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인도에서 맞이하는 아포칼립스-30화 (30/273)

육지 (2)

***

드디어 바람대로 무사히 육지에 다다르는 데 성공했다.

나름 충분히 계산했다고는 하지만, 위험한 미션임이 분명했고, 실제 해양 몬스터 때문에 아슬아슬한 장면도 몇 차례 연출되었다.

그렇기에 나는 성공을 크게 기뻐했고, 룰루랄라 가벼운 마음으로 드넓은 육지를 뛰어다녔다.

내가 도착한 곳의 지명은 ‘충남 태안 파도리’.

아쉽게도 파도리엔 웨이포인트와 안전구역이 없어서, 북쪽으로 약 8km를 이동해 만리포란 곳에 다다라야 했다.

8km면 꽤 멀어 보이지만, 바다 위 1.5km를 나는 것보다 훨씬 쉽다.

그래서 거리낌 없이 이동을 시작했는데···.

약 절반인 4km를 이동한 지점에서 예상치 못한 소동에 휘말리고 말았다.

“컥!”

“쏴! 쏴 죽여!”

-티티티팅!

악의로 가득한 외침과 거칠게 울려 퍼지는 총성.

더불어 난무하는 욕설 속에 비명이 더해지니, 흡사 전쟁터 한복판에 있는 느낌이다.

‘아니, 전쟁터나 마찬가지인가?’

나는 눈 앞에 펼쳐진 방어막을 요란하게 때리는 탄환들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흘렸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을까?

나는 그저 파도리의 피난 캠프를 발견해 만리포까지의 길을 물어봤을 뿐인데.

‘물론, 내 잘못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웬 미친놈이 시비를 걸며 주먹을 휘둘러 오길래, 반사적으로 팔을 꺾어 주었다.

그랬더니, 다른 놈이 나를 향해 대뜸 총을 갈겨 온 것 아니겠는가.

‘언제부터 대한민국이 시비가 붙었다고 총부터 쏴 재끼는 무서운 나라가 되었을까?’

물론, 대재앙으로 인해 다들 힘든 건 알지만, 이건 도를 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총을 쏜 놈까지 제압했더니, 이번엔 새롭게 두 명이 나타나 총을 갈기고.

그 두 놈을 또 제압했더니, 이번엔 네 명이 나타나 총을 갈겼다.

결국, 일이 커지고 커져 열댓 명이 나를 향해 총을 난사하는 이 사달이 벌어졌다.

‘이 새끼들이?’

총을 겨누고 쏜다는 건, 상대를 죽이겠다는 의지를 행동으로 옮긴 거다.

그런 녀석들을 상대로 자비를 베풀 필요는 없다.

때문에 나는 거리낌 없이 총을 쏘는 무리를 향해 살초를 펼쳤다.

검기가 깃든 검으로 몸을 토막 내고 머리를 노리며 마력탄을 쐈다.

“으아아악! 괴, 괴물 새끼!”

총을 든 사람들과 싸우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어차피 내 머리는 빛을 엮어 만든 투구가 보호해 줄 테고.

몸은 넝마가 되어도 상급 회복 물약을 먹으면 회복이 될 테니, 거리낌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붙어 본 상대는 상급 회복 물약을 꺼낼 필요도 없었다.

[김태식 / 레벨: 3]

[최형기 / 레벨: 1]

[조민수 / 레벨: 2]

총기를 맹신한 건지, 탐색 스킬이 표기한 그들의 레벨만큼이나 전투력도 하찮기 그지없었다.

도약 스킬과 발판 스킬을 이용해 이리저리 허공과 지면을 복잡하게 내달리면 총구가 제대로 따라오지 못했고, 화망이 넓게 펼쳐지면 아이템 내장 스킬인 방어막을 펼치며 다가갔다.

덕분에 녀석들은 내게 총을 한 발도 맞추지 못하고, 허무하리만큼 너무 쉽게 전멸하고 말았다.

-척!

도약 스킬로 단번에 10여 미터의 거리를 좁히며, 마지막 녀석의 목을 베어버린 나는 칼에 묻은 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몬스터를 죽일 땐 피도 함께 증발하며 사라지기 때문에 신경 쓸 필요가 없는데, 인간의 피는 달랐다.

결국, 인벤토리에서 휴지를 꺼내 닦아낸 나는 혀를 찼다.

-찰칵.

그리고 검을 수습한 나는 여기저기 널브러진 괴한들의 시체를 눈에 담았다.

‘이런 날이 오지 않길 바랐지만···.’

끝내 사람의 목숨을 빼앗고 말았다.

언제고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곤 생각했지만, 설마 육지에 발을 딛자마자 이 사달이 벌어질 거라곤 예상치 못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단 느낌이다.

[마력이란 능력치는 단순하게 스킬을 사용하기 위한 에너지만 늘려 주는 게 아닙니다. 사용자의 정신력도 강화시켜 주죠.]

윌리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마 내가 이렇게 침착할 수 있는 것도, 그녀가 말했던 대로 높은 마력 수치의 영향일 것이다.

