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판관요괴저택 (2)
관청을 나와 쭉 걸어 내려오면서 당등과 강 노인이 옛날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는 사이 연우혁은 틈을 노렸다.
“대협.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왜?”
“판관 어르신의 저택에 나타나는 요괴를 좀 조사해보려고 합니다.”
“오.”
당등은 기특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연우혁은 일이 쉽게 풀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맹 판관의 양쪽 뺨이 붓고 코뼈가 조금 내려앉긴 했지만 어쨌든 당문과 일이 잘 마무리된 것이다.
이제 이대로 미친 당문의 무인만 보내면...
“나도 좀 구경하고 싶군. 기다려라. 어르신만 데려다드리고 갈 테니까.”
“......”
* * *
강 노인이 집에 들어가는 걸 확인한 당등은 팔짱을 끼고 젊은 포두의 뒤를 쫓았다.
눈빛에는 평소 넘치던 살기 대신 호기심이 가득했다.
당가의 무인들은 외부인들을 잘 칭찬하지 않았다. 애초에 당가의 무인들은 살가움이나 친절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등이 생각하기에, 그건 당가의 무인들이 이 무림에서 진정한 협(俠)과 의(義)를 아는 유일한 문파이기 때문이었다.
다른 정파들은 시늉이나 내는 정도였고...
하여간 그렇기에 이런 당가의 무인에게 외부인이 칭찬을 받는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그리고 눈앞의 젊은 포두는 그 대단한 일을 해냈다.
당령이 그리 길게 말하진 않았지만, 저 젊은 포두가 없었다면 강 노인을 찾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만으로 충분했다.
‘젊은 포두치고 무공이 뛰어나긴 한데.’
당등은 뒤에서 찬찬히 연우혁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젊은 포두치고 무공이 뛰어난 편이긴 했지만 명문세가의 후기지수들과 비교하면 부족한 편이었다.
이런 수준으로 동귀어진을 펼치는 철갈방의 마두와 배짱 있게 맞서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담력만으로는 불가능했다.
강 노인이 남긴 파자(破字)를 순식간에 알아차릴 정도로 영특한 만큼, 상황을 주도면밀히 계산했으리라.
당등의 머릿속에 부족한 무공을 두뇌로 채우는 다른 세가가 떠올랐다.
“혹시 부친께서 제갈세가 출신인가?”
“...예?!?”
앞에서 걸어가던 연우혁은 기겁해서 주변을 쳐다보았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제갈세가의 무인 중 하나가 몰래 사생아를 낳았다는 소리 아닌가. 제갈세가 사람들이 듣는다면 뒷목 잡을 소리였다.
당등은 연우혁의 반응을 다른 뜻으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은밀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비밀은 지켜줄 테니 걱정하지 마라.”
“아닙니다!”
“정말로? 그런 것치고는 너무 머리가 좋은데.”
“과분한 칭찬에 감사드립니다. 선천적으로 상단전이 열린 탓에 여러 재주를 갖고 있습니다.”
“아...”
당등은 안타깝다는 듯이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나이 있는 무인인 만큼 상단전이 열린 사람들이 어떤 운명을 맞이하는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유감이다.”
“괜찮습니다. 다 왔습니다.”
연우혁은 발걸음을 멈췄다. 당등은 고개를 들고 장소를 확인했다. 한경 외곽의 다 무너져가는 고묘(古廟)와 그 위에 대충 휘갈긴 협(俠)자. 그리고 안에서 들리는 왁자지껄한 소리.
무림에서 이런 특징을 가진 장소는 많지 않았다.
“개방?”
“예. 한경의 개방 분타입니다.”
연우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사실, 같은 구파일방이라 하더라도 개방은 그 위치가 조금 특수했다. 관아와 관련해서는 더더욱 그랬다.
만약 구파의 무림인이 관청에 방문한다면 대부분 ‘도사님, 선사님, 오셨습니까’하며 대우를 받았다.
