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7)
109. 책임 (7)
MMORPG는 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Masively Multiplayer Online Role-Playing Game)의 약자다.
쉽게 설명하면, 유저 여럿이 동시에 접속하여 같은 맵에서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게임을 가리키는 말이다.
MMORPG를 처음 시작하면 해야 할 게 많다.
유저명을 정하고, 백업을 위한 계정 연동을 하고, 게임에 따라서는 게임 내에서 조작할 캐릭터 이름과 외형, 직업, 능력치도 정해야 한다.
수많은 유저와 같은 필드에서 싸우게 되니, 각자 개성을 확보하는 건 중요한 일이었다.
그냥 모바일RPG 게임이었던 플마고와는 다르게 MMORPG인 PlayerZ에선 할 게 많았다.
‘갓겜이라 그런지 초반부터 할 게 많구나.’
플마고는 MMORPG가 아닌 그냥 RPG게임으로 싱글 플레이가 기본이었다.
멀티 플레이 요소가 있긴 하지만, ‘다른 플레이어에게 도움 요청하기’라는 있으나 마나 한 기능뿐이었다.
망겜이라 나 외엔 다른 플레이어가 없다시피 했으니 쓰고 싶어도 못 쓰는 기능이었다.
‘플마고는 이미 정해진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 있었으니, 유저가 각자 캐릭터를 만들 필요는 없었는데…… MMORPG가 아닌 게임은 보통 그렇긴 하지.’
플마고에서는 캐릭터를 육성할 뿐이지 만들 필요는 없었다.
MMORPG가 아닌 모바일 게임에선 재화를 소비하여 이미 만들어진 캐릭터를 랜덤하게 뽑아 키우는 게 보통이었다.
물론 뽑는 건 쉽지 않았다.
스토리 진행도에 따라 자동으로 합류하는 플레이어블 캐릭터도 있지만, 유저들의 과금을 유도하기 위해 매력적인 캐릭터일수록 뽑기 어렵도록 설정해 두는 게 일반적이었다.
망겜인 주제에 플마고는 저 일반적인 요소를 따라갔다.
초반에 플마고 커뮤니티에서는 기간 한정 뽑기 대상이었던 용제건이 너무 안 나온다고 우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유희계의 성격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유저들도 용족의 총아가 성능캐라고 뽑겠다며 달려들었는데, 대부분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이 망겜에는 천장도 없었는데.’
천장이란 일정 횟수 이상 뽑기를 진행하면, 원하는 대상을 그냥 얻게 해 주는 시스템을 가리킨다.
랜덤 요소가 있는 게임에는 대부분 천장이라는 게 존재하였고, 운이 없는 사람을 구제해 주곤 했다.
그러나 망겜에 천장 따위가 있을 리가 없었다.
플마고에서는 천장이 없기에 확률상 무한하게 과금해도 끝까지 원하는 캐릭터를 얻지 못할 수도 있었다.
다행히 나는 운이 좋은 편이라 모든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얻었지만, 아닌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그나마 스토리상 캐릭터가 죽고 나면 뽑기 대상에 오르는 일이 없어졌지. 죽기 전에 뽑아야 했어.’
그것 때문에 염준열을 보고 플마고에 입문한 유저들의 원성이 잦았다.
염준열이 등장한 시점에선 용제건이 죽은 후라 영구 정지를 당할 각오를 하고 다른 사람의 계정을 사지 않는 한, 뒤늦게 게임을 시작한 사람은 둘을 같이 얻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스토리 모드에선 죽은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출격시킬 수 없지만, 프리 퀘스트에선 가능했기에 용족과 후예를 같은 공격대에 넣고 싶어 하던 유저들이 불만을 표했다.
그러나 아무리 건의를 해도 운영진은 죽은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뽑기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스토리가 이어질수록 살아남은 캐릭터가 얼마 없다 보니 뽑기고 뭐고 의미가 점점 없어졌다.
어차피 건의하는 사람들도 결국 접었기 때문에 운영진은 아무 신경도 쓰지 않았다.
모처럼 갓겜이 열렸는데 플레이하지 않고 망겜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장남욱 때문이었다.
