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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책임 (6)
교실 근처에서 문새론과 헤어진 후, 혼자 디바이스 메시지를 확인해 보았다.
[염준열] 의신아, 안녕.
[염준열] 오늘은 어제처럼 맑을 예정이라고 해. 구름이 조금 있지만, 비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아.
어떤 메시지가 올까 걱정했는데, 평소대로 아침 인사와 날씨에 관해 적혀 있었다.
제자로서 보낸 메시지도 마찬가지였다.
‘어제 진 걸 마음에 두고 있을까 봐 신경 쓰였는데, 괜찮은 걸까?’
어제 대련에 관한 내용도 쓰여 있긴 했다.
[염준열] 신문부원에게 어제 치른 본선 해설을 의신이가 맡는다고 들었어. 의신이가 쓰는 분석 기사는 이해하기 쉽고 참고할 점이 많아서 어떤 기사가 나올지 기대돼.
[염준열] 의신이의 해설을 참고해서 다음에 더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할게.
수석을 놓쳤을 때처럼 풀 죽어 있는 게 아닐까 마음이 무거웠는데, 염준열은 달랐다.
텍스트 너머로 의욕에 찬 염준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렇게 염준열이 노력하고 있는데, 내가 괜한 걱정을 한 게 아닌가 싶었다.
염준열에게는 뼈 아플 내용이 들어갈 기사를 사심 없이 기대한다는 말에 감격스러워졌다.
‘기사를 정말 잘 써야겠다.’
기사를 전부 확인한 문새론도 염준열과 비슷한 소리를 하긴 했다.
타이틀 히어로와 내 제자의 대결에 관해 쓰는 기사이니, 소홀히 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으나 이렇게 기대하는 이들이 많으니 더욱 신경 써야겠다.
“너 서포트 부문에 지원한 사람 인터뷰도 하지 않았어? 되게 바쁘네.”
“응, 어제 관전한 후에 디바이스를 통해 원격 인터뷰를 했어.”
반 아이들과 어제 있었던 대련에 관해 이야기하던 중, 오늘 본선을 치를 예정인 독고미로가 말했다.
독고미로의 말대로 나는 서포트 부문도 담당하고 있었다.
그쪽은 특성상 대련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선발하는 만큼, 수고가 적어 겸사겸사 맡기로 했다.
‘일이 많아졌지만, 서포터를 따로 뽑을 가치가 있어. 교류전은 팀전으로 진행되니까 서포터가 있으면 수월할 거야.’
플레이어 중 치유계 이능을 타고난 이들은 극히 드물고, 서포트 관련 이능을 가진 이들도 공격 쪽 능력에 비해선 적은 편이다.
그래서 서포트에 전념하는 플레이어가 없는 상황을 전제하고 공격대, 수비대를 구성하는 법을 배우지만, 있는 쪽이 훨씬 편하다.
그런 점을 감안하여 이번 선발은 두 부문으로 나뉘어 진행된다.
하나는 주수혁과 염준열이 지원한 딜러 부문, 다른 하나는 서포터 부문이다.
‘만약 유상희나 윤여랑이 지원했다면 귀한 치유 능력을 높이 사서 바로 채용됐을 텐데.’
유상희는 졸업했고, 윤여랑은 용궁 일로 바빠 지원하지 못했다.
비록 치유계 이능은 아니지만, 전투에 도움이 되는 이능을 지닌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 여럿 지원하긴 했다.
그 필두가 현재 총동아리회장인 허채아였다.
총동아리 일로 바쁠 허채아는 주변의 추천을 받아 지원했다고 한다.
인터뷰를 할 때, 허채아와 이런 대화를 나눴다.
―사실 가을에 하는 사관학교와의 교류전을 생각해서 안 나가려고 했어. 동아리와 소모임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교류전이니까…….
―작년보다 교류전 규모가 커지고, 동아리와 소모임 숫자가 늘어나서 많이 바쁘다고 들었어요.
―맞아, 하지만 준열이한테만 책임을 떠맡게 하는 건 미안하잖아. 그래서 동아리장하고 소모임장한테 양해를 구하고 일을 좀 나눠 줬어.
허채아가 나선 건 자치 기구의 대표로서 책임감을 느꼈기 때문인가 보다.
처음 선발전에 지원한 이들 중, 자치 기구 대표는 염준열 하나였다고 한다.
천동하는 TC 그룹의 내부 사정과 호족과의 협력 등의 문제로 주변의 무수한 추천에도 불구하고 고사했다.
