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917화 (917/925)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917)

111. 합숙 (6)

식사를 할 때에는 운전과 경호를 맡던 전무영도 함께했다.

식사 전, 전무영은 도청기의 유무와 이에 준하는 이능의 존재가 없음을 확인한 후에야 자리에 앉았다.

주문한 음식이 도착하기 전에 전무영이 경고했다.

“의원님을 캐려는 이들이 많습니다. 안전한 가게로 골랐지만, 서빙 후 그릇을 체크하기 전까지는 신중히 대화를 나눠야 합니다.”

방 체크는 끝났지만, 직원을 매수해서 서빙 중에 촬영과 도청을 하거나 그릇에 도청기나 이능을 남길 경우를 경계하는 듯했다.

평소의 성국언이라면 전무영에게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웃었을 텐데, 지켜보고만 있었다.

혹시 전례가 있는 게 아닐까?

성국언이 안대를 쓰기 시작한 후, 벌어진 사건들을 생각하면 그 수준의 사건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저도 같이 점검할게요.”

“네가 도와준다면 문제 없겠지. 큰 이능을 사용하진 말고.”

성국언이 안대로 가려지지 않은 눈으로 내 왼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내 왼눈은 반쯤 시력이 돌아온 덕에 안대로 완전히 가린 성국언에 비해 훨씬 나은 상태다.

성국언의 운동 신경이나 감각을 고려하면 한쪽 눈을 가려도 일상생활에 지장은 없겠지만, 당연히 불편함을 느끼고 있을 거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메뉴들도 정교한 젓가락질 없이도 편하게 먹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너비아니 구이는 넓게 잘려 있는 덕에 젓가락질을 적당히 해도 집기 편했고, 방풍죽처럼 숟가락으로 떠먹는 메뉴도 있었다.

“얼른 이 안대를 풀 수 있으면 좋겠구나. 이 방엔 문제가 없는 것 같으니 못다 한 대화를 했으면 좋겠구나.”

성국언과는 해야 할 이야기가 많았다.

사정상 디바이스를 통해 하기에는 곤란한 것들이 많았고, 내가 먼저 화제를 꺼내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

성국언은 주저 없이 가장 까다로운 화제를 택해 말했다.

“곧 할아버지를 보내 드릴 예정이다. 매장이나 수장은 고인께서 원하지 않고, 화장을 해야겠지. 하나 화장 시설을 이용하는 건 불가능하니 이능을 사용할 생각이다.”

성국언의 조부인 성형우를 보낼 때가 되었다.

시신에 남은 단서는 거의 수습이 되었다.

이미 오래전 사망하여 잊혔으나 죽은 후에도 후대를 위해 헌신한 영웅에게 예의를 표해야 할 때였다.

성형우와 성국언이 살아서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정 많은 성국언이 조부를 그냥 보낼 리가 없었다.

“할아버지의 시련을 통과한 시완이를 포함해도 장례식에 출석할 사람은 열 명도 되지 않겠지. 네가 그중 한 명이었으면 좋겠구나.”

그런 중요한 자리에 내가 가도 되나 싶었지만, 허락해 준다면 반드시 출석하고 싶었다.

나는 길게 고민하지 않고 성국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제안해 주셔서 감사해요. 출석할게요.”

“고맙다.”

내 대답에 성국언뿐만 아니라 전무영도 같이 미소 지었다.

둘 다 웃고는 있었으나 화제가 화제인지라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는데, 성국언이 말을 돌렸다.

“홍규빈 팀장님과는 이야기를 마쳤다. 포모르 마족 건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마쳤으니, 마족과의 거래를 두고 협회가 나를 고발할 일은 없겠지.”

성국언은 침체된 공기를 바꿀 겸 가벼운 어조로 말했으나 내용은 그렇지 못했다.

성국언은 현재 계약을 걸고 포모르 마족과 위험한 줄다리기 중이다.

수를 써 뒀지만, 일이 조금만 잘못되어도 성국언의 실각과 포모르 마족과의 대립으로 이어질 거다.

잘 도와줬으면 한다는 의미를 담아 금찬왕찬에게서 받아 낸 제갈재걸의 시 낭송 영상을 홍규빈에게 보내 뒀는데, 부디 일을 잘해 주길 바랄 따름이다.

“포모르 마족은 계약 조건을 달성했나요?”

“소식이 없는 걸 보니 아직인 것 같다만, 작업에 진척이 있는 것 같긴 하더구나.”

