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899화 (899/925)

(899)

109. 책임 (9)

신인의 진정한 소원과 책임.

신인과 청호의 성품과 행적.

청호의 육신을 손에 얻은 흑막.

인간이 되어 은광고에 나타난 공청훤과 한이.

이를 놓고 여러 가설을 떠올렸으나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게 없었다.

“생각이 있는 것 같군.”

있기는 한데, 아직 뚜렷한 수가 생긴 건 아니었다.

괜히 혼란만 줄 수 있으니 말을 아끼기로 했다.

황지호는 캐묻는 대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네 생각대로 움직이기 위해 무모한 짓은 하지 않길 바라마. 아직 네 눈이 어떤 상태인지 잊지 말도록.”

좀 흐릿하게 보이는 거 빼면 괜찮은데, 황지호가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신인과 청호가 엮여 있는 건인데 아무 대가 없이 일을 마치는 건 어렵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긴 했으나 실제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므로 일단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또 모르는 척하는군. 됐다. 이 몸이 알아서 챙기는 수밖에. 교실로 가지.”

됐다니까 나도 더 말하지 않기로 했다.

황지호는 결계를 풀고 교실로 향했다.

교실에는 태호권 소모임의 아침 훈련을 마치고 온 한이가 있었다.

황지호는 그 모습을 보고 평소대로 인사했다.

“좋은 아침이다, 친우여.”

한이는 질색한 얼굴을 했지만, 황지호는 처웃으며 말을 걸었다.

결계를 친 교실에서 본 그늘진 얼굴이 떠오르지 않을 만큼 밝은 모습이었다.

* * *

오늘은 한중일 교류전 대표 선발전 본선 마지막 날로, 내가 출전할 차례가 되었다.

그래서 방과 후에 나는 신문부실로 향하는 대신 체육관으로 향했다.

“의신이 형, 같이 가요.”

체육관으로 이동하던 중에 은호와 만났다.

은호는 운사와 한 대화 건으로 복잡한 심경일 텐데도 평소처럼 온화하고 살갑게 대해 주었다.

은호는 내가 출전한 경기의 기사 작성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한창 힘들 때 일을 많이 시키는 것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운 좋게 의신이 형 기사를 제가 쓰게 되었어요. 제가 맡게 되어서 기뻐요. 시간을 아낄 겸, 이동하면서 인터뷰할까요?”

“그러자.”

에어보드를 타지 않으면 이동 시간이 길어지겠지만, 나중에 인터뷰 시간을 또 쓰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나도 은호의 시간을 아껴 주기 위해 바로 즉석 인터뷰에 응해 함께 걸었다.

은호는 은광고 홍보대사로서 어떤 경기를 보여 줄 건지, 한중일 교류전을 어떻게 보는지 등의 질문을 던졌다.

사전에 본선 경기장으로 통보받은 체육관 쪽으로 향하려 하는데, 은호가 나를 멈춰 세웠다.

“체육관이 아니라 운동장으로 가야 할 거예요. 어느 운동장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중앙 구역에 있는 곳을 지정하겠죠.”

“장소가 바뀌었어?”

“아직이지만, 분명 장소를 바꿀 거예요. 우리 반 아이들은 다 의신이 형 응원하러 온다고 했고, 그 외에도 많은 분들이 오시겠죠. 그 인원을 다 수용하기엔 체육관이 좁아요.”

내 응원을 온다고?

올해 1학년 0반은 다 착한 후배들인 것 같다.

선배를 생각하는 마음이 큰 착한 후배들이 다 온다고 해도 많아야 몇십 명일 텐데 굳이 운동장으로 옮기려 할까?

스타 플레이어 염준열의 경우, 팬들이 몰려올 것이 예상되어 처음부터 본선을 운동장에서 치르긴 했지만, 다른 이들은 체육관에서 치렀다.

운동장에서 치른 경기가 하나 더 있긴 했다.

‘독고미로가 경기를 할 때에는 0반 선배놈들이 강력하게 주장해서 운동장으로 미리 옮겼다고 듣긴 했는데…… 마지막 경기는 안다인과 했으니 운동장에서 하길 잘했지.’

전승을 하던 독고미로는 마지막 경기에서 졌지만, 선발을 확정 지었다.

독고미로를 패배시킨 유일한 인물이 바로 타이틀 히로인 안다인이었다.

둘은 좋은 대결을 펼쳤지만, 주수혁과 염준열 때처럼 결계 출력을 최대로 올리지도 않았고 경기 시간도 그리 길지 않았다고 한다.

