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쾌 연우혁 (2)
‘통한 건가?’
연우혁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방금 마 파파의 잃어버린 촉대 사건을 어떻게 해결했는지 숨 한 번 쉬지 않고 말할 수 있었던 건, 연우혁이 실제로 풀어본 적 있던 사건이어서였다.
처음 해결했을 때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등잔 밑에 물기가 없는 게 단서인 걸 어떻게 알아.’
그 때는 그렇게 욕을 했었는데 이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뭐하나? 안 따라오고.”
오 포두가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기억 속에서 오 포두는 이렇게 자상한 사람이 아니었다. 뇌물을 주거나 친인척인 포쾌여도 말을 안 듣거나 일처리가 시원찮으면 욕설 섞인 호통을 내뱉거나 손찌검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기대 가득한 눈빛을 보내다니.
눈앞의 위기는 벗어났지만 연우혁으로서는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부디, 내가 아는 사건이 나오길.’
* * *
동쪽의 안가장은 견사(繭絲) 장사로 크게 번 안 장주의 장원으로, 장주의 말에 따르면 가히 도원경을 연상시키는 장원이라고 했다.
“물론 그 정도는 아닐세. 손님에게 싸구려 술을 대접하더군. 그래서야 쓰나.”
오 포두는 세 달 전 장주가 싸구려 술을 대접했던 게 아직도 가슴에 응어리로 맺혀 있었는지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물론 도시의 유력자들은 저잣거리의 평민들처럼 포두에게 굽신거릴 필요가 없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싸구려 술을 대접할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안 장주께서 혹시 원한을 사신 적은 없으십니까?”
“원한?”
오 포두는 말하기 전에 주변을 한 번 두리번거리며 확인하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사실 장주는 견사 장사뿐만 아니라 염왕채(閻王債)로도 크게 한 몫 벌었네.”
“염왕채 말입니까?”
염라에게 진 빚, 즉 고리대금을 말하는 일이었다.
불법은 아니었지만 도시에서 어깨에 힘 주고 거드름피우는 유력자들이 당당하게 밝히고 다닐 만한 일도 아니었다. 애초에 염왕채를 전문적으로 빌려주는 곳은 사파나 흑도라고 불리는 이들 정도였다.
“그래. 물론 장주 본인이 직접 한 건 아니고, 장원의 아랫사람들을 시켜서 빌려주긴 했다지만... 알 사람들은 다 알았지.”
“빚을 진 사람이 많았습니까?”
“죽은 사람이 몇 있지. 친족들은 죽이고 싶을 테고.”
연우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실은 앉아 있으면 편하게 정보가 굴러오지 않았다. 정보가 필요하면 직접 묻고 발로 뛰어야 했다.
아직 어떤 사건인지 파악하지 못한 만큼 최대한 물어볼 수밖에.
그런데 그런 태도를 오 포두는 더욱 좋게 본 모양이었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지었다.
“질문이 아주 날카롭군. 내 조카 놈은 장주가 넘어진 게 아니냐는 헛소리나 하던데. 그래. 누군가 죽었으면 의심가는 놈부터 찾아야 하지.”
“아닙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물론 아직 적응이 덜 된 연우혁 입장에서 오 포두의 칭찬은 부담 그 자체였다. 이번 사건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 지 본인도 모르는데 긴장을 풀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도착했군. 저기가 장주의 장원일세.”
오 포두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장원의 하인들을 불렀다.
그러나 그 태도는 얼마 가지 못했다.
장원 안에는 이미 먼저 온 선객들이 있었던 것이다.
* * *
사 포두의 성씨는 사(謝)를 썼지만 인상을 보면 차라리 사(巳, 뱀 사)가 어울릴 것 같았다.
허리춤에는 철편(鐵鞭)을 차고, 붉은색 가죽신을 뽐내듯이 앞뒤로 반복해 왔다 갔다 하며 하인들을 노려보는 모습이 마치 먹이를 노리는 뱀 같았다.
물론 오 포두는 상대가 뱀이든 용이든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가 놈아, 여기는 뭔 낯짝으로 얼쩡거리는 거냐! 썩 꺼지지 못하겠느냐? 당장 꺼지지 않으면 이 어르신께서 네놈의 낯짝을 두들겨 주마!”
오 포두의 고함에는 은은한 내공이 담겨 있었다. 연우혁은 포두가 무공을 익혔다는 걸 깨닫고 놀랐다.
중죄를 짓는 이들 중에 무림인들이 많은 만큼 포두나 포쾌가 무공을 익히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포두나 포쾌의 무공이 뛰어난 건 놀라운 일이 맞았다.
하루의 대부분을 무공에 쏟아 붓는 무림인들과 달리 대부분을 공무에 시달리는 포두나 포쾌는 무공을 수련할 시간 자체가 부족했으니까.
게다가 환경은 또 어떤가.
