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검은 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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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검은 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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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검은 인영
2023.03.03.
서준이 본 건 반투명 유리문에 비친 검은 인영이었다.
그자는 조금 연 문틈으로 안을 지켜보다 감쪽같이 사라졌고, 간발의 차로 미세하게 흔들리는 문만 확인한 소연이 동그랗게 떠진 눈을 서준에게 돌리는 그때였다.
똑똑.
연습실 문을 누군가가 노크했다.
성큼 걸어간 서준이 활짝 문을 여니 눈앞에 떡하니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구원후였다.
CN 건물 전체는 보안이 잘 돼 있어 외부인 출입이 불가했다. 더구나 7층부터는 소속 연예인들이 사전에 예약하고 드나드는 통제구역 아닌가. 이 시간, 이 구역에 있어야 할 사람은 엄소연과 저뿐이어야 했다.
그러니 9층 복도에서 누군가가 얼쩡거리는 것부터가 이상한 노릇. 하지만 구원후라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너였어?”
“뭐가.”
“오면서 마주친 사람은 없고?”
“전혀.”
“넌 여기에 왜 온 건데.”
“술이 고파서.”
대표실에서 퇴근하려다 이제 막 연습실에 당도한 원후는 서준의 연이은 질문이 마냥 생뚱맞은지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짧게 대꾸했다.
“트레이닝 끝나려면 아직 멀었는데 무슨 술이야.”
“시간도 늦고 해서 끝났으면 셋이 갈까 했지.”
“회사에 쥐새끼 한 마리가 열심히 돌아다니던데, 한가하면 그거나 잡아.”
“뭐? 쥐? 우리 회사에 그런 게 있을 리 없을 텐데.”
“생쥐 말고 인쥐.”
그 쥐가 설마 저일까 싶은 원후는 농담이 싱겁다는 듯 피식거렸다. 그러나 웃음기 하나 없는 서준의 표정은 과묵하고 진지했다.
“왜, 누가 여길 기웃거리기라도 했나.”
“알았으면 보안팀 단속이나 한 번 더 하고 퇴근해.”
“그래, 난 이만 갈 테니 넌 엄소연 씨 골병들지 않게 살살해.”
뇌리에 스치는 누군가가 있었다. 하지만 확실하지 않은 터라 별 얘기 없이 원후를 돌려보낸 서준은 소연과 연습을 마저 이어갔다.
한 시간이 훌쩍 지나는 동안 소연의 뻣뻣했던 표현력도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졌다. 연기는 인물의 감정을 전하는 것이 실력인데, 그녀는 놀랍게도 그 이상을 해내고 있었다.
“자, 오늘은 그만합시다.”
“좀 괜찮아졌나요?”
“눈빛부터 완전 다른 사람?”
아주 좋았다는 뜻 아닌가. 서준의 표정이 계속 안 좋아 보여 조마조마했던 소연은 이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칭찬하실 줄은 몰랐어요.”
“나, 칭찬한 적 없는데.”
사실을 말한 것뿐인 서준은 재밌다는 듯 피식피식 실소했다.
“아…….”
아, 내가 너무 앞서갔나 보다.
민망해진 소연이 쭈뼛쭈뼛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길고 촘촘한 속눈썹이 큰 눈매의 반을 가렸다. 고혹적이라고 해야 할까. 눈을 깜빡일 때마다 빨려드는 느낌이 유독 강한 이유가 그것에 있는 듯했다.
하나로 묶은 긴 머리칼의 잔머리가 목선을 지나 어깨로 흘렀다. 그녀의 빨개진 얼굴처럼 귀도 차츰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고운 살갗을 만지고 입에 머금었던 케케묵은 감촉이 부지불식 되살아난 서준은 조금만 건드려도 쉬이 물드는 그녀의 살성을 어렵지 않게 기억해냈다. 아니, 그의 몸은 아직도 엄소연의 전부를 속속들이 기억하고 있었다.
귀엽게 안겨 오던 보드라운 감촉.
생소한 흥분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새근대던 숨소리.
차갑던 심장을 간지럽게 녹이던 어여쁜 미소.
그녀의 모든 것에 푹 빠져버린 나.
