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미친 짓이라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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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미친 짓이라 해도
2023.03.31.
“햇수로 4년이면 이자도 꽤 붙었겠지?”
엄소연을 회유하는 데 성공한 서준이 까만 눈빛을 반짝였다. 정말 하려던 이야기는 이제부터라는 뜻이었다.
“지금 무슨 말씀을. 제가 알아듣게 말씀하셔야…….”
“아직 계산이 안 끝났달까. 전에는 엄소연 씨가 무언가를 받아야 했지만, 이제 보상받을 사람은 나라는 거지.”
“……?”
안 끝난 계산? 보상? 웬 빚 독촉? 나, 이 남자한테 빚진 거 있어? 혹시, 고리대금 업자세요?
깜짝 놀란 소연은 청명한 하늘에 날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갈색 홍채에 둘러싸인 동공마저 도드라지게 커졌다.
이 남자는 대체 무얼 말하려는 걸까. 숨기는 게 있으니 당연히 긴장될 수밖에 없는 그녀는 의식적으로 웅크려진 가슴을 쫙 펴고 초조해진 눈빛을 곧게 세웠다.
“전, 그런 거 없는데요.”
“과연 그럴까.”
검지로 턱선을 쓰다듬은 서준이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 올렸다. 교만한 듯 오묘한 미소였다. 지금의 제 표정이 더욱 매혹적인 걸 잘 아는 태서준은 비현실적인 자신의 외모를 무기처럼 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심신미약 상태인 나를 단물만 쏙 빼먹은 껌처럼 버리고 사라진 사람이 누구시더라.”
“다, 단물이요? 심신미약은 또 뭔가요.”
두 달 넘게 얼굴을 맞대 왔지만, 그 하룻밤에 대해 아무 소리도 없던 그 아닌가. 아니, 별장에서 딱 한 번 그 일을 꺼낸 적이 있지만, 그걸로 다 끝난 거 아니었어? 그런데 갑자기 왜…….
“이곳이었지. 그날 우리가 함께 있었던 장소 말이야. 난 기분이 울적해서 술을 많이 마셨고, 엄소연 씨는 취한 나를 유혹했지. 기억 안 나?”
“제, 제가요? 제가 이사님을 어떻게…….”
소연은 발끝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찬 기운에 입술마저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날 술을 마시긴 했지만, 그는 분명 취하지 않았다. 많이 마신 거로 치면 내가 더. 그러니 취하진 않았지만, 취했다고 우길 수 있는 사람은 오히려 나일 것이다.
그리고 그 반대라면 모를까, 태서준이 어디 단물이든 쓴 물이든 빼먹을 수 있기나 한 남자인가 말이다.
“아마 가지고 놀기도 했지?”
“뭐, 뭐, 뭐라고요?”
내가 제대로 듣긴 한 건가?
등줄기에 소름이 오소소 돋은 소연은 전신에 식은땀이 꽉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영화 <저주의 칼>에서 보았던 태서준의 살벌한 연기가 스크린 밖으로 튀어나와 현실이 된 듯도 했다.
“제가 노골적으로 행동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덮친 건 이사님이었잖아요!”
“그건 엄소연 씨 생각이고. 당해서 맺힌 사람 기억이 더 선명한 법이니까.”
그날 일을 아무리 곱씹어 봐도 억울할 뿐인 소연의 관자놀이가 파르르 떨렸다. 풍성한 속눈썹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누명이나 다름없다.
그날 아침, 태서준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그가 잠에서 깨기 전 내뺀 건 사실이지만, 이 남자의 기억은 완전 제멋대로 아닌가. 정말 기막힌 말들의 연속이라 소연의 눈동자는 연실 출렁거릴 수밖에 없었다.
점점 말려드는 이 기묘한 기분은 뭘까.
그가 그렇다고 하니 진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마냥 휩쓸려 갈 그녀는 아니었다. ‘내가 정말 그랬나?’ 하는 의심이 뇌리에 깊이 파고든 순간, 소연은 경각심을 바짝 조이며 목청에 힘을 실었다.