포모르 마족이 조건을 완수하면 성국언도 움직여야 한다.

내가 둔 수인데도 그 생각을 하니 손이 식었다.

이 세계에 온 지 한참 되었고, 체스를 두게 되었고, 지금은 날이 더운데도 여전히 내 손은 금방 차가워지곤 했다.

성국언이 내 상태를 알아챈 것처럼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계약이 완수된다면 그자가 은광구에서 수작을 부리기 더 어려워지겠지. 그건 내 안전과도 직결되니 환영할 일이야. 그러니 걱정마라.”

포모르 마족에게 제시한 계약 조건 중 하나는 은광구를 ‘전이가 불가능한 구역’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완전히 불가능해지는 건 아니었다.

비유하자면 포모르 마족이 공간에 자물쇠를 거는 셈인데, 열쇠를 가지고 있으면 얼마든지 이동이 가능했다.

포모르 마족은 성국언의 납치 미수 현장을 목격했으니, 성국언이 자신의 안전을 위해 저러한 조건을 걸어도 이상해 보이지는 않았다.

‘포모르 마족들은 이동과 변형에 특화된 존재들이야. 그렇기에 본거지를 금방 한국으로 옮겼지.’

포모르 마족은 거의 반년 만에 본거지를 영국에서 한국으로 옮겨 버렸다.

진족의 본거지 이동은 단순한 이사와는 달랐다.

호족에 비유하면 알기 쉬웠다.

지금 은광구를 신역으로 삼고 있는 호족이 영국으로 본거지를 옮긴다면 100년이 걸려도 완전한 이동이 불가능할 거다.

호족의 온갖 시설이 숨어 있는 은광고, 지하가 지맥과 연결되어 있고 황지호의 힘이 크게 서린 황명호 대저택, 숲 전체가 살아 있는 듯했던 죽호의 죽림, 나락으로 길을 이을 수 있는 황명 타워 등등 이를 어떻게 옮길지 상상도 안 갔다.

‘또 포모르 마족은 핼러윈 파티 때 성 전체를 한 순간에 가든으로 치환해 버렸어. 그 정도로 고도로 발달된 공간, 이동 능력을 가진 진족은 흔치 않아. 그러니 그 힘을 이용하면 전이도 막을 수 있겠지.’

이 예상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포모르 마족은 성국언이 제안한 조건을 두말없이 받아들였다.

계약이 완수되면 흑막이 은광구에서 누군가를 다른 곳으로 전이시키거나, 가든의 입구를 열어 끌어들이는 건 불가능해진다.

“이제 포모르 마족이 조건을 달성한 후의 일을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성국언과 달리 전무영은 긴장한 어조로 말했다.

“의원님께서 대관석을 파괴하셔야 하는데, 준비되셨습니까? 침묵과 방관의 마왕을 따르는 자와 협력한다고 들었습니다.”

“그자와 내가 직접 접촉해도 된다만.”

성국언은 시델렌티움의 계약자인 류장에게 흥미를 가진 듯했지만, 지금 둘을 만나게 할 수는 없었다.

사실 내가 하려는 짓은 다누 신족이 쌓아 올린 수에 숟가락을 얹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포모르 마족에게 숟가락의 존재를 눈치채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두 분께서 직접 접촉하면 발각될 우려가 있어요. 그건 저한테 맡기세요.”

“또 이렇게 후배를 부려먹게 되는군. 만약 다른 수가 생기면 언제든 연락해라.”

“네.”

그 뒤로도 포모르 마족 건에 관해 몇 마디 말을 주고받았다.

아무리 대비를 잘했다고 하나 밖에서 이야기를 길게 하는 건 꺼려졌으므로 대화는 간결하게 끝났다.

하지만 성국언은 할 얘기가 많은 것 같았다.

이건 누가 들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건지, 디저트 그릇의 체크가 끝나기 전에 성국언이 불쑥 말했다.

“의신아, 최근에 함근형 선생님께 연락이 왔는데 말이다. 너를 많이 걱정하시더구나.”

어떤 의미에선 성형우의 장례식이나 포모르 마족과의 계약보다 듣기 어려운 일이었다.

함근형 선생님은 내 왼눈에 관한 건 때문에 성국언에게 연락한 듯했다.

나나 성국언이나 둘 다 나란히 왼눈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이니 연락이 가도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나도 소싯적엔 함근형 선생님의 속을 많이 썩였지. 그래도 나보다는 덜 걱정시켰으면 좋겠구나.”

