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저, 안 울었는데요 (37/51)


37화. 저, 안 울었는데요
2023.05.08.



 
깃털 같은 무게감이 서준의 가슴에 툭, 얹어졌다.

아직 새벽녘이지만 잠에서 깬 서준의 눈길이 저절로 꼼지락거리는 소연의 작은 손에 닿았다. 그녀의 귀여운 움직임이 여간 기분 좋은 게 아니었다. 서준의 입매가 부드럽게 휘어진 건 가슴 부위가 간지러운 것보다 왠지 뿌듯해서였다.

어젯밤, 소연은 한숨을 폭폭 내쉬며 위스키만 홀짝거렸다.

조그만 머릿속엔 무슨 생각이 그리 많은 것인지, 말도 없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이다.

술이 과했던 탓일까. 어느 순간 까딱까딱하던 머리가 서서히 앞으로 기울었다. 그리고 테이블로 고꾸라지기 직전, 그녀의 이마를 떠받친 서준은 그대로 있을 수 없어 소연을 침대에 눕히고 술이 깨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온종일 돌아다닌 피로감이 쌓인 데다 대화하며 펑펑 울어서인지 소연은 깨어나기는커녕 급기야 쿨쿨 잠들어버렸다. 그러니 어떡할까. 엄소연이 정신 차릴 동안 옆에 잠시 몸을 누인다는 게 서준도 그만 스르르 눈이 감기고 만 거였다.

그런 연유로 본의 아니게 동침하게 된 두 사람은 세상 모르게 깊이 잠들었고, 아침이 되도록 서로에게 체온 나눠주며 뒤엉켜 있었다.

지독할 만큼 꽉 채워 실컷 안아야만 만족될 줄 알았다.

그런데 그녀와 한 침대에 있는 것만으로도 서준은 꽤나 만족스러웠다. 그녀가 옆에 있기만 해도 늘 시리기만 했던 가슴이 따스해지는 기분이었으니까.

이렇게만 있어도 더는 아쉽지 않을 것 같았다. 수년간 가슴에 박혀 도통 빠지지 않는 이물감이 싹 사라진 것도 같았으나, 이 순간이 무엇보다 썩 맘에 드는 건 엄소연이 제 여자처럼 느껴진다는 거였다.

내 품으로 다시 돌아온 작은 새.

이미 폭 안겨 있지만 두 팔로 더욱 포근히 감싼 서준은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서준의 단정한 입매가 다시 한번 긴 호선을 그리며 매끄럽게 올라붙었다. 이젠 엄소연이 없으면 안 되는 자신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미소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서준은 제 몸 어딘가가 축축해지는 걸 감지했다. 자세히 보니 엄소연의 뺨이 닿은 어깻죽지가 미지근한 물기로 젖어 들고 있었다.


“음…… 으윽…….”

얼마 안 있어 소연의 입에서도 끙끙 앓는 소리가 띄엄띄엄 작게 흘러나왔다.

안간힘을 써도 전혀 움직여지지 않는 육신. 크게 울부짖고 싶어도 성대가 꽉 잠겨 절대 나오지 않는 목소리. 그것이 너무 괴로워 툭 터져버린 눈물방울이 서준의 옷을 적셨다.


“가, 가…… 가지 마…… 흐윽…….”

잘 자는가 싶었는데, 가위에 눌린 것 같았다. 서준은 눈도 못 뜨고 힘겨워하는 소연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 엄소연!”

“하……!”

서준의 목소리에 눈이 떠지고 막혔던 숨통이 트였다. 하지만 소연의 정신은 아직 악몽 속에 머물러 있었다.


“아, 아, 아무리 내가 잘못했대도 어떻게 그래! 난 현우 없이 못 살지만, 당신은 아니잖아! 그러니까 제발, 제발 데려가지 말아……흑흑…….”

“쉬…… 괜찮아, 괜찮아…….”

아이 아빠를 저라고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서럽게 울먹이는 소리도 대충 무엇 때문인지 알 것 같은 서준은 주먹까지 제게 휘두르는 소연을 바짝 끌어와 머리와 등허리를 토닥토닥 쓰다듬었다.


“괜찮아, 엄소연…… 꿈이야, 꿈…….”

“흐윽……지, 진짜……요?”

“그래, 나쁜 꿈.”

“엉엉…… 흐어헝…….”

꿈이란 말에 한시름 놓긴 했지만, 너무 놀란 소연은 서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얼마간 목놓아 울었다.

서준은 소연의 울음이 그칠 때까지 계속 토닥거리며 그녀를 안정시켰다.

그러나 그의 까만 눈동자는 불편한 심기, 그 이상의 노여움을 게워내고 있었다.

스페인행 비행기 안에서 엄소연에게 들은 사연이 생각나서였다.

그 남자와 헤어진 건 말 못 할 사정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곁에 없었지만 아이는 저가 더 많이 사랑한 사람의 아이라서 기쁘게 낳을 수 있었단다. 그리고 아이 아빠는 부모님이 부질없는 희망이라도 품으실까, 죽었다고 했단다.

