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쾌 연우혁 (1)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이다.
‘텍스트 게임 시작 문구치고는 너무 과한 것 아닌가?’
연우혁은 화면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매번 봐도 텍스트 게임 주제에 참 거창한 시작이었다.
-대환국, 천덕 15년.
-한경(漢京) 동쪽으로 이십 리 떨어진 장원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피해자 안 장주의 시체는 장원 외곽의 누각에서 발견되었으며, 피해자의 발걸음을 제외하고는 어떤 발걸음도 발견되지 않았다.
-근처 담장까지의 거리는 세 장하고도 두 척, 인근의 용의자들은 낭인 적면삼구(赤面三狗), 화산파의 철심철검(鐵心鐵劍)...
다 읽기도 전에 연우혁은 정답을 입력했다.
-사건이 해결되었습니다.
-명성이 오릅니다.
-선업으로 영기(靈氣)가 쌓입니다.
‘너무 많이 했나?’
정답을 맞췄음에도 불구하고 연우혁의 얼굴은 밝지 못했다.
방금 나온 사건은 분명 몇 번이고 풀었던 사건이었던 것이다.
텍스트로만 주어지는 정보로, 무림에서 일어나는 무작위 사건의 범인을 맞추는 추리 게임 <대환국의 명포쾌>.
최첨단 게임이 즐비한 시대에 어떻게 보면 시대퇴행적인 면이 있었지만 연우혁은 이 게임을 정말 좋아했다.
무협지를 연상시키는 배경에, 온갖 다양하고 특이한 사건들과 트릭들. 포쾌가 되어서 용의자들의 발언을 체크하고 알리바이를 확인하며 진범을 찾는 재미는 다른 게임에서 줄 수 없는 재미였다.
문제는 너무 많이 한 탓에 이제 어떤 사건이 나와도 범인과 수법을 알 수 있게 됐다는 점이었다.
방금도 장원 외곽, 누각, 발걸음은 피해자 본인, 담벼락 등 이런 말만 듣고서 바로 범인을 맞추지 않았던가.
이제 게임에서 제공하는, 단서나 범인에게 숨겨진 정보를 추가로 파악하는 특수능력도 의미가 없을 정도였다.
‘정말 아쉽군. 이런 게임이 다시 나올 거 같진 않은데.’
그리고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연우혁의 의식은 끊겼다.
* * *
“연 포쾌. 듣고 있나?”
“예? 예.”
연우혁은 무언가 홀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오 포두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자네. 내 자네를 좋게 봐서 요패(腰牌)를 줬는데 벌써부터 이러면 어떡하나? 이 한경에서 포쾌를 하고 싶어 하는 놈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나?”
포두, 오충이 못마땅해 하는 것도 당연했다.
포쾌란 무엇인가?
판관의 명령을 받아 죄 지은 악인들을 체포하는 이들이 바로 포쾌였다.
위로는 천자를 받들어 섬기며 아래로는 민초를 위해 악인들을 체포해 명성을 떨치는 일이니 이 얼마나 선망 받는 일이란 말인가.
물론 전도유망한 젊은이들이 그것 때문에 포쾌를 하진 않았다.
악인을 잡으며 조금씩 들어오는 푼돈이 생각보다 쏠쏠했던 것이다.
일단 악인에게 당한 사람에게 일을 열심히 하겠다는 수고비로 몇 푼을 받고, 악인이 가족이 있다면 찾아가서 연좌하지 않는 대신 감사비로 몇 푼을 받으며, 또 거기까지 찾아온 만큼 배도 출출해졌으니 끼니 값으로 몇 푼을 받고, 생각해보니 신발도 좀 닳았을 테니 신발값도 받고...
얼핏 들으면 파렴치한 탐관오리 같았지만 근면 성실한 포쾌들은 탐관오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만약 저기서 ‘전낭을 잃어버렸는데 전낭값도 물어내라’하면 탐관오리였지만 포쾌들은 그러지 않는 것이다.
하여간 이렇게 명예롭고 부수입도 있는 포쾌는 당연히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여기는 나름 번영한 도시 아닌가. 포쾌를 하고 싶다는 젊은 놈들은 수두룩했다.
그런 만큼 오 포두가 연우혁에게 포쾌임을 증명하는 요패를 건네준 건 실로 파격적인 일처리라고 할 수 있었다.
