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9)
110. 포스트모템 (9)
짧은 준비 기간을 거쳐 본격적으로 기말고사 시험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로 치를 시험은 공통 과목의 실기.
필수로 들어야 하는 과목이다 보니 등교 중인 반 아이들이 전부 모였다.
실기를 치르는 체육관은 적정 온도가 유지되고 있었으나 밖은 더웠기에 간식으로는 앵두 그라나타를 준비했다.
이동 중에 지쳤던 애들이 그라나타가 포장된 그릇을 볼이나 이마에 대며 열을 식혔다.
“의신이가 안 온 애들 것까지 준비해 왔어! 더 먹을 사람?”
“……나.”
“나도.”
김유리의 말에 미식가 맹효돈과 단맛을 사랑하는 한이가 제일 먼저 손을 들었다.
단시간에 찬 걸 먹는 바람에 머리가 울리는 것 같은데도 저 둘은 잘 참았다.
가장 느리게 그라나타 그릇을 비운 권레나가 물었다.
“등교 안 할 때는 실기 시험 어떻게 쳤어?”
“실기 시험을 치르는 데에 필요한 기초적인 운동 능력을 원격으로 확인하고, 최저점을 받았습니다.”
“성적에 신경 쓰는 사람은 실기 시험을 치를 때는 등교했을걸? 난 안 했지만.”
“소생도 그랬소.”
등교 거부자였던 아이들이 차례로 답했다.
목우람, 독고미로, 진정묵은 여태까지 실기에서 최저점을 받은 듯했다.
설비와 감독이 있는 곳에서 치러야 하는 실기 시험 특성상, 원격 시험을 치르는 이들에게 매우 무거운 페널티를 부여했는데도 등교 안 하고 버티는 이들의 뚝심이 굉장했다.
‘말이 기초적인 운동 능력이지, 은광고 평균 이상의 수준을 요구할 거야. 당장 저 방식으로 시험을 치면 반 정도가 탈락하겠지.’
필기는 물론이고 실기도 자신 없어 하던 권레나가 말꼬리를 흐렸다.
“그럼 등교 안 한 애들은 실기에서 최저점을 받았다는 거구나. 그런데 반 등수가…….”
우리 반의 꼴찌는 황지호가 고정으로 담당하고 있으나 그 바로 위는 치열했다.
필기 점수는 바닥에 가까우나 실기에서 만회하며 버티는 맹효돈, 딱히 자신 있는 과목은 없으나 자신 없는 과목이 많은 권레나.
이 둘은 늘 성적이 아슬아슬해 꼴찌 그 바로 위의 경쟁을 했다.
그 경쟁에 등교 거부자들이 끼어드는 일은 없었다.
‘등교 거부자들은 그동안 실기에서 최저점을 받아도 필기에서 만회할 만큼 뛰어났다는 거겠지.’
애초에 권레나는 ‘다소 문제가 있으나 우수한 아이’라서 우리 반에 온 게 아니었다.
냉정하게 말하면 권레나는 은광고 측에서 위험을 감수하고도 입학시킬 정도로 우수하진 않았다.
턱걸이로 입학시험을 통과한 후에 본인 의지가 아니라고는 하나 환몽 경매에 출석한 게 드러나 0반 행이 결정된 거다.
만약 합격 발표 전에 환몽 게이트가 세간에 드러났다면, 권레나는 합격하지 못했을 게 분명하다.
자칫하다간 은광고가 곧은 심성을 지니고 이능 악기를 다루는 귀중한 능력을 가진 인재를 놓칠 뻔했다.
이처럼 시험으로 학생을 평가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으나 다른 방식은 공정성, 객관성, 시간과 비용 등의 문제가 발생하니 대체할 수단을 찾기도 어려웠다.
“그럼 여태까지 다들 지호랑 같은 점수였나요? 등교하신 분들이 이번에도 최저점일 리는 없으니 우리 반 평균이 계속 올랐겠네요!”
사월세음이 분위기 전환을 하고자 밝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함근형 선생님은 반 평균 성적보다는 출석률이 오르는 걸 기뻐할 텐데.
어쨌든, 사월세음은 좋은 의도로 말을 꺼냈으나 시험을 앞두고 다소 부정적인 생각에 빠진 권레나가 급히 사과했다.
“얘들아, 미안. 내가 반 평균을 떨어뜨리고 있어…….”
“어, 어어…… 나도…….”
“……소생도 중간 이하라서.”
“네?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닌데요! 그런데 정묵이가 성적을 신경 썼나요? 그런 것치곤 선택한 과목이…….”
