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엄청난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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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엄청난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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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엄청난 대가
2023.01.16.
태서준과의 하룻밤.
그 일이 있은 지 한 달이 지났다.
특별한 것 없는 평범한 날의 연속이지만 소연은 전에 없던 이상 증상에 종종 시달렸다.
물론 몸이 바쁠 때야 그럴 겨를도 없겠으나 조금이나마 시간이 여유롭거나 혼자 있을 땐 어김없이 넋을 빼며 멍해졌다.
어쩔 땐 우울증 비슷한 허한 기분이 자꾸 밀려오기도 했다. 가슴에 구멍이 생겨 그곳으로 시린 바람이 들락날락하는 것처럼.
그뿐만이 아니었다. 원인 모를 통증에 시름시름 앓느라 요즘은 밥도 잘 먹지 못했다.
그럼에도 소연은 알지 못했다. 그 모든 증상이 지독한 그리움의 시작이며 생소한 영역에 발을 들인 후폭풍이자 엄청난 대가라는 걸.
그렇다고 이대로 시간을 허투루 보낼 엄소연이 아니었다. 은근 악바리 스타일인 그녀는 4학년을 앞둔 겨울 방학이지만 학우들과 졸업작품전에 출품할 단편영화를 준비하느라 학생으로서 알찬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출품 영화 마무리 일정으로 포스터 촬영이 있었다.
졸업작품의 주인공이자 소연의 상대역인 조인하가 촬영장에 늦으면서 작업이 얼마쯤 지체되었다.
그런데도 방송 연예계와 뭇 사람들에게 일찍이 주목받는 조인하가 그저 부러울 따름인 학우들은 그의 바쁜 스케줄을 이해하는 분위기였다.
여차여차 저녁 무렵 포스터 촬영을 종료한 소연과 동기들은 쫑파티를 겸해 학교 근처의 삼겹살 전문 음식점으로 이동했다.
불판에 먹음직스러운 고기가 지글지글 노릇하게 익어가고, 스무 명 남짓 되는 사람들은 길게 붙인 테이블에서 소주잔과 맥주잔을 맞부딪치며 여행 이야기에 불을 붙였다.
“우리 과 졸업 여행지가 롱아일랜드지?”
“왜, 내년 가을에 가는 건데 벌써 기대돼?”
“당연하지. 높은 빌딩과 해변이 공존하는 꿈의 뉴욕을 이제야 가보게 됐는데.”
“아, 돈이 원수네! 성인인데도 부모님께 놀러 간다고 손 내미는 내가 부끄럽다.”
“그러니까 우리도 어서 성공해야지.”
대학교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소연이 속한 연기과는 매년 해외로 졸업여행을 가는 전통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하던 중에 과 대표가 제 옆자리에 앉아 있는 인하와 소주잔을 마주 대며 물었다.
“아 참, 조인하는 졸업 여행 못 가지? 일이 바빠서.”
“글쎄. 시간이 되려나 모르겠네.”
말을 마친 인하가 크, 하며 쓴 소주를 목울대로 넘겼다. 인상을 써도 잘생긴 그는 배우 겸 모델답게 키마저 컸다.
빈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자 때마침 맞은편에서 고기를 굽던 여학생이 제일 잘 구워진 고기 한 점을 인하의 앞접시에 올려놓았다.
젓가락으로 그것을 집어 입으로 가져간 인하는 안주를 챙겨주고 생글거리는 그 후배가 아닌 옆쪽으로 시선을 꽂았다. 하얗다 못해 요즘 들어 유난히 창백해 보이는 소연의 얼굴 말이다.
“재수 없는 새끼! 조금 유명해졌다고 벌써 잘난척이냐? 아무튼 안 간다는 거지?”
“생각 중이긴 한데, 엄소연이 간다고 하면 나도 가려고.”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돌발적인 얘기에 주변 사람들은 인하의 눈길을 따라 소연을 바라보았다.
“뭐야, 촬영하면서 둘이 연기 호흡이 잘 맞더라니. 우리 모르게 사귄 거였어? 언제부터?”
과 대표는 한술 더 떠 인하와 소연을 정말 사귀는 사이처럼 엮었다. 물론 인하의 농담을 맞장구쳐주는 것이었다.
“그런 말장난 재미없어요, 선배.”
