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910화 (910/925)

(910)

110. 포스트모템 (10)

“부반장, 잘해라!”

“다녀와라, 조의신. 슬슬 수석을 노릴 때가 되지 않았나?”

“앗, 지호가 그런 말 하면 수석 안 노릴 거 같은데요…….”

“의신이 파이팅!”

쓸데없는 말이 섞여 있었으나 어쨌든 대부분이 응원하는 말이었다.

응원해 준 아이들에게 작게 손을 흔들고 자리에 선 후에도 떠드는 목소리가 들렸다.

‘쟤, 전혀 긴장을 안 하네’, ‘부반장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라는 내용이라 다음 시험에선 긴장한 척을 해야 하나 고민했다.

너무 태연해 보이면 그건 그거대로 위화감이 생기지 않겠는가.

[이계 공략 시뮬레이션을 시작합니다. 준비되셨습니까? (Y/N)]

홀로그램을 향해 손을 뻗어 Y버튼을 누르자 풍경이 일변했다.

이계 금속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멎자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긴급 탈출 아이템에 이능파를 불어넣으며 주변을 살폈다.

‘이렇게 넓고, 바람도 부는데 습해. 꽤 높은 곳에 있는 바위도 젖어 있어. 멀리서 강력한 이능파가 느껴져.’

체육관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넓은 공간 속, 고르지 않은 땅 위에 젖어 있는 암벽이 보였다.

높은 곳은 멀리 볼 수 있어 방어하기 좋아 보였으나 발판이 불안정해 보였다.

이대로 낮은 곳에서 기다리다가 탈출을 마친다는 선택을 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어느 암벽을 오를지 골라야 했다.

그 이유는 습기와 젖은 바위였다.

‘곧 물이 차오를 거야.’

실기 준비를 하면서 특별한 필드가 배경일 경우를 상정해 시뮬레이션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 특별한 필드는 보통 플로어 마스터나 보스 에너미에 의해 만들어지는데, 필드가 변형하는 것과 동시에 그들이 나타나곤 했다.

갑작스럽게 전황이 변화하므로 그 전조에 관해 익히고, 대응할 준비를 하는 게 필요했다.

스터디 모임이 도움이 되었다는 김유리의 말을 떠올리면 우리가 예습한 필드 변화 중 하나일 거다.

예습한 대로라면 스터디 모임이 도움이 되었다는 김유리의 말을 떠올리면 30초 내로 물이 차오르고, 강력한 에너미가 출몰할 것이다.

‘탈출 아이템에 불어넣는 이능파를 유지하면서, 도망다니는 게 이 시험의 답이겠지.’

우리 반에는 이 스테이지에서 등장할 에너미를 전부 쓰러뜨릴 만한 실력을 가진 아이들이 몇 명 있다.

하지만 이번 시험의 주제는 어디까지나 탈출이었다.

나는 전기 속성의 롯드 아이템 카드를 홀스터에서 뽑기 좋은 위치에 두고 적당한 높이의 암벽으로 향했다.

이 정도면 광림을 쓰지 않아도 금방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솨아아아…….

〈경고, 에너미가 접근 중입니다.〉

예상대로 물이 차오르는 것과 동시에 에너미 접근을 알리는 시스템 음이 들렸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높아지는 수면 사이로 푸른 갑주를 두른 에너미가 떠오르고 있었다.

물의 힘을 다루지만, 근접 전투가 특기인 건지 에너미의 주먹과 팔 근육이 크게 단련된 것처럼 보였다.

저 정도면 맹효돈이 시험 주제를 잊고 전의를 불태울 만했다.

물론, 나는 상대할 마음이 없었다.

‘거리를 두면 되니 도망가기 어렵지 않겠어.’

그렇게 생각하고 고개를 돌렸을 때, 위쪽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아직 흐릿하게 보이는 왼눈을 향해 날카로운 발톱이 날아들었다.

공기를 찢는 소리가 귀와 눈으로 파고들려 했다.

〈스킬 ‘만물 사용’이 발동했습니다.〉

카아앙!

반사적으로 홀스터에서 아이템 카드를 빼 들어 실체화해 왼눈을 방어했다.

실체화한 건 꺼낼 준비를 하던 R급 뇌(雷)속성 기본 마법 무기 ‘초보 마법사의 번개의 롯드’로, 근접전용 무기가 아니라 내구도가 바로 떨어졌다.

덤으로 이능파를 급히 끌어 쓰는 바람에 탈출 아이템 발동 게이지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비행종 에너미도 있다고?’

