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삶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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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삶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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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삶의 무게
2023.04.07.
소연은 밤새도록 한숨 쉬며 고민했다.
‘며칠 동안 엄소연은 버텨. 난 열심히 흔들어 볼 테니까. 못 견디겠으면 넘어오고, 정말 아니라면 내가 포기할게.’
‘예전에 네 맘대로 사라졌으니, 이젠 내 맘대로 할 차례 아닌가.’
‘차분히 잘 생각해 봐. 시간은 오늘 하루밖에 못 주겠지만.’
어제 태서준이 했던 말은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도 뇌리에 계속 맴돌았다.
첫눈에 욕심나는 남자였다. 그리고 몇 년의 세월을 건너뛰고 다시 만난 그는 처음의 그와 매우 달랐다. 첫인상이 우아한 신사였다면 지금은 고고한 맹수 같았다. 하지만 소연은 현재의 태서준이 싫지 않았다.
끌림은 더 강렬하고, 그를 향한 욕망은 더욱 뜨거워질 뿐이었다. 그래서 뒷걸음질 치면서도 눈은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거였다.
그리고 어제저녁, 서준은 객실로 들어선 어머니와 이모님을 소연에게 소개했다.
떨리는 속마음을 감추며 두 부인에게 공손히 인사했지만, 엄소연이 심적으로 그리 중압감이 든 것도 처음이었다. 한발 늦게 객실로 들어온 구 대표도 의식하지 못할 정도였으니.
그 순간 소연의 마음은 오로지 태서준 하나만을 의지했고, 시선 역시 그만을 향해 있었다.
‘어머니가 오해하신 겁니다. 1층 로비에서 작가와 감독도 보셨겠지만, 작품 회의가 있었다고 제가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 일 때문에 엄소연 씨와 서준이는 따로 더 할 얘기가 있었습니다.’
왜 둘이 있는 거냐는 이모님의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있었지만, 구 대표의 적절한 답변 덕분에 소연은 난처한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차여진과 차여정이 룸에서 나간 이후, 서준은 자신의 차로 소연을 도곡동 아파트 출입문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감사합니다.’
‘야박하게 차 한 잔 마시자는 소리도 없네.’
‘그럼 잠시 올라가실래요?’
‘엎드려 절받기는 사양입니다, 엄소연 씨. 푹 쉬고 내일 봐.’
그 말을 끝으로 서준은 그곳을 떠났지만, 소연은 그가 떠난 자리에 한참 머물러 있었다.
삼킬 수, 그렇다고 뱉을 수도 없는 담결이 태서준이었다. 머리에선 그를 밀어내라는데, 가슴은 그를 절대 놓지 말라 하니까.
근 2개월 동안 태서준이 던지는 혼란에 치이고 흔들리면서도 그를 애타게 바랄 뿐인 소연은 그가 제시한 유혹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애초에 딱 잘라내지 못하고 머리에 쥐가 나도록 고민하는 건 이미 그쪽으로 갈피를 잡은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 누구도 아닌 태서준이었다.
독이 든 사과인지 다디단 열매인지는 먹어 봐야 아는 거니까.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그냥 놔두고 싶은 소연은 이만 복잡한 생각을 털어냈다.
어느덧 정오가 되었다.
오늘 하루도 잘 살아내기 위해 소연은 사부작사부작 움직였다. 한없이 가라앉았던 기분이 어느새 기쁨과 흐뭇함으로 부풀어 올랐다.
이제 곧 화상 통화로나마 신이 제게 허락한 가장 값진 선물, 제 인생에 가장 소중한 보물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그 기분에 찬물을 끼얹은 건 여도순이었다.
“풉! 그러고 나가게?”
노란색 원피스를 입은 소연이 거실로 나오자 소파에 누운 채 머리만 들어 올린 도순이 혼자 보기 아깝다는 듯 웃으며 입매를 실룩거렸다.
