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921)
111. 합숙 (10)
PlayerZ 메인 스토리 챕터2를 클리어할 시 개방되는 보스 레이드, ‘해일을 부르는 타락 정령’.
유저들은 이를 줄여서 ‘해탁’, 혹은 친근감 있게 ‘해탁이’라고 부르는데, ‘뉴비 절단기’라는 명칭이 더 보편적이었다.
조금만 방심하면 큰 기술에 맞아 떨어지는 체력, 툭하면 바닷속으로 숨어 버려 보스에게 딜을 넣기 힘든 움직임, 체력과 이능파를 좀 먹는 디버프, 파훼법을 모르면 그냥 죽어야 하는 기믹 등등 뉴비가 죽기 딱 좋은 구조로 구성되어 있어 악명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원래 어느 게임이든 뉴비 절단기는 존재해. 플마고에서는 프롤로그에서 뉴비가 절단…… 아니 처형됐지.’
너무 쉬운 게임은 노잼 취급을 받고, 지나치게 어려운 게임은 망겜 취급을 받는다.
그러다 보니 게임사에서는 진행도에 따라 점진적으로 난이도를 올리는 방식을 택하는데,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뉴비는 벽에 부딪치게 되어 절단되는 때가 온다.
그 벽의 위치는 개인에 따라 갈리지만, PlayerZ의 유저들은 대부분 그 벽을 해탁으로 꼽고 있었다.
그리고 PlayerZ는 유저들이 그 벽에 돈과 시간을 써서 도전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하나는 게임으로서의 재미고, 다른 하나는 서사와 연출이었다.
“‘문을 연 자’들이여, 이계의 틈은 우리가 막고 있겠소. 그사이에 바다의 벽으로 향하시게나.”
이곳은 멸망한 왕국의 유적이 숨겨진 외딴 섬의 절벽.
메인 스토리 챕터2를 진행하는 동안 계속 플레이어를 도왔던 늙은 등대지기가 색이 바랜 갑옷을 입고 서 있었다.
등대지기의 정체는 옛 왕국의 수호 기사였고, 갑옷에는 유적 가장 깊은 곳에서 보았던 왕국의 문장이 수놓아져 있었다.
그 뒤로 농기구와 작살을 든 섬의 주민들이 있었는데, 자잘한 서브 퀘스트를 주며 플레이어와 연을 쌓은 NPC들이었다.
순례단으로 위장했던 도굴꾼들은 진작에 도망갔으나 이들은 남아서 플레이어와 싸우기로 결의했다.
‘스토리를 전부 스킵했다 해도 이 장면을 보면 느끼는 바가 있겠지.’
바다가 불안한 빛을 품고 일렁이고, 바닷바람이 전투를 암시하는 웅장하고 긴장감 넘치는 금관악기 연주 소리에 섞여 퍼져 나갔다.
이계의 틈 앞에 서 있는 등대지기가 등을 곧게 펴고 플레이어를 배웅하는 모습을 보니 전의가 솟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 넷 중에서 스토리에 가장 과몰입한 장남욱이 힘차게 답했다.
“빨리 돌아올게요!”
장남욱은 저번 스토리의 현자처럼 등대지기도 우리를 배신하는 게 아니냐며 망한 추리를 했었다.
그렇게 의심했던 등대지기가 도주하는 대신 플레이어를 돕는 길을 택하자 장남욱은 거의 울 뻔했었다.
시스템이 장남욱의 발화 내용을 해석해 등대지기가 이에 답했다.
등대지기는 입가에 깊은 주름을 만들며 웃었다.
“기다리고 있겠소. 반드시 다시 만나세.”
도입부 이벤트가 끝나고, 우리는 앞으로 전진했다.
자잘한 에너미를 쓰러뜨리는 동안, 멀리서 ‘해일을 부르는 타락 정령’이 물결을 조작하여 섬을 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가 코앞에 도착하자 정령이 물결을 다루는 걸 멈추고 우리를 바라보았다.
정령은 올 테면 오라는 것처럼 물결로 된 화살을 무수히 만들며 도발하듯이 웃어 보였다.
“저 파란 선을 넘으면 스킬이랑 장비, 소지 아이템 변경이 안 돼. 마지막으로 점검해.”
“아바타도 못 바꿔?”
“어, 입고 싶은 옷 있으면 죽고 다시 나와서 갈아입어야 돼.”
유상훈은 비치웨어 차림으로, 하와이안 셔츠를 걸치고 서핑 보드처럼 생긴 방패를 착용한 상태였다.
세계를 구할 용사다운 차림은 아니었으나 전부 캐시템으로 도배한 게 PlayerZ에 진심인 사람다운 옷차림새였다.
그에 반해 과몰입 중인 장남욱은 유적에서 입수한 옛 왕궁의 문장이 새겨진 무사복을 입었고, 도시후는 PlayerZ의 웹사이트에서 미니 게임을 하면 얻을 수 있는 생선 뼈다귀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었다.
