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그리움이 그리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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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그리움이 그리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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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그리움이 그리움을
2023.06.26.
드라마가 끝나자마자 대표실에서 시청각실 층으로 내려온 구원후는 엄소연을 불러냈다.
그녀가 조용한 복도로 나오자 한 손에 장미 꽃다발을 든 원후가 씩 웃었다.
“첫 반응이 아주 좋던데요. 한 5화까지는 엄소연 씨가 주인공이고 그 여운이 끝까지 유지될 거랍니다. 윤 감독이.”
“그럴 리가요. 오민정 씨가 들으면 서운한 말씀이세요.”
“원래 기억에 오래 남는 건 비극 아니겠습니까. 이거 받아요. 드라마 데뷔 축하해요.”
아까 벌어진 접촉사고의 여파였을까. 한 발 더 다가서는 원후의 보폭만큼 소연이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가 건넨 꽃다발은 마다할 수 없었다. 대표로서 당연히 건넬 수 있는 축하의 메시지니까.
“감사합니다. 대표님.”
사실 원후의 슈트 주머니 속엔 반지가 든 작은 상자가 있었다. 예약된 장소로 이동해서 그것을 줄 생각인 원후는 매끄럽게 입술을 늘이며 말문을 열었다.
“고마우면 내 부탁 하나 들어줄……!”
그 찰나였다.
시청각실에서 끼리끼리 무리를 이룬 사람들이 우르르 나왔다.
어디 가서 술이라도 한잔해야겠다며 회사를 빠져나가는 사람들 틈에 껴있던 오민정이 구 대표를 발견하곤 어느새 두 사람 앞에 서 있었다.
“제 건 없나요?”
소연이 들고 있는 꽃다발에 얼마간 시선을 꽂은 오민정이 원후를 빤히 쳐다보며 대뜸 물었다.
그 눈빛이 굉장히 뾰족한 건 안 그래도 드라마 첫 방영부터 주인공을 빼앗긴 기분에 기분이 별로인데, 구 대표에게 마땅히 축하받아야 할 자신이 또 엄소연 뒤로 밀린 같아 짜증이 나서였다.
오민정의 눈빛이 빨리 꽃다발을 내놓으라고 채근하자 원후는 난처한 표정에 딱딱한 미소를 섞어 말했다.
“오민정 씨. 드라마 첫 방영 축하합니다. 주말에 회사 차원에서 식사 자리가 마련될 예정입니다.”
“에게, 그거론 안 되죠. 저 지금 시간 괜찮은데 말이죠.”
어느 틈에 사람들이 썰물처럼 회사를 빠져나가 이제 복도에 남은 건 세 사람뿐.
지금은 곤란하다고 말하는 구원후와 그럼에도 계속 조르는 오민정 사이에 껴있는 것이 곤욕스러운 소연은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며 복도 중간쯤에 있는 모퉁이를 바삐 돌아 좁은 통로로 들어갔다.
화장실이 위치한 그 복도의 끝에는 건물 밖으로 통하는 유리문이 있었다. 그 문 앞에 길게 쳐진 진회색 커튼 밑으로 누군가의 발끝이 살짝 보였지만, 쓱 지나치는 소연의 시야에 커튼 밑부분까지 들어올 리는 없었다.
화장실 개수대에서 손을 씻은 소연이 작은 핸드백을 팔꿈치에 걸고 그곳을 나왔다. 하지만 아차 싶은 그녀의 발이 다시 나온 곳을 향했다. 구 대표에게서 받은 꽃다발을 깜빡 두고 나온 게 생각난 거였다.
그런데 소연의 발걸음이 주춤한 건 가방 속 핸드폰의 진동 때문이었다.
“……!”
쿵 소리가 날 듯 소연의 심장이 덜컥한 건 핸드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한 그 순간이었다.
태서준.
바로 그였다.
단 며칠 같이 있었을 뿐, 사귄 적이 없어 헤어졌다는 말도 어울리지 않는. 헤어졌으나 헤어진 적 없고, 그리웠으나 그리운 마음을 전할 수도 없는, 늘 혼자였지만 혼자일 수 없게 했던 그 남자였다.
화장실 문 앞에서 모든 움직임을 멈춘 소연이 전화를 받았다. 작은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워 아무 말 없이 그렇게.
“…….”
-…….
전화기 너머에서도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가 들을 수 있는 거라곤 그의 나직한 숨소리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소리라도 간절하게 듣고 싶었던 소연은 저릿저릿 저며오는 가슴을 작은 주먹으로 톡톡 건드리며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일순 힘이 빠져버린 두 무릎이 무너지듯 아래로 풀썩 내려앉은 것이다.