실수든 뭐든, 가장 필요한 순간 제 아이와 여자를 내팽개쳤다. 그것만으로도 책임감 따윈 밥 말아 먹은 놈이 틀림없다. 그 거지 같은 개새끼는 대체 누구이기에 꿈에까지 나타나 엄소연을 울게 만드냔 말이지…….

서준의 노기는 시간이 점철될수록 짜증으로 옮겨붙었다.

얼마나 사랑했으면 그 남자가 곁에 없는데도 아이까지 낳았을까, 라는 생각과 그 못난 새끼를 지키자고 부모님께 맹랑한 거짓말까지 한 엄소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짜증스러움도 잠시였다.

머리를 화들짝 들어 올린 소연이 침실을 휘휘 둘러보자 서준도 얼결에 그녀의 시선을 따라갔다.


“여긴 이사님 침실? 내가 왜 여기에서 자고 있어요?”

“그걸 내게 물으면 난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술 먹고 뻗은 사람한테.”

“아…….”

내가 취했었나? 아니, 가만 생각해 보니 취한 것보다 너무너무 졸렸다. 그래, 맞다. 자포자기가 되어 그냥 잤다.

제 잘못을 시인하듯 소연은 시선을 떨구며 잠시 가만 있었다.

그랬다.

태서준과 자신이 이어질 수 없는 수많은 이유와 아이에 대한 걱정으로 그녀의 머릿속은 포화상태가 되었다.

분명 그와 자신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포기하자고 다짐했으면서. 그와 눈을 마주치면 마음 한편에 자꾸만 욕심이 자라났다. 갈대처럼 흔들리는 생각에 어느 순간 지쳐버렸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태서준에게 기대 쉬고 싶었다.

괜히 무안해진 소연은 볼멘소리로 작게 투덜거렸다.


“취해서 인사불성 됐으면 제 방에라도 옮겨 놨어야죠.”

“좀 무겁더라고.”

“힉, 무겁다니요? 저 되게 가벼운 사람인데, 그게 말이 돼요?”

소연이 따져 묻자 서준은 씩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원래 있었던 자리로 되돌려 놓았다. 그 때문에 커다란 손과 탄탄한 가슴 사이에 끼인 소연의 두 볼이 눌린 찰떡처럼 납작해졌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더 자자. 아직 새벽이야.”

“……”

더 자라고?

이제라도 내 방으로 돌아가야 하는 건지, 이대로 있어도 되는 건지.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이젠 나도 잘 모르겠다.

그는 잠깐 사이에 잠든 것인지 벌써 고른 숨소리를 냈다. 여전히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소연은 한동안 눈만 깜빡거렸다.

***

카디스는 말라가에서 자동차로 약 3시간 정도 달리면 닿을 수 있는 항구도시다.

현지 촬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건 사흘 후부터지만, 미리 스페인에 입국한 드라마 제작팀은 곧 숨 가쁘게 진행될 촬영 준비에 만반을 기하고 있었다.

봉 실장과 박성호는 한 시간 전 제작진이 머문 카디스로 출발했다. 서준은 온전한 두 사람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두 남자를 며칠 먼저 촬영지로 보낸 거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매일 출근하는 사용인 모두에게도 내일과 모레, 이틀간 저택 출입을 금지했다. 따라서 오늘을 포함한 사흘 동안 이 저택에 있는 사람은 서준과 소연뿐이었다.

오전 시간을 사뿐히 건너뛰고, 정오가 다 되어갈 무렵이었다.

서준은 주방에서 브런치를 뚝딱 만들어 침실로 가져왔다. 새벽을 뜬눈으로 지새우다 오전이 돼서야 다시 잠든 엄소연을 위해서.

샐러드, 해물 토마토 스튜, 통밀빵과 치즈 햄 등등과 신선한 과일주스. 베드 트레이에 놓인 음식들은 하나 같이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이 저택에 둘 뿐이라는 걸 방금 들은 소연은 그가 만들어온 음식을 다소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걸 다 이사님이 만드셨어요?”

소연이 묻자 그녀 맞은편에 앉은 서준은 느긋하게 토마토 스튜에 빵을 찍어 먹으며 간단히 답했다.


“밀키트.”

“우와! 스페인에도 그런 게 있어요?”

“없진 않겠지만, 이건 내가 준비해두라고 주방에 미리 얘기했지”

“아, 역시…….”

역시 꼼꼼한 사람은 뭐를 해도 치밀하지.

뒷말을 생략한 대신 히죽 웃어버린 소연은 샐러드를 아작아작 맛있게 씹어 삼켰다.


“엄소연 씨 요리 솜씨는 어때?”

“제가 자취 생활 몇 년째인데요.”

“자신 있나 본데, 네가 해 준 거 한번 먹어 보고 싶네.”

“뭐…… 기회가 닿는다면…….”

그는 그냥 해 본 소리겠지만 프러포즈라도 받은 듯 심장이 크게 요동친 소연은 어물쩍 말끝을 늘였다.

스페인에 온 이후로 줄곧 태서준과 함께했다.

그리고 오늘은 같은 공간에서 자고 일어났다. 또, 햇살 가득한 이국적인 침실에서 태서준과 마주 보며 점심을 먹고 있다.