한편, 나는 기본 아바타를 입고 있었는데, 이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우편으로 아바타 선물이 자꾸 날아들었다.
‘그래도 기본 아바타가 도시후가 입은 것보다는 나은데…….’
실제로 방송 채팅도 ‘저거 얻기 어려운 주제에 못 생겨서 아무도 안 입는 거 아니었음?’, ‘저 구린 아바타를 입고 다니는 놈이 있다고?’, ‘아이템 소개 페이지에서 봤을 때에도 구렸는데 영상으로 보니 더 구리다’라는 평이 쏟아졌다.
하지만 도시후한테는 딱히 우편 폭탄이 날아온 것 같지 않았다.
그냥 받는 게 좀 그래서 우편 반송 버튼을 누르고 있는데, 한 우편에서 손이 멈췄다.
별을 테마로 한 복장의 캐시 아이템에 메시지가 써 있었다.
[의신아, 나 유리야! 이거 우리 반 애들이랑 같이 고른 건데, 입고 방송해 줘!^▽^]
게임을 하는 건 아닐 텐데, 방송을 한다니까 아바타를 선물해 주고 싶어서 굳이 아이디를 만들고 선물을 사 보낸 걸까?
차마 이 선물은 반송할 수 없어서 그냥 입게 되었다.
은하수를 표현한 듯한 로브와 몸체에 그려진 별자리가 주기적으로 빛을 내는 켈틱 하프는 우리 반 애들이 고른 것답게 멋진 디자인을 하고 있었다.
“어, 옷 딴 거 입었네. 생선 뼈다귀 티셔츠 하나 더 있어서 주려고 했는데.”
“의신아, 훨씬 낫다. 음유시인 기본 복장은 디자인이 조금 투박한 것 같아.”
“음유시인 비치웨어 아바타 잘 나왔으니까 나중에 그것도 사라.”
아바타의 평은 괜찮았으나 우편은 여전히 쏟아졌다.
선물 받은 아바타로 갈아입자 자기 것도 입으라는 것 같았다.
우편 수신 거절 설정을 한 후에야 알림창이 조용해졌다.
‘음유시인이 무명의 초신성인 거 다 안다, 우편 받아라’, ‘내 것도 입어 줘ㅠㅠㅠㅠㅠ’, ‘또 거절 당했군’ 이라는 채팅이 몇 개 보이긴 했지만 보지 않은 것으로 하기로 했다.
몇 개는 아는 사람이 보낸 것 같아 찝찝했지만, 김유리처럼 이름을 써서 보내진 않았으므로 무시해도 별 탈은 없을 것 같다.
“가자!”
“파이팅!”
만반의 준비를 한 후, 짧은 응원의 말을 던지고 정령을 향해 달려갔다.
경계선을 넘어가자 정령이 바다 위를 달려가며 몸을 키웠다.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물방울이 힘을 머금고 튀어 오르고, 물결이 움직이는 연출에 눈을 떼기 어려웠다.
특히 유상훈의 화면은 숄더 뷰가 아니라 1인칭이었기에 실제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보여서 채팅창에 감탄사로 도배되었다.
뉴비 절단기를 1인칭 시점으로 도전하는 미친 자는 많지 않았기에 대부분 처음 보는 광경이었을 거다.
“바로 온다!”
“뭐, 벌써?”
정령의 모습에 넋이 나가 있던 장남욱이 허둥지둥 움직였다.
뉴비 절단기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장남욱을 향해 물의 화살을 쏘았다.
시작과 동시에 방어력을 향상시키는 연주를 시작했으나 연주의 완성보다는 화살이 더 빨랐다.
장남욱은 당황한 나머지 빠르게 이동하는 스킬을 쓰거나 아이템을 쓴다는 생각을 못 하고 도망만 다녔다.
장남욱이 화살에 따라잡힌 순간.
촤아악!
유상훈의 서핑 보드 방패가 물화살을 막았다.
아바타가 저래서 그런지 마치 서핑 보드가 물살을 가르는 것처럼 보였다.
유상훈이 대신 맞긴 했지만, ‘철벽의 의지’ 스킬을 쓰고 달려든 덕에 피해도 반감되었으며 쓰러지지도 않았다.
[아니, 저기까지 가서 맞아 준다고?]
[무빙 고인 거 봐 ㄷㄷㄷ]
[창술사 보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감?]
그러나 위기가 이어졌다.
유상훈이 몸을 날려 딜러를 살렸고, 내 방어 버프도 들어간 덕에 안정적으로 장남욱이 움직이기 시작했으나 다른 한쪽이 문제였다.
정령이 소환한 토템이 신기하게 생겼다며 가까이 가서 때려 보던 도시후가 그만 사고를 쳤다.
특정 속성의 공격을 받으면 자폭하는 토템인데, 도시후가 건든 토템이 암흑 속성이었다.
곧 도시후의 사망을 알리는 시스템의 메시지가 들렸다.