“……네.”

농담 같은 말이었는데, 성국언의 말은 그냥 후배 걱정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 * *

여름방학을 앞둔 시점, 2/4분기 학생 대표 회의가 개최되었다.

우리 반에서 교류전 대표가 셋이나 나온 바람에 준비해야 할 자료가 늘었으나 능력자 김유리가 도와주고, 여섯 번째 회의 참가인 만큼 어렵지 않게 대비할 수 있었다.

순식간에 자료 정리를 마친 김유리가 말했다.

“우리 전보다 일을 더 잘하게 된 것 같아. 그치?”

여태까지 김유리가 자료 정리를 거의 떠맡았으니 ‘우리’라고 하기엔 민망했으나 일을 더 잘하게 된 건 틀림없었다.

성장을 체감하며 학생 대표 회의용 대회의실A로 향했을 때.

전혀 성장하지 않은 선배놈들을 마주쳤다.

“아, 염준열 눈치 개 빠르네.”

“염준열이 아니라 천동하 때문임. 직전에 걔가 신호 주더라.”

금찬솔과 왕찬솔은 깜짝 등장을 위해 오늘 결석한 이들로 변장했다고 한다.

언뜻 보기에 이능과 특수 분장을 활용한 이들은 자치 기구 소속 임원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선배놈들은 회의 시작 전까지 버티다 참가자 전원이 속아 넘어간 걸 확인한 후에 정체를 드러낼 계획이었다.

그러나 안중지계(眼中之界) 천동하의 눈을 속일 수 없었다.

천동하는 대회의실에 도착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선배놈을 알아보았다.

“허술한 변장이야. ‘건곤(乾坤)을 품은 눈’이나 천리안 스킬을 쓰지 않아도 금방 알아봤어. 내가 아니더라도 주의를 기울였다면 바로 꿰뚫어 봤을 거야.”

“아니, 우리 반 애들도 다 속았는데 너 님이 이상한 거라니까요!”

“쟤 눈 더 좋아진 거 아님? 왜 저럼?”

천동하가 냉정한 어조로 말하고, 금찬왕찬이 가발과 가짜 이름이 쓰인 명찰을 집어 던지며 씩씩거렸다.

나와 김유리가 대회의실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상황이 정리된 후라 변장한 모습을 못 봤지만, 실제로 저 둘의 변장은 훌륭했다고 한다.

“꽤 괜찮았어요. 가짜 피부의 이음새가 어색하고, 머리카락 중 몇 가닥이 자연스럽지 못하게 휘어져 있던 게 아쉬웠지만요.”

“은하는 어떻게 그걸 다 알아봤어? 나는 전혀 몰랐어!”

은호는 당연히 알아보고 은서호는 전혀 몰랐는 듯했다.

은서호는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달라며 천은하의 모습을 한 은호에게 보챘다.

둘의 겉보기가 어떻든 정체를 아는 입장에서 봤을 때, 할아버지에게 이야기를 조르는 손주처럼 보였다.

“위화감을 느끼긴 했는데, 찬솔 선배님들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어. 동하 형은 바로 누구인지 알아봤나 봐.”

“나도. 천동하 선배님의 눈썰미를 본받아야겠어.”

역시 주수혁과 안다인은 알아본 것 같았다.

둘은 플레이어의 소양 중 하나가 관찰력이라며 사이좋게 토론하기 시작했다.

모두의 성장과 향상심이 느껴져 훈훈했지만, 모두가 이렇게 훌륭한 마음가짐을 가진 건 아니었다.

“무슨 일 있었냐?”

유상훈은 디바이스를 켜서 PlayerZ의 공략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저렇게 집중했다니, 유상훈도 게이머로서는 성장했다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저 선배놈들은 왜 처음 봤을 때와 변함이 없는 걸까.

둘의 괴짜스러움을 제쳐 두고 생각하면, 고작 1, 2년 갖고 사람이 변하기는 쉽지 않긴 했다.

갑자기 멀쩡해지면 오히려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것이다.

‘금찬왕찬 일당이 얌전해진 모습을 보인 건 제갈재걸 선생님을 잃은 후였지.’

저 선배놈들이 변한 건 플마고에서 큰일을 겪은 후였다.

그걸 생각하면 선배놈들이 여전히 저러고 있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모르겠다.

회의 시작 시간이 될 때쯤 혼란이 완전히 수습되었다.

염준열이 의장석에서 일어나 선언했다.

“지금부터 2/4분기 학생 대표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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