실금이 간 롯드와 다시 이쪽을 향해 달려들려는 비행종 에너미를 번갈아 보았다.

비행종 에너미가 ‘끼이익!’하고 높은 소리를 내자 동료가 늘었다.

날개를 퍼득이는 비행종 에너미가 셋으로 늘어났다.

상대를 아예 안 하는 건 어려울 것 같다.

‘난이도가 지나치게 높아. 이런 난이도를 상정하고 준비하진 않았어.’

저런 에너미들이 시뮬레이터에서 등장했다면 몇몇 아이들은 시험에서 통과하기 어려웠을 거다.

의아해하면서 새 아이템 카드를 실체화하였다.

저렇게 빠르게 공격해 오는 다수의 에너미들을 상대로 캐스팅 시간이 필요한 롯드를 쓸 수는 없었다.

나는 바로 ‘초보 저격수의 이능 총’을 꺼내 위협 사격을 가했다.

탕! 탕탕!

조준을 제대로 하지 않은 세 발 중 한 발이 비행종 에너미의 날개를 스쳤다.

비행종 에너미는 기우뚱하긴 했으나 땅으로 추락하진 않았다.

재장전하는 사이에도 비행종 에너미의 돌격이 이어져 몸을 굴러 피해야 했다.

게다가 지금 신경 써야 하는 건 비행종 에너미뿐만이 아니었다.

콰아아아!

플로어 마스터가 내지른 주먹이 암벽을 뒤흔들었다.

동시에 뒤에서 거대한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아직 밑에 있는 플로어 마스터가 탈출하려는 플레이어의 집중력을 흔들고, 비행종 에너미를 원호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수면은 계속 높아지고 있었다.

전투에 자신이 없고, 정신력이 약한 플레이어가 혼자 마주치면 정신이 혼미해질 법한 상황이었다.

또, 직접 상대하고 있는 비행종 에너미들의 움직임을 잘 살피니 뭔가 이상했다.

‘……자꾸 왼쪽을 파고들고 있어. 누가 에너미의 AI 설정에 손을 댄 거 아닌가?’

누가 이런 장난질을 했을지 금방 짐작이 갔다.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건 호족이나 교사진뿐이다.

그중 내 눈에 관해서 알고, 장난질을 할 만한 이는 한 명이었다.

‘용제건이 왜 이런 짓을 했지?’

쿠구구구!

그때 땅이 크게 흔들리고, 물방울이 튀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어느덧 수면이 높이 상승해 플로어 마스터가 물을 타고 암벽 위까지 올라와 있었다.

플로어 마스터가 나를 향해 물의 기운을 머금은 주먹을 들어 보이고 있었다.

의미는 없지만, 에너미에게 말을 걸었다.

“조금 더 빨리 오지 그랬어.”

내 목에 걸린 긴급 탈출 아이템이 빛을 발했다.

아이템 발동에 필요한 게이지는 100%에 도달해 있었다.

게이지가 잠시 멈춘 건 비행종 에너미가 등장한 잠시뿐, 그 이후에는 교전보다 탈출 아이템 발동에 더 주의하고 있었다.

내 몸이 점점 투명해지고 공간이 무너져 내렸다.

[시뮬레이션 클리어! 클리어 타임 4분 26초.]

시뮬레이션 조건 달성을 알리는 홀로그램 너머로 이계 금속으로 뒤덮인 체육관과 반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의신아, 고생했어!”

“부반장 새끼, 너무 대충하는 거 아니냐. 더 빨리 나올 수 있었으면서.”

“그래도 이 시간대면 만점일걸요? 의신이가 에너미한테 맞았을 리가 없으니까요.”

“거봐, 하나도 안 어렵…… 억!”

반 아이들을 보고 있으니 홀로 에너미들을 상대하고 있던 게 먼 일처럼 느껴졌다.

어쨌든, 중간에 문제가 발생하긴 했으나 규정 시간 내로 탈출하는 데에 성공했다.

내 왼눈을 노리는 비행종 에너미도, 암벽을 무너뜨리려는 플로어 마스터도 더 이상 내게 아무 영향도 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남아 있었다.

반 아이들은 내부 상황을 보지 못했지만, 시험 감독인 함근형 선생님은 이 모든 걸 지켜보았을 거다.

“조의신…….”

함근형 선생님의 얼굴이 평소보다 더욱 험악해 보였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저건 함근형 선생님의 놀란 표정이다.