“처음 만나 처음 했던 게 키스였어요. 미래에 대해선 어떤 기약도 없이, 순간 끌리는 감정만으로 잤고요. 그런 우리에게 다음 날이 있었을까요? 하다못해 더 만나자는 말이라도 했던가요? 아니잖아요! 우리가 암묵적으로나마 합의한 건 그날, 그 밤이 전부였다고요! 한데, 이사님답지 않게 왜 그런 억지를 부리세요! 갑자기 제게 왜 이러시는 건데요!”
“…….”
차분했던 그녀의 언성이 점점 높아진다.
이런 반응을 기대했던 건 아니지만 나름 재밌어진 서준이 쿡 웃었다. 얘기할수록 휘청거릴 엄소연의 모습이 눈에 선해서. 자신의 말에 크게 발끈하는 그녀를 상상만 했는데도 무척 기대되었다.
더불어 오늘 엄소연에게 받은 충격이 얼마쯤은 상쇄되는 기분인지라, 그래서 더 흔들고 싶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서준은 말끝을 살짝 비틀어 얼마쯤은 장난 같고 얼마쯤은 진실 같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사실 난, 쿨한 거 별로거든. 질척이는 건 기본, 몸도 아무 여자한테나 못 줘. 한 번으로 끝낼 거였으면 너랑 밤을 보내지도 않았다는 얘기지. 이런 내가 엄소연을 잊었을 것 같아?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 너만 생각나니 어떡하겠어.”
좋아한단 진실한 고백은 아니지만, 아주 조금이겠지만, 그도 저를 그리워했다는 소리로 들렸다. 소연은 미약하나마 그와의 공통분모가 있다는 사실에 그만 울컥했다. 하지만 그 감정을 들키기는 싫었다.
“……그래서, 뭘 어쩌시게요.”
목청을 가다듬어 한 톤 낮아진 음성으로 소연이 묻자, 서준은 꼰 다리를 풀고 너른 어깨를 앞으로 숙인 자세로 묵직하게 목소리를 흘렸다.
“한번 맞춰 봐. 내가 무슨 말을 할지.”
“그러니까…… 지금…….”
한 번 잔 사이라 쉬웠는데, 이제 애까지 있다 하니 형편없이 쉬워 보이나? 그런 거야? 원래 이런 사람이었어?
차가운 마네킹처럼 온기는커녕 어떠한 인간미도 내비치지 않는 이 남자. 지금 소연의 눈에 비친 태서준은 그녀가 알고 있던 그 남자가 아니었다. 적어도 노골적인 요구를 입에 담을 사람은 아니라고 믿었었는데, 아닌 게 아닌 것 같았다.
그 생각이 고스란히 투영된 갈색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자 상체를 뒤로 물린 서준이 안 그래도 긴장한 소연의 심장을 더 아프게 꽉 조였다.
“그건 아니고. 그동안 내가 엄소연 때문에 이래저래 쌓인 게 많거든. 크게 바라는 건 아니고, 나와 며칠만 붙어 있자.”
“무슨 궤변이세요!”
빽 소리친 소연이 하늘이 무너진 듯한 얼굴로 서준을 쏘아보았다. 부적절한 관계를 원하는 거라 예상했는데, 제 생각과 틀리지 않음을 인지해서였다.
그러나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 아는 법. 서준은 다음 말을 풀어냈다.
“내가 엄소연을 좋아하는 것 같아. 여자로서 꽤 많이.”
“!”
뜻밖의 고백에 깜짝 놀란 소연이 눈동자가 다 드러날 정도로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맥박은 고압 전원 스위치가 눌러진 듯 미친 듯이 팔딱팔딱 뛰었다.
“조, 좋아한다고요? 저를?”
“그런데 넌 아니잖아.”
“……!”
아니라니요! 난 이미…….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흔들면 백발백중 넘어갈 수밖에 없는.
심장이 난타전이 일어난 듯 마구 뛰었다. 당장 저도 좋아하고 있다는 말이 튀어나올 만큼 미치도록 설렜다. 하지만 그의 제안이 너무 갑작스러운 소연은 좋기보다 의심이 앞섰다. 아니, 겁부터 났다.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며칠 동안 엄소연은 버텨. 난 열심히 흔들어 볼 테니까. 못 견디겠으면 넘어오고, 정말 아니라면 내가 포기할게.”