이제 닷새 후면 태서준을 원 없이 볼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절로 콧노래가 나오는 도순은 일찌감치 바로 옆 건물인 소연의 집으로 건너왔다. 그리고 스페인으로 가져갈 여행 가방을 꾸려 놓고 이제 막 거실에서 한숨 돌리던 차였다.
“왜. 이상해?”
소연이 제 차림새를 요리조리 훑어보며 물었다.
머리 위를 장식한 머리띠와 원피스가 전부 노란색이라 좀 유치찬란하긴 했다.
“이상한 것보단 키즈 카페에서 알바하는 사람 같아.”
“그렇게 보인다니 성공이네.”
소연과 눈만 마주쳐도 까르르 웃어 재끼는 엄현우. 아빠 없이도 잘 자라주고 사랑스럽게 잘 웃는 현우는 노란색을 좋아했다.
“아! 현우 때문이구나?”
이제야 노랑 노랑 하게 차려입은 이유를 알아차린 도순이 무르팍을 탁, 내리쳤다.
“그래. 모처럼 시간 맞춰 영상 통화하려고.”
“어쩐지……. 아 참, 난 집에 좀 다녀올게. 냉장고가 텅 비었던데 먹을 것 좀 가져오려고.”
먹을 것도 먹을 거지만, 도순은 슬쩍 자리를 피해준 건 랜선으로나마 아들과 오붓한 시간을 가지라는 친구로서의 배려였다.
***
유정화와 유병환이 마주한 한정식집 독채는 살얼음이 낀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쩝쩝, 소리를 내며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병환의 입을 정화는 따갑게 쳐다보고만 있었다. 제 아빠지만 참으로 탐욕스럽고 철면피인 사람을 보고 있자니 구역질이 절로 났다.
“미경아, 너도 어서 먹지 뭐해?”
이런 진수성찬이 얼마 만인지. 병환은 딸을 걱정하는 듯 지껄이면서도 정화 앞에 놓인 그릇까지 넘봤다.
“다 드셔.”
이게 당신과 나의 마지막 식사이고, 오늘이 천륜도 끝인 날이니까.
정화는 네일아트로 곱게 단장한 손으로 음식이 담긴 사기그릇을 유병환 앞에 놓아주었다.
“뭐냐, 다이어튼지 뭔지, 그거 하는 거냐? 그럴 거면 이곳으로 왜 나를 불렀어? 음식을 남기는 게 얼마나 큰 죄인데.”
딸이 내민 접시를 싹싹 긁어먹던 병환은 입가심으로 맥주를 쭉 들이켰다.
“크! 이 맛이지……!”
음식을 대접하고, 흔쾌히 먹어주고. 겉으로 보기엔 지극히 정상적인 부녀지간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맹점은 비틀린 부성애, 아비가 딸의 등에 빨대를 꽂고 골수까지 지독하게 빨아먹는다는 거였다.
명품 시계에 번지르르하게 차려입은 양복 하며, 주름살 없는 호남형 얼굴까지. 그야말로 멀쩡한 허우대로 그 많은 돈을 어디에다 퍼붓고 다니는 건지. 밑 빠진 독이 따로 없었다.
기생충보다 더 쓸모없는 인간, 가족의 사골까지 우려먹을 작자였다.
최고 여배우란 수식어를 거머쥐고도 아직 지옥 같은 가족관계에서 탈출하지 못했다. 그 끔찍한 현실에 구토증이 몰려든 정화는 아빠라고 부르기도 싫은 유병환을 빤히 쳐다보며 입술을 사리물었다.
“나, 당신 딸 맞아?”
목구멍에 잔뜩 낀 이물감을 간신히 참아낸 그녀가 묻자 젓가락질을 멈춘 유병환이 떨떠름하게 웃었다.
“아무렴, 당연한 걸 왜 물어?”
“당신이 지긋지긋해서.”
“뭐, 지긋지긋? 얘가 어디서 막돼먹은 소리를 함부로…….”
병환이 말하다 멈춘 건 정화가 핸드백에서 무언가를 꺼내서였다.
