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잔의 독 (4)
‘아니 이런 개새끼가.’
연우혁은 당령을 속으로 욕했다.
물론 납치된 노인을 찾는 건 연우혁의 일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강 노인은 당령에게 중요한 사람이지 연우혁에게 중요한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 강 노인을 이렇게 한 번에 찾아줬는데 사람을 곤란에 빠뜨리다니.
팽가 남매가 아무리 호인이라지만 나중에 ‘연 포두가 하북팽가보다 사천당문이 더 대단하다던데’같은 말을 들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알 수 없었다.
“제갈세가 말입니까?”
“아니. 하북팽가.”
“...하북팽가도 그 협의(俠義)로 무림에 빛나는 명성 높은 세가이자, 그 도법은 무림의 일절로 꼽힙니다만... 역시 당문의 세력을 따라가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중에 꼭 팽주성에게 ‘팽 형님 당령한테 협박받았습니다 그 새끼 아주 나쁜 새끼입니다’라고 해명하기로 다짐하고, 연우혁은 이를 악물며 내뱉었다.
당령의 눈빛이 이제까지 봐왔던 눈빛 중에서 가장 부드러워지고 흡족함에 가득 찼다. 영안으로 보지 않아도 아주 만족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연우혁은 속으로 욕했다.
“정말 보는 눈이 있는데? 옛말에 구안능지(具眼能知)라고 했지. 아주 훌륭해. 포두.”
당령은 튀어나오는 무인 두 명을 암기로 쏴죽이며 칭찬했다. 연우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처음 만났을 때는 무례하게 굴었다는 걸 인정하겠어. 포두 네 재주는 사과를 받을 자격이 있어.”
“감사합니다.”
당령은 기어 나오는 무인 한 명을 암기로 쏴죽이고 텅 빈 수전(袖箭) 통을 소매에서 빼버렸다. 그리고 비침(飛針)을 쏘아서 그 뒤의 무인을 즉사시켰다.
포쾌들의 눈에는 그저 번쩍이더니 사람이 죽었다는 것만 보였겠지만 연우혁의 영안은 그 안의 내막을 완전히 꿰뚫고 있었다.
연우혁은 솔직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효율적이다.’
무림인이 일 대 다수의 싸움을 피하는 이유는 어떤 무인도 싸움을 거듭하면 지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무공을 익히지 못한 적이라 하더라도 그 적을 베고 찌르면 체력이 소모되고 내공이 소모됐다. 실수로 생채기라도 나면 피로는 빠르게 가중됐다.
그러나 사천당문의 전투법은 그런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뜨렸다.
상대가 머무는 곳에 독을 뿌려서 중독시킨 다음 무방비하게 튀어나오는 놈들을 암기로 쓰러뜨린다.
심지어 기관(機關)의 힘을 사용한 암기라 무림인이 직접 던질 필요도 없었다. 자기보다 약한 하수들을 다수 상대할 때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전투법이었다.
쾅!
문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이제까지 쓰러진 무인과는 다른 방식으로 누군가가 뛰쳐나왔다. 당령은 암기를 발사하려다가 동작을 멈췄다. 상대가 두꺼운 정문 파편으로 자신의 몸을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개... 개... 개자식들이... 쿨럭!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냐!?”
연우혁보다 머리 하나는 큰 장사(壯士) 체형의 무림인이 코에서 피를 흘리며 으르렁거렸다.
잘 단련된 외공과 그보다는 못하지만 제법 쌓은 내공. 연우혁은 상대가 누군지 바로 알아차렸다.
이 철갈방의 방주 노릇을 하고 있는 철갈권(鐵蝎拳) 탁명이었다.
탁명은 대체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아도 이것보다는 덜 갑작스러울 것이다.
“내가... 내가 당문하고 원한을 진 게 없는데 대체 왜...?”
“사파 무인이라면 등 뒤에서 칼 맞아도 의아해하면 안 될 텐데.”
당령은 차갑게 대꾸하면서 탁명을 주시했다. 꼴에 방주라고 제법 괜찮은 해독약을 갖고 있었는지 다른 놈들에 비해 중독 상태가 훨씬 약했다.
게다가 시체와 정문 파편으로 몸을 가리고 있어서 암기를 급소에 찔러 넣기가 쉽지 않았다.
원래 무시했을 상대의 말에 대답해주는 건 상대를 격분시켜서 빈틈을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였다.