“대체 왜 이러시는 건데요? 설사 이사님이 그런 마음이었어도 제게 아이가 있다는 걸 알았으면, 있는 마음도 거둬들여지는 게 정상 아닌가요? 제가 싫어지는 게 당연할 텐데요.”
“오늘 엄소연이 고백한 일로 몰랐던 마음을 알게 됐다면, 내 뜻에 따라 줄 텐가?”
“제정신이세요?”
“지극히 정상인데, 왜.”
“아, 아무튼, 그럴 수 없어요. 전 제 아이만 생각하고 싶어요. 제 상황에 이사님까지는 벅차다고요.”
“정 그렇다면 벅차지 않을 정도로만 다가갈게.”
소연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여태 표현하지 않던 감정을 갑자기 내보이는 것부터, 아이가 있는 것마저 상관없다는 그의 적극적인 태도가 당최 이해되지 않았다.
“마, 말도 안 돼!”
“말도 안 되는 일은 현실에 더 많지. 내겐 엄소연이 그런 존재고.”
“제가 거절하면 어쩌실 건데요?”
“예전에 네 맘대로 사라졌으니, 이젠 내 맘대로 할 차례 아닌가. 그래야 공정한 거지. 엄소연도 ‘공정’ 무척 좋아하잖아.”
손끝을 이마에 대며 잠시 무언가를 생각한 서준이 비스듬한 각도로 시선을 들며 말했다.
“우선 내 제안대로 하자.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미련을 못 버리거든. 정 부담스러우면 드라마든 뭐든 전부 엎어도 돼. 하지만 적어도 내게 후회는 남겨주지 말아야지.”
따사롭게 웃는 표정과 매끄러운 목소리는 더없이 자상했다. 하지만 그의 오만한 말속엔 뼈가 그득했다.
“…….”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는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태서준을 멀리해야 하는데 마음은 그럴 수 없다 한다. 반대로 그의 뜻대로 따르자니 아이 문제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비밀을 털어놓자니 진실을 알게 된 그가 받을 충격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아이를 어디까지 품어 줄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소연은 갈팡질팡하는 마음이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붉은 눈시울, 조명 빛에 부서져 반짝거리는 갈색 눈망울, 꽉 다물린 분홍빛 입술, 곧 울 것 같은 얼굴이 조금만 다그쳐도 한없이 무너질 듯했다.
그 슬픈 표정을 집요하게 쪼아대는 서준의 눈길은 무언가를 기필코 찾아내려는 관찰자 같았다.
“차분히 잘 생각해 봐. 시간은 오늘 하루밖에 못 주겠지만.”
서준은 과하게 집착하는 자신을 모르지 않았다. 엄소연을 향한 그것이 사랑인지 욕망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강한 질투에 사로잡혀 이같이 행동했다는 것도.
완전한 내 것.
그 미친 소유욕을 자극한 건 너다.
그 하룻밤, 그 이후부터였다. 너와 함께했던 그것만 생각하면 내 몸은 고삐 풀린 말처럼 달음박질쳤다.
네가 생각나는 밤이면 잠도 잘 못 잤다. 그런데 넌 남자깨나 만난 모양이지? 우리의 처음이자 마지막 밤이 네겐 별거 아일 수도 있다. 그렇게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네가 괘씸해지는 내 불쾌한 감정은 어떡할까.
엄소연을 작품에 꽂아준 건 웃기지도 않는 배려였다. 그러나 이젠 그 가식적인 짓도 못 해 먹겠다. 그러니 이젠 너도 흔들려 봐.
그 거지 같은 기분이 어떤 건지 아는 나처럼.
태서준은 이제껏 터무니없는 베팅을 해본 적이 없다. 그토록 계산적인 그가 무모한 짓에 뛰어들 땐 전부를 던지는 거다. 걷잡을 수 없는 폭주. 서준은 결심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엄소연을 제 여자로 만들어야겠다고.
두 번 다시 어디로든 도망치지 못하게.
그것이 미친 짓이라 해도 기꺼이.
***
객실을 나온 세 사람은 VIP층 로비에서 얼마간 대화를 더 나누고 다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1층 파티장은 한창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그곳으로 향하는 원후를 먼저 발견한 건 여진이었고, 그를 불러 세운 건 여정이었다.
