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무어라도 돼주고 싶은 (3/51)


3화. 무어라도 돼주고 싶은
2023.01.09.


소연이 묻자 서준의 짙은 눈매가 길어졌다.

계속 그렇게만 하라는 의미였다.

가까이에서 본 태서준은 여자보다 더 매끄러운 피부였다. 높고 반듯한 코 아래의 선명한 입술은 무얼 바른 것 같지 않은데도 매우 붉었다.

심지어 이 남자는 눈도 예뻤다. 길고 빽빽한 속눈썹이 일조하는 것이겠지만, 유독 진한 눈동자는 그윽하게 우수에 찬 듯 색마저 오묘한 빛을 띠었다.

어디 하나 완벽하지 않은 곳이 없는 남자의 얼굴을 탐색하던 눈길은 어느새 홀의 입구 쪽을 향했다. 소연은 아직도 그 자리에서 망부석처럼 꼼짝하지 않고 서 있는 그녀를 조심조심 염탐했다.


“갑시다.”

“어, 어딜…….”

서준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소연의 손목을 그러잡았다.


“내 룸.”

“저 아직…….”

남은 칵테일도 아깝지만, 감바스는 아직 입도 대지 못했다. 그게 다소 아까워 우물쭈물하는데, 서준이 소연의 팔을 잡아당기며 재촉했다.


“술이 부족하면 올라가서 같이 마셔요.”

소연을 데리고 그 여자 앞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친 서준은 바를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승강기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남자의 팔이 소연의 허리를 감쌌다. 뒤통수가 갑자기 싸늘해진 소연은 반사적으로 나온 문을 돌아다보았다.

정체 모를 그 여자와 소연의 눈빛이 정확히 마주치는 그 순간이었다.


“엇!”

소연의 허리를 그대로 끌어안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간 서준은 딱딱한 벽면에 그녀의 등을 밀어붙였다. 그다음도 순식간이었다.


“놀라지 말고.”

서준은 짧은 경고와 함께 고개를 깊이 숙였다.


“!”

두 입술이 빈틈없이 겹쳐졌다. 너무 놀란 소연의 눈이 크게 떠졌다.

자세는 연인처럼 그럴싸했지만 맞물린 두 입술은 적당히 겉만 맴돌았다. 그러나 소연은 이 순간 무엇도 할 수 없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전기에 감전된 듯한 짜릿함이 몸과 정신을 모조리 속박한 탓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서준은 몸을 떨어뜨리며 한 보 물러섰다.


“……!”

의지하던 그가 멀어지자 소연은 곧 주저앉을 것처럼 두 다리가 휘청했다. 그대로 중심을 잃는가 싶은 그때였다. 재빠르게 뻗어온 다부진 팔이 소연의 허리를 다시 붙잡아 잡아당겼다.

한쪽 팔로 소연을 꽉 끌어안고 다른 팔로는 벽을 짚은 서준이 물었다.


“괜찮습니까.”

“안 괜찮…….”

심장이 터져 죽을 뻔했는데, 괜찮을 리가!

울림 좋은 목소리는 더없이 정중했다. 그래서 더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면 내가 비정상인 거겠지?


“아, 아니, 괜찮아요.”

소연이 말을 절자 미려한 미소를 입가에 띄운 서준이 엄지로 물기 어린 입술을 쓱 닦아주고 뒤로 물러났다.

그의 손끝이 스친 자리가 화끈거렸다. 소연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 질끈 깨물었다.

VIP층에서 멈춘 엘리베이터의 문이 양옆으로 부드럽게 열렸다.

이 밀폐된 공간 안에 머문 건 채 1분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소연은 그 시간이 겁의 세월을 거친 것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저, 전 이만 가 볼게요.”

엘리베이터에서 먼저 내린 서준이 뒤를 돌아보자 ‘이만 안녕’이라고 인사하듯 소연은 고개를 숙였다.