어렸을 때부터 벌모세수를 통해 근골과 혈맥을 단련하고 각종 영약으로 내공을 충만하게 하는 명문 무림세가의 자제들과 포두, 포쾌는 그 시작부터가 달랐다.
그런 점에서 오 포두의 실력은 연우혁을 놀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마치 짐승이나 맹수의 그것처럼 몸을 저릿저릿하게 만드는 함성이었던 것이다.
사 포두는 무공이 한 수 아래였는지 순간 움찔하며 눌린 기세를 보였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킬킬 비웃음을 얼굴에 드러냈다. 그 자신감 있는 태도에 오 포두도 움찔했다.
무언가 믿는 구석이 없다면 포두들끼리 서로 구역을 침범하는 일은 드물었다. 포두의 구역이란 자존심이나 마찬가지라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칼부림도 서슴지 않았다.
“판관 나으리께서 명령을 내리셨다!”
“뭐라?”
“포두란 자가 사건 하나 쉽게 해결하지 못하고 꾸물거리고 있으니 판관께서도 화가 날 만 하지.”
오 포두의 턱 옆으로 굵은 힘줄이 솟았다. 그만큼 세게 이를 악문 것이다.
이 도시 주변의 사법과 관련된 대소사들을 모두 관장하는 판관에게, 살인 사건이 오래 끌리는 건 자신의 체면과도 상관이 있는 문제였다. 시간이 끌린다면 재촉을 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오 포두는 그리 시간을 끌지도 않았고 최근에 커다란 실수를 저지른 적도 없었다. 판관이 오 포두의 체면도 생각하지 않고 다른 포두를 부를 사람은 아니었다.
결론은 하나.
저 사가 놈이 판관 앞에 가서 아첨을 떤 게 분명했다. 오 포두는 해결할 능력이 없어서 질질 끄는데, 자신은 해결할 수 있다고.
‘치열하군 정말.’
연우혁은 옆에서 덩그러니 서서 포두 사이의 치열한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칼이 휘둘러지지도 피가 튀지도 않았지만, 서로 지독할 정도로 진심이었다.
이럴 때 새로 들어온 포쾌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가만히 서서 시체마냥 있는 것.
“그래서 네놈은 해결할 자신이 있다는 것이냐?”
“물론이지! 자. 지켜봐라. 여봐라. 귀빈들은 모시고 왔느냐?”
“예!”
사 포두 밑에서 일하는 포쾌들이 오 포두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보니 먼저 와서 여러 준비를 한 모양이었다.
“모시고 들어 오거라! 하하! 내가 이 살인에 엮인 내막을 아주 시원하게 풀어드리겠다!”
* * *
장원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
피해자 안 장주의 시체는 장원 외곽의 누각에서 발견되었고, 피해자의 발걸음을 제외하고서는 어떤 발걸음도 발견되지 않았다.
시체에 남은 흔적은 하나. 등에 깊숙이 박힌 단도뿐이었다.
장주의 얼굴은 평온했고 어떤 다른 상처도 없었기에 이걸 본 몇몇 포쾌들은 안 장주가 귀신에 홀렸다느니, 요괴가 술법을 써서 단도를 날렸다느니 괴상한 추측을 해댔다.
그러나 사 포두는 이걸 보자마자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아차렸다.
장원 외곽의 누각에서 시체가 발견됐는데 근처 부드러운 흙에는 피해자의 발걸음 말고는 어떤 발걸음도 없었다?
이런 묘기를 보여줄 수 있는 건 귀신도 요괴도 아니었다. 귀신이었다면 장주의 얼굴이 공포에 질려 있어야 하고 요괴였다면 자신의 광포함을 이기지 못하고 다른 상처를 입혔을 것이다.
범인은 바로 무공의 고수였다. 그것도 꽤 높은 경지의.
멀리 떨어진 담벼락을 디디고 경공을 펼쳐 누각 위로 착지한 다음 일격에 장주를 죽이고, 다시 경공을 펼쳐 담벼락을 넘어 빠져나온 것이다.
“무슨 허튼 소리를 지껄이느냐! 거리가 얼마나 되는데!”
“하. 오 포두. 오 포두. 일류의 무인이라면, 그 중에서 경신법(輕身法)에 뛰어난 무인이라면. 그래도 불가능할 것 같나?”
오 포두는 신음소리를 내며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일류의 경지에 도달한 무인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던 것이다.
만약 일류의 경지에 도달한 무인이, 그것도 상승의 경공과 신법을 깊게 수련했다면?
그런 자라면 담벼락을 박차고 날아올라 누각까지 도착했을지도 몰랐다.
상대가 입을 다물자 사 포두는 기세가 한층 올라 히죽 웃었다.
“자. 이제 귀빈들이 들어오시니 아까처럼 소리 지르는 일은 피하도록 하는 게 좋을 거다. 하찮은 무공을 보면 귀빈들의 심기가 불편해지실 수 있으니!”