제작보고회가 끝나고 집에 와 아들을 재우고 허적해져 오는 마음을 달릴 길 없던 그 새벽, 불현듯 그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으면서도 소연은 울지 않았다. 흘리지 못한 눈물만큼 아랫입술을 꽉 물어야 했지만.
아니, 카디스를 떠나온 이후로 소연은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엄소연…….”
그 억척스럽게 참아왔던 눈물이 한꺼번에 툭 터져버린 건 제 이름을 부르는 낮은 목소리 때문이었다.
“흐흑…….”
메마른 슬픔, 응어리진 설움을 작은 흐느낌으로 게워낸 소연은 더는 소리 내지 않으려 손등으로 입술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울먹이는 어깨의 흔들림은, 참으려 해도 참아지지 않는 그리움은 어떻게 해도 막을 수 없는 거였다. 바닥에 웅크린 채 숨죽여 울던 소연은 작은 목소리로 읍소했다.
흑흑,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
소연은 그가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나온 소리였다. 그리고 그녀의 깊은 마음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커튼 뒤에 서 있는 서준에게도 선명히 들렸다. 굳이 전화기를 통하지 않고서도 또렷이.
나, 여기 있잖아!
그러니까…….
“……울지 마.”
이내 모습을 드러낸 서준의 손에 일으켜 세워진 소연은 어느새 유리문 밖으로 나와 있었다.
“……!”
많이 놀랐지만, 소리치지 않았다. 눈도 깜빡일 수 없었다. 환영 같은 그가 그 잠깐 사이에 사라져버릴까 봐. 더는 보이지 않을까 봐.
“정말…… 당신이에요?”
“그래…… 나야.”
서준은 벽을 짚은 두 팔로 소연을 가두며 진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눈물범벅인 얼굴이 이리도 예뻐 보일 줄이야.
“…….”
꿈은 아니죠? 이대로 사라지는 건 아니죠?
“…….”
너도 내가 보고 싶었구나. 나처럼…….
추운 길목을 지나온 그리움이 그리움을 들여다보았다.
서서히 가까워진 두 시선이 빈틈없이 맞물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오래도록 서로를 바라보았다.
안 오려고 했지만, 그게 잘 안되었다.
참으려고 했으나 더는 못 참았다.
엄소연이 미치게 보고 싶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그런 이유로 정신없이 달려온 서준은 엄소연을 살짝 보고만 가려고 시청각실 앞을 서성거렸다.
뒷문을 조금 열어 안을 들여다보니 마침 그녀의 모습이 정확히 보였다. 여전히 예뻤다. 아니, 더 예뻐졌다. 객관적으론 전과 별반 달라진 게 없는데 서준의 눈엔 그렇게 보였다.
그냥 가려던 걸음을 되돌린 건 서두르는 구둣발 소리가 조용한 복도에 울리기 시작하면서였다. 소리 나는 반대편으로 재빠르게 이동한 서준은 시청각실 옆으로 난 통로에 몸을 숨겼다.
서준이 모퉁이 너머로 시선을 던진 건 혹시 구원후는 아닐까, 하는 짐작 때문이었다.
여기에 안 온다고 말해놓고, 딱 마주치면 창피하지 않나.
그리고 그 순간 제 짐작이 맞았음을 확인하는 동시에 시청각실에서 나온 엄소연까지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엄소연을 바라보는 구원후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손에 든 꽃다발은 또 뭐냔 말이지.
서준은 머뭇거리는 구원후의 태도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구원후가 고백한다던 여자가 엄소연이었다.
설마가 사실로 둔갑하는 광경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서준의 입술엔 실소가 잔뜩 물렸다. 구원후가 엄소연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어처구니도 없지만, 한 여자 때문에 사촌 형제 사이가 험악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무엇보다 저 말고 다른 남자를 만나는 엄소연을 당최 용납할 수가 없는 서준은 이제껏 참아온 감정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갑자기 복도로 쏟아져나온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에 떠밀린 서준은 어쩌다 보니 커튼 뒤에 서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였다.
화장실로 들어가는 엄소연의 뒷모습을 보게 된 서준은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 그녀를 어떻게든 좀 더 오래,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그 바람은 서준의 행동을 한발 더 나아가게 했다.
하지만 막상 그녀와 통화가 연결된 순간엔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알 수 없는 힘이 가슴을 쥐고 비트는 것만 같은 통증에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그때 서준의 눈에 확 박힌 건 일순 아래로 푹 주저앉는 그녀였다.
무슨 까닭에서인지 엄소연은 예전보다 더 작아진 등을 가늘게 떨며 울었다.
