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개인 방송 (4)
‘윌리아와 시에나도 잘하고 있네. 특히 시에나의 경우 상위권에 들긴 힘들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윌리아와 시에나는 법사와 궁수이기 때문에 맨손으로 시작한 생존 게임이 불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문제없이 내 다음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4등은 클로에고, 5등은…… 인도인 자다브? 누구지?’
상위권은 익숙한 이름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클로에의 라이벌 격인 제임스와 윤시아를 제치고, 자다브란 인도인이 중간에 끼어 있는 게 의외였다.
그 인도인뿐만 아니라, 제임스와 윤시아 밑으로 러시아인과 독일인 등의 뉴 페이스들이 상당수 보였다.
윤시아 다음으로 순위가 높은 사냥꾼 협회 멤버는 9위의 무당파 장문인 진후에이였으며, 12위에 김민희, 17위가 진후에이의 직속 제자이자 연검 사용자인 장밍웨이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장밍웨이의 사형이자 진후에이의 또 다른 직속 제자인 장쥔에 앞서 최공찬이 18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최공찬은 김씨 아저씨의 아들이 속한 파티의 리더이자 협회의 주요 간부로 떠오르고 있는 길종혁의 제자였다.
‘장비빨과 스킬빨을 빼고, 레벨도 1이 되니, 진짜 재능 있는 사람들이 위에 포진하게 되는군.’
그 외 김현수와 최도겸, 박상만은 20~30위권에 포진되었으며, 100위 이내에 총 17명의 사냥꾼 협회 소속 멤버들이 이름을 올렸다.
‘인구를 생각하면 한국인의 비율이 높은 편이긴 하지만, 지난 이벤트 대전에 비하면 나름 균형이 맞는 상황이긴 하네.’
이번 이벤트는 몬스터뿐만 아니라 인간도 조심해야 하는 만큼, 변수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높은 순위를 기록한 사람들은 좋든 나쁘든 대단한 실력의 보유자임이 분명했다.
‘이름들을 잘 기억해 놨다가 소속 단체가 없거나 힘이 약한 단체 사람들은 협회로 끌어들여야겠어.’
물론, 이벤트는 아직 초입이다.
남은 시간이 21시간이나 되니까.
순위는 얼마든지 변동될 수 있고, 시간이 지날수록 전통 강자들이 위로 올라올 가능성이 크지만, 한 번이라도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면 그만큼 특별한 재능을 가졌단 의미라 생각한다.
그런 이들을 영입할 수 있다면 당연히 영입하는 게 나을 터.
“으음…….”
때문에 나는 한자리에 가만히 서서 한참 동안 순위표를 살펴야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순위표를 머릿속에 저장한 나는 눈앞에 떠오른 창들을 모두 닫았다.
“역시 눈에 띄긴 하나 보네.”
나는 슬쩍 고개를 들어, 머리 위를 살폈다.
그러자 황금색으로 찬란하게 반짝이는 큼지막한 숫자 1을 볼 수 있었다.
이어서 시선을 내리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수풀을 헤치며 등장했다.
-부스럭. 부스럭.
하지만 곧바로 또 다른 무리가 수풀 속에서 등장하고, 아예 사방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완전히 포위됐다.’
어느새 나를 중심으로 사람의 장벽이 만들어졌다.
나를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키는 사람들.
동양인은 물론, 백인에 흑인까지 피부색이 글로벌하기 그지없었다.
누가 봐도 절체절명의 상황.
“알아서 경험치와 아이템이 굴러들어 오네.”
그러나 허리춤에서 스릉 검을 뽑아 든 내게선 어떠한 긴장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유쾌하단 표정을 지을 뿐이다.
“시청자 여러분, 과연 저는 이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을까요? 그럼 계속 지켜봐 주세요.”
그리고 시청자를 향해 멘트를 친 나는 숨통을 조이듯 서서히 거리를 좁혀 오는 이들을 향해, 오히려 먼저 달려들었다.
* * *
“이런 미친.”
머리 위에 1위 표식이 달린 서백호를 나무 위에서 몰래 지켜보며 개인 방송을 진행 중이던 필리핀 여성, 알시아는 말도 안 되는 광경에 경악해야 했다.
이유는 서백호 단 혼자서 사방에서 개떼처럼 몰려드는 사냥꾼들을 짚단 베듯 쓸어버렸기 때문이다.
“저, 저게 가능합니까? 보아하니, 스킬은 거의 쓰지 않는 것 같은데요? 비록 저 한국인 남성이 가장 빨리 레벨 20을 넘긴 데다가 장비도 준수하게 갖추고 있다곤 하지만, 덤벼드는 사람들도 레벨이 10은 그냥 넘어 보이는데요.”
