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907화 (907/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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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포스트모템 (7)

‘반응을 보니 생각도 못 한 것 같아.’

말없이 연표를 응시하는 호족들을 보니 내 추측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

호족이 생각도 못 한 이유라면, 정답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상위 존재는 모두를 공평하게 사랑하지는 않는다.

용족, 무녀를 아주 아끼는 용왕신만 봐도 알 수 있다.

용제건은 ‘용왕신의 총아’ 혹은 ‘용족의 총아’라고 불리고 있다.

총아란 특별히 사랑받는 존재를 칭하는 단어이므로, 모두가 공평하게 사랑받는 집단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말이다.

‘천신이 한반도에 은혜를 베풀고, 호족을 아낀 건 사실이야. 하지만 천신은 신인을 특별히 아꼈지.’

천신과 신인을 경애하는 호족들의 이야기만으로는 알기 어려웠다.

풍백과 우사는 신인의 말로 백일의 시련이 삼칠일로 준 것을 보고 분개했었다.

천신이 자신의 자신의 아들인 신인을 특별히 아끼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긴 했다.

문제는 천신이 다른 것들에 비해 신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또 신인을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였다.

‘천신의 힘이 점점 한정되어 간다면 모든 걸 신인에게 쏟아붓고 싶어 하진 않을까?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신인에게 가야 할 자신의 은혜를 호족이나 다른 인간들이 빼앗아 간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천신이 한반도의 인간과 호족을 버리고 신인만을 택한다면, 신인은 먼저 천신을 설득하려 했을 거다.

그게 잘 안 되었다면 다른 수단을 찾으려 했을 거다.

“만약 의신이 형의 말씀대로라면, 신인 님의 행보가 납득이 가요. 그분이 인간이 되어 한반도에서 삶과 죽음을 반복하고 있다면, 천신께서는 절대 이곳을 저버리지 못할 테지요.”

은호가 담담하게 말했다.

인간의 삶을 경험한 은호는 비교적 빠르게 상황을 받아들인 것 같았다.

백호군도 말은 없었지만 연표에서 눈을 떼고 있었다.

하지만 황지호와 적호는 오래도록 신인과 청호가 사라진 시점의 연표 부분에서 도통 눈을 떼지 못했다.

천신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호랑이들의 눈을 계속 가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천신의 음성을 들은 게 언제인가요?”

“내가 신역의 수인이 되었을 때다.”

은호의 질문에 백호군이 답했다.

그 일은 플마고의 유저라면 누구든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연표상, 종전 후 천신이 강림한 시점.

천신은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권능을 백호군에게 주었다.

그러나 백호군이 진명(眞名)을 분실했다는 걸 알자 오만을 벌한다며 능력을 봉인하고 신역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때 백호군을 벌하기 위해 천신이 모습을 드러냈을 거다.

“백호 형님, 진명을 분실한 건 언제죠?”

“……시기를 특정 짓기 어렵다.”

은호의 질문에 백호군이 잠시 침묵했다가 답했다.

그 중요한 걸 잃어버렸는데 잘 기억하지 못하다니.

진명을 잃어버린 충격이 컸던 것 같아 걱정되었다.

‘저렇게 큰 충격을 받았는데 천신은 과한 처분을 내린 거 아닌가?’

진명 좀 잃어버렸다고 내 최후의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죄인 취급하는 천신을 좋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천신이 백호군을 보호하려 했다는 건 이해했지만, 수인이 아닌 다른 취급을 해 줬으면 했다.

가두고 힘을 제한하는 것 외에도 상대를 보호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백호군은 마지막까지 진명을 되찾지는 못하지만, 수인 신분에서 벗어나는 데에 성공해서 마지막엔 모든 힘을 다해 싸웠지.’

진작에 백호군이 수인의 제약을 벗었으면 플마고가 덜 피폐해지지 않았을까?

혼과 육신을 잇는 쐐기인 진명이 없으니 깊은 잠에 빠질 리스크가 커져 그 전에 퇴장했을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은호가 다시 질문을 던지기 전, 황지호가 긴 침묵을 깨고 말했다.

“……이계 충돌이 일어난 직후, 이 몸은 큰 이변을 감지하고 호족을 소집했다. 그땐 이미 백호에게 진명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전에는요?”

은호가 묻자 황지호가 생각에 잠겼다가 답했다.

