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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포스트모템 (6)
은호가 꺼낸 자료에는 개천 신화라 불리는 때에 발생한 사건들이 연대순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국사 교과서에 몇 페이지 정도로 등장하는 간결한 연표에 비해 몹시 길고 자세했다.
은호는 무언가를 알아내기 위해 연표를 작성하고 있으니 매우 신중하고 세심하게 작업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황지호가 말한 게 전에 만들던 그 연표였구나. 연표는 아직일 줄 알았는데.’
은호는 깨어난 지 1년도 안 된 데다 학교생활과 각종 사건을 둔 작전 회의에 참가하느라 바쁘다.
그렇기에 분량이 몇천 년 어치에 달하는 연표를 작성하는 건 좀 더 시간이 걸릴 거라고 예상했다.
아직 완성은 아직이지만, 청호와 신인에 관한 고찰 때문에 미완성 연표를 꺼내온 것 같다.
‘은호가 잠든 이후의 사건도 연표에 기록되어 있어. 다른 호랑이들의 말을 참고하고, 자료를 따로 살펴본 건가.’
본채에서 화호를 봐서 그런 건가, 호랑이 저택 5층에 있던 거대한 서고가 떠올랐다.
양이 워낙 많았기에 황지호는 온갖 나이대의 분신을 동원해서 기록을 살폈다.
어린 황유호가 혹사 당한 걸 생각하니 갑자기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제가 잠든 이후의 일은 황호 님께서 확인해 주셨어요.”
“작년에 풍백과 우사, 운사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보유한 기록을 전부 살펴보았지. 얼마 지나지 않은 일이었기에 돕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때 기록을 살핀 게 지금 도움이 되고 있구나.
황유호의 고생이 헛수고가 되지 않아 다행이었다.
황유호를 포함한 분신들이 아득한 기록을 꼼꼼하게 살핀 덕인지, 긴 세월에 걸친 한반도의 주요 천재지변이 잘 기록되어 있었다.
호족들은 날씨를 관장하던 세 관리인 풍백, 우사, 운사가 사라지고 호족의 무녀도 대가 끊기자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해 나름 최선을 다한 듯했다.
신인 마저 떠난 후에는 천신과의 소통이 거의 불가능해졌기에 할 수 있는 거라곤 기록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개천 신화는 기록되지 않은 부분이 많다. 현대에 비해 기술이 발전하지 않았고, 자원은 부족했으며 전쟁이 잦아 기록을 남기기 어려웠지. 연표에서 빈 곳은 기억에 의존해 채워야 할 거다.”
황지호가 듬성듬성 비어 있는 연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기억은 시간이 흐르면 변질되기 쉽다.
게다가 호랑이들은 호족으로서 수천 년간 다져진 신념과 확고한 가치관이 있다.
그런 호랑이들이 복기하고 반추한 기억이다 보니 틈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
‘은호는 다른 삶을 경험했고, 플마고를 통해 제 3자의 시점으로 개천 신화를 본 적이 있기에 더 객관적이겠지. 무언가를 느낀 게 아닐까?’
은호가 시간과 심력을 쏟아 가며 개천 신화를 복기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일 거다.
개천 신화에는 빈틈이 존재하고, 그 틈에는 큰 비밀이 숨어 있을 것이다.
은호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에는 신인 님과 청호 님이 연관된 건 위주로 살펴 주셨으면 합니다.”
이 중에서 유일하게 호족이 아닌 내가 무언가를 찾아내 주리라고 기대한 것 같다.
찾아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없지만, 기대에 응할 수 있으면 좋겠다.
연표 홀로그램을 전개하고 있자니 은호의 말이 조금 걸렸다.
‘방금 ‘이번에는’이라고 말했어. 은호는 개천 신화에 존재하는 틈이 하나가 아니라고 생각하나 보네.’
우선 지금 찾아야 할 것은 신인과 청호에 관한 틈이다.
신인과 청호에 관한 고찰, 알고 있는 사항을 머리에 새기며 연표를 확인했다.
제일 먼저 확인한 곳은 신인과 청호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시점이었다.
[천신의 대련 소집]
[신인, 풍백, 우사, 운사 강림]
이건 황지호가 한 옛 이야기에서 들었던 내용이었다.
대련을 계기로 뿔뿔이 흩어졌던 호랑이들이 한자리에 모이고, 황지호는 은호한테도 지고 청호한테도 지는 등 수난을 겪는다.