처음엔 마력이 높아지면 인간성마저 없어지는 거 아닐까 싶어서 꺼림칙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기능이 있어 다행인 것 같다.

만약 사람을 죽였다고 패닉에 빠져 있거나, 싸우는데 망설임이 있었다면 바닥에 누워 있는 건 괴한들이 아닌 내가 되었을 수도 있다.

“군인은···. 아닌 것 같은데? 뭐하던 사람들이지?”

시체들을 살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두 20~30대의 외형인데, 군인이라기엔 머리도 길고, 헤어스타일도 제각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의문을 표하고 있던 그때.

“와, 와아아!”

“아씨, 깜짝이야.”

웬 사내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나는 순간적으로 검을 뽑을 뻔했지만, 이어진 그의 행동에 검에서 손을 뗐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대협!”

대협?

이 사람 뭔 소리를 하는 거지?

[최익찬 / 레벨:4]

내가 황당해하자, 최익찬이라는 실없어 보이는 사람 뒤로 조심스러운 태도의 누군가 다가왔다.

[최익헌 / 레벨:5]

비슷한 이름의 또 다른 남성.

아무래도 형제인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동생이 무협광인지라···. 이들은 총기로 무장해 저희 마을을 점거하고 핍박하던 놈들입니다. 당신이 그들을 해치웠으니, 우리 마을을 구해주신 거나 다름이 없죠.”

형인 최익헌의 설명에 비로소 상황파악을 하게 된 나는 지금의 상황이 묘하게 가의도 때와 비슷하단 느낌을 받았다.

다만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오오오!”

폐교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환호하며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데, 그 수가 가의도 때와 비교도 되지 않게 많다는 거였다.

500명은 가뿐히 넘어 보이는 사람이 폐교 안에 숨어 있었다는 것도 놀랍지만, 사람을 죽였는데도 이렇게 열광하는 거 보니, 시체들이 정말 뒈져도 싼 놈들이었단 것을 알게 되었다.

덕분에 나는 한참 동안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감사하단 인사를 들어야 했다.

‘내 딴엔 갑자기 총질해서 처리한 건데.’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영웅 취급을 받으니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그런데 대협, 시체들은 수습하지 않으십니까?”

그렇게 얼마나 사람들의 인사를 받아줬을까?

무협광이라는 최익찬이 다가와 의문의 말을 했다.

이상한 호칭은 그냥 그 사람의 개성 정도로 생각하며 무슨 말인지 되물었고, 최익찬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사람 좋은 웃음을 흘렸다.

“죽은 사람에게서 갖고 있던 코인과 인벤토리에 보관된 아이템 등을 챙길 수 있습니다.”

“그래요?”

전혀 모르고 있던 시스템이다.

그래서 나는 최익찬의 말에 따라 시체에 손을 얹었고.

[보유 코인: 542]

[인벤토리 보유 아이템]

-고블린 가죽 12개

-5.56mm 소총탄 60발

[착용 장비]

-고블린의 흑요석 단검(고급 / 힘+1)

눈앞에 위와 같은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아이템은 터치하는 것으로 너무도 간단히 수습할 수 있었다.

‘어째서 이런 시스템이?’

최익찬이 알려 주지 않았다면 쉬이 알아채지 못했을 시스템이다.

하지만 나는 이 시스템을 보며 다시금 미간을 찌푸려야 했는데.

마치 인간도 몬스터처럼 파밍 대상에 포함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이건 인간의 협력을 방해하는 시스템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경험치까진 흡수하지 못한다는 걸까?

만약 사람을 죽여서 레벨까지 올릴 수 있었다면 정말 헬게이트가 열렸을 거다.

‘물론, 인간에게서 아이템을 파밍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악의적이지만···.’

나는 20구의 시체에서 상당히 많은 코인과 아이템을 획득할 수 있었다.

솔직히 코인과 총기 관련 물품 빼곤 그다지 쓸모없는 기초 아이템뿐이었으나, 남 주긴 아까운 계륵 같아 일단 챙기고 봤다.

“저어···.”

그리고 그때, 최씨 형제 중 형인 최익헌이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말 안 해도 어떤 용건 때문에 그러는지 알 것 같다.

시체 수습 방법을 알고 있다는 사실만 봐도 이들이 괴인들에게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알 수 있으니까.

아마 이들은 자신들이 힘이 없어서 그런 상황을 겪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다.

그런 의미에서 총기는 가장 쉽게 힘을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이고.

“총기를 원하시는 거죠?”

너무도 쉽게 마음을 읽어서인지, 최익헌이 얼굴을 붉혔다.

“네, 맞습니다. 당연히 은인께 그냥 달라는 염치 없는 말은 할 수 없으니, 값을 치르고 건네받았으면 합니다.”

총 20정의 K2소총 중, 나와의 전투 중에 3정이 파괴되고 17정이 남았다.

또한 약 3천 발에 달하는 탄환까지.

나는 궁금해졌다.

과연 뭘 주려는 건지.