“강 노인을 납치해서 데리고 있겠지?”
“그... 그깟 대장장이 놈 하나 데려와서 가뒀다고...?!”
자백이나 마찬가지인 말에 당령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완전히 확신할 수 있었다.
정말로 저 포두는 흐트러진 대장간의 모습만 보고 사라진 사람을 찾아낸 것이다!
“미... 미친... 아무리 당문이라 하더라도 이런 짓이 허용될 줄 아느냐?!”
“지부(知府)한테 사파 새끼 하나 쓸어버렸다고 하면 감사를 받으면 받았지. 당문이 네 하찮은 방과 똑같은 줄 아나?”
당령은 독살스럽게 쏘아붙였다.
그 모습에 연우혁은 독이나 암기도 그렇지만 당문의 혀 또한 치명적인 무기라는 걸 깨달았다. 한 마디 들을 때마다 탁명의 정신이 분노로 흐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경을 다스리는 지부 어르신과 직접 대면해서 이야기가 가능한 오대세가 출신의 무림인과, 그 밑의 밑 판관에게도 굽신거리며 뇌물을 바치는 일개 방주는 신분이 달라도 너무나도 달랐다.
아마 탁명 본인도 지금 느끼고 있을 터였다.
당문의 힘과 권세라면 철갈방 무인들을 허가 없이 격살해도 칭송을 들으면 들었지 책임을 묻진 않을 것이라고!
“하긴 그렇게 멍청하니 방을 말아먹었겠구나. 남은 무인이 없으니 방이라고 하기도 뭐하다.”
‘저건 배워야 한다.’
연우혁은 감탄했다.
저게 진짜 격장지계였다. 탁명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포효하며 들고 있던 정문 파편을 던졌다.
당령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보법을 밟으며 암기를 쏘아냈다. 비침이 탁명의 몸 위에 꽂혔다.
‘뭐지?’
예상했던 것보다 얕게 들어간 암기에 당령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외공을 익혔는진 몰라도 살가죽이 꽤 질긴 모양이었다.
“당 소저, 조심하십시오! 놈이 혈단을 복용했습니다!”
연우혁이 다급하게 외쳤다. 아까부터 영안을 열고 있었기에 철갈권이 뭘 하고 있는지도 파악하고 있었다. 파편을 던지고 먼지에 몸을 숨겨도 연우혁의 눈을 이목을 속일 수는 없었다.
‘무슨 단약을 복용한 거지?’
무림에는 흔히들 혈단(血丹)이라고 불리는 단약들이 있었다.
이름에 피가 들어가긴 했지만 그 중 피로 만든 건 극소수에 불과했고, 대부분은 수상쩍은 약재와 광물들을 수상쩍은 방식으로 섞어 넣은 것에 가까웠다. 보통 붉은색이라 혈단이라고 불렸다.
이런 수상쩍은 단약을 복용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일시적으로 잠력을 끌어내고 내공을 증폭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후유증이 없을 리 없었고, 어지간한 사파 무림인도 이런 혈단을 쉽게 먹진 않았다.
어디서 어느 의원이 만든지도 모르는 물건을 목구멍 속으로 던져 넣는 데에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재수가 없으면 효과는 나타나지 않고 후유증만 나타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탁명은 나름 방주라고 괜찮은 혈단을 갖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내공의 양이 빠르게 증가하고 그 흐름도 매서워졌다. 동시에 피도 끓어올랐다.
‘저러다 죽...?! 아, 어차피 죽겠군.’
생각해보니 철갈권 입장에서는 애써 세운 방도 망했겠다, 가만히 있으면 당문 무인한테 팔다리가 썰리는 운명밖에 남지 않았다. 죽더라도 저승길동무로 데려가고 싶은 마음도 이해가 갔다.
“큭!”
당령은 생각보다 매서운 탁명의 공격에 전율했다.
같은 이류의 경지라 하더라도 당령은 일류를 엿보고 있는 이류 말입이었고 탁명은 편법과 속성으로 익힌 이류 중입의 경지.
게다가 독과 암기까지 있으니 수월하게 제압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과 달리 상성이 썩 좋지 못했다.
놈이 익힌 특수한 외공 때문에 암기가 제대로 혈도를 찌르지 못하고 있었고 독 또한 방금 먹은 해독약 덕분에 어느 정도 버티고 있었다.