독고미로와 안다인의 전투 능력을 고려하면 결계 출력을 최대로 올려야 하긴 할 텐데, 이미 선발이 확정된 둘은 전략적인 행동을 했다.

‘이미 주수혁과 염준열 건으로 전력이 크게 노출되었어. 굳이 둘이 소모전을 하여 수를 드러낼 필요는 없었지. 게다가 보는 눈이 있었어.’

그날 그 자리엔 일본의 대표로 확정된 화족 출신 플레이어의 전속 코치가 있었다고 한다.

그 플레이어는 굳이 비교하자면, 일본에서 염준열급이거나 그 이상의 인기를 누리며 활약하고 있다고 한다.

다른 곳에는 모니터 요원만 보냈는데 이 경기에 굳이 전속 코치를 파견한 이유는 바로 안다인 때문이었다.

‘염준열은 연상이고, 주수혁과는 성별이 달라. 그러니 그 일본 플레이어가 라이벌로 찍는다면 안다인이겠지.’

플레이어 간 성별을 따로 두고 생각하는 건 무의미하지만, 스포츠 부문은 보통 성별에 따라 나누어 그 시대 대표 선수를 꼽지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그 일본 플레이어가 ‘세계 최고의 천재’라는 수식어를 쓰기 위해서는 안다인을 쓰러뜨려야 했다.

그래서 안다인을 자세히 살피기 위해 이 중요한 시기에 전속 코치를 보낸 것이다.

그 코치 하나만을 경계해 힘을 아낀 건 아니지만, 독고미로와 안다인은 합의하에 경기에 제한을 뒀다.

독고미로와 안다인은 광림 없이 스킬로만 싸웠고, 주력 무기 대신 학교에서 지급한 기본 아이템을 활용했다.

다소 손을 놓긴 했으나 둘의 실력이 워낙 출중했기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두 선배의 대결할 시간이 다가오자 운동장에 자리가 없었죠. 그 덕에 날거나 나무에 매달려서 보시는 분도 있었잖아요? 이번에도 그럴 것 같으니 학생회 측에서 대비할 거예요.”

조금 늦게 온 학생들은 에어보드를 타고 보거나 스킬과 광림을 활용해 그 경기를 구경했다.

주수혁과 염준열의 경기를 직관하지 못한 이들이 이번 경기마저 놓칠 수 없다며 온 탓에 사람이 아주 많았다.

늦게 온 사월세음은 비행술을 사용해서 경기를 구경했고, 용제건은 일찍 왔으나 그냥 땅에 있는 학생들의 부러움을 부추기기 위해 하늘에서 관람했다.

그 난리가 났던 탓일까, 은호의 말대로 장소가 바뀌었다.

[김유리] 의신아, 지금 체육관 도착했어?

[김유리] 안내받은 체육관 말고 운동장으로 가 줘. 초반부터 관객이 너무 많이 와서 장소를 옮기기로 했어. 갑자기 공지해서 미안해 >▽<;;

[김유리] 확보한 운동장은 중앙 구역 학생회관 바로 가까이에 있는 데야!

김유리가 보낸 디바이스 메시지에는 은호가 예측한 내용이 그대로 나와 있었다.

은호와 함께 운동장으로 향하니 아직 경기 시간이 안 됐는데도 관객석이 반 이상 차 있었다.

지금 이 상태로라면 부 활동을 마친 이들이 온 후에는 좌석이 모자랄지도 모른다.

요 며칠간 명경기가 쏟아지다 보니 직관하고자 하는 이들이 늘어난 것 같다.

‘우리 학교는 정말 싸움 구경을 좋아하는구나.’

관객석을 보고 있자니 낯익은 얼굴들이 많이 보였다.

그중 단연 눈에 띄는 건 우리 반이었다.

“여기를 본 것 같습니다. 플래카드를 흔들죠.”

“의신이다! 여기예요!”

“생각보다 일찍 왔네.”

관종 콤비가 만든 것이 확실한 오로라색 장식이 보였다.

그 둘은 등교하지 않은 주제에 응원 도구를 만들어 보낸 건가.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나를 응원해 주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괴도랍시고 묘한 동지 의식을 품은 걸 달가워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중일 교류전은 관심을 받기 좋은 자리인데, 왜 이걸 알면서도 안 나온 거지?’

국제적인 관심을 포기할 만큼 중요한 일이 있는 걸까?

악몽 인섬니움을 찾아다니는 등교 거부자와 어울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거다.

우리 반에는 나와 독고미로, 맹효돈 외에도 저 관종처럼 학교 대표로 뽑힐 만한 인재가 많은데 지원을 그리 하지 않았다.