그 설레는 분위기가 만들어낸 기분이지만 소연은 마치 신혼여행을 온 것 같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행복한 상상에 불과했다.

소연은 불현듯 새벽녘에 시달렸던 악몽을 떠올랐다.

아들과 꽃이 흐드러지게 핀 정원에서 한가로이 놀고 있었다. 분명 그랬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태서준과 그의 가족들은 현우를 데리고 이 저택 중앙 계단에 걸린 그 초상화 속으로 사라졌다.

아들을 붙잡으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별안간 엄청난 무게의 바위에 하반신이 깔려버렸으니까. 그래도 몸부림치며 초상화 쪽으로 팔을 뻗는데, 별안간 현우를 폭 감싸 안은 태서준이 바로 앞에서 차가운 눈빛으로 저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어느 틈에 그 옆으로 딱 붙어 선 유정화가 저를 비웃고 있었다. 너 따위가 감히 넘볼 수 있는 태서준이 아니라는 것처럼.

오죽하면 그런 꿈까지 꿨을까.

꿈과 현실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제 상상과 자신이 처지가 꽤 많이 동떨어져 있음을 직시한 소연의 마음은 헛헛해질 뿐이었다.


“자주 그래?”

서준은 심각하게 물었다. 아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잠깐 본 것이지만 소연의 얼굴에 스친 어두운 표정이 왠지 제 탓인 것 같아서. 그녀가 악몽을 꾼 것도 아이 아빠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은 기시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작 엄소연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빛으로 되물었다.


“뭘요?”

“자다가 우는 거.”

“제가요? 언제요? 저, 안 울었는데요.”

습관이 무서웠다. 아니, 아이 일에서만큼은 절대 물러설 수 없는 방어 본능이 시킨 것이다. 제가 운 걸 그가 분명 보았고, 그건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으면서도 소연은 천연덕스럽게 시치미를 뚝 뗐다.


“그래?”

뻔히 내가 알고 너도 알 텐데 왜 이러실까.

서준이 웃는 낯으로 되물었으나 소연은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었다.


“글쎄, 그런 적 없다니까요.”

거짓말쟁이로 찍히는 한이 있어도 어쩔 수 없었다.

꿈속의 일을 말해버리면 그 악몽이 현실이 돼버릴까 봐. 현우를 영영 잃어버리게 될까 봐.

소연은 그것이 몸서리쳐지도록 두려웠다.

***

늦은 오후, 소연과 서준은 노을 진 해변을 거닐었다.

발가락 사이로 모래가 부드럽게 부서졌다. 맨발로 걸으며 길게 난 발자국. 두 사람이 걸어온 자취는 소연이 돌아다본 사이에 밀려온 파도가 하얀 거품으로 깨끗이 씻어냈다.

태서준을 내 남자로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두 번 다시 없다면. 밀어내기만 하다 이 남자를 영영 놓쳐버리면. 그래서 오늘이 내 일생에 후회로 남는다면.

모래 위의 자국들이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듯 이 남자가 나를 지워버리면, 난 그 모든 걸 견딜 수 있을까?

소연이 걸음을 멈춘 채 쓸쓸한 눈길로 서준을 비스듬히 올려다보았다.


“태서준 씨가 어제 그랬잖아요. 정말 내가 그렇게 좋아요?”

“왜. 거짓말 같아?”

“아니요. 너무 진짜 같아서 묻는 거예요.”

“못 버티겠으면 넘어와도 돼. 엄소연은 언제든지 환영이니까.”

안 그래도 넘어가기 직전인 소연은 서준의 달콤한 목소리에 더욱 흔들었다.


“…….”

나 정말 그래도 될까요?

대답 없이 서준을 응시한 눈동자가 붉은 노을빛에 물들어 찰랑댔다.


“참, 말도 안 듣지.”

마음 같아선 억지라도 제 여자로 묶어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건 그가 더 잘 알았다. 사람 마음이 강제한다고 돌려지는 게 아니니까. 그렇다면 엄소연을 깔끔히 단념해야 할까.


“고집은 고래 심줄보다 더 세고.”

아니, 아니다. 그 역시 맘먹은 대로 될 것 같지 않은 서준은 피식거리는 웃음소리에 핀잔을 섞었다.


“그래서, 싫어졌다는 말인가요?”

“그럴 리가. 우리 내일 밤엔 데이트하러 나갈까?”

느닷없는 데이트 신청에 소연의 커다란 눈에 반색이 돌았다. 어제도 시내 구경을 나가긴 했으나 데이트란 말은 그에게 처음 들어봐서였다.


“어디로.”

“해변에서 카니발이 열리거든.”

“불꽃놀이도 해요?”

“물론이지.”

“좋아요, 가요, 가!”

서준의 팔에 매달리듯 두 손으로 움켜잡으며 폴짝 뛴 소연이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불안 불안한 살얼음판을 걷는 듯했다.

이미 결심하고 있었으니까.

내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숨기고 있는 것을 모두 꺼내 그에게 말해야겠다고.

그래도 변함없이 나를 좋아해만 준다면 이 남자의 손을 꼭 잡고 세상 끝까지 가 보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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