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 속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법 (59)화 (59/107)

살막 실종 사건 (2)

“...하여간 그랬다니 다행입니다.”

“그보다 천기수사가 왔는데, 별 일 없었나?”

적조는 제갈우의 별호를 읊을 때 적개심과 두려움이 섞인 반응을 보였다.

“별 일 없었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포두, 너는 포두라서 천기수사 그 자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는 거야.”

적조의 말에 부하는 긴장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흔히 살수들이 어느 문파를 두려워하느냐 이야기가 나오면 여러 갑론을박이 나왔지만, 적조가 생각하기에 제일 두려운 문파는 제갈세가였다.

무림에서 가장 두려운 자는 강한 자가 아니라 지혜로운 자였던 것이다.

그 중 특히 천기수사 제갈우는 살막의 의뢰를 몇 번이고 망쳤는지 몰랐다. 저번에 부자 놈을 하나 죽였는데, 자상(刺傷)의 각도와 깊이만 보고 살수가 고용됐다는 걸 알아차리는 모습에 오금이 굳는 기분이었다.

“무서운 사람이긴 했습니다.”

연우혁은 일 끝내자마자 바로 안채부터 털어댔던 천기수사의 모습에 깊이 공감했다. 적조는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랬을 거야. 용케 속여 넘겼다.”

“천기수사께서 그렇게 명성이 높으신데, 용케 살막에서 원한을 가지지 않는군요?”

“원한? 원한이야 강호 천지에 다 뻗었지만, 원한 있다고 다 갚을 수는 없는 법이야.”

살막이라고 제갈세가나 천기수사에게 원한이 없지는 않았다.

다만 복수하겠다고 천기수사를 공격하는 순간 피의 보복이 돌아올 테니 참을 뿐.

살막이 아무리 악명이 높아도 제갈세가나 오대세가의 공격을 받아낼 만큼 강하진 못했다.

무림에서 원한이란 힘이 없다면 잊어버리는 게 차라리 속편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포두 네가 당문이나 팽가와 친하게 지내는 건 현명한 선택이다. 네게 복수하려는 놈도 한 번은 고민할 테니까.”

“!”

살수의 말에 연우혁은 전율했다.

확실히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는데 놓치고 있었다. 연우혁이 사건을 해결할수록 원한도 같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젠장. 앞으로 더 조심해야겠군.’

이번 판관의 일은 운이 좋았지만 앞으로도 운이 좋을지는 알 수 없었다. 상단전을 걱정하면서 수련하다가 등에 칼 맞고 죽으면 그것만큼 어이없는 일도 없을 터였다.

“그런데 저는 당문하고는 그리 친하지 않습니다만.”

“그래?”

적조는 의아해했다. 당문 무사 놈들이 하는 이야기를 좀 염탐해봤는데 포두의 말과는 달랐던 것이다.

독혼수처럼 괴팍한 당문의 고수가 아끼는 외부인은 흔치 않았다. 안 그래도 폐쇄적인 당문 아닌가.

‘저 녀석 말이 맞겠지.’

적조는 더 묻지 않고 넘겼다. 어차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자. 포두. 우린 약속을 지켰다. 포두도 약속을 지켜줬으면 좋겠군.”

“그 전에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연우혁의 질문에 적조의 부하는 매섭게 노려보았다.

살수로서 저런 말은 언제나 좋지 못한 징조였다. 원래 약속과 다른 이야기가 시작될 거라는 암시였으니까.

그러나 연우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약속을 어기거나 할 생각은 없으니 말입니다. 저는 두 분을 도우고 싶은 겁니다.”

“돕고 싶다?”

적조는 포두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를 못했다.

“위치만 말해주면 될 텐데? 이봐, 포두. 말했잖아. 장로의 손녀를...”

“예. 압니다. 장로의 손녀를 찾고 계시다고. 그런데 적 대협. 혹시 손녀를 암살하러 가시는 겁니까?”

“뭐?”

뜻밖의 말에 역용술이 풀리더니 머리카락이 붉어졌다. 적조가 살기를 드러내며 말했다.

“방금 그게 무슨 뜻으로 한 소리냐?”

“대답부터 해주십시오.”

연우혁은 흔들리지 않고 말했다.

무공의 경지가 오른 것도 오른 것이었지만, 무림에서 워낙 괴팍한 인물들을 많이 만난 탓에 이제 흔들리지도 않았다.

“당연히 아니다!”

“그럴 것 같았습니다. 자. 보십시오. 지금 찾는 손녀 분의 자당께서는 장로님과 사이가 틀어지시고 도망쳐 나오셨습니다. 그런데 손녀 분에게 가서 살막에서 나왔다, 모시러 왔다고 하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어... 놀라더라도 혈연인데 감격하지 않을까?”

적조의 부하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연우혁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대답했다.