“원후야! 이 녀석, 안 그래도 한참 찾았잖니. 전화해도 안 받더라만, 넌 어디서 뭐를 한 거야?”
“급한 일이 좀 있었습니다, 어머니.”
때때로 불같은 성격을 드러내는 여정이 빠른 어조로 질문을 떠안기자 원후의 부드럽던 인상이 대번 딱딱해졌다.
“하여튼, 오늘 같은 날 별실에 들어 눈도장이라도 찍으면 좀 좋아. 이제 너도 결혼을 생각할 나이인데 언제까지…….”
“아, 참!”
말허리를 가로채는 솜씨가 능란했다. 잔소리하는 여정의 어깨를 한쪽 팔로 다정하게 감싼 원후는 권 작가와 윤 감독을 두 부인에게 소개했다.
“인사부터 하시죠. 여기는 곧 방영될 드라마를 제작 중이신 윤 감독님과 권 작가님, 이쪽은 제 어머니와 이모님이십니다.”
“안녕하십니까, 윤지완입니다.”
윤 감독이 여진과 여정에게 정중하게 예를 갖추며 고개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권은영……입니…….”
그러나 어렴풋이 인사를 건네던 권 작가는 차여진을 빤히 쳐다보느라 말끝이 흐려졌다.
경제 뉴스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모를 수 없는 셀럽 중 셀럽, 재벌이라는 명칭과 더불어 사회 지도자라고 일컬어지는 굵직한 기업인들 사이에서도 단연코 일인자인 태석호 회장의 아내, 차여진 여사를 한눈에 알아본 거였다.
사업 수완도 비상해, 외모도 출중해, 구원후는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로열패밀리의 일원. 그러니 그 집안 안주인의 위상은 어떠하겠나. 하지만 그러한 차여정도 언니 옆에선 빛 좋은 개살구였다.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재력과 빼어난 아름다움은 물론 기품마저 독보적인 차여진의 자태에 눈을 뗄 수 없는 권 작가에게 차여정은 그저 투명인간이었으니까.
그 때문이었다.
“원후야, 서준이는 어디 있니?”
불쾌감이 찌든 눈초리를 애써 진정시킨 여정이 다소 뾰족한 말투로 조카를 찾았다.
“객실에 있습니다.”
“혼자?”
“그건 아니고…….”
두 모자가 묻고 대답하는 동안 윤 감독은 이만 실례하겠다는 눈인사를 끝으로 파티장 안으로 들어갔고, 걸려온 전화를 받느라 핸드폰을 귀로 가져간 권 작가는 파티장 옆 모퉁이를 돌아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
“혹시, 여자랑 있다니?”
태서준을 궁금해하는 건 여진인데 꼬치꼬치 캐묻는 건 여정이었다.
“그렇긴 한데, 두 분이 생각하시는 그…….”
그런 게 아니라고, 원후가 입을 떼려던 동시에 여정이 말꼬리를 잡았다.
“짧게 대답만 하면 될 걸, 서론이 장황하구나. 그러니까 더 수상쩍잖니.”
“수상할 게 뭐가 있습니까.”
“됐다, 우리가 직접 올라가서 보면 되지.”
“지금이요?”
소연의 굳은 표정 때문이라도 원후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객실에서 졸지에 벌어진 열띤 토론은 얼추 좋은 방향으로 진화됐으나, 전혀 몰랐던 캐스팅 내막을 알게 된 엄소연은 적지 않게 혼란스러울 터.
그 깔끔치 못한 기분을 서준이 풀어주고자 그녀를 룸에 남게 했으리라는 걸.
“일 때문이니, 가시더라도 나중에 가시죠.”
“아무리 일이 좋아도 그렇지, 남녀가 단둘이서 호텔 룸에 있을 일이니? 언니, 어서 가 봅시다!”
남편의 불륜 현장이라도 급습하는 듯, 여정은 엘리베이터 쪽으로 여진을 잡아끌며 바삐 걸음을 옮겼다.
“어머니, 이모님, 제 얘기 좀 들어보시라니…….”
갔네, 갔어! 이럴 땐 행동도 엄청 빠르시지.
이미 엘리베이터 문은 닫혀버렸다.
그쪽으로 걷는 원후의 잇새로 꺼질 듯한 한숨이 비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