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막 실종 사건 (3)
팽주성은 당황했다.
물론 우혁 아우가 앉은 자리에서 누가 죽었다는 이야기만 듣고도 범인을 알아맞히는 재주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산에 놀러 와서도 이런 이야기를 할 줄이야.
이쯤이면 연우혁이 액운을 몰고 다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농담처럼 떠오를 정도였다.
“그게 정말인가?”
“예.”
연우혁은 침착하게 말했다.
사실 이 사건 자체는 초반에 잘 해결하면 그리 복잡하게 꼬일 사건이 아니었다. 당장 정 소저를 데리고 간 놈도 사악하고 치밀한 계략으로 데리고 간 게 아니었다.
-정 소저의 하인들을 매수해서 다른 곳으로 헤매게 한 다음, 내가 찾아서 데리고 오면 깊은 감명을 받을 것이다!
...유치하고 철없는 발상이었지만 문제는 강호의 드넓은 산에서 이런 짓을 했다가는 자칫 정말로 실종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실종이 되면 여기서부터는 찾기가 매우 복잡해졌다. 그렇게 되면 연우혁도 당장 달려가서 흔적 확인하고 세 갈래길 중 어디로 갔는지 기억을 떠올려야 했다.
기껏 쉬러 나왔는데 숨도 쉬지 못하고 산을 뛰어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연우혁은 최대한 빨리 끝내겠다는 일념 하에 팽주성에게 말했다.
“물론 이유도 있습니다. 형님. 아까 상자 안에 든 물건을 맞혀보라고 했을 때 향낭이...”
팽주성은 듣지도 않고 연우혁이 지목한 사람을 붙잡으러 걸어갔다. 연우혁은 황당하다는 듯이 팽주성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
혁리욱은 한경의 명문가 출신으로, 뛰어난 학식과 문장으로 곧 급제할 거라는 기대를 받는 청년이었다.
그런 만큼 이번 유산회에서도 여러 사람들이 칭찬의 말을 던졌지만 혁리욱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머릿속이 다른 생각으로 꽉 차 있었던 것이다.
‘언제쯤 출발해야 하지?’
유산회에 정여혜가 온다는 말을 듣자 혁리욱은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정 소저와 가까워질 방법이 전무했다.
최근에 청군 정씨 가문에서 이리저리 혼사를 알아본다고 하지 않던가. 자기 가문으로는 전혀 연락이 오지 않는 걸 보니 이대로 내버려뒀다가는 끝장이었다.
없는 돈을 긁어모아 정 소저의 하인들을 매수했고,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를 잘못 알려준 것까지는 성공했다. 이제는 적당히 때를 봐서 ‘제가 찾아보러 가겠습니다’정도만 하면 됐다.
“이보게. 혁리 아우.”
“!”
갑자기 덩치 큰 무림인이 말을 걸자 혁리욱은 긴장했다. 팽가 출신의 무림인, 팽주성이었다.
솔직히 혁리욱은 팽주성이 조금 불편했다. 사람이야 호탕하지만 아무래도 거친 무림인 아닌가. 유산회에 참가한 벗들 중에는 팽가의 권세 때문에 아첨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혁리욱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잠깐 걷지. 저쪽으로 가게.”
“예?”
혁리욱은 당황했다. 너무 뜬금없는 제안이었던 것이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걷자는 건데 왜 그러나?”
“...그럴 기분이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좀 쉬어야겠...”
팽주성은 웃으면서 혁리욱의 어깨를 붙잡았다. 무림인도 아니고 연약한 혁리욱에게 내공이 실린 지법은 비명이 튀어나올 만큼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팽주성은 그럴 줄 알고 아혈을 먼저 짚은 상태였다. 혁리욱이 ‘미쳤소?’하고 눈빛으로 말하자 팽주성은 빙그레 웃었다.
“내가 좋게 말할 때 따라오게. 한 번만 더 반항하면 대낮에 개처럼 두들겨 맞는 수가 있네.”
“......”
뒤에서 따라오던 연우혁이 오히려 더 기겁했다. 평소 느긋하던 인상과 전혀 다른 모습 때문에 놀란 건 아니었다. 오대세가 출신인데 저 정도 강단도 없다면 그게 더 놀라운 일일 것이다.
그보다는...
‘아니, 이 사람 이유도 안 들었는데 이래도 되나?’
아무리 연우혁을 믿는다지만 이러다가 잘못 안 거면 어쩌려고...
“이 정도면 됐겠군. 자. 점혈을 풀 텐데 소리 지르지 말게. 멀리도 왔지만 소리 지르면 자네만 고통스러울 테니까.”
혁리욱은 아혈이 풀리자 씨근덕대며 팽주성을 노려보았다. 팽주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엄하게 말했다.
“정 소저를 어디로 안내한 건가? 빨리 말하게.”
“!?”
혁리욱은 기절할 듯이 놀랐다. 절대 알 수 없는 사실을 눈앞의 무림인과 포두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소...”