‘김유리는 광림이 안정됐지만, 이걸 사람들 눈앞에서 사용하기엔 꺼려진다고 했지. 또, 이번엔 스태프로서 활약하고 싶다고 했고.’

이번에 학생회의 주요 인물들 다수가 대표로 차출되는 바람에 빈자리가 크긴 했다.

김유리는 이를 메울 생각이라고 한다.

그 외에는 목우람이 국제 호구가 될까 봐 반 애들이 출전을 말렸고, 진정묵은 방학 동안 마교에 대항하기 위해 짧은 폐관 수련을 할 예정이다.

‘한이는 태호권 소모임 후배들이 많아지는 바람에 방학 동안에 바쁠 거라고 했지.’

늙어서 못 나오는 황지호는 논외다.

경기는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딜러 부문의 본선 경기는 교내외 대련 결과, 에너미 토벌, 이계 공략 실적 등을 바탕으로 시드를 정하고 진행했기에 눈에 띄는 강자와 맞붙을 일은 없었다.

대부분 만물 사용을 활용해 마법과 근거리 무기를 섞어서 공략하기만 해도 금방 이길 수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경기는 쉽지 않았다.

그동안 치른 본선 경기가 늘 그랬듯, 마지막에는 시드끼리는 맞붙기 때문이었다.

“오래 기다렸습니다, 모두가 기다린 마지막 경기! 모두가 다 아는 은광고 그 사건의 생존자, 무명의 초신성 조의신, 얼굴과 관록만큼은 철혈쌍검 못지않은 학생부회장 헌드레드 세컨드 곽경구의 대결이 시작됩니다!”

와아아아아!

MC를 맡은 방송부원이 호응을 유도하자 여기저기서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곧 기말고사 기간이 시작되므로 다들 마지막으로 노는 거라 생각하고 광기에 젖어 있는 듯했다.

심판을 맡은 0반 판독기 교사의 얼굴이 본선 시작 전에 비해 매우 피곤해 보였다.

하필 오늘 1, 2, 3학년 0반이 다 온 바람에 더 긴장한 것 같았다.

착한 후배들, 동급생들이 모인 1, 2학년 0반은 그렇다 쳐도 선배놈들은 뭘 보러 온 건지 솔직히 이해가 안 갔다.

‘잘해라, 수상한 부반장 놈아!’, ‘미로랑 같이 대표 나가는 거다, 알지?’라는 말을 하는 걸 보니 싸움 구경할 겸 0반이랍시고 날 응원하는 것 같긴 했다.

어쨌든 이 자리엔 함근형 선생님을 비롯해 많은 교사가 왔으니 사고 걱정은 안 해도 될 거다.

경기 시작 전, 곽경구가 말을 걸었다.

“너희 반 독고미로와 안다인의 경기를 봤나?”

곽경구가 관객석을 돌아보며 말했다.

바로 의도를 알아챘다.

그 둘이 그랬듯이 우리 둘은 선발이 확정되었으니 수를 숨기자는 뜻이다.

“네.”

“말이 통하네. 준열이가 네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했다.”

주수혁과 염준열이 그랬듯, 곽경구도 나와 진심을 다해 대결해야 할까 봐 걱정했나 보다.

염준열은 내가 곽경구의 광림을 쓴다는 걸 알고 있으므로 전력으로 싸우지 않으리라고 확신했을 거다.

전력 노출도 그렇지만, 나는 곽경구가 광림을 사용하는 게 꺼려졌다.

곽경구의 ‘100초의 은총’은 시간제한이 명확하게 정해져 있어서 함부로 낭비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당장 곽경구가 하교하는 길에 높은 희귀도의 이계가 발생했는데, 광림 가용 시간이 끝나면 낭패 아닌가.

“진정묵이 곽경구 선배님께 검을 배웠다고 들었어요. 저도 배워 가고 싶어요.”

나는 만물 사용, 그것도 검만을 사용하겠다고 돌려서 말했다.

곽경구는 내 말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우선 검 하나로 시작할까.”

곽경구는 주수혁처럼 쌍검을 사용하는데, 그중 하나만 사용하겠다고 선언했다.

각자 제약을 거는 걸 보고 일부 관객들이 실망한 티를 냈지만, 갑자기 날뛰기 시작한 각 학년의 0반 학생들 때문에 야유를 보내는 데에 실패했다.

0반 판독기 교사가 왠지 더 피곤해하는 얼굴로 선언했다.

“……시작!”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