황지호는 아득한 옛날을 회상하다가 말을 이었다.

“글쎄, 몇백 년 전쯤에는 진명이 있었을 거다. 그것도 먼발치에서 이야기를 나눴을 뿐이니 확신하기 어렵군.”

“적어도 몇백 년 이상 두 분이 만나지 못했나 보군요.”

황지호는 답하는 대신 주변의 호랑이를 둘러보며 입꼬리를 당겼다.

황지호는 정말 긴 세월 동안 친우들과 만나지 못한 듯했다.

다른 호족들이 있다고는 하나 황호가 친우로 인정한 신화계 호족들과는 다를 것이다.

“무엇을 하다가 진명을 분실한 건지는 묻지 않겠다. 하지만 네가 유희 따위에 정신이 팔려 진명을 잃어버릴 것 같지 않군. 그랬다면 진작에 네 ‘계’가 신화계에서 유희계로 바뀌었을 거다.”

“……백호 님이 그 용과 같은 계가 될 리가 없습니다.”

“하하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처음으로 김신록이 입을 열었다.

김신록이 스승으로 모신 백호군이 유희계 용족 용제건과 같은 계가 되는 건 싫은가 보다.

나도 그건 좀 아니다라고 생각하긴 했다.

유희계는 용제건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어쨌든, 황지호의 말 덕에 분위기가 환기되었다.

“신인께서 인간이 된 이유를 알았으니, 청호의 육신에 관한 건도 고찰하기 수월해질 거다. 청호는 신인의 말에 동조하여 행동했을 테니 말이다.”

황지호가 다시 주제를 되돌리고, 호랑이들이 저마다 의견을 제시했다.

어느덧 연표 대신 청호의 도복 띠가 발견된 장소의 지도, 시기, 과정 등이 담긴 홀로그램이 눈앞을 채웠다.

긴 회의가 이어지는 동안, 아무도 천신을 원망하는 말을 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한 추측을 의심하는 말도 하지 않았다.

호랑이들은 천신이 뜻이 어떻든 그냥 받아들일 마음 뿐인 듯했다.

그래서 또 다른 의문을 입에 담지 못했다.

‘만약 내 생각대로라면, 이상한 점이 있어.’

신인이 인간이 되기로 했다면, 천신이 자신을 특정 지어 다시 편애할 수 없도록 정체를 감추는 길을 택했을 거다.

그렇다 해도 천신은 신인을 찾으려 시도했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천신은 한이와 천성헌의 꿈에는 나타났지만, 공청훤의 꿈에 나타나는 것 같지 않았다.

스승의 날을 앞둔 시점, 공청훤이 나와 은호가 있는 자리에서 한이의 꿈을 두고 상담한 적이 있었다.

‘공청훤이 꿈에서 천신을 봤다면 전에 한이의 꿈을 두고 걱정하지 않았을 거야. 같은 상위 존재라는 것을 바로 알아채고 받아들였겠지.’

한이의 존재를 알았다면 공청훤에 관해서도 파악하기 쉬웠을 텐데.

왜 아끼는 신인 대신 청호 쪽을 택해 접근한 걸까.

의문을 품고 있는 사이에도 회의는 계속 진행되었다.

“도복 띠가 발견된 장소 주변에 있는 주요 플레이어 시설 목록입니다. 조사를 더 해 봤더니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습니다.”

적호는 얼마 전까지만해도 성형우의 시신 건으로 바빴을 텐데도 성실하게 조사해 왔다.

“도복 띠가 발견된 국가가 중국인 건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걸 잊을 리가 없지.”

적호는 청호의 도복 띠가 발견된 장소에서 반경 10km 이내의 시설 목록을 지도와 함께 띄웠다.

스무 개 정도 되는 시설 중, 적호가 하나를 짚었다.

그러자 홀로그램에 성인이 안 된 듯한 이들의 얼굴 사진이 몇 개 떠올랐다.

“이번 한중일 교류전에 참가하는 중국 대표 대부분이 이곳 출신이더군요.”

프로필 옆 비고 란, ‘한중일 교류전 대표 선정’이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 * *

청호와 신인을 둔 고찰이 이어지고 있는 중에도 시험 기간이 계속 이어졌다.

그사이에 날이 더워져 하복을 꺼내기 귀찮아 춘추복을 입고 다니던 이들이 사라졌다.