그가 키스한 건 그 여자에게 보여 주려는 것이었고, 그 계획은 성공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할 이유도 더는 없는 거였다.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틈으로 잘생긴 미간이 확 구겨지는 게 보였다. 30초 광고 같은 짧은 만남. 이것이 저와 태서준의 엔딩인 것만 같은 소연은 문이 다 닫혀가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깐!”

도로 열린 문 사이로 서준의 긴 팔이 쑥 들어왔다.


 

***

아직 할 얘기가 남았다는 서준의 말이 통했을까. 그의 출구 없는 설득에 떠밀린 소연이 룸 안까지 들어온 건 삽시간이었다.


“도와드린 것 때문에 이러시는 거면 전 괜찮아요.”

서준이 문을 닫고 돌아서는 동안 소연은 현관 근처에서 엉거주춤 선 채로 말했다.


“내가 괜찮지 않습니다.”

간다는 소연을 이곳까지 데려오느라 애쓴 탓인지 호흡을 크게 한 번 몰아쉰 남자의 흉부가 들썩여졌다.


“그냥은 못 보냅니다. 기브앤테이크. 처음 얘기했던 대로 합시다.”

“제가 안 받겠다는 데도요?”

“줘야 하는데 못 주는 것만큼 찝찝한 것도 없죠. 더구나 내 뺨에 먼저 뽀뽀하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도와주려고 그랬던 거잖아요!”

아깐 아무 소리 없더니 이제 와 내 뽀뽀를 타박하는 거야? 다소 억울해진 소연이 언성을 살짝 높였다.


“그걸 뭐라 하는 게 아닙니다. 그쪽이 뽀뽀한 건 내가 제안한 거래에 동의한다는 뜻 아니었습니까. 계산은 제대로 하잔 말입니다.”

“…….”

소연은 마음이 갈팡질팡했다.

태서준과 좀 더 같이 있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왠지 제 인생이 확 뒤바뀔 것 같은 불안한 예감 때문이었다.

크게 흔들리는 눈동자에 그 두려움이 고스란히 투영된 탓일까. 소연의 낯빛을 살피던 서준은 널찍한 공간에 놓인 소파 앞으로 그녀를 데리고 이동했다.


“뭔가 오해한 게 있나 본데, 나 그런 사람 아닙니다.”

그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기분이 꽤 상한 모양이었다.


“그래서가 아니고…….”

후, 에라 모르겠다.

버티기를 포기한 소연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겁난 이유가 무엇이든 이젠 거부할 수 없는 운명 같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푹신한 소파라도 소연에겐 가시방석이 분명했다. 태서준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부터가 혼란 그 자체였으므로.


“진짜 이건 아닌 것 같아요. 끽해야 짧은 스킨십 정도인데 그걸 물질로 계산하는 게 더 이상한 거죠. 너무 갑작스러워서 생각나는 것도 없고요.”

“그럼 앉은 김에 천천히 생각해 봐요. 곰곰이 고민해 보면 무언가 생각나는 게 하나 정도는 있을 겁니다.”

“글쎄요, 뭐가 있을까요.”

“그건 나도 궁금합니다. 그쪽이 무얼 원하게 될지.”

그의 말대로 생각해 보긴 했다. 그러나 암만 머리를 굴려 봐도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태서준과 키스했던 장면만 끊임없이 되풀이될 뿐.


“솔직히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요. 부담 가지실 필요는 없으실 것 같은데요.”

진정되지 않는 심장을 위해서라도 이곳에서 빨리 퇴장하는 게 급선무인 소연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전 정말 괜찮으니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

“지금 바로 나가면 제가 조금 곤란해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정중한 손짓으로 소연을 다시 소파에 앉힌 서준은 좀 더 차분한 어조로 설득했다.


“아…… 그 생각을 못 했네요.”

섣불리 호텔을 나섰다간 아까 그 여자의 눈에 띌 수도 있는 일이다. 저를 이곳에 데리고 온 그의 깊은 내막을 이제야 알게 된 소연은 제 생각이 짧았음을 얕은 고갯짓과 작은 음성으로 수긍했다.


