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900화 (900/925)

(900)

109. 책임 (10)

환호 속에서 나와 곽경구가 무기 아이템 카드를 실체화했다.

약속한 것도 아닌데 둘 다 학교에서 지급한 아이템을 택했다.

같은 디자인의 검이 실체를 갖추자 자석처럼 이끌리듯이 상대를 향해 쏘아졌다.

〈스킬 ‘만물 사용’이 발동했습니다.〉

카아앙!

시스템 음이 들리기 무섭게 검날이 맞붙는 소리가 들렸다.

출발선 너머에 있던 곽경구가 바로 앞까지 와 있었다.

땅을 박차는 소리나 뛰기 위한 준비 자세도 없이 날렵하게 이동한 결과였다.

속으로 조용히 감탄했다.

‘곽경구는 큰 체구를 활용해 기술보다는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걸 선호하는 편인데도 빨라.’

진득하고 노련하게 상대를 공략할 것 같은 인상과 달리 곽경구는 속전속결로 적을 쓰러뜨리는 걸 선호했다.

광림을 하루에 100초밖에 쓰지 못하니 긴 싸움을 꺼려 하는 성향이 생기고 만 것이다.

그렇기에 처음 곽경구와 싸우는 이는 시작과 동시에 그의 기습에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곽경구와 대련할 때 가장 주의한 건 이 첫수였다.

‘곽경구는 싸움이 길어져도 냉정을 유지하고, 포기하지 않는 연습을 해야 해.’

그런 마음을 기르기 위함인지, 곽경구는 체스 대회에 나오기도 했다.

곽경구는 작년에 나와 준결승전에서 만났을 때, 경기가 끝나지도 않았고 활로도 남아 있는 상황에서 먼저 기권을 선언했다.

부디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번엔 체스가 아니라 검술이니 곽경구가 쉽게 포기할 리 없지만 말이다.

“기습이나 힘으로는 안 되겠네.”

무겁게 힘으로 누르던 곽경구가 칭찬 비슷한 말을 던졌다.

아무리 제약을 걸었다고 해도 이 정도의 힘에 바로 당할 리가 없었다.

호족 최고의 무재인 백호군이 휘두르는 대검을 받아 본 적이 있는데, 쉽게 쓰러지면 가르침을 준 호랑이에게 실례였다.

휘익!

나는 대답하는 대신 검날을 오른쪽으로 흘리고 몸을 낮췄다.

몸집의 차이를 이용해 안으로 파고 들어가 상대의 밸런스를 무너뜨릴 심산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곽경구가 뒤로 두 발자국 빠르게 물러났다가 단숨에 도약했다.

쐐액!

검날이 공기를 찢는 소리가 들렸다.

곽경구가 검을 두 손으로 쥐고 몸을 낮춘 나를 향해 검을 내리긋고 있었다.

떨어지는 검날이 허공에 깨끗한 직선을 만드는 게 보였다.

나를 꿰뚫을 것 같은 선을 보며 다음 수를 생각했다.

‘곽경구는 지금 양손에 힘을 실었어. 그냥 검을 들어 막으면 자세가 무너질 거야. 피하는 건 안 돼. 철혈쌍검류의 주요 기술을 생각하면…….’

비록 지금 곽경구가 검을 하나만 쓰고 있지만, 검 하나가 없어도 추격타를 날리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할 거다.

행동 방침을 정한 나는 발을 멈추고 이능파를 끌어올렸다.

검날을 쥔 손에서 흘러나온 검은 기운이 검을 먹어 치우듯이 움직였다.

파앗!

곽경구의 검날이 닿기 직전, 내가 발산한 검은 이능파가 검날을 뒤덮었다.

평범한 철검이 순식간에 흑검으로 변한 것처럼 보였다.

이능파로 날카롭게 벼려진 흑검의 날을 본 곽경구가 눈을 크게 떴다.

카아앙!

검과 검이 맞부딪치기 무섭게 곽경구가 검을 뒤로 물렸다.

이능파로 강화한 대상을 일반 아이템으로 상대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곽경구가 검을 물리며 검날의 상태를 눈으로 훑어 부서진 곳이 없는지 확인했다.

“이건 만물 사용의 효과가 아니지?”

만물 사용 덕에 이렇게 대응할 수 있던 건 아니다.

만물 사용은 어디까지나 검을 잘 다루도록 할 뿐이니, 이능파 컨트롤이나 상황에 따른 대응법은 오로지 내게 달려 있었다.