포쾌들이 굽신거리며 손님을 모시고 들어오자 오 포두는 깜짝 놀랐다.
귀빈이라고 지껄이길래 대체 어느 대인을 모셨나 했는데, 놀랍게도 안뜰로 들어오는 자들은 무림인이었다.
‘철심철검(鐵心鐵劍) 평일원!’
검의 손잡이에 새겨진 작은 매화문양을 보자 오 포두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상대는 무려 화산파 출신의 무림인이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무림인들은 관을 조심하며 어지간해서는 대놓고 거역하려고 하지 않지만, 무림인들 중에서도 명문세가나 거대 문파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이들의 권세는 포두 하나 정도는 쉽게 짓누를 만큼 강력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권세를 쓰지 않아도 저 평일원이라는 무인은 이 자리를 시산혈해로 만들 수 있었다.
무려 절정의 경지에 도달한 무인!
화산파 내에서도 저 정도 되는 고수는 몇 없었다.
그 뒤에 들어오는 무림인은 평일원보다는 명성이 떨어졌지만 악명이 만만찮았다.
적면삼구(赤面三狗) 중 첫째 정일. 객점에서 투패만 벌어지면 끼었다가 잃기라도 하면 온갖 행패를 부리는 자로 인근에는 악명이 드높았다.
무공도 만만치 않은데다가 다른 형제들의 손속도 악랄해 당한 흑도의 무림인들도 이를 갈 뿐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놈이었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것은 삼절객(三絶客) 담풍호였다.
이들 중 명성이나 악명으로 따지면 가장 뒤떨어졌지만 괴팍하기로는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비파를 타며 술잔을 기울이다가도 심사가 뒤틀리면 망설이지 않고 검을 뽑아서 찌르는데, 대체 무슨 곡절로 검을 찌르는지 알 수가 없어 사람들이 이를 두려워했다.
“빈객들께서 이 하찮은 사 모의 간절한 부탁을 들어주시니,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사 포두는 손님들이 모두 들어오자 포권을 하며 입을 열었다.
“감히 제가 이렇게 빈객들을 부른 까닭은, 어느 천인공노할 자가 안 장주를 죽이고 도망쳤기 때문입니다!”
자리에 있는 무림인들은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묶여 있던 하인들은 고개를 슬쩍 들어 올리며 무림인들을 구경했다.
“평 대협. 대협을 이 자리에 부른 것은 백 번 사죄하겠습니다. 하지만...”
“됐네. 장주를 죽인 게 무림인인가?”
평일원은 냉정하게 대꾸했다. 태연한 걸 보니 연우혁은 사 포두가 미리 설명한 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저 정도 되는 사람을 부르면서 그냥 오라고 하진 않았을 것 같았다.
“그렇습니다!”
“난, 난 아니야!”
정일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외쳤다.
“요 포두 놈. 감히 내게 누명을...”
“적면삼구는 장주를 죽일 수 없었네. 장주가 죽은 날 내 일을 돕고 있었으니.”
“맞, 맞아!”
오 포두는 믿기 힘들다는 듯이 되물었다.
“아니, 적면삼구 네 녀석이 화산파의 일을?”
“......”
정일은 부끄러웠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평일원은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설명했다.
“하여간 정일은 아니네.”
“그렇습니다. 평 대협. 자. 다들 들어보십시오. 철심철검 평 대협께서는 감히 살인을 저지를 분이 아니십니다. 그리고 정일은 평 대협의 일을 돕고 있었고요. 그렇다면...”
자리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담풍호에게 쏠렸다. 평일원은 도포의 옷자락을 옆으로 치우며 검으로 손을 뻗었다.
오 포두는 그제야 사 포두의 속셈을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삼절객 담풍호를 범인이라고 확신하고 다른 무림인들에게 부탁해 이 자리를 만든 것이다. 혼자서 삼절객을 잡으려고 했다가는 비명횡사할 수도 있으니.
오 포두는 가슴이 쓰라렸다. 사 포두의 추측이 너무나도 완벽했던 것이다. 자신이 멍청한 조카 놈을 보살피는 동안 사 포두는 독사처럼 그의 발꿈치를 물어버렸다.
“내가 범인이란 말인가?”
“꼭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죄가 없으시다면 판관 나으리께서도 풀어주실 겁니다.”
“퍽이나 그렇겠군.”
삼절객 담풍호는 그냥 잡혀가지 않겠다는 듯이 기세를 올렸다. 철심철검의 기세와 맞부딪치자 장원 안이 살기로 팽팽해졌다.
한바탕 피바람이 불 것 같자 연우혁은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 “!”
“이 장원에 총관이 있습니까?”
“있... 는데.”
오 포두는 당황해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무림인들이 칼을 휘두르기 직전인 상황에 한낱 신임 포쾌가 무슨 생각으로 끼어든단 말인가?
“그 자가 범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