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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목숨 줄 (16/51)


16화. 목숨 줄
2023.02.24.



“저기 있는 커피 저 주실 건가요?”

소연은 그의 책상 위에 얌전히 놓인 유명 브랜드 커피를 발견했다.


“분명 차 마시자고 했을 텐데.”

적어도 빈말하는 남자는 아니었다.

그 사실에 보조개가 쏙 들어간 소연의 양 볼에 어여쁨이 앙증맞게 피어났다.


“저 여기서 커피 다 마시고 가도 되죠?”

방금까지 울먹거린 주제에 당당하게 요구하는 배포만큼은 높이 평가해줄 만했다.


“물론입니다, 엄소연 씨.”

우선 앉으라며 소파 쪽으로 가볍게 턱짓한 서준이 시원스러운 보폭을 책상 쪽으로 움직였다.

소파에 몸을 낮춘 소연은 허벅지 중간까지 껑충 올라온 플리츠 미니스커트를 두 손으로 살며시 쓸어내렸다.

그 순간이었다.

제법 커다란 무언가가 소연의 무릎 위로 툭 내려앉았다.


“엇!”

고급스러운 쇼핑백은 겉면에 박힌 중후한 로고부터 흔한 브랜드가 아닌 듯했다.

안에는 노트북도 거뜬히 들어갈 만큼 큼지막한 브라운 계열의 가죽 가방이 들어 있었다. 소연은 얼결에 꺼낸 그것을 양손에 들고 찬찬히 살펴보았다.

샐리백과 백팩이 모두 가능한 지퍼 장식이 포인트인 디자인이었다.


“설마, 저 주신다는 건 아니죠?”

“왜 아닙니까.”

소연이 커다란 눈을 끔뻑거리며 묻자 우아한 동작으로 커피 두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서준은 별다른 대꾸 없이 그녀 옆자리에 착석했다.

고가 브랜드와 거리가 먼 그녀의 차림새는 참으로 소탈했다. 연예인이라면 하나쯤은 있을 법한데도 그 흔한 명품백조차 지닌 걸 본 적이 없으니.

어제 단골 매장에 들렀던 서준은 그게 갑자기 생각나 그녀의 것까지 사들인 거였다. 이유라면 그게 전부인데 무슨 첨언이 필요할까.

오다가 주웠다는 농담도 거창한 듯 서준은 단 두 어절의 무심한 말로 설명을 끝냈다.


“이걸 왜요?”

“그냥.”

“…….”

이 값비싼 걸 주면서…… 그냥이라고?

하긴, 줄곧 화만 내던 사람인데 다른 의미가 있을 리 없지.

서준의 날렵한 이목구비를 한참 응시하던 소연은 머리를 설핏 갸웃하며 커피잔의 빨대를 입술로 가져와 쪽 빨아당겼다.


 

***



“보냈잖아! 당신이 그렇게나 좋아하는 그 돈! 그거면 됐지, 왜 또 전화질인데!”

반포동 호화 빌라 안에서 절규하는 목소리가 날카롭게 새어 나왔다. 친부와 통화하는 유정화가 피를 토하듯 마구 내지르는 소리였다.


“나 미치는 꼴 보고 싶어 그래? 내가 당신 금고야? 대체 얼마나 더 쥐어짜 줘야 그만할 건데!”

-아무리 못났어도 난 네 아빠인데 어찌 그 못된 말본새로 지껄여?

“그 입 닥쳐! 내가 왜 못해!”

정화는 원수보다 못한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렸다. 전화기를 움켜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꿈 많은 시절엔 고왔을 테지만 이젠 탐욕에 찌들어 앙상함만 남은 길쭉한 손이었다.


“당신 때문에 엄마가 어떻게 됐는데!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그런데 아직도 돈타령만 하는 당신이 내 아빠라고? 하! 웃기지 마!”

딸이 계속 악다구니를 쓰자 유병환은 잠시 할 말을 잊은 듯 딸의 이름만 연거푸 불렀다.


-유미경, 미경아…….

“그렇게 부르지 마! 소름 끼쳐!”

오래전에 버린 이름은 듣기만 해도 이가 갈렸다. 손바닥만 한 기계에서 그 이름이 흘러나오자 더는 눈물도 나지 않는 눈시울이 붉은 독기를 머금고 파르르 경련했다.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절색의 여배우.

그러한 수식어답게 빼어난 미모로 곱게 자라 꽃길만 걸었을 것 같은 유정화의 실상은 그와 정반대였다.

유정화는 없고 유미경만 존재했던, 차라리 고아가 부러웠던 어린 시절.

번듯한 회사에 허우대도 멀쩡했음에도 유병환은 돈의 씨만 봐도 그것을 가지고 도박판을 전전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가난과 남편의 온갖 폭력에 시달린 엄마는 도망치듯 집을 나가버렸다.

그 후 8살의 작은 소녀가 감당해야 했던 일은 악몽 그 자체였다.

빨래며 밥을 짓는 일이며, 집안일을 작은 손으로 직접 해야 했던 정화는 한겨울 추위를 홑이불 한 장으로 냉골에서 견디는 일은 허다했다. 심지어 동네 집집을 돌아다니며 돈을 빌려야 그날 하루가 그나마 평온했다.