그 밤, 작고 도톰한 입술이 무척 달았다.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미칠 듯한 황홀감을 내게 안겨준 그녀는 딱히 하는 것도 없는 주제에 내 이성의 마지막 고삐마저 싹둑 잘라버렸다.
그래 놓고.
그랬던 여자가.
난 이토록 그날의 네가 화인처럼 선명한데, 넌 얌전하게 새초롬히 눈만 깔고 있으면 된다, 이건가? 날 한번 엿 먹여 보시겠다, 뭐 그런 거야?
수년 동안 남자의 욕망을 푼 적 없는 서준은 그 겨울밤이 마지막이었다. 그래서 욕구불만이라도 쌓인 걸까. 엄소연 앞에서 충동이 잘 다스려지지 않는 거야 이제 익숙해질 법도 했지만, 서준은 오늘따라 그 정도가 아주 심각했다.
“그런데…….”
얼마간 침묵하던 서준이 불쑥 말하려다 눈살을 찌푸렸다.
“발가락이 보이는 하이힐도 그렇고, 엄소연 씨는 입다 만 그런 옷밖에 없습니까.”
열감이 몰린 어딘가가 몹시 지끈거린 탓에 서준은 날카로운 말투에 성말라진 불만을 섞었다.
“……!”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는 소연이 전면 큰 거울로 눈길을 던졌다. 옷장을 다 뒤져가며 꽤 신경 써서 골라 입은 것이라 뜨끔한 거였다.
다소 짧은 스커트와 속이 살짝 비치는 블라우스는 조금 과한 듯도 했지만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이니 통과. 신발이야 발 전체가 다 보인 들 무슨 죄일까. 화장기 없는 얼굴이 다소 창백했으나 핑크빛 입술 덕에 그럭저럭 뭐.
암만 봐도 평범한 범주에 속하는 제 차림새를 나무라니 소연의 입에서 절로 볼멘소리가 튀어나오는 건 당연했다.
“제 옷이 뭐가 어때서요.”
“엄소연 씨는 아무렇지 않은가 본데, 연기 연습하러 나온 사람 치고는 옷차림이 과하지 않나.”
“제 드레스코드까지 간섭하실 정도로 이사님이 보수적인 줄은 미처 몰랐네요.”
서준의 기습적인 타박을 꼭꼭 씹어 되돌려준 소연의 눈 주위가 뜨끈해진 건 서운해서가 아니었다.
그와 이렇게 마주 보고 있으니 자꾸 떠오르는 얼굴이 있어서. 이 남자와 오차 없이 겹쳐지는 아이의 얼굴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캐나다에 있는 아이가 사무치게 그립고 보고 싶었다.
엄소연의 친모인 조연희 여사는 손주도 귀중하지만 어린 나이에 너무 빨리 엄마가 돼버린 딸아이의 삶도 소중했다.
그래서 누구보다 더 냉정해져야 했던 그녀는 아이와 떨어져선 단 하루도 살 수 없다고 울며불며 매달리는 딸의 등을 억지로 떠밀어 한국으로 보내려 했다.
저와 아들을 모질게 떼어놓으려는 엄마가 야속해 몇 날 며칠을 울기만 했다.
몰래 아이를 데리고 도망쳐 살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자신은 가진 게 없었다. 부모님이 아니라면 아이와 단둘이 지낼 집은커녕, 당장 필요한 돈조차 마땅치 않았다. 현실은 그만큼 냉정했다.
그래서 끝내 독하게 결심했다. 엄마와 아이를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반드시 성공해 보이고 말겠다고. 그렇게 소연은 한국으로 귀국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굳건했던 그 마음이 태서준의 말 한마디에 맥없이 흔들렸다.
서준은 소연의 표정을 보자 아차 싶었다.
내가 너무 세게 말했나?
하지만 롱코트로 전신을 둘둘 말은 그녀였어도 똑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그만큼 서준은 엄소연의 존재 자체를 무척 자극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삐죽거리는 입 모양이 곧 울 것 같았다.
물먹은 눈동자가 강물에 반짝이는 윤슬처럼 유난히도 반짝인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낀 거지만 엄소연은 천성부터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래서 한눈에 반한 건지도.
