 친우를 뒀군. 고맙다.”

황지호는 저 당연한 말을 기쁘게 느낀 것 같지만, 받아들일 생각은 없는 듯 한마디 덧붙였다.

“하지만 친우와 관련되었다면, 내가 짊어질 필요가 없는 것이라도 책임을 질 것이다.”

나와 호랑이들의 말로는 황지호가 느끼는 책임을 덜어 줄 수 없었다.

그래도 황지호는 처음 말을 꺼냈을 때와 달리 웃고 있었다.

*    *    *

한밤중, 황명호 대저택의 별채.

개학한 이후 저택에 잘 머물지 않던 은호가 드물게도 늦게까지 있었다.

은호는 긴 은발을 단정히 묶고 어린 모습을 한 황호의 분신과 함께 걸었다.

둘은 지금 운사의 침소로 향하는 중이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결심했군. 이제 운사가 결백하다고 믿는 건가?”

“처음부터 운사 님이 결백하다고 믿고 있었어요. 겨우 우리의 눈을 속이고자 화로에 긴 시간 묶어 두는 건 비효율적이니까요.”

“적호가 이 자리에 있으면 뭐라 했을 거다. 그렇게 생각했다면 진작에 얼굴을 비치지 않고 뭐 했냐고 말하겠지.”

적호는 성형우의 시신에 남은 정보를 분석하겠다며 저택을 비웠다.

운사의 메시지를 보고 의욕이 솟은 듯했다.

지금 적호는 아들과 단란하게 밤샘 작업 중이었다.

“적호 님이라면 분명 그렇게 말씀하실 거예요. 지금 안 계신 덕에 조용히 이동할 수 있는 거겠죠.”

“조의신을 쉬게 하려고 일부러 나중에 말을 꺼낸 거라고 생각했다만, 노림수가 더 있었군.”

책략가 은호가 이 시간대를 택한 이유는 적호와 조의신을 피하기 위함인 듯했다.

은호가 운사를 찾아갈 예정이라는 걸 안다면, 쉬지도 않고 동행하겠다며 제안할 게 분명했다.

사적인 대화를 하기 위함이었다면 조의신이 알아서 자리를 피해 주겠지만, 지금은 단순히 인사를 하러 가는 게 아니었다.

은호는 직접 운사의 얼굴을 보고 속을 떠볼 속셈도 있었다.

황호도 이를 알기에 모르는 척 조의신이 쉬도록 유도했다.

“의신이 형에게는 나중에 정보 공유를 하면 될 거예요. 고심 끝에 밤늦게 운사 님을 뵈러 가기로 결심했다고 하면 이해해 주시겠죠. 그런데 백호 형님도 오실 줄 알았는데, 어디 계시죠?”

“조의신의 방문 앞에서 신수를 달래 주고 있다. 조의신이 왼눈을 잃은 이후로 신수의 기분이 영 아니지 않나.”

“신수가 의신이 형한테 얼굴도 보여 주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근처에는 있나 보네요.”

조의신이 알면 기쁜 나머지 멍청해질 법한 소식이었다.

나중에 조의신이 신수를 보고 싶어 하는 티를 내면 은근히 그 정보를 흘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은호가 웃었다.

은호를 올려다보던 황호가 물었다.

“은호, 왜 갑자기 운사를 보러 가기로 한 거지? 너는 운사가 결백하다고 믿어도 변절의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았나.”

“운사 님이 지금은 결백하지만 앞으로 변절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건 변함이 없어요.”

은호의 생각은 처음과 다를 바가 없는 듯했다.

운사의 필사적인 메시지를 보고도 은호는 여전히 변절의 가능성을 지우지 않고 있었다.

신화시대에 처절한 배신을 경험한 은호는 의심을 접을 생각이 없었다.

은호는 그럼에도 운사를 만나기로 결심했다.

“황호 님께서 책임을 지려는 걸 보고 느끼는 바가 있었기에 이 자리에 온 거예요.”

“……뭘 느낀 거지?”

“책임이요.”

어린 모습을 한 황호가 은호를 빤히 쳐다보았다.

은호는 여전히 온화하게 말했다.

“운사 님이 붙잡혔을 때에는 제가 호족의 수장이었죠. 많이 늦었지만, 그 책임을 조금이라도 지고자 해요.”