결승에 올라간 건 백호군과 은호였고, 은호가 기권하여 백호군의 우승이 결정된다.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온 신인은 천신을 대신해 호족 최고의 무재에게 무기를 선물하였다.
‘백호군은 두 번이나 거절했지만, 세 번째에는 받아들였지. 그리고 그 무기는 필요한 순간이 오면 모습을 드러낼 거라고 했어.’
백호군이 사용하는 파운참뢰(破雲斬雷)의 백아(白牙)는 은호가 만든 것이고,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백아를 휘둘렀다.
플마고에서는 마지막까지 그 무기가 힘을 발하는 일은 없었다.
설령 힘을 발휘했다 해도 플마고의 엔딩을 바꿀 순 없었을 거다.
그외 연표에 적힌 사항을 확인하며 시선을 옮겼다.
[외적의 침입]
[삼칠일의 시련]
적호와 웅녀가 처음으로 만난 건 삼칠일의 시련 때라고 들었다.
이때 시련을 통과한 둘은 큰 힘을 받아 최전선에서 활약하며 외적을 쓰러뜨렸다.
‘이때까지는 호족과 웅족이 손을 잡고 있었지.’
그러나 외적과의 전쟁은 순조롭지 않았다.
연표에는 수많은 희생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어딘가에 기록되어 있을 리는 없고, 전부 호랑이들이 기억하고 있던 이름을 다시 적은 듯했다.
수천 년 동안 이렇게나 많은 이름들을 잊지 않고 있었던 거다.
연표에 곧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풍백, 우사, 운사 전몰(戰歿) 가장]
최근에 수정되었을 항목이었다.
여태까지 죽었다고 생각한 이 셋은 살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웅족의 배신에 관한 부분이 나왔다.
[1대 웅족의 수장 사망]
[2대 웅족의 수장 추대]
[웅족, 외적의 동맹 결성]
웅족이 완전히 호족을 저버린 건 수장이 바뀐 후라고 들었다.
하지만 운사의 말을 들어 보면 풍백과 우사가 행동했을 시점에 이미 웅족은 배신할 기색을 보였다.
1대 웅족의 수장은 그들과 뜻이 맞지 않아 제거된 듯했다.
전쟁 중이었기에 죽음을 꾸며 낼 방법은 얼마든지 존재했다.
[백호, 토족의 지원을 받아 개천(開天)]
긴 전쟁의 끝 무렵, 수세에 몰린 호족이 활로를 열고 승전하게 된 계기가 적혀 있었다.
백호군이 사관학교 교류전 개막식에서 춘 검무의 배경이 된 개천신화에 기록된 신화적 벽사 행위였다.
외적들이 부른 삿된 어둠이 한반도를 덮고, 천신의 목소리가 단절되자 백호군은 홀로 어둠의 근원으로 향했다.
무수한 외적을 벤 백호군은 마지막으로 하늘과 땅 사이의 어둠을 베고자 했다.
월궁의 달토끼들은 항아에게 부탁해 짙은 어둠에 가느다란 실금을 내고, 백호군은 이를 노려 어둠을 갈라내는 데에 성공한다.
그리고 다시 하늘을 여는 데에 성공했기에 이는 개천의 벽사라고도 불린다.
[종전 후, 천신의 강림]
그 이후에는 개천 신화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호족이 승리한 후에 열린 하늘에서 천신이 내려와 소원을 들어주던 때였다.
이때, 웅족의 용서를 빈 이들이 있었고 천신은 그 말을 들어준다.
그리고 몇 년간 짧은 평화가 이어졌다.
‘황지호가 임시 수장이 되었어. 은호가 건강을 잃은 걸 보니 천기를 어겼을 때가 이때구나. 은빛 영웅도 이 즈음에 태어났겠지.’
이 기간에는 날씨가 크게 어그러지는 일도 없었고, 인명 피해가 날 법한 재난도 없었다.
경사가 몇 개 적혀 있을 뿐이었다.
‘적호와 웅녀의 혼례, 제호의 탄생…….’
그러나 김신록이 태어나고 1년도 지나지 않았을 때, 웅족이 호족을 배신하였다.
적호는 천익산을 제외한 모든 곳의 호신총을 부수고, 가면을 썼던 부부는 자식을 잃었다.