그러면서 되뇌는 울먹이는 목소리.
너무 보고 싶다는 엄소연의 음성은 들릴 듯 말 듯 아주 작았지만, 서준의 청각과 심장을 크게 강타했다.
죽을 만큼 뻐근해진 가슴이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서준은 커튼 밖으로 긴 다리를 움직여 서럽게 저를 찾는 소연을 끌어안음과 동시에 일으켜 세웠다.
“이렇게 힘들어할 거였으면 진작 내게 왔어야지. 하다 못 해 전화라도 했어야지. 그것도 못 할 거면 내가 전화했을 때라도 말을 했어야지. 그랬어야지, 이 바보 같은 여자야…….”
저도 모르게 비집고 나오는 말들을 단숨에 쏟아낸 서준은 무작정 소연을 데리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눈물방울이 그렁그렁한 두 눈에 눈을 맞춘 서준이 엄지로 소연의 얼굴을 훑으며 말했다.
“울지 마…….”
내가 앞에 있으니 이제 울지 마…….
목소리도 그렇지만, 갸름한 얼굴을 서서히 쓸어내린 서준의 손끝에서 다정함이 담뿍 묻어났다. 그리고 그의 애틋한 마음은 그녀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엄소연을 내가 울려버렸네…….”
그래서 내 가슴은 더 아프다.
그렇게 말하는 거 같았다. 감미롭게 들리는 그의 음성도 전과 다소 다른 느낌이었다. 고압적인 강렬함은 덜해진 대신 어린아이를 어르듯 한없이 부드러웠다.
“흐흐흑…….”
그 때문인지, 커다란 눈에서 아이 같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허, 울지 말라니까 더 우네? 엄소연, 청개구리였어? 그래서 내 곁에 있으래도 훌쩍 가버린 거야?”
“…….”
“좀 늦었더라도 아니란 걸 알았으면 내게 달려왔어야지. 그렇게 보고 싶었으면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던지고 내게 왔어야지.”
“제가 어떻게 그래요…… 흑흑…….”
“한 입으로 두말하면 내가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
소연은 닭똥 같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그럼 왜……. 끝까지 아닌 척도 못 할 거면서, 이렇게 보고 싶어 저 혼자 끙끙대면서, 뭐가 또 아닌데?”
“흑……”
다신 울지 않겠다고 그렇게 기를 쓰고 다짐했건만. 한번 허물어진 마음은 별안간 나타난 태서준 때문에 더욱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계속 허물어졌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다시 태서준을 만났다는 게 죽어도 좋을 만큼 기뻤다.
그러나 엄소연이 아는 태서준은 어렵고 어려운 사람, 감히 욕심낼 수도 없는 태산같이 큰 사람이었다. 그래서 진실을 말할 수 없었고, 그저 물거품이 되어버린 인어공주처럼 사라지는 것을 선택한 거였다.
그만큼 이루어지기 힘든 사람이기에 그를 떠났고, 지금도 감히 욕심낼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젠 어떻게 해야 옳은 선택인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그녀였다.
“몰라요.”
“엄소연, 너 진짜……!”
이 여자를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혼내 줘야…….
“말 안 해도 좋아. 하지만 네 마음을 나한테 들켜버린 건 어떡할 건데?”
“제가 그런 것까지 책임져야 하나요? 대체 뭘 바라시는 건데요?”
“몰라 물어? 정 모르면 내가 가르쳐 줘?”
“그래요, 전 하나도 모르겠으니 알려 줘요.”
“좋아! 이제부터 알 때까지 내가 하나하나 일일이 다 알려줄게.”
“……!”
서준이 경고하며 키스했다.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엄소연이 지금 잘못하고 있는 걸 깨우쳐주려면 이 방법밖에 없으니까.
소나기처럼 퍼부어지는 그의 입맞춤을 도저히 밀쳐낼 수 없는 소연은 그저 눈을 꽉 감고 있었다. 이미 깊은 사랑에 빠져 있는 소연은 다른 출구가 없었다. 제 아이의 아빠이자, 자신의 첫사랑이며, 영원히 사랑할 수밖에 없는 태서준 말고는.
빨아당겼다 다시 벅차게 차오르는 격렬한 숨결이, 그의 뜨거운 입맞춤이 일깨워주었다.
이 남자도 나를 못 잊은 시간 동안 줄곧 힘겨워했다는 걸.
이 남자 없이는 한순간도 살 수 없는 저라는 걸.
소중한 남자를 어리석게 밀어냈던 저였지만, 또다시 이 남자를 놓친다면 더욱더 어리석은 저가 될 거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