평소 즐겨 먹기도 하고 꽤 좋아하는 삼겹살이지만 오늘따라 그 냄새가 역했다. 뒤집히는 속을 간신히 참고 있던 소연은 뜬금없는 소리를 한마디로 일축했다.
조인하와 과 대표는 군필자로서 소연보다 두 학번이 높았다. 그들과 적절한 선후배의 관계를 잘 유지하고 있는 소연은 말이 나온 김에 과 대표에게 정확히 말했다.
“전 졸업 여행은 참여 못 해요. 휴학할지도 모르고요.”
“휴학? 그건 왜?”
“개인적인 일이요.”
“그러니까, 그게 뭔데 제대로 말을 못 해? 학비 때문이야?”
“두루두루 일이 겹쳐서요.”
과 대표는 집요하게 계속 물었지만, 소연은 끝까지 제 사정을 말하지 않았다.
“…….”
역시 철벽녀답지…….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인하가 얕게 코웃음 치며 소주잔을 입으로 가져가 탈탈 비워냈다.
학교 일에 전혀 관심 없는 조인하가 고작 시시한 단편영화에 출연하고자 중요한 스케줄을 뒤로 미룬 건 오로지 엄소연 때문이었다. 졸업 여행도 같은 이유였다.
“그럼, 나도 안 가야겠네.”
“이 새끼, 진짜 엄소연한테 관심 있나 보네?”
“관심 정도가 아니지.”
“뭐?”
과 대표가 두 사람을 번갈아 향하며 눈매를 크게 키우자 인하는 대뜸 본심을 드러냈다.
“엄소연. 나랑 단둘이 밥 한번 먹자. 데이트도 좋고.”
“……!”
소연은 술과 고기는 입도 안 댄 채 물만 마셨다. 한데, 뜻밖의 고백에 난처한 속이 더 심하게 울렁거렸다. 욱, 하며 쓴 물까지 넘어오려는 걸 억지로 삼킨 소연은 유연한 태도로 선을 그었다.
“인하 선배, 다들 진짜인 줄 알잖아요. 그리고 저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그럴 리가.”
검지로 미간을 긁적인 인하가 피식, 웃었다. 줄곧 지켜봐 왔지만 이제까지 그러한 낌새는 전혀 없었다. 더구나 남자라면 무조건 담을 쌓는 소연의 얘기를 곧이곧대로 믿을 순 없었다.
“저 먼저 가 보겠습니다. 몸이 으슬으슬한 게 감기 기운이 있어서요.”
백팩을 어깨에 멘 소연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인하도 몸을 일으키며 벗어둔 겉옷을 손에 들었다.
“같이 가. 내가 데려다줄게.”
“아닙니다. 차 있어요.”
“내 차로 가.”
“무슨 말씀을. 선배님은 술 마셨잖아요. 음주운전은 안 되죠.”
딱 잘라 말한 소연은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그곳을 나갔다.
***
“잠깐 얘기 좀 해!”
소연은 자신의 차 앞에서 돌려 세워졌다. 무시당한 것 같은 기분이 썩 좋지 않은 인하가 공터 주차장까지 따라붙은 거였다.
“남자가 있다고? 거짓말까지 하는 이유가 뭐지?”
소연은 체념한 듯 인하를 반듯이 올려다보았다.
“진짠데요.”
“그래, 그렇다 치고. 그 남자와 헤어지면 나한테 기회는 줄 수 있어?”
“아니요.”
“왜지?”
“선배야말로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거죠?”
갑자기가 아니었다.
봄 햇살을 닮은 미소가 따뜻해 보여도 엄소연은 견고한 틀에 감싸인 것처럼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여자였다. 그 때문에 입 한번 못 떼고 속앓이하는 학과 선후배가 수두룩했다.
2년 전 복학 첫날, 엄소연의 신비스러운 모습에 눈이 멀어버린 인하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시기가 조금 늦어지긴 했으나 용기가 없어서는 아니었다. 오늘 같은 기회를 엿보았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고?
술기운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기 좋게 까인 분풀이일 수도 있었다. 인하는 소연의 손목을 꽉 붙잡아 제게로 바짝 당겼다.
“뭐 하는 짓이에요?”