역시 이 시뮬레이션은 함근형 선생님이 의도한 바가 아니었던 것 같다.

“…….”

함근형 선생님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으나 확신을 가지고 내 왼눈을 보고 있었다.

설마 용제건은 내 왼눈의 상태를 함근형 선생님에게 알리려고 이런 장난질을 친 건가.

내부 상황을 전혀 모르는 아이들은 떠들고 있었고, 내 다음 차례인 진정묵이 가부좌 자세에서 몸을 일으켰다.

“……들어가도록. 다음, 진정묵!”

함근형 선생님은 반 아이들 앞에서 내 왼눈을 두고 뭐라 하진 않았지만, 생각이 많아 보였다.

함근형 선생님은 스승의 날 사건 당시 대활약하여 맹효돈을 구했고, 성국언의 모습으로 다친 나를 보았다.

하지만 겉보기에는 멀쩡한 왼눈이 아직 낫지 않았다는 건 모르셨을 거다.

성국언이 왼눈을 계속 안대로 가리고 다니는 걸 보고 짐작하셨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흠, 무슨 일이 있었나?”

“별일 없었어.”

“있었나 보군.”

황지호가 뭐라고 하긴 했으나 함근형 선생님의 충격 받은 듯한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왼눈은 천천히 치료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더 서둘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윤여랑은 시험이 일찍 끝날 거라고 했지. 조금 이르게 찾아가도 될까?’

윤여랑은 1학년 1학기는 용궁을 중심으로 생활할 생각이라 선택 과목은 전부 시험 준비에 시간을 크게 투자하지 않아도 성적을 받기 쉬운 것들로 채워 넣었다고 한다.

그래서 시험이 레포트로 대체된 과목을 주로 택했다는데, 시험을 안 보는 만큼 까다로운 주제로 작문을 해야 하는데도 윤여랑은 망설임이 없었다.

윤여랑의 실력이라면 그 정도 레포트 쯤은 문제 없겠지만 말이다.

윤여랑은 시험 준비 기간에 돌입하기 전, 이런 말을 남겼다.

―언제든 용궁으로 찾아오세요! 이번에 임연화 선생님이 담당하시는 진족 관련 과목은 대부분 레포트 제출로 시험이 대체된대요. 진족에 관한 건 황룡 님과 용왕신 님이 잘 아셔서 도움을 청하기도 쉽고요.

윤여랑은 용족의 무녀로서 진족에 관해 더 공부하고 싶었다고 한다.

마침 협회 쪽 외부 프로젝트에 참가하느라 바쁜 임연화의 수업에선 시험이 레포트로 대체되어 이를 택한 듯했다.

용궁에 좀 이르게 찾아가 치료를 받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 *

우리 반의 등교생들이 무사히 실기 시험을 치른 다음 날,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반 아이들이 각자 시험을 치르기 위해 이동하기 전, 조례 시작 직전에 김유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얘들아, 루이스랑 슬비 말인데, 재시험 쳐야 할 거야. 아마 걔랑 같이 있던 등교 거부자도.”

“응? 시험 결과는 아직 안 나왔잖아.”

“원격 시험도 안 쳤나 보네.”

“헤드기어 쓰고 하는 건데, 그거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그때 안 쓰면 바로 0점 처리돼.”

“맞습니다. 저도 몇 번 놓칠 뻔했습니다.”

등교 거부자 출신 아이들이 빠르게 그 이유를 짐작했다.

김유리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곤 말했다.

“……맞아, 자느라 시험을 못 쳤대.”

뭐라고.

저번에 관종 콤비가 보낸 메시지에 어쩌면 좀 길게 잠들 수도 있다는 말을 남겼기에 시험 시작 전에 전화도 해 뒀는데.

둘은 내 전화를 받았고 시험도 치겠다고 답했었다.

김유리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의신이 전화 받은 후에 바로 잠들었나 봐. 의신이한테 미안했는지 나한테 연락하더라.”

김유리의 어색한 웃음소리 뒤로 반 아이들의 어이없어하는 목소리가 섞였다.

기껏 모닝콜을 해 줬는데 의미가 없어지고 말았다.

알람을 듣고 깨어나자마자 바로 잠드는 이들이 있는데, 그게 저 관종들이었나 보다.

‘그래도 바로 다음 날 깨어나서 다행이네.’

관종들과 악몽을 쫓는 등교 거부자는 재시험을 쳐야겠지만, 그 셋의 능력이라면 재시험쯤은 충분히 통과할 거다.

또 잠들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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