한 푼도 없는 날엔 동냥해온 돈이라도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딸에게 혹독한 매질을 일삼는 아비란 작자 때문이었다.

불쌍하다며 혀를 차는 사람.

동정하며 다문 얼마라도 작은 손에 쥐여주는 사람.

그들 속에서 눈치 보는 것에 익숙해진 그녀였지만 그건 고생 축에도 끼지 못했다. 15살이 될 무렵부터가 진정한 불행의 시작이었으니까.

그 칠흑 같은 터널을 지나온 정화는 유독 탐스러운 외모 덕분에 배우가 되었다. 그리고 개명하자마자 친부와 연을 끊었다.

그러나 천륜이란 이토록 질긴 거였다.

아빠라는 작자는 아무리 전화번호를 바꾸고 거처를 옮겨 숨어도 기어코 찾아내거나 연락해 왔다.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는 아빠를 쉽게 끊어내기도 어려웠다.

톱스타 유정화는 빈민가 출신이 아닌 부유한 집안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사람이어야 하니까.

유미경은 세상이 아는 유정화와 철저히 다른 사람. 아니, 아예 없는 사람이었다. 부모님은 유학파 재외 교포이고, 그 유복한 가정에서 부족함을 모르고 살아온 유정화는 태생부터 공주였다.

정화는 그렇게 포장된 자신을 거짓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비루하고 초라한 환경과 불우한 가정사에 시달린 유미경을 지워야 모두에게 환영받는 유정화가 될 것이기에. 그러므로 자신은 그저 모두가 좋아하는 모습을 선택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유정화로 성공하는 것에 부모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했다.

강요에 못 이겨 아빠가 모시는 사장 집에서 가정부 노릇을 해야 했던 엄마는 항상 지친 모습으로 귀가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그 이후, 어린 자신이 그 집의 잔심부름부터 가정부 노릇까지 해야 했다.

어릴 땐 회사 사장에게 가족을 바쳐가며 승진에 목매더니, 이젠 딸의 등골을 빼내서 한다는 게 주식이었다. 그랬으면 번듯하게 잘살기나 할 것이지, 주는 돈마다 전부 탕진하고 또 딸에게 손을 벌리는 이 작자가 과연 내 아빠일까.


“당신이 어떻게 아빠야? 내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지!”

-미경아, 네가 이러면 이 아빠가 섭섭하지.

“내 아빠가 아니라니까!”

유병환의 얼토당토않은 소리에 정화는 이성을 잃은 듯 길길이 날뛰었다. 뼈와 살을 파먹는 증오심에 몸부림쳤다.


-너 혼자 잘나서 연예인이 된 게 아니라는 것만 알아 둬! 네 비밀을 끝까지 지켜주는 거로 난 네 아빠의 소임은 다 한 거다. 이쯤이면 무슨 말인지는 알 테지?

“이 미친…… 그게 누구 때문인데!”

생전 처음 사랑했던 남자를 버리면서까지 돈과 명예에 환장하게 된 내가! 갖고도 참을 수 없이 더 갖고 싶은 갈증에 허덕이는 내 탐욕이 누구 때문에 생겼는데!

이 세상은 시궁창 같은 지옥이고 딸에게 악랄한 협박을 들이대는 유병환은 짐승이자 악마였다.

유정화에겐 그랬다.


-잔말 말고 돈이나 더 보내. 오늘 받은 것보다 많…….

“제발 그만!

탁!

아트월에 걸린 자신의 사진액자로 힘껏 전화기를 내동댕이친 정화는 정신없이 미니바로 향했다.


“개새끼……! 내가 반드시 죽여버리고 말 거야!”

혼자 살겠다고 도망친 엄마? 자식을 돈 나오는 기계쯤으로 생각하는 아빠? 하, 웃기지 말라고 해! 날 고아보다 더 고아처럼 만든 게 당신들이잖아!

양주를 병째로 집어 든 정화는 그 많은 양의 술을 목구멍에 콸콸 들이부었다.

꿀꺽, 꿀꺽, 꿀꺽…….

희석하지 않은 원액을 계속 삼키는데도 쓴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독한 양주보다 더럽고 엿 같은 유미경의 삶이 훨씬 더 써서였다.

***

도곡동 아파트 단지로 진입한 한 대의 고급세단이 소연이 거주하는 건물 앞에 부드럽게 정차했다.


“아, 아닙니다. 그냥 있으셔도 돼요.”

숙녀에 대한 예의랄까. 뒷좌석 문을 열어주려고 안전띠를 푸는 봉 실장을 보자마자 극구 만류한 소연은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닫은 차 문의 열린 창으로 몸을 약간 숙인 소연은 앉은 채 고개만 돌려 저를 바라보는 서준에게 다소곳이 인사를 전했다.


“…….”

역시 엄소연답네.

잠시 대꾸를 미룬 서준이 피식 웃었다. 올 때보다 떠날 때의 속도가 몇 배 더 빠른 듯한 여자를 보고 있자니 실소를 참을 수 없어서.