“그럼 제가 이 룸에 좀 더 있길 바라시는 건가요?”

“가능하다면, 그것까지 도움받고 싶습니다.”

“이왕 도와드린다고 나섰으니 조금 더 있다가 갈게요. 저도 그 정도 의리는 있거든요.”

서준은 강요하지 않는 선에서 유연하게 부탁했고 소연은 그의 두 번째 부탁을 또 받아들였다.


“오늘 당황스러웠을 텐데 고마워요. 보답은 꼭 하겠습니다. 우선 한잔할래요?”

“그럴까요?”

너른 응접실과 침실이 두 개가 딸린 객실 내부는 꽤 컸다. 소연이 고급스러운 실내를 찬찬히 둘러보는 동안 서준이 물었다.


“이름이.”

“엄소연입니다.”

기본적인 통성명을 이제야 했다. 뽀뽀하고 키스한 후에 말이다. 느닷없이 부탁했고 무턱대고 도운 탓이지만 그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생긴 동질감이랄까.

시선을 맞교환한 서준과 소연이 동시에 피식, 웃었다.

설렘이 깃든 미소였다.

다이닝 공간의 미니바에서 와인을 꺼낸 서준은 외투를 벗고 제 쪽으로 다가오는 소연을 바라보며 눈매를 살며시 늘였다.


“그것도 벗어요.”

간단한 먹거리가 놓인 식탁에 앉으려던 소연은 아연실색한 얼굴로 움직임을 멈췄다. 그의 말이 너무 노골적으로 들려서였다.


“네? 뭐를…….”

그의 눈썹과 입술이 삐딱하게 휘었다. 그럴 리 있겠냐는 실소였다.


“롱부츠 말입니다. 장시간 신고 있으면 꽤 불편할 텐데.”

“아…….”

난 또 뭐라고.

식겁했던 표정에 민망함과 안도감이 교차한 소연은 부츠를 벗고 서준이 건네준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식탁을 사이에 두고 서준과 마주한 소연은 지금의 상황이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졌다.

하지만 입술에 남은 첫 키스의 여운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현실에 다시 없을 환상 속에서나 가능할 법한 남자. 그 태서준과 키스했다는 건 아직도 뜨거움이 가시지 않은 제 입술과 두근거리는 가슴이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그 사실이 사뭇 부끄러운 소연은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물었다. 그러나 그녀의 머릿속은 그의 입술 감촉을 좀체 떨칠 수 없었다.

그런데 입술은 왜 떨렸을까. 애수에 젖은 듯한 눅눅한 눈빛은 또 뭐였고. 실연의 아픔 때문일까? 그 여자와 헤어졌지만, 마음은 그러고 싶지 않았나? 그 시름이 더 커질까 봐 아무렇지 않은 척 애쓰지만, 실은 견디기 힘들 만큼 괴로운 건가?

그의 입술에 닿았던 그 순간, 묘하게도 그런 것이 느껴진 소연은 그의 슬픔을 조금이나마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래 봤자 한두 시간뿐이겠지만 기꺼이.

샹들리에의 낮은 조도와 간접 조명이 겨울밤의 정취를 한껏 돋웠다. 더구나 이곳은 자극적일 수밖에 없는 호텔 객실 아닌가. 이러한 환경에서 남녀가 단둘이 있다는 건, 없는 욕망도 불러들일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이었다.

다소 서늘한 실내 공기지만 술잔을 기울이는 시간이 점철될수록 몸이 더워진 서준은 와이셔츠 윗단추를 하나 풀고 커프스단추를 빼낸 소매를 접어 올렸다.

사소한 손목 움직임까지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그를 너무 넋 놓고 봤다는 생각이 불쑥 든 소연은 괜히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벽에 걸린 커다란 액자는 에로틱하면서 금빛 색채가 신비로움을 품은 걸작 중의 걸작이었다.