무기에 이렇게 빨리 이능파를 싣는 건, 백아를 하얀 이능파로 감아 휘두르던 백호군에게서 배운 덕이었다.

그걸 말할 수는 없지만, 일단 만물 사용의 효과가 아닌 건 밝혀 두기로 했다.

“연습했어요.”

“그래.”

짧게 답한 곽경구가 검을 고쳐 쥐었다.

곽경구의 손에 이능파가 넘실거렸다.

“그럼 나도 연습한 걸 보여 줘야겠다.”

곽경구의 검날이 이능파 색으로 물들었다.

곽경구 또한 나와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술렁이던 관객석에서 연신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그냥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보다 이능파를 무기에 감고 싸우는 건 몇 배나 체력과 이능파, 정신력이 소모되는 짓이었으니 놀랄 법했다.

시작 신호는 따로 없었으나 나와 곽경구는 다시 상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파아앗!

쇠가 부딪치는 소리 대신 서로 다른 성질의 이능파가 반발하고, 작은 폭발을 일으키는 소리가 연거푸 터졌다.

서로 검으로 싸우고 있는데도 언뜻 보기에는 화려한 이능 스킬을 활용해 싸우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검술만 따지면 곽경구가 위였지만, 이능파 컨트롤 실력은 내 쪽이 위라 아직까지는 백중지세였다.

검의 움직임과 이능파의 흐름을 제어하느라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호흡이 흐트러졌으나 나도 곽경구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와아아아아!

주고받는 합이 길어질수록 관중들의 반응이 뜨거워졌다.

응원하는 이들도, 그냥 응원 없이 구경하는 이들도 경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시선이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체스 기사 시절부터 경기 중에 관객의 시선을 받았으니 익숙했다.

하지만 저번 체스 대회의 상대였던 곽경구가 있고, 그때 우리 반 애들이 있던 탓일까.

자꾸 반 아이들 쪽이 신경 쓰였다.

“……크윽.”

“정묵아, 의신이의 이능파 색이 부러우세요? 그만 부러워하고 응원하세요!”

“정묵이 이능파 색도 예쁜데…… 염료로 재현하기 힘들 정도로 섬세하고 드문 색이야.”

반 아이들이 응원하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아니, 응원이 아닌 말도 있었다.

검은색에 집착하는 어둠의 다크니스 검객 진정묵은 내 이능파 색이 부러운 듯했다.

또, 이미 선발로 확정된 맹효돈과 독고미로 둘은 훈수 비슷한 소리도 섞어 가며 열심히 응원했다.

“부반장, 그냥 검만 휘두르지 말고 주먹도 써!”

“그래, 한 손은 검을 쓰고 남은 한 손은 맨주먹을 휘두르면 되잖아.”

“그게 말처럼 쉽냐?”

“두 분께는 쉬울 겁니다.”

“맞아, 미로가 한 경기 보니까 한 손으로 메이스를 휘두르고 한 손으론 주먹질을 하더라.”

만물 사용은 무기와 방어구를 잘 다루는 스킬이라 격투기는 어찌할 수 없는데,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플레이어의 궤적으로 맹효돈의 싸움 스킬을 쓴다면 저 둘이 훈수한 대로 싸울 수 있겠지만, 이번 경기에서 광림을 쓸 생각은 없었다.

체력과 집중력을 소모하는 바람에 머릿속은 조금씩 아득해지는데, 반 아이들이 저러고 있는 걸 보고 그에 따라 생각하니 이상하게 정신이 다시 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응원을 받고 힘을 얻는 나와 달리 곽경구는 흔들렸다.

‘자치 기구 학생들이 있는 쪽…… 주수혁을 보고 있어.’

곽경구는 지금은 은광고 학생부회장에 어울리는 성실한 학생이지만, 광림을 얻은 직후엔 청소년 음주를 저지르는 등 잠시 비뚤어졌다.

천재 검사로 이름을 날린 곽경구의 아버지 철혈쌍검과 그 뒤를 이은 불세출의 천재 주수혁 사이에서 갈등한 탓이다.

곽경구는 은광고 입학 직전에 주수혁에게 감화되어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아무 사감이 없는 건 아닐 거다.

주수혁이 얼마 전 압도적인 무위를 선보였으니 이를 보고 무언가를 느꼈을 거다.

안다인과의 수련 덕인지 주수혁은 플마고 속에서보다 더욱 성장했고, 곽경구와의 차이는 더 크게 벌어졌다.