“일단 저희 마을 사람들이 십시일반 모으면 2,000 코인은 모일 겁니다.”

일반인의 입장에선 많은 코인이다.

하지만 내 입장에선 성에 차지 않는 코인이었다.

“1차로 그 2천 코인을 드리고, 5번에 걸쳐 추가로 2천 코인씩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이어진 제안은 생각지도 못한 거여서 나는 자신도 모르게 놀란 표정을 지어야 했다.

“할부로 총기를 가져가겠다는 겁니까?”

“네, 부족할까요?”

선금 2천, 추가로 2천씩 5번 지급.

총 1만2천 코인을 지급하겠단 의미다.

지금 내 전 재산이 1만8천 코인임을 생각하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역시 규모의 경제란 건가?’

이들 개개인이 얻을 수 있는 코인은 내 입장에서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그게 모이고 모이면, 무시할 수 없는 금액이 된다.

“총기 15정에 탄환 2,500발 넘기죠.”

총기 2정과 500발의 탄환은 내가 소유할 생각으로 말했다.

그에 최익헌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이 마을의 대표도 아닌 것 같은데, 마음대로 결정해도 됩니까?”

“설득은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의견을 묻고 오시죠.”

“알겠습니다. 그럼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내 지시에 그는 어디론가 달려가 몇몇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몇 마디 말을 나누더니, 채 3분이 지나지 않아 되돌아왔다.

“허락받았습니다.”

이렇게 빨리?

나는 그들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껴야 했다.

큰 금액을 질러서 거절하기가 힘들긴 한데, 왠지 이들이 손해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7일 간격으로 2천 코인씩 납부하겠습니다.”

그리고 납부 기간도 짧다.

잠깐 싸우고 얻은 총과 탄환 좀 건네주고 매주 2천 코인이 거저 생기는 거였으니.

‘잠깐 매주? 아아, 그런 거였나?’

나는 그제야 이들의 목적을 알아챘다.

“그러니까 나보고 매주 와서 여러분 상황 좀 지켜보고, 겸사겸사 위험한 것 같으면 도와 달라는 거군요?”

이제 보니, 해당 금액은 총기값에 보호비가 포함된 거였다.

제법 머리를 잘 굴리지 않았는가.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만큼 저희가 기댈 곳이 없어서···.”

“처음 본 저를 뭘 믿고 이러시는 거죠?”

“지금까지 보인 행동과 대화만 봐도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시체를 수습할 줄 몰랐다는 것 자체가 이런 놈들과 궤가 다르단 뜻이죠.”

“하지만 전 개인인데요?”

“총기로 무장한 20명을 혼자서 여유롭게 해치우는 개인이시죠.”

나는 피식 실소를 흘렸다.

영문도 모른 채 이용당할 뻔했지만, 이익을 보전해주려 했던 만큼 그리 화는 안 난다.

그리고 이들 덕에 새로운 사업의 가능성도 봤고.

“결국, 코인을 계속 상납하면 윗대가리만 저로 바뀌는 거 아닌가요?”

“억압받으며 강제로 빼앗기는 것과 자유를 위해 지급하는 보호비는 엄연히 다릅니다.”

“저 녀석들에겐 얼마를 빼앗기셨는데요?”

“매일 1,500~2,000코인입니다.”

“좋습니다. 그런 거면 가격을 더 올려 받아도 되겠네요.”

“네?”

“매주 3천씩, 5회 납으로 하죠.”

그래도 말하지 않고 나를 이용하려 한 값은 챙겨 받아야겠다.

“끙···. 알겠습니다.”

“대신 여러분에게 위기가 닥칠 때, 적극 도와드리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그리고 나는 총기와 탄을 건네주고, 선납으로 2천 코인을 받았다.

인연을 맺는 대가로 그들은 내게 매주 3천 코인을 상납하게 되었다.

일단 5회납으로 기한이 한정되어 있지만, 관계가 만족스럽게 이어진다면 자연히 연장될 터이다.

‘이거 왠지 조폭이 된 느낌인걸?’

나는 최익헌, 최익찬 형제와 악수를 나누고는 그들에게 만리포로 가는 길을 물었다.

“만리포 안전구역이 어느 쪽인지 아십니까?”

이미 아버지와의 위성통화로 계룡대로 가는 길의 웨이포인트 위치를 파악해둔 상태다.

일단 여기서 가장 가까운 웨이포인트가 만리포다.

“대, 대협 만리포에 가시려고요?”

그런데 내 물음에 무협광 최익찬이 당황했다.

나는 왜 그러냐며 물었고, 그에게서 만리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실은 대협께서 해치운 놈들이 만리포에서 보낸 끄나풀이란 소문이 있거든요. 거긴 경찰을 중심으로 세력이 형성되어 있어서 거의 군대에 가깝다고 들었어요. 아마 여기 못지않게 강압적인 수탈이 이어지고 있겠죠.”

“음···.”

아니, 사람 있는 곳은 왜 죄다 이 모양이야?

온 지 하루도 안 지났는데 벌써 월광도가 그리워진다.

“그래도 일단 위치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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