권레나에 이어서 찔리는 게 많은 맹효돈과 진정묵이 연이어 사과했다.
진정묵이 본인 성적에 관해 관심을 주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긴 했다.
사월세음이 당황해하고 있을 때, 송대석이 툴툴거리며 끼어들었다.
“전원 같은 점수가 아닌 한 반의 절반은 평균을 깎아 먹는 게 당연한 거 아냐? 반 평균 1등 한다고 누가 상 주는 것도 아닌데 뭘 사과해.”
“대석이 말이 맞아!”
말투는 까칠한데 내용을 따지고 보면 나름 좋은 뜻이었다.
민그린이 그 뜻을 알아듣고 밝게 반응했다.
“봐, 전 과목 40점도 웃고만 있잖아.”
“하하하하!”
독고미로 말대로 반 평균을 깎아 먹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한 황지호는 처웃고만 있었다.
이윽고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는데, 참 시험 기간 다운 선곡이었다.
기말고사의 시작을 알린 곡은 홀스트의 행성 모음곡 중 ‘화성(Mars)’, 관악부와 현악부가 시험 기간에 돌입하기 전에 녹음해 제출한 곡이었다.
전쟁을 부르는 자(the Bringer of War)라는 부제가 붙은 이 곡에서는 전쟁을 앞둔 긴장감과 두려움이 잘 표현되어 있었다.
종소리와 함께 맞춰서 등장한 함근형 선생님이 선언했다.
“출석 체크 후에 실기 시험에 관해 설명하마.”
첫 시험 과목은 은광고 2학년 1학기 공통 과목 중 하나인 ‘플레이어의 전투 실전1’.
이 과목의 경우, 수업과 시험 감독 모두 담임 교사가 맡는다.
반 단위로 이계 공략을 할 때, 담임이 지휘관 역할을 맡으므로 학생의 전투 능력을 파악하기 위해 이런 제도가 도입되었다.
‘첫 시험이 함근형 선생님 담당 과목이면 애들도 덜 긴장하겠지.’
함근형 선생님의 얼굴은 평소대로 험악했으나 무서워하거나 긴장하는 아이는 없었다.
등교를 오래 한 아이들은 익숙해져 있었고, 등교를 한 지 얼마 안 된 진정묵은 무림인답게 상대의 풍모가 어떻든 흔들리지 않았다.
“이번 시험 주제는 탈출과 생존이다. ‘긴급 탈출 아이템’의 사용법에 관해선 1학년 때 배우지만, 실제로 사용해 볼 경험은 없었을 거다.”
함근형 선생님이 ‘긴급 탈출 아이템’에 관해 언급할 때, 권레나와 사월세음을 지그시 바라봤다.
둘은 작년에 이계로 실기를 나갔다가 플로어 마스터와 마주치는 바람에 위험한 상황에 처했는데, 탈출 아이템의 존재를 늦게 떠올렸다.
‘그때, 이계에서 시델렌티움을 만났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미궁형 이계에 나타난 방관과 침묵의 까마귀 마왕, 시델렌티움이 내 행동 원리와 동기를 알아보겠다며 나를 시험했다.
시델렌티움은 침묵이라는 수식언답게 소리 없이 입만을 움직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네가 지금 당장 이 미궁을, 공략의 최대 공헌자로서 클리어하길 원한다.
―이 길은 보스 에너미가 기다리는 다음 플로어로, 이 길은 이 미궁에서 가장 연약한 자들이 있는 장소로 이어진다.
―어떻게 할 거지?
그 ‘가장 연약한 자들’이란 권레나와 사월세음을 가리켰다.
‘마계의 길잡이’ 확보를 위해 거래를 성사시켜야 했으나 둘을 저버릴 수는 없어 홍룡을 둘에게 보내고, 나는 보스 룸으로 향했다.
홍룡이 오래 버티진 못했으나 다행히 용제건과 반 아이들이 늦지 않게 도착해 위기를 모면했다.
함근형 선생님은 제자가 위험했던 일을 아직도 기억하시는 듯했다.
‘그래도 잘못하다간 둘이 크게 다칠 뻔했어.’
시델렌티움과의 거래는 무사히 성사되어 중요한 정보를 얻고 강한 조력자를 얻었으나 그때 일을 생각하면 좋게만 생각할 수 없었다.
그 덕에 마왕이고 뭐고 반말이 쉽게 나오는 것 같다.
“이번 시험은 이계 시뮬레이터를 통해 진행한다. 목표는 공략이 아닌 탈출이다. 자세한 개요는 지금부터 홀로그램으로 전송할 테니 확인하도록.”