“놀라긴 할 겁니다. 감격은 저도 모르겠고...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겁니다. 좋게 나온 분이 아닌데, 여러분께서 너무 대뜸 찾아가는 게 아닌가 싶어서 걱정이 됩니다. 만약 자당께서 살막의 살수들이 언젠가 찾아올 때를 대비해서 함정이라도 파놨다면?”

“...!”

연우혁이 이렇게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 사건은 저택에서 십수명이 넘게 죽은 사건이었고, 저택의 사람들과 살수가 충돌해서 피바람이 불었었다.

그럼 최소한 살수들이 찾아갔을 때 환영은 받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저택 사람들이 함정을 파고 기다렸거나, 오해가 있었거나...

“음!”

적조는 침음성을 흘렸다. 생각도 못했는데 확실히 포두의 말이 아픈 곳을 찔렀다.

“아씨께서 싫어하실 지도 모르겠군.”

‘그걸 말해줘야 아나?’

연우혁은 그냥 가만히 있었다. 살수들이 이해했다면 다행이었다.

“그럼 이제 알려드리겠...”

“연 포두. 잠깐 내 이야기를 들어봐라.”

“?”

적조는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 연우혁은 멈추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 일을 맡긴 장로께서는 사실 내게 무공을 가르쳐 준 스승이다.”

‘아하.’

연우혁은 적조 같은 살막의 대주이자 고수가 왜 이런 사람 찾는 일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하긴 자기 스승의 가족사와 관련된 일이라면 나설 수도 있었다.

“장로께서 손녀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하신 겁니까?”

“비슷하다. 찾아달라고 했지만 만나게 해달라고 하진 않았어. 애초에 장로께서는 돌아가셨고.”

“저런. 지병이 있으셨습니까?”

“내가 죽였다. 다툼이 좀 있어서.”

“......”

연우혁은 경악했지만 두 살수는 당연하다는 듯이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받은 은혜가 있어서 죽은 사람 소원이나 들어줘야겠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생각해보니 손녀를 찾고 싶다고 말만 했지 또 찾은 뒤의 이야기를 안 했단 말이야.”

“그럼 찾은 다음 어떻게 하시려고 했습니까?”

“살막으로 가서 묘지에 술이나 좀 붓고, 장로 재산도 좀 주고 하려고 했지. 그런데 듣고 보니 싫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좀 들어서.”

“......”

“어떻게 하면 좋겠나?”

‘그걸 왜 나한테 묻냐?’

연우혁은 그렇게 말하려다가 두 살수의 무공을 다시 한 번 떠올리고 인내했다.

“저택이 아니라 밖에서 만나시죠. 만난 다음 물어보시면 되잖습니까? 어떻게 생각하는지.”

연우혁이 생각하기에도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장로의 손녀와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외할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저택에서 호화롭게 사는데 그걸 다 버리고 살막의 안가로 떠나고 싶은지 대답해줄 것 아닌가.

“좋은 생각이야.”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음. 연 포두. 부탁 하나만 더 하고 싶은데.”

“어떤 부탁인지 듣고 결정하겠습니다.”

“이야기하는데 같이 좀 가주...”

연우혁이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기색을 드러내자, 적조와 부하의 말이 다급해졌다.

“내가 관리 가문의 어린 여식하고 무슨 이야기를 해봤겠나!”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절 보십시오. 제가 명문가의 여식과 어울릴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그냥 살수들하고 어울리는 게 싫어서가 아니라, 진지하게 연우혁으로서 관리 가문의 여식과 접촉해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연우혁이 가문이 있고 미래가 창창한 정관이면 모를까, 가문도 없고 재주 뛰어난 포두에 불과했다. 지금 막 명성을 쌓았을 뿐인데 한경의 명문가 여식을 꼬드겼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괘씸죄에 걸릴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출세하려고 행동거지를 조심하고 있는데 뭘 시킨단 말인가?

하지만 살수들도 만만치 않게 끈질겼다. 적조는 계속 간청하다가 결국 마지막 수단을 꺼내들었다.

“나중에, 자네가 원하는 사람 한 명을 죽여주지!”

“...아니. 진짜 그렇게까지 하셔야 합니까?”

“정말 진지한 일이라 그렇다. 만약 내 서툰 말 때문에 아씨가 장로에 대한 원한을 풀지 못한다면, 죽어서도 떳떳하지 못할 거야.”

적조의 진지한 말에 연우혁의 마음도 좀 누그러졌다.

‘아니. 잠깐. 이 사람이 죽였잖아.’

연우혁은 바로 감상적으로 되려는 기분을 다잡았다. 속을 뻔한 것이다.

“알겠습니다. 한 번 계획을 짜봅시다.”

“포두. 자네는 내 장자방이다!”

‘이렇게 무의미한 칭찬도 드물겠군.’

고작 여식 만나서 무슨 이야기할지 정하는데 이런 칭찬이라니. 연우혁은 속으로 질색했다.