새하얀 피부, 오목조목한 이목구비, 선연한 그녀 표정이 내비치는 감정은 아무리 봐도 슬픔이었다. 소연의 얼굴로 천천히 팔을 뻗은 서준은 희고 투명한 뺨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려 갸름한 턱을 부드럽게 끌어올렸다.
부지불식 나온 서준의 행동이지만 소연도 저항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내가 예민했나 봐. 울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
“…….”
다정한 손길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지만, 다정한 사과는 더욱 기대할 수 없었다. 더욱이 그의 반 토막 난 말투는 언제 들어도 지나치게 유혹적이라 안 그래도 부서질 듯 뛰는 소연의 가슴은 금세 터지기라도 할 것처럼 난동을 부렸다.
서준의 상체가 자력에 이끌리듯 천천히 기울며 두 얼굴의 간격이 점차 좁아졌다.
등에 닿은 커다란 손이 아래로 미끄러져 허리를 움켜잡을 때까지 소연은 정지 자세로 가만히 있었다. 사실 그녀는 심장마비 직전이라 두 다리로 제 몸을 지탱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운 상태였다.
당장이라도 그동안 있었던 일을 털어놓고 모든 걸 그에게 내맡기고 싶을 만큼. 그의 품에 안겨 맘껏 목놓아 울고 싶을 만큼.
마음이야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의 세상이 그렇게 만만치 않음을 이미 알고 있는 소연은 일순 자신의 나약함에 소스라치도록 깜짝 놀랐다.
이 남자와 또다시 엮인다면. 그래서 지금보다 태서준을 더 사랑하게 된다면 이번엔 정말 작은 출구마저 없어질 것이기에.
정신이 반짝 차려진 소연이 말했다.
“우리…… 이러면 안 되잖아요.”
“왜…….”
까만 눈썹을 꿈틀하며 고요한 음성으로 반문한 서준은 작은 얼굴을 구석구석 더듬은 시선을 갈색 눈동자 속에 깊이 묻었다.
여기서 멈춰야 하는 이유가 뭔지, 웬만해선 멈추기 힘든 저를 어서 이해시켜보라고 다그치는 거였다.
“이사님은 몰라도 전 당장 내일부터라도 이사님 얼굴 못 쳐다봐요.”
“왜 못 보는데.”
다시 묻는 낮고도 투박한 말투는 그녀의 이유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이었다.
“왜긴요. 어색해질 게 뻔하잖아요.”
그럴싸하게 핑계를 댄 소연이 조금만 움직여도 그에게 닿을 듯한 얼굴을 뒤로 뺐다.
“아, 맞다!”
가까스로 서준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소연이 잰걸음으로 캐비닛 안에 넣어두었던 도시락 가방을 꺼내왔다.
“우리 비타민 충전해요. 출출할 때 같이 먹으려고 집에서 넉넉히 싸 왔거든요.”
“이거 먹고 떨어져라?”
“아니죠. 오늘도 집에 데려다주실 거잖아요. 그 작은 보답입니다.”
“하…….”
기가 막힌 서준은 얕은 실소를 내뱉었다.
잘생긴 입술에서 터져 나온 웃음은 허탈함 그 자체였다. 요리조리 잘도 내빼는 게 참으로 그녀다웠으니까.
탁자 위에 간식거리가 소담스럽게 담긴 찬합을 늘어놓은 소연이 어서 다가앉으라 손짓하는 그때였다.
서준은 또다시 반투명 유리에 어른거리는 수상한 자를 포착했다.
이번엔 문이 아닌 창문이었다. 얼핏 보아도 큰 키와 호리호리한 체구가 꽤 평범치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아까 그놈일 확률이 높았다.
“저 새끼, 내가 잡는다!”
소리 없이 으르렁대듯 혼잣말을 나직이 짓씹은 서준은 순식간에 연습실 밖으로 달려나갔다.
***
왜일까.
유정화는 갑자기 왜 나를 찾아온 걸까.
그녀라면 쌍수 들고 받아줄 기획사는 많고 많을 텐데 왜 굳이 CN을 선택한 걸까. 더구나 태서준이 돌아온 이 시점에서.