하지만 전적으로 제 주관적인 느낌이라는 걸 모르지 않는 서준은 웃음을 천천히 거둔 입술로 말했다.


“내일 촬영은 언제 끝날지 모르니, 일 마치는 대로 전화하지.”

“정 시간이 없으시면 무리하지 마시고 모레 해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해.”

“네.”

이사실에서 커피만 마신 게 아니었다. 두 사람은 그곳에서 간단히 입을 맞춰 보았다. 태서준을 바로 앞에 두고 대사를 읊자니 어찌나 두근대던지 호흡이 자연스럽지 못했던 게 소연은 아직도 찝찝할 따름이었다.

또, 한 시간 정도 연습을 한 후에는 회사를 나와 저녁 식사도 같이했다.

느닷없는 가방 선물도 그렇고 저번에 치킨을 얻어먹은 보답으로 소연이 사겠다며 서준을 단골 냉면집으로 안내한 것인데, 그와 같이 있어 좋은 것도 좋았지만 냉면에 육전을 곁들여 맛있게 먹어주는 그를 힐끔 쳐다본 그녀의 가슴은 뿌듯함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점점 반말 쓰는 빈도가 잦아진 서준의 말씨에 소연은 왠지 기분이 묘했다. 그와 한 걸음쯤은 가까워진 것도 같으면서 이래도 되나 싶은 노파심도 들었으니까.


‘억울하면 엄소연 씨도 반말합시다.’

 
그가 했던 말이 머리에 둥실 떠오른 순간이었다.


“먼저 들어가.”

서준의 짧은 말투가 또 들려오자 저도 모르게 반말이 튀어나왔다.


“그래, 잘 가.”

저가 저질러 놓고 감당은 안 되는지 소연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건물 입구로 냉큼 뛰었다.


“큭…….”

“!”

“!”

방심하다 한 방 먹은 것이지만, 서준은 꽤 재밌다는 표정으로 피식거릴 뿐. 되레 식겁한 건 앞 좌석의 봉 실장과 박성호였다.


“들으셨죠? 잘 가라지 않습니까. 갑시다.”

서준의 농담 섞인 지시에 세단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건물 안에서 밖을 몰래 엿보던 그녀도 이만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소연은 두 손으로 꼭 쥔 쇼핑백을 부드러운 눈매로 내려다보았다.

과정이야 어찌 됐건 바라만 보고자 했던 남자에게 처음 받은 선물이었다. 그것만으로도 흐뭇한 소연은 입술 끝을 살포시 늘이며 7층에 다다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집 안으로 들어선 그녀가 구두를 벗을 때였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으앗, 깜짝이야!”

현관으로 뽀르르 달려 나온 도순이 소연을 반겼다.

도순이 전세로 사는 옆 동은 조금 작은 평수인데, 그곳에서 종종 건너온 도순은 이렇듯 소연을 놀라게 하곤 했다.


“나 오늘 여기서 자고 가도 돼?”

“여도순이 그러겠다는데 누가 말려.”

거실로 접어드는 동안 도순은 이미 다른 것에 정신이 팔린 상태였다.


“이 가방 뭐야?”

소연의 손에 들린 쇼핑백 안을 들여다본 눈이 휘둥그레졌다.


“꽤 비싸 보이는데? 네가 산 건 아니겠고. 누가 줬어?”

구두쇠는 아니지만, 씀씀이가 알뜰한 엄소연이 거금을 들여 백을 살 리 없다는 건 도순이 더 잘 알았다.


“아, 이거……? 전에 큰언니가 보내준 걸 차 트렁크에 놔두고 깜빡했지 뭐야.”

“예쁘다! 안 쓸 거면 나 주라!”

“이건 안 돼!”

태서준이 준 거라고 솔직하게 말하면 당장 달달 볶일 걸 예상한 소연은 대충 얼버무리며 드레스룸으로 총총히 걸음을 옮겼다.


“이 봐, 이 봐!”

졸졸 뒤따라온 도순이 옷장 한쪽을 쓱 쳐다보며 아깝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쌓아두기만 했지, 쓸 줄을 몰라요. 바깥 공기 한번 못 쐬는 얘네들은 무슨 죄라니?”

말처럼 선반 위의 명품 가방들 전부가 꼬리표조차 떼지 않은 새것인데, 가족들이 조금씩 챙겨준 것이 이젠 그 수가 꽤 되었다.

소연이 이 가방들을 사용하지 않은 건 제 능력으로 마련한 게 아닐뿐더러, 귀한 물건일수록 쓰는 사람의 위치와 맞아야 빛이 날 것인데 저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에 손이 잘 가지 않아서였다.


“그러지 말고 나 하나 주라.”

도순이야말로 장난삼아 던져본 말이었다.

그런데 이래저래 미안한 게 많은 소연은 오늘따라 인심이 후했다.


“좋아. 맘에 드는 거 골라서 너 해.”

“진심이야?”

“이것만 빼고.”

고개를 한 번 끄덕인 소연은 서준에게 받은 가방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마치, 제 목숨 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른 건 다 줘도 이것만큼은 절대 안 된다고 온몸으로 말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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