“그럴 필요는 없다만. 대체 어떻게 책임을 지겠다는 거냐.”

“제가 직접 운사 님을 상대하여 변절할 가능성을 줄이고, 만약 변절한다면 제가 가장 먼저 알아내어 일을 바로잡겠습니다.”

은호는 처음과 다름없는 태도로 말하고 있었지만, 그 내용은 칼날 같았다.

운사가 만약 배신한다면 은호가 먼저 파악해 처단하겠다는 뜻이었다.

황호는 은호가 말한 책임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저것은 본래 수장이 해야 할 역할이거늘, 은호가 그 책임을 덜어 주고자 이 자리에 온 것이다.

황호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은호가 말했다.

“그럴 일이 없기를 바라고 있어요.”

그렇게 황호와 은호는 책임을 나누어 지고 운사를 만나러 갔다.

운사는 은호가 방문할 것이라고 황호의 분신으로부터 전해 듣고는 안절부절못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운사가 고개를 휙 들어 은호를 보았다.

은호를 눈에 담자 순식간에 운사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은호……!”

“운사 님, 오랜만이에요.”

운사는 당장이라도 침상에서 뛰어내려 은호의 무사를 확인하고 싶어 했으나 몸이 따르질 않았다.

겨우 앉아 있는 몸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게 고작이었다.

은호는 그 움직임이 연기가 아니라고 판단한 후에야 가까이 다가갔다.

“네가 깊이 잠들었다고 들었어. 일어나서 정말 다행이야.”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운사 님이 무사히 구출되어서 기뻐요. 맥을 확인해도 될까요?”

“물론이지. 네 손을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

은호는 무방비하게 웃고 있는 운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운사는 은호가 급소 위에 있는 맥을 짚고, 그 위에 이능파를 흘려도 아무 저항 없이 있었다.

운사는 은호가 자신을 해할 가능성이 있다고는 전혀 생각지 못하는 듯했다.

그저 은호의 무사를 가까이에서 확인하는 게 기뻐 보였다.

운사의 몸 상태를 확인한 은호가 물었다.

“제가 깊은 잠에 든 건 운사 님께서 붙잡힌 이후의 일인데, 잘 알고 계시네요. 이계 충돌 후에도 제가 잠든 상태였다는 것도 알고 계셨나요?”

따뜻한 목소리로 한 말이었지만, 안에는 무거운 의심이 숨겨져 있었다.

이를 파악한 황호가 내색은 안 해도 씁쓸한 마음을 숨겼다.

‘저렇게 말은 해도 현재 운사가 결백하다고 믿는 건 사실일 거다. 다만 변절의 싹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확인하려는 거겠지.’

은호의 의심은 두 가지 사실에서 기인했다.

하나는 운사가 풍백과 우사를 친우라고 불렀다는 것.

다른 하나는 운사가 외부 상황에 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운사가 깨어난 후에 한 발언들을 종합해 보았을 때, 은호는 운사가 호족의 상황에 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판단했다.

모든 정보가 차단된 채로 화로에 묶여 있었다면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허술한 구조 신호를 보내는 게 고작이었던 운사가 외부의 정보를 수집하는 건 불가능했다.

“……화로에 있을 때, 호족에 관해 하는 말을 들었어. 좋은 소식이라곤 없었지.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어.”

운사는 은호의 의심에 관해서 전혀 눈치채지 못한 건지 순순히 답했다.

그 눈에는 슬픔이 어려 있었지만, 은호가 아닌 다른 대상을 향해 품은 듯했다.

그 대상이 누군지 바로 알아챈 은호가 물었다.

“풍백과 우사가 운사 님께 소식을 전한 건가요?”

“응, 호족에게는 가망이 없으니 마음을 다르게 먹으라고 권했어.”

긴 세월 운사가 화로 속에서 타고 있는 동안, 풍백과 우사는 여러 차례 방문했다고 한다.

보통 화로가 잘 가동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지만, 가끔 말을 걸었다고 한다.

호족에 관한 소식이 주 내용이었다.

운사는 그 안에서 호족이 큰 전투에서 큰 희생을 치렀다는 것, 은호가 깊은 잠에 빠졌다는 것, 신인과 청호의 행방을 알 수 없다는 것 등을 전달받았다.