[장남욱] 미안해, 얘들아. 계속 고민했는데도 어떤 직업을 택해야 할지 아직 정하지 못했어. 사실 나는 에너미와 직접 싸우는 게 아직도 익숙하지 않고, 광림과 스킬이 서포트 계열이라 공격대에서 서포터를 맡고 있어. 그 점을 고려하면 서포터 쪽을 택하는 게 편하겠지만, 기왕 게임을 하는 김에 다른 시도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
[유상훈] 그럼 딜러 해.
[장남욱] 딜러를 할지 안 할지 고민이 남아 있긴 한데, 딜러를 해도 직업 선택이 좀 어려울 것 같아. 나는 창술 스킬을 쓰는데, 원거리 공격 스킬도 써 보고 싶어. 활이나 총을 사용하면 에너미를 상대하는 게 더 수월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도시후] 남욱이 매일 직업 고민했는데 아직도 못 정했어 ㅎㅎ
장남욱의 고민이 길어졌다.
나와 도시후는 장남욱의 직업에 맞춰 파티를 짜기 좋은 직업을 고르기로 했기에 덩달아 늦어졌다.
유상훈은 이미 캐릭터 작성을 마친 후 튜토리얼 화면을 열고 우리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빨리 게임을 하고 싶어서 안달복달하던 놈이니 독촉하거나 답답해할 법도 한데, 유상훈은 전혀 그런 티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장남욱이 고민하는 꼴을 보며 재밌어하는 눈치였다.
[유상훈] ㅋㅋㅋ 잘 생각해서 하고 싶은 거 해라.
유상훈은 그냥 지금 이 모든 과정이 즐거운 듯했다.
긴 채팅을 보기만 해도 현재 유상훈의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알 수 있었다.
게이머로서 훌륭한 자세였다.
만약 플마고 유저가 주수혁과 안다인 중 누구를 먼저 육성해야 할지 고민이다 하면서 내게 긴 상담을 요청했다면, 나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것 같긴 하다.
아쉽게도 그런 사람은 없었지만 말이다.
[장남욱]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이렇게 고민이 많은 걸 보니 뭘 골라도 똑같을 것 같아. 그냥 랜덤하게 정할게.
[도시후] 와 드디어! 진작에 하지!
[장남욱] 사다리타기 앱 켤게.
장남욱은 고심 끝에 랜덤하게 직업을 정하기로 했다.
결과는 금방 나왔다.
장남욱은 근거리 딜러, ‘창술사’가 되었다.
막상 정하고 나니 아쉬움이 남아서 다시 사다리타기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장남욱은 그냥 바로 창술사를 한다고 했다.
유상훈은 기다렸다는 듯이 창술사에게 맞는 스탯 분배를 제안했고, 장남욱은 군소리 없이 시키는 대로 다 따랐다.
[유상훈] 광림은 정함?
[장남욱] 공격형 광림으로 할 생각이야. 랜덤으로 정해진다고 했지? 그럴싸한 광림이 나올 때까지 리셋하고 있을게.
[유상훈] 어, 그럼 하고 있어라. 조의신, 직업 뭐 할래?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장남욱이 어느 직업을 고르든 바로 택할 수 있게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 * *
자정이 막 지났을 무렵, 황명호 대저택의 별채.
은호는 기숙사로 향하는 대신 운사를 찾아와 운사의 몸 상태를 살피고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의 내용은 대부분 현재 확인된 운사의 메시지와 관련이 있었지만, 은호는 중간중간 의도를 감추고 질문을 던졌다.
은호는 운사를 통해 호족의 정보가 어느 정도 빠져나갔는지 알고자 했다.
‘내가 깊은 잠에서 깨어난 건 알려지지 않았어. 천은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도.’
풍백과 우사는 운사에게 많은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에는 호족과 엮인 게 많은 덕에 은호가 정보를 가려내기 편했다.
‘운사 님께 드릴 정보는 앞으로도 제한해야겠어. 특히 은광고와 의신이 형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좋겠지.’