그의 악력을 당할 수 없는 소연이 눈살을 가늘게 찌푸렸다.
“내 질문에 대답부터 해!”
손아귀에 실린 힘만큼 인하의 입에서 거친 말투가 튀어나왔다.
“천만에요. 전 다른 남자 만날 생각 없어요.”
이미 그 남자와 끝났다는 소리로 들리는 건 뭘까. 그 직감에 손의 힘을 누그러뜨린 인하가 언성을 낮춰 물었다.
“헤어졌어?”
“지나친 관심 부담스럽습니다.”
“맞나보네. 헤어진 거.”
“제 상황이 어떻든 선배와 상관없는 일이에요.”
실수로 빌미를 주긴 했으나 소연은 굳이 번복하지 않았다. 이미 한 남자로 꽉 찬 마음이 그리하라고 시킨 거였다.
“연애하다 상처 좀 받았나 본데, 괜찮아질 때까지 내가 기다린다면?”
“하…….”
소연의 긴 한숨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었다.
거절도 한두 번이지 상대방에게 긍정적인 대답을 못 하는 것도 곤욕이었다. 그런 데다가 가로등 두 개가 전부인 이 공터는 꽤나 으슥했다. 추운 겨울밤이라서 그런지 지나가는 사람마저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이 실랑이를 지켜보고 있다면, 그로 인해 자칫하여 오해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저도 그렇지만 조인하는 더욱 곤란한 상황에 부닥칠 수도 있었다.
“선배님은 기자를 달고 다니시잖아요. 그 사람들 눈에 띄면 어쩌시려고 이래요? 오늘 일은 없던 거로 할 테니 선배도 그만 해요.”
“밀어내지만 말고 잘 생각해. 나만 한 남자도 드무니까!”
소연은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했고, 그리 취한 것 같지도 않은 인하는 아까 하던 말만 되풀이했다.
“제가 아니라잖아요. 나중에 저를 어떻게 보시려고 이래요?”
“또 보려고 내가 이러는 거 아니야!”
“정 그러시면 술 깨시고 나중에 전화로 얘기해요.”
소연이 몸 방향을 틀어 운전석 문고리에 손을 대는 그 순간이었다.
“아!”
인하는 소연을 차체로 힘껏 밀어붙였다.
“간단히 물러설 거였으면 이러지도 않았어!”
“싫다고 했잖아! 이거 놔! 놓으라고!”
“가만있어!”
그의 무례한 행동에 소스라친 소연이 소리치며 거칠게 저항했으나 그럴수록 인하는 소연의 양쪽 손목을 상당한 힘으로 조였다. 당장이라도 꺾어 부서뜨릴 것처럼.
그때였다.
퍽!
“헉!!!”
어디선가 날쌔게 날아온 발이 조인하의 뒤쪽 가랑이를 거침없이 걷어찼다.
“야이, 미친! 싫다잖아! 이 개자식아!”
***
<키하젤> 본사에 태서준이 나타났다.
이 소식을 직원들이 들었다면 다들 놀랐겠지만, 모두가 퇴근한 늦은 시간이었다. 봉 실장과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에 그림자처럼 스며든 서준은 상층에 도착해 서슴없이 대표실 문을 열었다.
“어서 와, 태 대표.”
여태 눈 빠지게 기다렸다는 듯 태서준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엉덩이를 가볍게 놀려 소파 상석을 내어주었다.
“그냥 있지, 왜.”
“아무리 친구래도 회사에선 서열이라는 게 있지.”
“뭐, 굳이 그러겠다면.”
서준이 긴 다리를 접어 앉자 채 대표는 봉 실장과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다.
근래 자본시장을 쥐락펴락하며 급부상한 <키하젤>은 글로벌 M&A 전문기업으로서 태서준을 포함해 대표가 둘이었다.
배우로서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신인 시절, 미래의 안전장치라는 명목으로 친구 사업에 투자하며 동업으로 이어진 회사가 이젠 제법 큰 회사의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그 친구를 전면에 내세운 태서준은 중요 업무만을 결정하는 숨은 오너였다.
실질적인 총수가 따로 있는 걸 모를 수밖에 없는 사업가들은 채 대표를 <키하젤>의 유일한 수장으로 알고 있다.
“갑자기 입대라니?”
“그렇게 됐다.”