“길게 얘기 안 해. 이거로 확실히 끝내요. 이 유정화가 돈 빌린 사람이 수두룩하다는 걸 누가 알까. 난 그게 제일 겁나. 이 모두가 당신 때문이잖아!”
“행여나. 네가 겁 없는 애라는 걸 내가 아는데?”
“시끄럽고. 당신한테 더 퍼 줄 돈이 없다는 것만 알아둬요!”
매번 듣는 말이라 병환은 우선 식탁 위로 던져진 통장 안의 금액부터 확인했다.
“마지막이라면서 고작 이거냐? 흐흠, 이거로는 어림없는데. 빌딩 한 채 살 정도는 돼야…….”
지금 받은 액수만으론 절대 만족할 수 없는 병환은 뱀 꼬리처럼 말끝을 길게 늘였다.
“하,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뭐, 그래서 더 주겠다는 거냐, 말겠다는 거냐?”
병환은 유들유들한 말투로 딸의 불편한 속을 더 들쑤셨다.
“…….”
정화는 친부의 지나친 물욕에 돌아버릴 만큼 진저리가 쳐졌다. 그러나 이미 예상한 일이었고, 그래서 더 준비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 방법까지 쓰고 싶지 않은 것도 사실.
약간의 망설임 때문에 정화가 한참 잠자코 있자 병환은 딸을 살갑게 불렀다.
“미경아…….”
그러나 그의 입은 곧장 막혔다. 제 이름에 발작하는 정화의 목소리에.
“그래! 당신한텐 단물 쓴 물 다 빼준 유미경이 있었지! 하지만 당신이 팔아먹은 딸, 미경이는 죽었어! 그런데 없는 걔를 왜 자꾸 찾아! 내가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어! 난……유정화라고!”
부모? 웃기지 마! 이 같지도 않은 미친 새끼야!
“좋아, 더 드릴게! 하지만 천륜인지 뭔지, 그 질긴 연도 그거로 끝인 건만 알아둬요!”
정화가 발악한 이후 얼마간의 정적이 흘렀다.
딸의 흥분이 조금 누그러진 것도 같았다. 이때를 기다리며 눈치만 보던 유병환은 정화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다시 슬쩍 꺼냈다.
“해서, 네가 더 준다는 게 얼마이고, 언제 줄 건데?”
“당신이 상상하는 그 이상. 내일 당장 줄게.”
정화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초겨울 가뭄처럼 건조했다.
분노하는 것마저 단념한 듯이.
***
서울은 낮이지만 밴쿠버는 저녁이었다.
소연의 엄마, 조연희가 똘똘하게 생긴 아이를 품에 안고 화면 속에 있었다.
“하이, 마이 썬.”
-알러뷰, 맘.
거치대에 고정한 핸드폰을 마주한 소연이 아들을 향해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우리 현우 잘 있었어?”
-엄마가 많이 보고 시퍼떠요.
“엄마도 우리 현우가 아주 아주 많이 보고 싶었……”
아직 30개월을 채우지 못한 작은 아이는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긴 속눈썹이 진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울컥한 소연이 하던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눈시울 역시 어김없이 붉어졌다.
“우리 현우 이제 잘 시간이네?”
-웅! 함머니가 삼십 밤만 자면 혀누 데리고 서울 갈꼬래요. 그래또 혀누는 매일…….
아이가 앵두처럼 발그레한 입술을 오물거리며 쫑알쫑알 열심히 말했다. 아직 여물지 못한 발음이지만 그래서 더욱 애틋하고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그런 연유로 한번 올라간 소연의 눈매와 입술이 더 길어져 내려올 줄 몰랐다.
“엄마도 빨리 보고 싶어. 현우보다 더 많이……. ”
젖은 호흡이 흐트러지고 음성마저 미세하게 떨렸다. 하지만 눈물은 절대 흘릴 수 없기에 소연은 더욱더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눈부신 딸의 미소가 어떤 의미인지 잘 아는 연희 또한 울컥했다. 그러나 모전여전인지 연희의 목소리는 더없이 밝고 강직했다.