심지어 단약까지 먹어서 내공이 급증한 상태.
‘침착하게 시간을 끈다.’
당령은 지금 가장 유리한 우군인 시간을 떠올리며 단혼보(斷魂步)를 밟았다. 변화가 심한 보법에 탁명은 순간 당령을 놓치고 잘못된 방향으로 돌진하려고 했다.
우득!
뼈가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탁명은 억지로 몸을 꺾고 방향을 전환했다.
쓰레기 같은 사파 무인이 보여주는 예상 외의 독기에, 당령의 눈빛도 공명해서 매섭게 타올랐다.
“좋다. 어디 한 번...!”
저런 놈과 권각을 교환하는 것도 손해라 여겼지만, 저렇게 건방지게 덤비는 걸 보니 한 대 맞고서 숨통을 끊어버려야겠다는 당문 특유의 독심이 올라왔다.
그 순간 탁명의 뒤에서 흰 채찍이 날아들었다. 탁명은 간신히 몸을 옆으로 피했지만 등이 쫙 찢어지며 독이 스며들었다.
“!!”
“...!”
탁명은 한낱 어린 포두 새끼가 자신의 싸움에 끼어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심지어 자랑하던 질긴 외공마저 부수고 상처를 입힐 줄이야.
“포두 새끼...!?”
‘당문은 부하 다 죽여도 존대하던 놈이...’
연우혁은 포두를 무시하는 철갈권의 태도에 살짝 발끈했다.
판관이 부리는 개새끼 취급이라지만 다 죽어가는 범죄자 놈이 저런 태도를 보이니 울컥하는 게 사실이었다.
“죽여버리겠다!”
탁명은 살가죽을 찢고 올라오는 독기에 고함을 쳤다. 점점 혼미해지는 정신이 판단력을 잃고 분노에 몸을 맡기게 만들었다.
‘아니?!’
연우혁은 상대가 당령을 두고 자신을 노리자 깜짝 놀랐다. 어지간해서는 당령을 계속 노릴 줄 알았던 것이다.
‘놈이 동귀어진을 노리고 있다!’
심지어 같이 죽겠다는 각오로 달려들고 있었다. 연우혁은 바로 백사편법의 초식을 최대한으로 펼쳤다.
푹!
탁명은 피하지도 않고 몸으로 받아냈다. 날카로운 채찍이 몸을 뚫었는데도 황소처럼 주먹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환장하겠군!’
“포, 포두님!!!”
포쾌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우혁은 침착하게 영안으로 탁명의 동작을 읽어냈다. 그리고 남두성군(南斗星君)의 힘까지 불러냈다. 내공과 체력이 샘솟듯 밀려왔다.
지금 놈의 움직임은 날카로운 채찍으로 베거나 뚫는 게 아닌, 오로지 힘으로 쳐야 막을 수 있었다.
퍽!
북 터지는 소리에 포쾌들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날아간 것은 탁명이었다.
연우혁은 깊게 숨을 내쉬며 쓰러진 철갈권을 내려다보았다. 달려들었을 때부터 부상이 심했던 탓에 이미 숨통이 끊어져있었다.
‘운이 좋았다.’
길이 넓지 않고 상대의 기세가 워낙 강해서 피할 수가 없었다. 만약 영안이 없었거나 힘이 부족했다면 날아가는 건 연우혁일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의 승부였다.
“주, 주먹질 한 번으로... 철갈권을 죽이신 겁니까?!”
“...아니다. 당 소저가 죽인 거지. 큰일 날 소리 하지 마라.”
연우혁은 양 포쾌의 뺨을 때릴까 잠깐 고민했다. 안 그래도 심기 불편해졌을 당령이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령은 먼지를 털고 다가오더니 말했다.
“됐어. 연 포두가 죽인 걸로 하라고.”
“예? 하지만 당 소저께서...”
“귀 멀었나? 네가 죽인 걸로 하라니까?”
“아, 예.”
잠시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당령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방금은... 사과하지. 당문의 무인은 다들 화증(火症)이 좀 심한 편이라.”
“아닙니다. 의협심이 강하시면 좀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래. 그래도 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 덜한 편이야.”
“......”
연우혁은 경악했다.
그리고 앞으로 당문의 ‘당’만 들려도 무조건 도망쳐야겠다고 다짐했다.
‘실로 미친 새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