대단한 가문 출신도 아니고, 이 도시 출신 토박이도 아닌 흔해 빠진 떠돌이 아닌가. 몇몇 포쾌들은 ‘오 포두의 먼 친척인가?’같은 말들을 하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연우혁은 오 포두의 먼 친척이 아니었고, 뇌물을 바친 것도 아니었다. 오 포두가 연우혁을 포쾌로 임명한 건 소문 때문이었다.
-참 신통하우. 말을 듣자마자 내가 잃어버린 촉대(燭臺)를 찾아냈다우. 그 청년에게는 신통력이 있는 게 틀림없수.
-정말 신기한 일입니다. 포두님. 작년 내내 뼈 빠지게 일해서 번 은자가 사라졌는데, 그 젊은 놈이 누가 가져갔는지 한 번에 맞추지 뭡니까? 감사한 일이긴 합니다만, 어떻게 맞춘 건지 아직도 궁금합니다. 설마 그 젊은 놈이 타심통(他心通)이라도 있는 걸까요?
‘뛰어난 놈도 필요하긴 하지.’
오 포두는 기본적으로 친인척이나 혹은 은자로 성의를 보여줄 줄 아는 전도유망한 젊은이들을 포쾌로 뽑았지만, 이 전통적인 방식에도 문제가 있었다.
포두 밑의 포쾌들이 너무 무능하면 포두까지 같이 싸잡혀서 처벌받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도시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일들은 발로 뛰고 곤봉을 휘두르면 대체로 해결되었지만 가끔씩 몇몇 일들은 그걸로도 해결되지 않는 법.
이 때 오래 해결하지 못하고 질질 끌면 재수 없을 경우 지부 어르신한테서 날벼락이 떨어지는 수가 있었다.
노련한 오 포두는 이럴 때를 대비해 똘똘한 놈 몇 명 정도는 밑에 있어야 한다는 걸 잘 알았다. 만약 그 똘똘한 놈이 신통력이라도 있다면 더더욱 믿음직스러우리라.
그래서 연우혁을 찾아가 요패를 주고 영광스러운 포쾌의 자리를 건네줬는데, 이놈이 첫 사건부터 비실대며 마치 홀린 것마냥 멍하니 있자 살짝 후회가 되었다.
‘소문을 너무 믿었나?’
한 명의 입에서 나오는 소문은 믿기 힘들어도 여러 명한테서 나오는 소문은 나름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이러다니.
물론 포쾌로서 맡게 된 첫 사건이 너무 큰 사건이긴 했다. 무려 장원의 장주나 되는 사람이 칼에 찔려 죽은 사건이었으니까.
하지만 포쾌라면 배짱이 두둑해야 하지 않겠는가.
오 포두는 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자네. 북자다점(北子茶店)의 찻잎 찌는 마 파파가 잃어버린 촉대를 찾아준 거 기억하나?”
* * *
“...!”
연우혁은 눈만 깜박였다.
앞에서 오 포두가 뭐라고 떠들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추리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눈 감았다 뜨니 처음 보는 무림의 포쾌가 되어 있었으니.
허리춤에 차고 있는 요패나 곤봉도, 가볍게 걸친 경장도, 주변을 스치고 지나가는 물지게 진 일꾼도, 그 일꾼에게 술잔을 권하며 목청껏 외치는 점포의 상인도 다 현실감이 없게 느껴졌다.
“자네. 북자다점의 찻잎 찌는 마 파파가 잃어버린 촉대를 찾아준 거 기억하나?”
“예?”
“그래. 기억하나보군. 그 때도 신통력을 써서 찾지 않았던가? 지금도 자네의 신통력이 꼭 필요한 때네. 정신을 차리게! 포쾌는 배짱이 두둑해야 한단 말일세.”
연우혁은 그제야 자신이 포쾌가 됐고, 눈앞의 건장한 근육질의 중늙은이는 본인의 상사인 포두라는 걸 떠올렸다. 마치 원래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집도 절도 없는 떠돌이 출신에, 주변의 몇몇 사건들을 해결해준 것으로 운 좋게 포쾌가 됐고...
...지금이 바로 포쾌가 된 다음 처음으로 맡는 사건이었다.
실패하면 바로 쫓겨날지도 모르는 상황. 연우혁은 현재 상황을 빠르게 파악했다.