천동하의 활약을 보지 못하는 건 아쉽게 됐지만, 얼마나 바쁜지 잘 알고 있어서 강요할 수 없었다.
TC의 동향을 살필 수 있으면서 호족이 완전히 신용하고 협력해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현재 천동하밖에 없는 상황이라 누군가로 대체할 수 없었다.
‘도원우도 믿을 만하지만, TC 연구소를 단독으로 습격한 건으로 조용히 움직이기 어려워. 대놓고 상대 파벌에서 경계하고 있을 거야. 천동하는 딜러로 나오든 서포터로 나오든 선발됐을 텐데, 아쉽게 됐어.’
그리고 현 지익회장은 기숙사 소속 학생과 거주 구역 관리에 애를 먹고 있다.
성시완의 능력이 지나치게 뛰어나서 상대적으로 그렇게 보이는 건지, 아님 현 지익회장에게 문제가 있는 건지 의견이 갈렸다.
내 생각엔 둘 다 맞는 말이지만, 후자 쪽이 더 옳다고 봤다.
새로 들어온 1학년 0반은 누가 봐도 졸업한 우기환 일당보다 착하고 순한데 고생하고 있다니, 그냥 능력이 많이 부족한 거다.
‘게다가 지익회 관리보다 다른 쪽에 더 정신이 팔려 있다는 소문도 있어. 허채아는 바쁜 와중에도 이런 훌륭한 마음가짐을 하고 선발전에 지원했는데, 비교된다.’
허채아는 선발전에 지원한 자치 기구 대표가 염준열밖에 없다는 걸 알고 지원했다.
설령 중간에 떨어지더라도 학생들이 뽑은 자치 기구의 장이 학교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게 목적이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허채아는 이렇게 말했다.
―서포터에 지원한 사람이 없어서 운 좋게 본선에 올라온 것 같아. 합숙이 진행될 때까지 추가 인원을 모집하도록 건의해 보려 해. 만약 이야기가 잘되면 신문부에서 홍보해 줄 수 있을까?
서포터 지원자는 열 명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쪽 부문은 서류 심사와 서류 내용의 진위 확인을 위한 간단한 면접을 통해 선발이 진행되다 보니 스카우터가 붙지 않았다.
차라리 딜러 부문에서 한 대련처럼 운동장, 체육관 같은 무대를 준비하고 본인의 이능을 실연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면 스카우터와 관객이 늘어 지원자가 많았을지도 모르겠다.
추가 모집에선 다른 방법을 고안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나는 허채아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정식으로 추가 인원 모집 건이 확정되면 바로 기사화할게요.
―응, 고마워.
―저야말로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나야말로 대화할 기회가 많지 않았던 허채아와 말을 나눌 수 있어서 감사할 따름이었다.
은광고 서포터 대표로 허채아가 뽑히는 건 거의 확정된 사항인 것 같다.
은광고 대표로 선발된 이들을 하나씩 떠올리다 보니 뛰어난 이들이 워낙 많아 가슴이 벅차올랐으나 아쉬운 마음이 조금 들었다.
지원했으면 하는 이들이 몇 명 빠진 탓이었다.
‘마진승이 서포트 부문에 지원하면 좋을 텐데. 광림도 그렇고, 스킬도 그렇지. 그리고 지원했으면 하는 사람이 하나 더 있는데…….’
다른 하나는 바로 박승현이었다.
박승현의 광림, ‘군사가 지휘하는 진군가’는 플마고 시절 자주 쓰던 서포트 계열 이능이었다.
소리가 닿는 곳이라면 동료들의 신체 능력과 이능파 출력을 크게 상승시키는 저 광림은 범위도 넓고 효과도 좋았다.
박승현이 부정 입학자에게 지나치게 시달린 바람에 신체 능력 등이 떨어져 육성하기는 매우 까다로웠으나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었다.
지금 박승현에게는 그런 걸림돌도 없으니 학교를 대표하는 서포터로 출전하는 것도 충분할 텐데, 이번 선발전에 지원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고 박승현에게 물었다.
―서포터로 지원할 줄 알았는데, 네 이름이 없었어. 지익회 일이 많이 바빠?
박승현의 대답에 따라서 지익회를 터느냐 마느냐를 결정할 생각이었다.
박승현은 머쓱해하며 답했다.
―지익회 일이 바쁜 것도 있는데…… 음…….
정말로 지익회 일 때문이 아닌 건지, 일이 힘든데 차마 티를 못 내는 건지 구분하기 위해 관찰했다.