-우리 현우 많이 컸지? 아프지 않고 잘 커 줘서 얼마나 대견한지 몰라. 그런데 넌 괜찮은 거니? 감기 같은 건 좀 걸러도 되련만, 환절기마다 한 번씩 크게 앓는 너잖니. 전보다 좀 야윈 것도 같고.
“그래도 이번 봄엔 감기 안 걸렸잖아요. 그리고 내가 얼마나 건강한데. 엄마가 보내준 영양제 꼬박꼬박 잘 챙겨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으니 염려 말아요, 엄마.”
-건강은 장담하는 거 아니야. 아무튼, 현우를 생각해서라도 네 몸은 네가 잘 챙겨야지.
내리사랑이라더니, 연희는 자식 걱정에 여념 없었다.
“저, 곧 해외 촬영 나가요. 그 일 마치고 돌아오면 엄마랑 현우 볼 수 있겠다.
-그래. 네 아빠도 네가 드라마에 출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좋아하시더라. 그래도 너무 잘하려고 무리하게 애쓰지는 마라. 일도 일이지만 너 자신을 잘 돌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도 없으니까.
“그럼요, 엄마. 명심할게요.”
-특히 촬영장에서 몸조심하고. 지난해 사고 났을 때, 우리가 얼마나 놀랐니. 넌 얼마나 많이 힘들었고.
“알아요, 엄마. 저 진짜 조심할게요.”
더 이야기했다간 눈물샘이 폭발할 것 같은 연희는 이만 딸과의 대화를 줄였다.
-스페인이라고 했지? 아무튼, 누누이 하는 얘기지만 제발 조심해. 너 또 다치면 난 못 산다.
“히힛.”
-속도 없이 웃지만 말고!
“네, 잘 알아 모실게요, 엄마”
소연은 현우와 연희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며 화상 통화를 종료했다.
그러나 오물거리는 작은 입술과 고사리 같은 손을 꼬물대며 ‘안녕’이라고 작별인사를 하는 아이의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걸 어떡할까. 그래서 눈물로 흐려지는 시야였다.
눈물을 펑펑 쏟아내며 욕실로 이동한 소연은 차가운 물로 얼굴을 적셨다.
눈물인지 물인지 자신도 알 수 없게.
그러나 혼자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와 같은 눈물은 아무리 게워내도 줄어들지 않는 화수분 같았다.
잠시 후 소연이 축 처진 어깨로 욕실을 나와 문은 닫을 때였다.
“엄마야!”
소스라치게 놀란 소연의 등이 욕실 문에 쿵, 부딪쳐 둔탁한 소리를 냈다.
아무도 없어야 할 소파에 누군가가 떡하니 앉아 있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만, 그 누군가가 태서준이라 소연은 몇 배 더 놀라버렸다.
처음엔 환영인 줄 알았다. 제 마음속에 늘 살아 숨 쉬는 그의 잔영이 아주 잠깐 망막에 스친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보고 또 봐도 그인 데다가 들려오는 매끄러운 목소리마저 그였다. 제 눈에 보이는 그는 분명 현실이었다.
“귀신을 본 것도 아닌데. 너무 놀라진 맙시다, 엄소연 씨.”
“이, 이사님이 여길 어떻게…….”
“도어클로저가 망가져서 문이 열려 있었어. 더구나 화상 통화하는 엄소연 씨를 방해하기 뭐해서 그냥 지켜봤지.”
“……!”
들켰다!
순간, 그가 뭐라도 알아챘나 싶은 소연은 덜컥 겁부터 났다. 새된 가슴이 한 번 더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서준은 짙은 눈빛으로 집안을 쓱 둘러보았다. 그의 눈길에 제일 먼저 닿은 건 부서지는 햇볕에 곱게 물든 레이스 커튼이었다.
조금 열린 발코니 창틈으로 들어온 바람이 새하얀 커튼을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