운사는 현재 은호가 학교생활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은호가 천은하로 위장하는 과정은 다소 까다로웠고, 본모습으로 돌아오는 것도 복잡했으나 운사에게 숨기기 위해 번거로운 과정을 감수했다.
은호는 이렇게 숨기긴 했지만, 운사는 현재 황호가 학생으로 위장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운사는 교복을 입고 나타난 황호에게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다.
‘교복 차림을 보고 질문이 나올 만도 한데, 운사 님께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어. 우리의 안부나 건강 외에는 묻지 않으려 하시는 것 같아.’
운사는 친우를 볼 때마다 긴장이 풀어진 얼굴로 귀를 기울이고 묻는 말에 대답하기만 했다.
운사는 친우와 재회하고, 그들이 건강하게 지내는 것만으로도 매우 기뻐하는 것 같았다.
그 생각에 이르니 은호의 머릿속 한편이 차갑게 식었다.
풍백과 우사는 운사의 저런 심성을 이용했다.
화로 안에서 불타고 있는 와중에 찾아가 말을 몇 마디 걸고, 호족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회유하려 드는 것만으로도 운사는 그들을 친우로 여겼을 것이다.
은호는 그런 속을 철저하게 숨기고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늦은 시각까지 시간을 빼앗아서 죄송해요.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물론이지. 은호만 괜찮다면 얼마든지 여기에서 대화를 나누고 싶어.”
운사는 피로한 기색을 애써 숨기며 말했다.
아직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게 뻔히 보이는데도 운사는 은호와 좀 더 있고 싶어서 괜찮은 척했다.
현재 운사는 긴 시간 나눈 대화 탓에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다소 힘이 빠진 상태였다.
운사가 속내를 감추기 어려워진 시점을 노려 은호는 아주 중요한 화제를 꺼냈다.
“운사 님, 그자는 크리스마스이브에 청호 님의 도복 띠를 이용해 황호 님을 꾀어내려고 했습니다.”
“뭐? 황호를?”
운사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은호는 운사의 짧은 말을 날카롭게 분석했다.
운사는 청호의 도복 띠보다는 황호의 이름에 더 놀라워했다.
운사는 그자가 청호의 도복 띠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네, 다행히 황호 님 대신 청호 님의 제자가 가서 회수해 왔습니다. 가짜가 아닐까 의심했으나 청호 님의 것이 확실했지요.”
“그랬구나…….”
운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청호의 도복 띠 때문에 황호가 다치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한 듯했다.
그 태도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운사가 직접 멀쩡한 모습을 본 황호보다 보이지 않는 청호에게 더 마음을 써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은호는 청호에 관해서 더 물어봐야 한다고 직감했다.
운사는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머뭇거렸다.
“운사 님, 질문하고 싶은 게 있다면 말씀하세요. 친우의 일이니 궁금한 게 많으시겠죠.”
“고마워. 그럼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은호는 인내심을 가지고 부드러운 표정으로 운사의 말을 기다렸다.
운사는 마치 깨진 유리에 손을 가까이 가져가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자리에 청호는 없었어?”
“청호 님은 계시지 않았답니다. 도복 띠만이 발견되었죠.”
운사의 말에 은호가 흔들림 없이 답했다.
은호는 머릿속으로 운사의 말에 숨은 뜻이 없는지 계속 살폈다.
청호는 현재 한이의 모습으로 은광고에 있다.
그자는 이를 모르는 걸까?
아니면 알고 있으나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운사에게는 알리지 않았던 걸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구나. 청호도 구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청호 님을요?”
“응, 사실 구조 신호를 보낼 때 청호 이야기도 했어. 전해지지 않았나 봐.”
아직 운사가 보낸 메시지를 전부 해독하지 못했다.
꽤 긴 부분이 누락된 흔적이 있기도 했다.
조의신도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는지 메시지의 해석에 힘을 보태겠다고 했고, 은호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어지는 운사의 말에 은호는 웃는 얼굴을 유지하기 위해 힘을 기울여야 했다.
“풍백과 우사가 말하길, 청호의 육신이 그자의 손에 있다고 했어. 나와 같은 처지가 아니라면 좋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