구파 문파가 오대세가처럼 강력한 힘과 명성, 인맥을 갖고 있어서기도 했지만 일단 그걸 제외하더라도 구파의 무림인들은 세간에서도 존경 받을 요소들이 많았던 것이다.
수양이 뛰어난 도사나 승려는 백성들은 물론이고 관리들도 존경하며 흠모했다.
그에 비해 개방의 무림인이 관청에 방문한다면?
일단 관리들은 삐딱한 자세로 비스듬히 쳐다보았다. 심지어 일결이나 이결 제자가 아니라 분타주가 와도 그랬다.
개방의 힘이 무섭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개방이 그만큼 관아와 깊이 엮여 있기 때문이었다.
화산파의 무림인이라면 관리한테 모욕을 받으면 뺨을 갈겨버리고 화산으로 돌아가면 됐다.
하지만 개방의 무림인이 관리의 뺨을 갈기면 관리들은 펄펄 뛰며 이 인근 거지들의 구걸을 방해하고, 거지들에게 맡기는 각종 더럽지만 짭짤한 일들을 취소해버리고, 거지들끼리의 법도에 따라 처리한 일도 트집을 잡고...
다른 구파와 달리 개방은 관에게 허락받은 특권들이 너무나도 많았고 책임져야 할 거지들도 그만큼 많았다.
부역을 지지 않고, 세금을 내지 않고, 심지어 국법도 잘 적용받지 않았다. 대부분의 관리들은 ‘거지들의 귀찮은 일은 거지들끼리 알아서 해라’하며 백성 취급도 해주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모욕일 수도 있었지만 특권인 건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개방과 관은 서로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태도를 견지했다.
거지들은 허락된 구역 안에서만 구걸을 하고, 포두나 포쾌들에게 시비를 걸지 않는다.
포두나 포쾌들은 거지들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한 먼저 핍박하거나 갈취하지 않는다.
실제로 연우혁이 오 포쾌한테 이런저런 가르침을 받았을 때 가장 먼저 들은 이야기 중 하나가 ‘거지 놈들 만만해보여도 돈 뜯지 마라’였다.
포쾌 입장에서는 엮여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여긴 왜 온 거지?”
“안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니, 포두 나으리께서 여긴 무슨 일로...”
젊은 거지 하나가 연 포두를 보고 뜨악한 표정으로 말했다.
포두가 분타까지 찾아오는 건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어린 놈들이 무슨 사고라도 쳤소? 만약 그런 거라면 우리가 따끔하게 가르치겠소. 최소한 다리 하나는 부러뜨릴 테니 이만 돌아가시오.”
“그것 때문에 온 게 아닙니다. 분타주를 뵙고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왔습니다.”
“아니... 분타주 님을 그렇게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게 아닌...”
당등의 눈빛에서 살기가 짙어지고 기세가 뿜어져 나오자 거지는 그제야 상대의 신분을 알아차렸다.
“설, 설마 독혼수 당등 대협이십니까?”
“물을 시간에 분타주나 부르지 그러냐?”
“예, 예!”
‘잘 데리고 왔군.’
연우혁은 당등을 데리고 온 보람을 처음으로 느꼈다.
억지로 따라올 때는 질색했지만 역시 개똥도 약에 쓸 때가 있는 법이었다. 개방 분타에 들어갈 때는 당문의 무인이 가진 명성이 제법 쓸만했다.
“들어오십시오. 분타주께서 안에 계십니다.”
연우혁은 거미줄을 손으로 대충 치운 다음 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몇몇 거지들이 깨진 그릇에 죽을 담아 손으로 퍼먹고 있었다. 연우혁과 눈이 마주치자 절대 줄 수 없다는 듯이 그릇을 손으로 가렸다.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당등은 젊은 포두의 말에 놀랐다.
“...분타주 님을 뵙습니다.”
“!”
그릇을 손으로 가리던 거지가 꼬질꼬질한 소매로 입가를 슥 닦은 다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 이 거지를 알아보는 사람은 드문데. 용케 알아봤군. 역시 소문이 자자한 명포두라 다른 건가?”
“어떻게 알아봤냐?”