“풍백과 우사는 계속 나를 설득하려고 했어. 그래서 그자에게 완전한 신임을 사는 데에 곤욕을 치른다고도 들었어.”

“그 둘이요?”

“계속 마음을 바꾸지 않는 나를 긴 세월 설득하니까, 의심스러웠나 봐.”

황호와 은호는 속으로 쓴소리를 삼켰다.

그자는 운사가 있든 없든 풍백과 우사를 끝까지 신임하지 않았을 게 뻔했다.

둘이 빠르게 배신한 건 사실이나 어쨌든 처음엔 신인의 밑에 있었으니 그 교활한 자가 완전히 신용할 리가 없었다.

‘풍백과 우사를 이용해 운사의 죄책감을 부추기고자 했겠지.’

풍백과 우사가 조금이라도 운사를 아끼는 마음이 있다면 변절을 권하는 게 아니라 화로 속에서 빼내려 시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운사는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듯했다.

긴 이야기를 마치고 은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운사 님이 쉴 시간을 빼앗았네요. 이만 가 볼게요.”

“……벌써?”

운사는 길게 말을 하느라 목이 아팠을 텐데도 아쉬워했다.

은호는 운사의 아쉬움을 가라앉힐 겸, 다음 수를 준비할 겸 말했다.

“자주 올게요.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요.”

*    *    *

주말이 지나고 다시 한 주가 시작되었다.

주말 사이, 나는 호랑이들과 그동안 모은 정보를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

구교사에서 발견된 운사의 메시지와 성형우의 시신에 남은 기록이 그러했다.

수십 년 이상 쌓인 정보들이었기에 확인하고 대조하는 작업이 꽤 오래 걸렸으나 시간을 들인 수고가 있었다.

‘위치 정보는 어느 정도 추려 낸 것 같아. 아직 해석이 제대로 안 된 부분이 남아 있지만, 시간이 더 있으면 해결될 거야. 또 은호가 직접 나서기도 했으니 운사 쪽 정보는 문제가 없겠지.’

그리고 내가 잠든 사이에 은호가 큰 결심을 하고 직접 운사를 만났다고 한다.

은호는 둘이 어떤 대화를 했는지 소상히 알려 주며 앞으로의 계획을 말했다.

은호는 운사와의 대화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남겼는지 추적해 볼 예정이라 한다.

‘은호는 운사가 등 돌릴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었어. 어쩌면 직접 눈으로 확인하며 그 가능성을 가늠하고, 방지할 심산인 게 아닐까. 덤으로 정보 수집을…… 응?’

등교하던 중,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어 돌아봤더니 용제건이 서 있었다.

내가 돌아보자 기다린 것처럼 용제건이 밝게 인사했다.

“의신아, 안녕?”

대체 언제부터 저러고 따라다녔던 걸까.

용제건은 기척을 죽이고 내 뒤에서 날아다닌 것 같았다.

“준열이가 아주 재밌는 걸 준비하고 있던데, 알아?”

용제건의 눈에는 염준열이 뭘 하든 재미있게 보이지 않을까?

상대하지 않고 넘어가려 했는데, 용제건은 나를 그냥 보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파앗!

순식간에 시안색의 공간이 주변에 펼쳐졌다.

소리를 차단하는 결계였다.

이른 시각이라 등교생이 몇 명 없었는데, 그나마 용제건의 색을 발견하기 무섭게 먼 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덕에 넓은 길에 나와 용제건만 남게 되었다.

“홍룡화는 의신이가 알고 있는 준열이의 미래와 관련이 있는 거지?”

그야 그렇다.

플마고에서 염준열이 폭주하는 순간, 처음으로 발동된 능력이니까.

용제건은 더 말을 하지 않고 나를 가만히 봤다.

‘왜 저런 소리를 하는 거지? 혹시…….’

용제건이 하는 말을 들으니 염준열의 스승이 된 후 계속 무시했던 어떤 수가 떠올랐다.

전무영은 리플레이를 통해 ‘그림자 없는 시간’의 새로운 사용법을 터득해 타인의 기척을 지우는 능력을 얻었다.

리플레이 속 전무영은 사망 직전이었고, 큰 이능에 당해 제정신이 아닌데도 능력을 얻는 데에 성공했다.

이건 염준열에게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염준열은 리플레이를 통해 빠르게 홍룡화를 습득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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