동복, 춘추복의 경우 학생들이 대부분 신교복 쪽을 입으나 하복은 조금 달랐다.

여름이라 흰 셔츠를 입고 싶어 하는 학생들은 보통 구교복을 택했고, 그냥 관성대로 신교복을 입는 이들도 있어 등굣길의 학생들을 보면 색 배합이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옷차림은 달라도 모두가 공평하게 시험 기간 앞에서 죽어 가고 있었다.

예외도 있긴 했다.

“야, 네가 편집해 준 영상 올렸다.”

유상훈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는 모습으로 나타나 말했다.

성적에 조금도 욕심이 없는 유상훈은 꾸준히 PlayerZ을 플레이하고 있었고, 게임 방송까지 시작했다.

아직 실시간 스트리밍 방송에는 손대지 않았으나 유상훈은 10분에서 20분 정도 길이의 동영상을 업로드했고, 순식간에 구독자 수를 쌓아 올렸다.

적극적으로 홍보한 것도 아닌데 트레일러에 등장한 방패병의 팬들이 알아서 PlayerZ 커뮤니티에 영상을 퍼올린 덕이었다.

댓글을 보면 반은 한국인, 반은 외국인이었다.

‘글로벌 서버를 운영하는 중인데, 트레일러 영상은 그냥 한국어 음성에 자막을 붙여 올렸지. 보통 더빙을 하거나 따로 제작을 할 텐데.’

워낙 잘 만든 게임이라 트레일러 영상 음성이 한국어라도 외국 게이머 사이에서 잘 퍼져 나갔다.

덕분에 유상훈은 ‘Shield bearer’보다는 그냥 한국식 발음으로 ‘방패병’이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하여튼 유상훈의 영상을 보는 외국인이 많은 바람에 영어 자막 기능을 활용해 작업을 했는데, 반응이 좋아서 조회수가 더 크게 올랐다고 한다.

현재 유상훈이 동영상을 올리는 채널은 구독자수, 조회수 전부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는 중이었다.

“야, 하도 하라고 해서 수익 신청할 건데 편집하는 비용 줄게.”

“안 줘도 돼.”

“줄 건데.”

유명한 게이머들과 계약한 MCN에서 유상훈에게 여러 차례 연락을 했다 들었는데, 계약할 생각인가 보다.

귀찮은 걸 극히 혐오하는 유상훈이지만, PlayerZ에서 과금을 하기 위해 계약에 응하려는 게 아닌가 싶다.

헤비 유저가 될 마음이 컸던 유상훈은 이계 공략을 해서라도 게임에 쓸 돈을 벌 생각이었으나 그냥 게임을 하며 돈을 버는 길을 택한 것 같다.

‘게임에 쓸 돈을 벌기 위해 방송을 하다니…… 망설임 없이 지를 테니 보는 사람들은 재밌겠네.’

조금 있으면 유상훈이 동영상 크리에이터, 방송 전문 게이머가 될지도 모르겠다.

방송을 하면서도 나와 장남욱, 도시후와는 계속 게임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보였고 우리 셋도 이에 동의한 상태다.

우리는 초보자 게이머라 방송용으로 삼기에는 재미가 없을 테니, 아마 유상훈의 솔플을 위주로 영상을 제작하게 될 거다.

‘약속 대로 유상희 앞에서는 공부하고 있는 것 같으니 낙제는 안 하겠지.’

유상훈은 농구인이 될 수는 없지만, 프로 게이머나 방송인이 될 수는 있다.

유상훈이 농구 외의 것을 열정적으로 하는 건 처음 봤기에 우선 응원하기로 했다.

방송이 커지면 악질 팬 따위가 달라붙겠지만, 그건 내가 처리하면 된다.

악질 팬 하니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최근 안다인을 향한 악성 댓글의 양상이 조금씩 바뀌고 있어. 워낙 여러 주제로 어그로를 끄니까 티는 안 나지만, 일본 대표와 엮이는 댓글이 늘어났지.’

청호의 도복 띠가 발견된 곳 주변에 위치한 양성소 출신의 중국 대표.

안다인을 라이벌로 의식 중인 일본 대표.

큰 행사에는 사소한 잡음이 따르는 편이지만, 이 세계에 존재하는 흑막을 생각하면 좌시할 수는 없었다.

시험 기간이 끝나면 한중일 대표 교류전 준비에 들어갈 텐데, 고민이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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