하지만 당혹감 어린 감상도 잠깐.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쉬이 믿을 수 없는 촬영 대상의 전투력 덕분에 알시아의 방송은 시청자 수가 가파르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혼자 2배속 재생으로 움직이는 듯]
[무시무시하네]
[괜히 세계 랭킹 1위가 아님]
[저 한국인 앵글로 영상을 보면 어지러울 정도임]
[영상 촬영 위치가 좋네]
[하루 종일 쟤만 쫓아다니자! 그럼 시청자 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
덕분에 그녀의 눈빛이 기회를 포착한 하이에나처럼 번뜩였다.
“진짜 그럴까요? 저 사람 쫓아다니기.”
[ㅇㅇ]
[레벨업뿐만 아니라 시청자 수도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보상 주는 거잖아? 좋은 소재를 찾았으면 움직여야지.]
그러다 이내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잠깐만요. 그럼 제가 저 사람의 시청자를 빨아먹는 게 되는데, 과연 저를 가만히 둘까요?”
타당한 의견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시청자들로부터 의외의 사실을 전해 받을 수 있었다.
[저긴 시청자가 억 단위라 모기 짓 좀 한다고 티도 안 나]
[그리고 저 사람이 먼저 다른 사람을 공격한 경우를 본 적이 없음]
[맞아, 공격해 오면 대응은 하지만, 먼저 선공격을 하진 않음]
“그래요?”
시청자들의 의견에 끝내, 알시아는 용기를 내기로 했다.
서백호를 쫓아다니며 중계를 해야겠다고.
“와 순식간에 20명을 넘게 벤 것 같은데요? 앗 레벨업 했네요. 콩고물을 주워 먹긴커녕 오히려 상대만 강화시켜 주고 있습니다.”
멀리서 지켜보니,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건 바로 서백호의 움직임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우며 끊김이 없단 것이었다.
그에 알시아는 감탄사를 내질러야 했다.
“어떻게 저런 움직임이 가능한 거죠? 설마 미리미리 적의 공격 경로를 예측하고 그에 맞춰 움직이는 걸까요? 아, 방금 휘두른 한 번의 공격으로 두 명이 동시에 목을 베이고 말았습니다. 한 명은 보이지 않는 사각에 있었는데 우연이 아니겠죠?”
서백호의 전투는 마치 잘 짜인 하나의 극본을 보는 듯했다.
덕분에 덤벼들던 사람들의 안색은 점차 창백해져 가고, 결국 전투가 시작되고 2분여가 지나자 섣불리 덤벼드는 사람 없이 대치가 이뤄지고 있었다.
“아, 아무래도 승산이 없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랭킹 1위 남성을 공격했던 이들이 도망칠 타이밍을 재기 위해 열심히 눈알을 굴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이벤트 필드는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세계.
그들의 등 뒤로 또 다른 세력이 등장하며, 도망치려 하던 사람들은 얼떨결에 샌드위치를 당해 전멸하고 말았다.
“오, 저들은 1위 남성을 건드리지 않고 떠나네요. 아주 좋은 판단입니다.”
그렇게 전투가 일단락되자 서백호는 시신들에게서 필요한 물품을 챙기기 시작했다.
“조금 더 다가가 볼까요?”
알시아는 시청자가 느는 만큼 겁도 줄었다.
좀 전에도 서백호가 자신을 선공하지 않은 사냥꾼들을 그냥 풀어 준 것을 목격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오래지 않아 그에게 접근하길 그만뒀다.
이유는.
-째릿.
서백호의 시선이 숨어 있던 그녀에게 정확하게 향해졌기 때문이다.
“헉.”
알시아는 그 자리에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정황상 아무래도 기감으로 알아챈 것 같았는데, 알시아는 쉬이 납득할 수 없었다.
기감은 고레벨의 영역이다.
신체 능력치와 마력 수치가 높아지면 전신의 감각 또한 예민해지는데, 이를 통해 깨우치는 게 바로 기감 능력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감의 노하우를 알고 있다고 해도 능력치가 낮으면 써먹기 힘들 건만…….
서백호는 벌써부터 그걸 능숙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이건 경고다.’
알시아는 서백호가 자신에게 시선을 던진 이유가 뒤쫓아 오지 말란 신호로 알아들었다.
때문에 그녀는 감히 그의 경고를 무시하지 못하고 한참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어야 했다.
[에이 뭐야]
[재미없네]
[ㅂㅂ]
그 결과, 시청자들도 빠르게 빠져나가 원상 복구가 되고 말았다.
“후우, 그냥 사냥이나 해야겠네요. 과연 랭킹 1위입니다. 모기 짓도 쉽지 않군요.”
서백호의 눈빛은 좀처럼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알시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가 이동한 곳과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 * *
랭킹 1위란 표식은 누군가에겐 타깃 포인트로, 누군가에겐 도망치란 경고 표식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나를 발견한 사람들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다.
덤벼들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치거나.