다 지난 과거라서 쿨하게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전 남친과 재결합이라도 해볼 속셈? 그도 아니면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소속사와 상생해 보려는 걸까?
잠시 생각에 잠겼던 원후는 어렵지 않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태서준과 유정화의 매끄럽지 않은 관계를 배제하고서라도 그의 정확한 직감이 유정화는 무조건 안 된다고 했으므로.
“우리 회사에 관심을 주신 건 영광입니다만 이미 거물급인 유정화 씨에게 CN이 뭘 더 해드릴 수 있겠습니까.”
구 대표는 직설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을 유연하게 돌려 말했다.
영광이니, 거물이니 하며 치켜세워준들 그게 거절의 밑밥인 걸 왜 모르겠나. 하지만 까인 걸 알고도 알은 채 할 수 없는 정화는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친부에게 줄 돈을 아직 마련하지 못했다.
그것 말고도 거액의 돈이 필요하다.
아직까진 화려한 생활을 유지하는 데 큰 문제는 없지만, 이제껏 모아두었던 돈은 기자들의 입막음용으로 줄줄 새어 나가 어느새 바닥을 드러냈다.
그랬다.
그녀의 어두운 과거로 협박하는 건 유병환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품위 유지비로 지출이 커진 정화는 금전적인 압박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로 인해 며칠 동안 전전긍긍하며 생각해낸 게 전속계약금이었다. 마침 현재 소속사와의 계약 만료가 얼마 남지 않았다.
업계 최고인 CN 엔터테인먼트라면 거액의 계약금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더구나 아직 태서준을 잊지 못한 정화에겐 꿩 먹고 알 먹는 일.
오늘 삼성동으로 발길을 재촉한 그녀의 속내엔 그런 사정이 잠재되어 있었다.
돈과 태서준.
이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유정화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자존심에 금이 가지 않는 선에서 제 의사를 한 번 더 피력하는 것뿐이었다.
“최고 회사와 최고 배우가 손잡으면 서로 윈윈 아닌가. CN 엔터테인먼트 아성에 제 이름이 얹어지면 회사 인지도는 물론 주가 역시 급상승할 텐데. 설마, 구 대표님은 그만한 야망도 없이 사업가가 되신 건가요?”
“야망도 능력이 따라주지 않으면 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걸 구분 못 하면 배가 산으로 가는 거고, 사업은 폭삭 망하는 거지요. 유 배우를 모시기엔 우리 회사 그릇이 작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보다 더 크고 견고한 기획사가 또 어딨다고. 좋게 말하면 겸손이지만 유정화 입장에선 연이어 두 번씩이나 대차게 까인 거였다.
당장 모델로 데뷔해도 부족할 게 없는 구원후의 외양은 태서준과 많이 닮아 있었다. 그러나 구 대표를 태서준의 절친으로만 알고 있는 정화는 두 남자가 친구보다 더 끈끈한 혈연관계라는 건 짐작도 못 했다.
5년 전만 해도 < CN 엔터테인먼트 >는 제대로 된 배우는커녕 신인조차 영입하기 어려운 구멍가게에 불과했다.
그 시기에 태서준이 CN 소속 배우가 된 걸 축하는 자리에서 오랜 친구라 소개한 게 전부였을 만큼 서준은 제 개인사를 유정화에게 일절 말하는 법이 없었으니까.
“…….”
하! 구 대표가 지금 이 유정화를 박대했어? 진짜 많이 컸네!
어딜 가나 환영받는 최정상 여배우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구 대표는 그러든지 말든지였다.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 손목시계를 확인한 원후가 회전의자에서 장신을 곧추세우며 미간을 다소 구겼다.
선약도 없이 대표실로 들이닥친 유정화. 달갑지 않은 불청객 때문에 공항으로 출발해야 할 시간이 벌써 20분이나 지체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곧 출장길에 올라야 해서.”
상의 버튼을 정갈하게 채우고 대표실 문을 활짝 연 원후가 예의 바르게 고개를 까딱 숙였다.
어서 대표실에서 나가 달라는 정중한 독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