***

청군 정씨는 한경의 역사 깊은 명문가 중 하나였다. 때로는 드높은 권세나 풍족한 재물 없이도 그 가문이 쌓은 역사만으로 존중을 받는 경우가 있었는데 청군 정씨가 바로 그랬다.

새로 한경에 부임하는 관리부터 시작해서, 자기 가문의 격을 올리고 싶어 하는 야심 찬 가주, 오래되고 넓은 인맥의 힘을 빌리려는 전장주나 상단주...

살문 장로의 딸이 결혼한 사람은 바로 이 가문 출신의 젊은 관료였다. 비록 둘 다 병약해서 일찍 죽었지만, 둘이 낳은 딸 정여혜는 아직 가문에 남아있었다.

‘젠장. 생각보다 접촉하기 어려운데.’

연우혁은 이게 판관의 죽음을 조작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강호의 여협도 아닌 규중처녀를 일개 포두가 만날 방법이 쉽지 않은 것이다.

그나마 밖에 나갈 때도 이제 여러 사람들을 다 데리고 나가는데...

“어떻게 안 되겠나?”

“조용히 좀 해보십시오.”

연우혁은 깊게 생각에 잠겼다. 다른 포쾌들은 대체 무슨 사건이길래 연우혁이 저렇게 고민하나 두려워했다.

“우혁 아우 있나?”

“!”

안가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팽주성의 모습에 연우혁은 하던 일을 멈추고 일어섰다. 적조는 재빨리 자세를 낮추고 포쾌처럼 굴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팽가로 돌아간 줄 알았던 사람이 나타나자 연우혁은 의아해했다.

무슨 일이 있길래?

“아. 별 일은 아니고. 언제나 공무로 고생하는 우혁 아우가 걱정되어서 왔네. 가끔씩 쉬어주어야 어려운 일들을 해낼 수 있는 것 아니겠나?”

팽주성은 최근 한경 주변의 명산지를 둘러본 다음 한경의 젊은이들과 유산회(遊山會)를 조직한 모양이었다.

말이 유산회지 한마디로 산으로 놀러가는 모임이나 마찬가지였다. 주변 호족이나 명문가 출신 젊은이들끼리 같이 놀러가서 시 짓고 경치 구경하는...

원래라면 당연히 연우혁은 낄 생각이 없었다. 저런 자리에 포두가 가봤자 좋을 게 별로 없었던 것이다. 팽주성이야 자기 의동생이라고 띄워주겠지만 굳이 눈총만 받을 자리를 무엇하러 가겠는가.

“잠깐. 형님. 혹시 정 소저도 있습니까? 청군 정씨의...”

“!”

팽주성은 깜짝 놀랐다.

“우혁 아우. 설마...”

“형님. 오해십니다. 제가 그 소저에게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정 거사 어르신과 친분을 쌓을 생각인가? 그건 정말 좋은 생각이군. 그 어르신께서 우혁 아우를 도와주신다면 한경에서 정말 든든할 테니까!”

“...예. 형님께서는 어떻게 그렇게 제 마음을 잘 아십니까?”

연우혁은 팽주성을 무시한 자신을 반성했다.

“정 소저도 있네. 걱정 말게. 내가 도와주겠네. 정 소저가 아우를 칭찬할 수 있도록.”

“그러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그냥 잠깐 이야기 할 시간만 있으면...”

“사람 참! 나만 믿게.”

팽주성의 반응에 연우혁은 살짝 불안해졌다.

정말 괜찮은 거 맞나?

***

“자네가 연 포두라고? 생각보다 훨씬 젊군.”

“포두 놈이 여기는 왜 와?”

“왜, 질투라도 하는 건가? 아버지한테 들었네. 자네가 아버지의 일을 도와줬다고.”

“혼자서 철갈방을 토벌했다는 게 정말인가?”

의외로 사람들의 반응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시비를 거는 자들도 몇몇 있었지만 대부분은 요즘 소문 덕분인지 연우혁을 보고도 환영했다. 부하 포쾌로 위장한 적조는 초조하게 속삭였다.

“아가씨는 어디 있지?”

“좀 기다려보십시오.”

“연 포두, 연 포두! 혹시 이 상자 안에 든 물건을 맞출 수 있겠나?”

“향낭이군요.”

“대, 대단하군! 대단해! 다들 이거 봤나?!”

생각보다 잘 녹아드는 연우혁의 모습에 팽주성은 매우 흐뭇해했다.

가문이 없거나 포두라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저렇게 재능이 있는 아우라면 당연히 친분을 쌓을 자격이 있었다.

한바탕 젊은이들과 이야기를 나눈 연우혁이 팽주성에게 돌아왔다. 생각보다 심각한 표정에 팽주성이 놀리듯이 말했다.

“우혁 아우. 왜 그러나?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나?”

“팽 형님. 정 소저가 실종되신 것 같습니다. 저기 저 놈을 붙잡아서 심문하셔야 할 거 같은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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