말 그대로였다. 학생 때는 의과대 공부로, 이후에는 배우로 활동하면서 일반인보다 다소 늦은 시기에 입대하게 되었다. 그 이유로 모든 일을 중단해야 하는 서준은 업무정리차 본사에 들른 거였다.
결재서류에 사인한 서준이 입술 끝을 여유롭게 늘이며 말했다.
“나 없이도 잘 해주리라 믿습니다, 채 대표.”
“그게 믿는다고 될 것 같으면 내가 이렇게 불안에 떨겠습니까, 태 대표님?”
“엄살이 심하십니다. 제가 괜히 채 대표와 손을 잡았겠습니까. 제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이 기회에 증명해 보십시오.”
친구에서 사업파트너 관계로 분위기를 전환한 두 남자는 말투부터 달라졌다. 일 앞에서만큼은 진중해질 수밖에 없는 CEO로서의 습성이 반영된 것이었다.
기업의 성장한계 타진과 투자비용 절감. 인수와 매각을 통한 차익획득. 그것들을 조율하는 탁월한 감과 능력은 채 대표가 본 중 태서준이 가히 으뜸이었다.
아직 새파랗게 젊지만, 뛰어난 순발력과 명석한 두뇌가 우선인 사업에서 나이야말로 그저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몸소 입증하는 친구이기도 했다.
그런 태서준이 하루아침에 회사 일에서 손을 뗀다니 채 대표는 엄청난 부담과 무게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 없지만 돌아오실 때까지 버텨보긴 하겠습니다.”
“해보기도 전에 너무 낙담하시면 아예 안 돌아오는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의욕이 불끈 솟습니다. 진짜 잘해 보겠습니다, 태 대표님.”
“좋습니다. 이제야 채 대표답습니다.”
일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대표실 문 앞에 선 서준과 악수한 채 대표가 친구로서 물었다.
“그럼, 연락은 아예 안 되는 거야?”
“알면서 그러네.”
봉 실장을 잠깐 일별한 서준이 장난스럽게 코끝을 찡긋했다. 정 연락할 일이 생기면 봉 실장을 통하면 된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회사 일을 일단락짓고 본사를 나온 태서준과 봉 실장이 차에 오르자 운전석을 지키고 있던 박성호가 뒷좌석을 돌아보며 물었다.
“논현동으로 모실까요?”
“부모님은 봬야겠지?”
서준은 한동안 태석호와 차여진을 대면하지 않았다.
원체 태서준이 은둔형인 탓도 있지만, 부모님은 막내아들을 보기만 하면 결혼하라고 압박만 하니, 결혼에 딱히 관심 없는 서준이 그런 자리를 즐겨할 리 없었다.
그러나 제게 주어진 시간은 오늘뿐이고, 자식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는 지켜야 하는 건 그도 잘 알았다.
“그럼 가회동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래.”
명령이 떨어지자 고급세단은 서준의 본가를 향해 곧장 달리기 시작했다.
20대의 끝자락.
의사로서의 실패, 사업가와 배우로서의 성공. 그 와중에 사적인 삶도 놓치지 않았건만, 바로 그 개인적인 부분이 자신을 가장 많이 지치게 한 요인이었다.
오르막과 내리막, 평평한 길과 굴곡진 길을 가리지 않고 지금까지 종횡무진 달려왔으니 숨이 찰 만도 했다. 서준은 잠시 숨고르기를 할 겸 삶의 변곡점으로 입대를 선택한 거였다. 그리고 오늘로써 떠날 준비를 완벽히 끝마쳤다.
그런데 이 찜찜한 기분은 뭘까.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빼먹은 듯한데 그게 무언지는.
골몰하던 깊고 짙은 눈매가 설핏 가늘어진 건 차가 가회동 인근 교차로를 가로지를 무렵이었다. 서준은 피식, 하며 허탈한 실소를 터뜨렸다.
갖고 싶었지만 내 것일 수 없었다.
그러나 난 아직도 그녀를 원하고 있다.
하지만 그깟 감정이야 일시적 욕망이고 어차피 시간에 희석될 터.
여전히 무엇인지 모를 제 마음을 별거 아닌 것처럼 가슴 깊숙이 찔러넣은 서준은 고요히 가라앉은 시선을 차창 밖으로 던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