곽경구의 외모는 이미 성인을 훌쩍 넘겼지만, 속은 청소년이므로 성장한 주수혁을 보고 평정심을 유지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곽경구와 주수혁은 같은 쌍검 도장 출신이지만, 광림이나 성향을 따지면 서로 공격대에서 맡을 역할이 달라. 그걸 깨달으려면 광림을 좀 더 잘 다뤄야 할 텐데.’

하지만 곽경구의 광림을 연습하는 건 쉽지 않다.

곽경구의 광림은 다치면서 배워야 하는 데다 하루에 100초밖에 못 쓴다.

철혈쌍검 곽 사범이 매우 엄하고 험하게 아들을 훈련시키고 팬 덕에 사용법이 다소 익숙해졌지만, 내가 플마고에서 성장시킨 만큼은 아닐 거다.

‘게임에서 했던 것처럼 곽경구의 광림을 훈련할 수 있다면…….’

게임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자 머릿속에 어느 수가 하나 떠올랐다.

하지만 생각을 잇기 전, 전황이 바뀌었다.

곽경구의 검을 휘감은 이능파가 조금 흐려지고, 자세가 무너졌다.

경기가 길어지며 잡념이 섞이다 보니 장기전에 약한 곽경구 쪽이 먼저 흔들린 것이다.

그 틈을 놓칠 생각은 없었다.

나는 곽경구의 검을 날려 버릴 생각으로 몸을 움직였다.

손힘이 약해진 틈을 타 검을 완전히 쳐 낼 생각이었다.

“……!”

곽경구가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뒤늦게 반응했다.

곽경구는 무의식적으로 검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움직였다.

하필 내 왼쪽 방향에서 그렇게 하는 바람에, 시야가 흐릿해 그 움직임을 늦게 파악했다.

곽경구는 맨손을 뻗어 내 검이 그리는 궤적을 가로막으려 했다.

급히 들어 올린 손에는 방어구도 없었고, 이능파로 감싸여 있지도 않았다.

검을 놓치느니 팔을 베이는 쪽을 택한 것이다.

‘안 돼, 곽경구를 진짜로 베고 말 거야!’

검은 검날이 곽경구의 교복 소매를 잘라 내고, 팔을 파고드는 장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피를 흘리는 건 화면 너머로 몇 번이나 봤다.

하지만 리플레이를 하며 계속 봐도, 플마고의 엔딩까지 봐도 그 피에는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 장면을 내 손으로 만들고 눈앞에서 볼 수는 없었다.

100초의 은총을 사용하는 곽경구가 할 법한 당연한 선택이지만, 내가 그걸 받아들이는 건 불가능했다.

파아아…….

나는 검날을 감싼 이능파를 거두고 억지로 검이 향하는 방향을 바꾸었다.

내 검이 곽경구의 팔을 베는 대신, 검날을 향해 쏘아졌다.

속도는 제법 붙어 있었으나 자세가 무너진 채로 휘두른 검은 어설픈 호선을 그렸다.

카아앙!

검날이 부딪치기 무섭게 내 손에서 검이 빠져나갔다.

검을 쥐고 있던 손에 이능파가 없던 탓에 지잉 하고 울리는 게 느껴졌다.

손에 통증을 느낀 후에야 겨우 안심했다.

내가 휘두른 검이 곽경구를 베는 게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휘이익!

내 검이 멀리 날아가 경기장 위로 힘없이 떨어졌다.

관중석이 시끄러운 바람에 검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 어려울 텐데, 이상하게 그 소리가 크게 들렸다.

무장 상태가 해제된 나를 보고 심판을 맡은 0반 판독기 교사가 외쳤다.

“거기까지!”

곽경구는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막 파악하고는 경악한 얼굴을 했다.

멀리서 봤거나 내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한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직도 모르는 듯했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해도 곽경구가 모를 리가 없었다.

내가 마지막에 이능파를 거두고 엉뚱한 곳을 노렸다는 걸 알아챘을 거다.

곽경구는 다급히 승리 선언을 하는 심판을 향해 무언가 말하려 했다.

하지만 심판의 말이 먼저 떨어졌다.

“곽경구 승!”

박수 소리 사이에서 곽경구와 인사를 나누는 동안, 내 머리는 차게 식어 있었다.

‘내가 아니었다면 곽경구가 크게 다쳤을 거야.’

플마고의 곽경구가 사망하는 때는 고등학교 3학년으로, 현재 그와 같은 나이다.

하지만 플마고 속 곽경구는 이렇게 안일하지 않았다.

선발전을 하며 본 이들의 모습이 하나씩 머릿속을 스쳤다.

플마고의 플레이어로서,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성장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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