갑자기 전혀 모르는 세계에 떨어진 것도 황당했지만 그렇다고 맨몸으로 쫓겨날 수는 없었다. 포쾌로 녹봉을 받고 따뜻한 집에서 머무는 것과, 아무것도 없는 부랑자로 길가에서 노숙하는 건 천지차이였으니까.
‘방금 뭐라고 했지?’
북자다점, 찻잎 찌는 마 파파, 잃어버린 촉대...
연우혁의 머릿속에서 언젠가 해결한 적 있었던 사건이 번뜩였다.
“기억납니다.”
“응?”
“마 파파가 잃어버린 촉대 말입니다. 어떻게 해결했는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 그런가?”
오 포두는 반색했다.
반신반의하고 있었는데, 신통력으로 어떻게 해결했는지 기억하고 있다는 걸 보니 이번에는 자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사실 신통력이나 술법을 다루는 이들은 변덕스럽고 괴팍한 부분들이 많아 어제까지는 멀쩡하게 점을 치더라도 오늘은 갑자기 치지 못하겠다고 뻗대는 놈들도 수두룩했다.
오 포두가 보기에는 사기꾼들도 비슷한 핑계를 댈 것 같았지만 어쩌겠는가. 뛰어난 재주를 가진 놈들은 언제나 대접을 받는 법이었다.
“그 날 등잔에는 물기가 없었습니다.”
“뭐라고 했나?”
“등잔에 물기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
오 포두는 이 젊은 포쾌가 중압감에 귀신이라도 들렸나 싶어서 쳐다보았지만 연우혁은 진지하게 말했다.
“마 파파가 쓰던 등잔의 구조를 아십니까? 윗잔에는 기름이, 아랫잔에는 찬물이 들어갑니다.”
등잔은 보통 기름을 채우고 그 위에 심지를 넣어 불을 붙이는 식이었는데, 이 때 기름을 채운 잔 밑에 이중으로 잔을 하나 더 만든 다음 찬물을 채워서 기름의 온도를 조절하곤 했다.
이럴 경우 귀한 기름을 아낄 수 있는 것이다.
“마 파파는 밤에도 찻잎을 손질하는 사람인만큼 등잔에 불을 켜놓고 일을 하는 게 다반사였습니다. 그런데 조는 사이 촉대가 사라졌고, 심지어 남은 등잔에는 찬물이 없었다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실로 이상하군!”
오 포두는 자신도 모르게 젊은 포쾌의 말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 젊은 포쾌의 화술은 오 포두도 마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그 이유는 미리 찬물을 빼놓고 기름의 양을 줄여놓은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등잔이 꺼지면 안이 어두워지니 들어가서 쉽게 촉대를 가지고 나올 수 있지요. 마 파파는 그 날 밤 보초를 섰던 하인을 의심했지만, 저는 아침에 등잔을 관리했던 하인을 의심했습니다. 등잔에 수작을 부린 사람이 범인일 가능성이 높으니 말입니다.”
“대단해, 대단해!”
오 포두는 자신도 모르게 길거리에서 크게 박수를 쳤다.
“혹시 그게 스님들이 말하는 육신통(六神通)인가?”
“예? 아닙니다. 그냥...”
“아. 물론 아니겠지! 내가 불법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육신통은 정말 대단한 경지일 테니까. 하지만 그 발끝만 따라가도 훌륭한 건 마찬가질세. 잠깐. 혹시 불법이 아니라 도술인가?”
“그건 저도 잘...”
“타고난 신통력인가보군. 요술(妖術)은 아니라 믿네. 하긴 그런 술법이었다면 벌써 몇 명은 죽어나갔겠지.”
오 포두는 연우혁의 등을 두드렸다. 나름 단련된 내공을 갖고 있는 포두의 손길에 연우혁이 비틀거렸다.
“사실 이번 일은 어떻게든 핑계를 대서 한 발 빼려고 생각했었네. 아무래도 장원의 장주씩이나 되는 사람이 죽은 만큼 나 같은 포두는 잘못 건드렸다가는 훅 날아갈 수 있거든. 하지만 자네의 신통한 재주를 보니 생각이 바뀌는군.”
“과찬이십니다.”
“아니야. 정말 뛰어난 재주일세. 뭐라도 떠오르는 게 있다면 나한테 편히 말해주게나.”
오 포두는 만족스럽게 수염을 쓰다듬었다.
멍청한 부하들만 두고서 헛소리를 지껄일 다른 포두들을 생각하니, 벌써 이 포쾌를 뽑은 게 뿌듯할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