나는 연표에 쓰여 있는 숫자를 오래도록 바라봤다.
‘이때부터 안다인은 계속 호족 부부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웅족과 치른 전쟁의 결과, 호족은 승리했다.
웅족은 사사로운 사건을 간혹 일으키나 감히 전쟁을 일으킬 만한 세력을 모으지 못했다.
‘김신록은 이후 자신이 진족이라고 생각하며 성장했다고 했지.’
김신록이 뒤늦게 자신이 후예라는 것을 깨닫고 아버지의 존재를 알게 된 후, 붉은 형틀에 묶인 적호를 찾아가 신보를 사용한다.
그 결과 적호는 더욱 큰 벌을 받게 되었다.
또, 아마 이 즈음에 김신록은 용제건과 만나 친구가 되었을 거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은호는 깊은 잠에 빠지고, 황지호가 정식 수장이 되었구나.’
신인과 청호가 사라진 것은 황지호가 정식 수장이 되고난 이후의 일이었다.
호랑이들은 속은 읽을 수 없는 얼굴로 연표를 확인했다.
누구 하나 목소리를 내지 않는 것을 보니, 여기에 나온 기록들은 전부 호랑이들이 기억하고 있는 대로인 듯했다.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몇 개 있지만, 지금 주목할 건 신인과 청호가 사라졌을 때의 일이야.’
연표에는 신인과 청호의 수색 결과와 과정에 관해서도 짤막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굳이 요약해서 쓰려고 저렇게 짧게 쓴 게 아니라, 정말 아무 성과도 없었기에 저렇게 쓸 수밖에 없었던 거다.
그렇다면 호족의 방식으로 신인과 청호에 관해 생각하면 답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연표를 앞에 펼쳐 두고 생각에 잠겼다.
‘신인과 청호가 사라진 후에 딱히 눈에 띄는 부분이 없어. 큰 사건은 아주 긴 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일어나고…… 웅족의 습격은 그 전후에도 몇 번 있던 일이고…….’
나는 호랑이들이 해 준 개천 신화에 관한 이야기를 샅샅이 떠올렸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황지호가 해 주었던 이야기 속, 은호가 했던 말이었다.
―천신님의 힘만으로는 이 땅의 모두가 부족함 없이 사는 건 불가능하겠죠. 우리는 언젠가 신의 힘 없이 이 땅에서 살아갈 힘을 길러야 해요. 하지만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겠죠.
과거 한반도의 땅은 척박했고, 기술은 아직 발전하지 않았기에 천신의 은총이 없으면 이 땅이 유지되기 어려웠다.
그런 와중에 큰 전쟁을 몇 차례나 치러 땅은 더욱 메마르고, 강력한 권능을 발휘한 천신은 힘을 많이 소모하였다.
그 점을 생각하면 한반도에는 전쟁이 아닌 형태의 위기가 닥칠 뻔했을지도 모른다.
‘천신의 힘과 한반도의 상황을 잘 아는 건 신인이었을 거야. 그런데도 인간이 되어 호족의 곁을 떠났지.’
이어서 운사가 했던 말도 떠올랐다.
―신인께서는 호족과 인간을 몹시 아끼셨어. 책임보다 소원을 우선하실 분이 아니야.
신인의 책임에 관해 떠오르니 실마리가 보였다.
나는 다시 한번 연표를 살폈다.
이번에 주목한 건 사건과 인물의 나열이 아닌 다른 부분이었다.
“의신이 형이 무언가 알아내신 것 같군요.”
아직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한 번 그 가능성을 떠올리자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호랑이들이 내 말을 기다리는 와중에도 많이 망설였다.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신인은 인간을 지키기 위해 인간이 된 것일 수도 있어.”
“그게 무슨 뜻이지?”
나는 연표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신인이 인간이 된다면, 천신은 절대로 인간을 저버리지 못할 테니까.”
신인과 청호가 사라진 시점 전후.
천재지변의 발생 빈도가 아주 조금 달라져 있었다.
기우제, 기청제의 빈도도.
풍년을 축하하는 축제도.
그 둘이 사라지기 전, 힘을 조금씩 잃어 가던 한반도의 땅이 힘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긴 전쟁의 역사를 겪으며 지나치게 힘을 소모한 천신은 한반도를 저버리려 했고, 신인은 이를 막기 위해 인간 사이에 섞여든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