소연은 다물렸던 입술을 조심스레 풀었다.


“저 작품 진짜예요?”

“오스트리아 궁전에 있는 걸 여기서 찾으면 되겠습니까.”

“아…….”

당연한 걸 물었다. 바보같이.

멋쩍어진 소연은 뾰로통하게 두 볼을 약간 부풀렸다. 그 얼굴을 힐긋 바라본 서준이 픽 웃었다. 그 찰나였다. 식탁 위에 올려놓은 소연의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소연아, 영화 오디션 결과가 궁금은 한데 물을 수가 없네. 그래도 묻는다. 혹시 오디션에서 까였다고 이 야심한 밤까지 방황하는 건 아니지?]

자동으로 액정 위에 뜬 문자를 대충 확인한 소연은 뭐라 답장을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러는 사이 전화벨이 울렸다.


“받아요.”

“친구예요. 나중에 제가 전화하면 돼요.”

핸드폰 전원을 아예 꺼버린 소연이 도순의 연락을 외면한 건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여도순은 태서준의 열혈 광팬이었다.

그 친구 때문에 소연까지도 태서준의 데뷔부터 지금까지의 역사를 줄줄이 꿰고 있었다. 그러니 여도순이 지금 저와 그가 같이 있는 걸 알면…….

말해도 믿지 않겠지만, 제아무리 절친이라도 오늘 일은 비밀에 부쳐야 했다.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엄소연 씨는 부모님이나 가족한테 연락 안 해도 됩니까?”

서준은 눈썹을 약간 올리며 느릿하게 말했다.


“부모님은 외국에 계세요. 큰 언니는 일벌레라 뉴욕에서 아예 들어올 생각이 없고, 작은 언니는 일찍 결혼해서 제주도에 정착했어요. 그래서 전 혼자 살고요. 뭐든 제가 다 알아서 한다는 뜻이죠.”

“그러면 자고 가도 되겠네? 마침 침실이 하나 더 있으니 하는 말입니다.”

“……!”

소연의 눈빛이 출렁였다.

와인을 마신 데다 시간도 많이 늦었으니 배려심에 하는 얘기겠지만 소연은 가슴이 철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설레는 것도 처음이었다. 소연은 부지불식중에 대답해버렸다.


“그러면 와인 더 마셔도 돼요? 사실은 제가 술을 좀 마시고 싶은 기분이거든요.”

바닥난 빈 병을 잠시 응시한 서준이 새 와인을 가져와 소연의 빈 잔을 채워주었다.


“뭔가 속상한 일이 있는 모양인데 조금만 더하고 쉬어요.”

눈썰미가 빠른 남자였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 소연은 글라스에 담긴 것을 꼴깍꼴깍 마셨다. 하지만 술기운이 중첩될수록 잊고 있던 낮의 일이 자꾸 떠오른 소연은 기분이 울적해졌다.

커다란 눈시울이 붉었다.

금세 눈물이 굴러떨어질 것 같았지만 고집스럽게 참는 듯했다. 속상한 일 탓에 울기 직전인 건 알겠는데, 왜 자신의 심장이 뻐근해지는진 모를 일이었다.

아니, 사실 서준은 알고 있었다.

오늘 처음 만났음에도 전혀 낯설지 않은, 그녀에게 무어라도 돼주고 싶은 낯선 자신을.

얼어붙은 마음도 사르르 녹이는 따뜻한 인상인데 예쁘기까지. 눈앞에서 그런 여자가 우는데 어느 남자가 가만히 보고만 있겠나. 의도치 않은 유혹이 더 뿌리치기 어렵다는 걸 이 여자는 모르는 모양이다.

서준의 오른팔이 꿈틀했다.

주인 뜻과 상관없이 그녀에게 뻗으려는 손을 재빨리 말아쥔 거였다.

바에서는 도움이 필요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녀를 룸까지 들일 필요는 없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여기까지 따라온 그녀에게 위로의 손짓이라니.

자제해야 했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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