경험상 ‘계’새끼는 일을 떠넘기고 불합리한 얼차려를 할 때 입막음을 같이 했다.
이야기가 새어 나가면 더욱 가혹한 괴롭힘이 가해지기에 주변에서 돕고자 했던 이들도 하나둘씩 입을 다물었다.
온건파였던 최 병장이 전역한 이후의 상황을 생각하면 성시완이 졸업한 이후의 현 지익회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반성하고 변했다고는 하지만 고작 몇 년 만에 사람이 그렇게 쉽게 개과천선하기는 어려울 거다.
―……사실 고민하다가 때를 놓쳤어. 광림을 다루는 연습을 하고 있는데, 잘 안 되고 있거든.
다행히 박승현은 괴롭힘당하고 있지 않은 듯했다.
온 신경을 기울여 박승현이 무언가 숨기고 있는 기색이 없음을 확인한 후에야 안도했다.
박승현은 광림에 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나와 비슷한 힘을 아주 강력하게 다루는 사람이 있대. 그걸 흉내 내니까 좀 나아지긴 했어. 그래도 좀 힘들어서…….
박승현과 비슷한 힘을 아주 강력하게 다루는 사람.
은광고 관련 인물들이 있는 자리에서 박승현의 광림을 몇 차례 쓴 적이 있기에 마음에 걸렸다.
‘내 흉내를 내서 나아졌다면, 내가 직접 조언하면 더 좋아지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박승현을 도울 수 있을지 고민했는데, 허채아가 제안한 추가 모집 건이 통과되면 수가 생길 것 같다.
선발전을 두고 여러 이슈가 쏟아지는 상황이었으나 오후에 무사히 기사가 업데이트되었다.
예상대로 주수혁과 염준열의 대결을 다룬 기사는 높은 조회수를 기록했고, 반응이 아주 좋았다.
0반 선배놈들은 저 대결 때문에 구교사 귀신 기사가 주목받지 못했다며 서운한 티를 팍팍 내는 항의 메시지를 내게 보냈다.
하지만 그래서 0반 선배놈들이 뭘 할 수 있겠는가?
구교사 귀신 같은 엉뚱한 내용이 아니더라도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의 대결 앞에선 당연히 묻혔을 거다.
‘그보다는 댓글이 좀 신경 쓰여.’
내가 작성한 기사에는 안다인의 이름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댓글에 여러 번 언급이 되어 있었다.
주목을 받는 플레이어가 웹상에서 자주 언급되는 건 이상하지 않지만, 별 상관이 없는 기사 댓글에 이름이 나온 게 마음에 걸렸다.
그것도 그리 긍정적인 내용이 아니었다.
안다인과 주수혁, 안다인과 염준열을 비교하며 한쪽을 폄하하고 무시하는 내용이었는데, 누구의 팬이든 기분이 나빠질 것 같은 내용이었다.
‘소홍룡보다 신탄의 사수가 세다는 둥, 그래 봤자 주수혁은 안다인한테 발린다는 둥…… 원시적인 도발로 보여. 싸움을 유도하는 것 같아.’
주수혁과 염준열, 안다인의 팬덤 사이에서 분탕을 치며 둘을 싸우게 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의심되었다.
악질 악플러가 특정 집단을 이간질시키는 밑 작업 중 하나가 ‘내용과 관계없이 상대를 언급하기’ 아닌가.
다행히 누군가가 ‘왜 자꾸 안다인을 언급하느냐’라는 식으로 먹이를 주기 전에 새 댓글을 달아 묻히곤 했다.
마치 누가 댓글의 흐름을 관리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운이 좋았다.
그래도 운에만 맡기고 방치할 수는 없었다.
‘안다인과 관련이 전혀 없는 곳에서 이런 일이 계속 벌어진다면 언젠가 문제가 생길 거야.’
아직은 사소한 불씨에 불과했지만 한중일 교류전이라는 큰 대회를 통해 큰불로 번질지도 모른다.
안다인 관련 기사 외에도 은광고의 주요 플레이어 기사는 전부 체크하기로 다짐했다.
덤으로 안다인의 가족의 힘을 빌리는 것도 생각해 두기로 했다.
‘문제가 되는 댓글 수가 더 늘어나고, 상대가 개인이 아니라 집단으로 움직인다고 판단되면 바로 호족에게 알려야겠어. 이런 건 머릿수가 많을수록 유리하기도 하고.’
그리고 화요일에서 수요일로 넘어가는 밤, 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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