이번 시험 테마는 예상한 대로 생존과 연관되어 있었다.
1학년 때는 플레이어가 어떤 존재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배운다면, 2학년 때는 플레이어로 산다면 무엇이 필요한지 배우게 된다.
가장 중요한 건 생존이니, 2학년 1학기 실기 주제는 이변이 없는 한 생존법으로 정해진다고 한다.
“탈출이라 다행이다. 재작년처럼 15분 살아남기면 오래 걸리잖아.”
“미로는 어느 쪽이든 잘할 거 같은데요!”
“레나, 어제 연습한 주제로 선정되었습니다. 다행이군요.”
“대석이는 버티기 쪽이 유리했을 텐데…….”
재작년에 2학년이었던 우기환 일당이 15분이나 근손실이 발생하자 학교 측에 크게 항의하는 바람에 당분간 버티기 주제는 잘 채택이 안 될 거다.
시험엔 나오지 않아도 교과 과정엔 여전히 포함되어 있었으니 완전히 피해 가는 건 불가능하지만 말이다.
하여튼 반 아이들은 대부분 탈출 주제를 마음에 들어 했다.
“공격에 직격당할 때마다 감점 5점, 시간을 초과하면 1분당 감점 5점. 시간 초과를 이용하면 오래 걸릴 테니 적당히 맞다가 탈출해야겠군.”
진지한 표정으로 홀로그램을 살피던 황지호가 혼잣말을 했다.
황지호는 실기에서도 40점을 받기 위해 애썼다.
100점 받는 것보다 힘들 텐데 참 지극정성이다.
계산 실수로 늙은 호랑이가 한 번쯤 낙제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아쉽게도 그걸 기대하긴 어려울 듯하다.
‘어려운 주제가 아니니 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 배운 대로 하면 감점 받을 일은 없을 거야. 괜히 눈에 띄는 짓을 해서 불필요한 가산점을 받지 않게만 해야지.’
생각을 마치며 홀로그램을 닫고 반 아이들의 시험을 지켜보기로 했다.
시험 순서는 출석 번호순으로 정해졌다.
출석 번호는 성별 관계없이 가나다순으로 정해졌는데, 1번인 구슬비가 결성했기에 2번인 김유리가 제일 먼저 시험을 치렀다.
‘본래 성으로 하면 권레나가 2번이겠지만, 아직 학교에서는 ‘이레나’야. 바로 내 앞 번호니까 순서가 한참 남았어.’
내 출석 번호는 13번.
전체 열여섯 명 중 13번으로 꽤 뒤에 배치되어 있다.
참고로 내 뒤로는 진정묵, 한이, 황지호가 있다.
“다녀올게!”
“유리야, 잘해!”
반 아이들의 응원을 받으며 김유리가 웃으며 이계 시뮬레이터 가동 범위에 들어갔다.
시험을 치르는 장면이 공개되면 후발 주자가 유리해지기에 중계는 없었지만, 시간대나 표정을 보면 대략적으로 그 내용이 짐작이 갔다.
김유리는 주어진 시간 내로 웃으며 나왔다.
“스터디 모임에서 같이 실기 연습한 게 도움이 됐어!”
김유리는 부정행위가 되지 않을 범위에서 힌트를 줄 겸 응원할 겸 코멘트를 남겼다.
실기가 불안한 아이들이 그 말을 듣고 스터디 모임에서 했던 것들을 떠올리려 애쓰는 게 보였다.
이어서 독고미로는 예상대로 빠르게 탈출했고, 맹효돈은 저도 모르게 탈출 대신 싸움에 몰두한 건지 조금 늦었으나 감점은 면했다.
한편, 목우람은 조금 과도한 힌트를 던질 뻔했다가 함근형 선생님에 의해 제지당했고 민그린은 고심한 끝에 힌트 비슷한 말을 남겼다.
“시야가 좁아지지 않게 주의해야 할 것 같아.”
민그린 다음 주자는 사월세음이었는데, 탈출을 마친 후 ‘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라는 말을 남긴 걸 보니 힌트가 큰 도움은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이어서 송대석은 ‘이게 뭐가 어렵냐?’라는 말을 마치기 전에 민그린의 날아차기에 당했다.
하필 송대석 다음이 권레나 차례였기 때문에 맞을 만했다.
“낙제는 면한 것 같아……!”
송대석 다음으로 시험을 마친 권레나가 눈에 띄게 안도했다.
조금 오래 걸리긴 했지만 권레나는 무사히 시험을 마쳤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