≪흑마도사 이름뭘로지을까고민중인 님이 정령의 토템에 의해 사망하였습니다.≫
“미안, 죽었어!”
“어, 지금 한 명 죽으면 안 되는데.”
유상훈이 정령의 움직임을 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장남욱은 그 와중에 열심히 스킬을 써 가며 정령의 피를 깎고 있었는데, 사망 메시지를 보고 우뚝 굳었다.
그때, 정령이 빙글빙글 돌며 하늘 위로 올라가자 발판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기울어지는 발판의 균형이 흔들리고 물기둥에서 여러 색의 빛이 번쩍였다.
‘아마 특수한 기믹일 거야. 해결 못 하면 전멸할 것 같은데.’
유상훈은 스포일러를 할 생각이 없었고, 나는 아직 파훼법을 추리할 만한 요소를 찾지 못했다.
장남욱은 어쩔 줄을 몰라 하다 모든 스킬을 정령에게 퍼부었으나 무적 모드에 들어간 바람에 의미가 없었다.
≪창술사 장창술사 님이 물 제물의 침식에 의해 사망하였습니다.≫
≪음유시인 jo2god111 님이 물 제물의 침식에 의해 사망하였습니다.≫
≪중보병 방패병 님이 물 제물의 침식에 의해 사망하였습니다.≫
곧 사망을 알리는 메시지가 줄줄 떴고 눈앞에 캄캄해졌다.
다시 앞이 밝아졌을 때에는 아바타를 갈아입었던 경계선 안이었다.
첫 트라이가 끝나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남궁규연] 첫트하는 동안은 집중하라고 알림 다 꺼 놨는데, 이제 해제하겠음.
[남궁규연] 수금 잘 땡기고 나중에 밥 사!
급히 정한 매니저지만 당연히 활약에 걸맞은 보수를 지불할 예정이었다.
첫날이라곤 하지만 유상훈은 수익을 내는 스트리머 아닌가.
그리고 대망의 첫 후원이 도착했다.
―(알림) 하하하! 님께서 13,000,000원을 후원해 주셨습니다.
―고생이 많다. 넷이서 간식이라도 사 먹도록.
[어?]
[??????]
[천삼백만 원? 천삼백 원이 아니라??]
[아니 첫 후원부터 단위가 왜 저럼; 주작 아님?]
[벌써 이 방에 회장님 붙었네 ㄷㄷ]
[무슨 간식 값이 천삼백만 원이에요;;;;]
[은광고 13조가 주멤버라 저렇게 쏜 건가?]
[하 회장님 초면에 죄송합니다만 실례가 안 된다면 치킨 한 마리랑 초밥 한 세트만 사 주십시오.]
[큰 실례니까 꺼지셈;; 회장님, 저는 아이스크림 하나면 됩니다.]
[너도 꺼져.]
내 생각이 맞다면 저 회장님이란 놈은 진짜로 한 그룹의 회장일 가능성이 있었다.
회장이 왜 인터넷 방송을 보며 후원이 열리자마자 저 난리를 쳤나 싶지만, 용의자는 그럴 만한 놈이었다.
용의자에게 바로 디바이스 메시지를 보냈다.
[나] 너야?
[황지호] 하하하하! 잘 알아봤군. 조의신, 너는 선물을 쉽게 받아 주지 않지. 이참에 도네이션이라는 좋은 제도를 활용하기로 했다. 얼마든지 더 후원할 생각이 있으니 기억해 둬라.
[나] 하지 마.
그 이후로 뭐라 메시지가 더 오긴 했지만, 그걸 읽는 대신 남궁규연에게 연락했다.
[나] 방금 천삼백만 원 후원한 사람 후원 차단 부탁할게.
[남궁규연] 아는 사람인가 보네? ㅇㅋㅇㅋ알았음
유상훈이 소통하는 사이, 나는 마이크를 끄고 후원에 관해 간략히 설명했다.
“황지호가 그랬대. 나중에 유상훈 보고 환불하라고 해야겠어.”
“지호네 집은 돈이 많지만 그래도 아껴 써야 하지 않을까? 청소년 시절부터 과소비하는 습관을 들이면 좋지 않잖아.”
“신경 안 써도 될 것 같은데…….”
도시후가 신경 쓰지 말라해도 장남욱은 계속 신경 썼다.
장남욱은 졸업식 때 황명호의 모습을 한 황지호를 봤으면서도 저런 소리를 했다.
설마 황지호가 직접 정체를 밝힐 때까지는 고등학생으로 취급할 생각인 걸까?
어쨌든, 그 늙은 호랑이의 청소년 시절은 수천 년 전에 끝났기 때문에 장남욱이 저렇게 배려해 봤자 소용없을 것 같다.
약간의 소동이 있었지만, 허무하게 첫 트라이에서 전멸한 것 치고는 분위기가 여전히 좋았다.
“그럼 2트 갑니다. 트라이하는 동안 후원, 구독 알림 소리는 꺼 둘게요.”
우리는 정령에게 도전하기 위해 다시 전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