당등은 호기심에 차서 물었다.
당장 당등도 분타주인 걸 알고 유심히 지켜보고 나서야 상대의 무공이 다른 거지들보다 뛰어나단 걸 알 수 있었다.
저 분타주의 무공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계열의 무공이 분명했다. 개방에는 거지들이 많아 저런 무공이 제법 있었다.
그런데 이 포두는 분타주와 안면도 없어 보이는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알아차렸단 말인가?
“매듭을 봤습니다.”
개방의 제자들은 새끼줄에 묶은 매듭의 개수로 신분을 표현했다. 분타주라면 세 개의 매듭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분타주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되물었다.
“난 매듭이 없네만?”
분타주는 일부러 매듭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매듭이 없어서 분타주 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허! 정말 명포두가 맞군 그래! 개수가 아니라 없어서라니. 그래. 그건 생각 못했군.”
사실 영안으로 확인한 거였지만 연우혁은 표정을 바꾸지 않고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등은 감탄한 눈빛으로 젊은 포두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명포두는 무슨 일로 찾아온 건가? 그것도 독혼수 대협과 같이? 필요한 정보라도 있나?”
팔짱을 낀 당등은 아마 포두가 필요한 정보를 말할 것이라 생각했다.
무림에서 개방만큼 소문과 정보에 빠삭한 이들이 드물었으니까. 온갖 곳을 돌아다니는 거지들은 주워듣는 게 많을 수밖에 없었다.
“분타주 님에게만 이야기드리고 싶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다들 나가있어라.”
분타주는 의아해하면서도 거지들을 밖으로 나가게 만들었다.
당등과 분타주만 남자 연우혁은 입을 열었다.
“분타주 님. 판관 저택에 요괴인 척 소란을 일으키시는 건 이제 그만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
당등은 놀라서 입을 쩍 벌린 채 젊은 포두를 쳐다보았다.
* * *
협걸개(俠乞丐)란 별호를 갖고 있는 정 분타주는 살면서 이렇게 놀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눈앞의 포두가 뛰어나단 소문을 많이 듣긴 했지만, 그 중에는 과장도 어느 정도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원래 무림의 소문이란 건 칠 할이 거짓 아니었던가.
백 보 양보하더라도 단서를 찾고 범인을 집요하게 쫓는 재주가 있다고 생각했지, 앉은 자리에서 백 리를 보는 그런 재주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러나 오늘 이렇게 이야기하는 걸 보니 분타주는 자신이 잘못 판단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포두에 관한 소문들은 진실일지도 모른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
“판관 저택에 나타나는 요괴들은 개방의 거지들입니다. 무공을 익혔으니 밤에 담장을 넘고 요괴인 척 하는 게 별로 어렵지 않겠지요. 게다가 개방의 귀가 있으니 저택의 방비도 쉽게 파악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개방이 왜 그런 짓을?”
“아마 그... 판관 나리의 탐학질이 좀 심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만.”
연우혁의 조심스러운 말에 분타주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그 자하고는 구원(舊怨)이 있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게 무슨 짓이오? 들키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의협심이 좋다지만 밑의 거지들도 있지 않소.”
당등은 어이가 없어서 분타주를 타박했다. 분타주도 할 말이 없었는지 고개를 숙였다.
연우혁도 어이가 없어서 당등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판관의 뺨을 대낮에 갈긴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니었다.
‘장난하나?’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기 부끄럽지만...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네.”
“들켰잖소. 여기 들켰는데 무슨.”
분타주의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보다 못한 연우혁이 끼어들었다.
“괜찮습니다. 이제라도 그만두시면... 잠깐. 분타주 님.”
영안으로 분타주의 감정을 보고 있던 연우혁은 설마 싶었다.
“...이미 며칠 전에 판관 저택의 은자를 털었네. 놈이 끝까지 버텨서 요괴 시늉으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아, 거참!”
당등은 이 겁 없는 거지에게 벌컥 화를 냈다.
알 만한 사람이 이렇게 뒷감당을 생각 안 하고 일을 저지르면 어떡한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