처음엔 덤벼드는 사람이 많았지만, 1시간이 더 지나고 갱신된 랭킹에서 내 레벨이 30을 넘은 걸 알게 된 후, 덤벼드는 사람들이 급감했다.
그래서 심히 아쉬웠다.
‘덤비는 사람들을 처치하는 게 제법 짭짤했으니까.’
어깨를 으쓱인 나는 평범하게 몬스터를 사냥하며 시청자들과 소통을 이어 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등장하는 몬스터들의 숫자도 많아지고 레벨도 높아지는 느낌이네요.”
현재 내 방송의 시청자 수는 무려 2억.
채팅창이 올라가는 게 농담 좀 보태서 거의 빛의 속도 수준이다.
“제 파티원인 두 사람과 사귀냐고요? 에이, 어떻게 둘과 사귑니까? 파티원인 마법사님과는 교제 중인 게 맞고, 궁수님은 오빠 동생 같은 사이입니다. 뭐, 궁수님 본인은 자신이 누나라고 생각하는 거 같지만요.”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중간중간 채팅을 읽어 냈는데, 시청자들이 이걸 무척 신기해했다.
1차원적인 사냥이 지속되니 방송은 Q/A 시간이 되어 갔는데, 덕분에 나는 꽤나 많은 정보를 개인 방송으로 털어놨다.
“원래는 개인 정보를 숨기고 다녔는데, 요즘엔 굳이 숨길 필요가 있을까 싶더라고요. 이젠 저를 모르는 사람이 없잖아요?”
“제 원래 레벨요? 181입니다.”
“고향이요? 고향의 사전적 의미가 태어나서 자란 곳 맞죠? 출생지는 용인이긴 한데, 아버지가 군인이라 어려서부터 이사를 자주 다녔거든요. 그래서 고향이라 부를 만한 장소는 없는 것 같아요.”
다행인 건 사람들이 나에 대해 궁금한 게 워낙 많아서 큰 사건 없이 사냥만 이어지고 있음에도 지루해하는 사람이 없단 거였다.
그렇게 계속 사냥을 이어 갈 때.
“어?”
나는 움직임을 멈춰야 했다.
바로 달려들기 힘든 몬스터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서큐버스네요. 예전에 참 많이 잡았던 몬스터인데.”
하지만 일반 서큐버스는 사냥이 그리 어렵지 않다.
“서큐버스는 매혹 스킬만 조심하면 됩니다. 실제 전투 능력은 동레벨의 몬스터들보다 떨어지기 때문에 매혹만 막을 수 있으면 오히려 경험치를 벌기 좋은 몬스터입니다.”
눈을 개안시켜 주는 서큐버스의 등장에 많은 시청자들이 환호하는 게 보였다.
하지만 정작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서큐버스를 볼 수가 없었다.
유혹의 춤을 추는 서큐버스는 시각을 통해 매혹 스킬을 걸어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입고 있던 옷을 찢어 천 조각으로 눈을 가렸다.
옷이 두껍지 않아 희미하게 적의 실루엣이 보였다.
이 정도면 매혹에 걸리지 않을 터.
더불어 기감을 더하면 충분히 서큐버스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함부로 따라하시면 안 됩니다. 기감에 의존한 전투는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이후 나는 서큐버스를 처치하면서 레벨을 올렸다.
역시 서큐버스는 매혹만 막으면 꽤나 좋은 사냥감이었다.
덕분에 나는 홀로 서큐버스 존을 누비며 사냥을 이어 갈 수 있었다.
“이 페이스면 다음 랭킹 발표 전까지 34레벨은 달성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예전에 레벨 34를 올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쏟아야 했던가.
물론, 환경이 다르긴 하지만, 레벨과 장비 등을 제외하고도 스스로가 매우 강해졌단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응? 저게 뭐죠?”
나는 희미한 시선 속에 뭔가 이상한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다른 서큐버스들과 다른 실루엣을 가진 여성형 몬스터를 말이다.
그런데 그 실루엣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더니.
갑자기 아래와 같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특수 이벤트 몬스터의 매혹에 걸렸습니다.]
“뭐, 뭐라고!?”
전혀 예상치 못한 메시지에 나는 경악성을 내뱉었다.
특수 이벤트 몬스터가 뭐길래 일반적인 매혹 파훼법을 뚫고 들어온단 말인가?
이어서 어느새 옆에 나타난 몬스터가 내 뺨을 쓰다듬으며 안대를 풀었고, 곧 눈에 번쩍 뜨이는 미인을 볼 수 있었다.
[으훗, 잘 부탁해? 우리 아기?]
매력적이기 그지없는 그녀의 대사와 함께 몸이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헐?]
[헐?]
[지금 매혹 걸린 거?]
[그럼? 이제부터 이 사람 서큐버스 꼬봉임?]
난리가 난 채팅창과 함께 나는 엿됐음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