팽주성은 다시 점혈한 다음 혁리욱을 한 대 팼다. 뼈나 장기를 다치지 않게 고통만 주는 수법에, 연우혁은 팽주성이 한두번 해본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빨리!”
“컥... 커헉. 백, 백련봉 쪽으로... 잘못, 잘못했습니다.”
“따라오게. 우혁 아우. 자네도 같이 가지.”
“아, 예.”
연우혁은 아까보다 매우 공손해진 태도로 대답했다. 혁리욱이 눈물을 콸콸 쏟아내는 걸 보니 거절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난 백련봉 쪽으로 가서 한 번 돌고 오겠네! 괜찮은 경치를 발견하면 돌아올 테니, 먼저 마시고 있게나!”
“아니, 팽 형! 팽 형께서 가시면 우린 누구와 마십니까!”
“혁리욱 자네는 왜 같이 가나?”
“혁리 아우도 같이 가고 싶다는군. 하하!”
팽주성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끝낸 뒤 연우혁과 혁리욱을 데리고 말을 몰았다. 연우혁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형님. 이렇게 손속을 쓰셔도 되는 겁니까?”
“하하. 자기가 한 일이 있는데 입 닥치고 있지 않겠나?”
“만약 틀리기라도 했다면?”
“우혁 아우가 한 일이 틀릴 리가 있나. 이봐. 빨리 안내하게.”
“이, 이쪽입니다...”
혁리욱은 고통과 수치, 굴욕으로 떨다가 일각 정도 지나자 정신이 돌아왔는지 변명을 꺼냈다.
“제가 악한 의도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아네. 정 소저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런 것 아닌가.”
“그, 그런데 왜 이렇게 가혹하게...!”
“그건...”
연우혁은 자신이 대신 설명하려고 했다.
혁리욱이 괜히 팽주성한테 원한이라도 품으면 자기가 미안해졌던 것이다.
“지금 정 소저한테 잘 보여야 하는 사람이 자네만 있는 줄 아나? 자네 때문에 여기 우혁 아우는 바쁜 공무도 내버려두고 왔는데 기회만 날리게 생겼어. 자네는 자네밖에 모르나?”
“아, 아니. 형님. 그게 아닙니다.”
“아닌가?”
팽주성은 의아해했다.
그거 말고 화낼 이유가 딱히 없었던 것이다.
“여기 산이 비교적 낮고 야트막해보여도 그래도 산입니다. 단촐하게 나왔다가는 길을 잃을 수 있습니다.”
“아니...!”
혁리욱은 포두의 말에 기가 막혔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억지란 말인가?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목소리 낮추게. 내가 자네 동생인가?”
팽주성이 엄하게 노려보자 혁리욱은 자신도 모르게 포두 뒤로 숨었다. 연우혁은 팽주성을 말렸다.
“죄송합니다. 팽 형. 여기 혁리욱 소협도 나쁜 뜻은 없었을 겁니다.”
“그, 그렇습니다. 여기서 길을 잃을 리가...”
“정 소저 데리고 간 것도 들켰으면서 자신은 어떻게 하나?”
“그... 그건 대체 어떻게 아신 겁니까?”
“앞으로 우혁 아우 앞에서 쓸데없는 짓을 저지를 때는 한 번 더 고민하고 하게.”
팽주성의 말에 혁리욱은 경악의 눈빛으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경황이 없어서 어떻게 알았는지는 생각 못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이 포두가 알아맞힌 것이다.
최근 한경에 명성을 떨칠 때만 해도 ‘포두가 무슨, 운 좋게 쉬운 사건 몇 개 잡았을 것이다’라고 비웃었었는데...!
“대체 어떻게?!”
연우혁은 대답해주는 대신 인상을 찡그렸다. 영안으로 본 저 멀리에서 가마를 잠깐 내려놓은 흔적이 보였던 것이다.
‘젠장.’
정 소저가 여기 있었으면 쉽게 끝났지만 없는 순간부터 이제 가짜 흔적 진짜 흔적을 찾아가며 쫓아가야 했다. 연우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혁리욱은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없, 없을 리가 없는데... 아직 안 온 거 아닙니까?”
“저기 잠깐 가마 내려놓은 흔적 있습니다. 북쪽으로 간 모양이군요.”
현실을 부정하던 혁리욱은 연우혁이 가리키는 곳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이건 말도 안...”
타타탁!
뒤쪽에서 누군가 달려왔다. 연우혁과 팽주성은 고개를 돌렸다. 숨을 헐떡이며 땀에 젖은, 새로 들어 온 포쾌 적조였다.
적조는 연우혁을 노려보려다가 팽주성이 있는 걸 알아차리고 말했다.
“포... 포두님이 사라지셔서... 찾아왔습니다.”
“저렇게 충성스러울 줄이야!”
팽주성은 감탄했다.
맹장 밑에 약졸 없다더니, 역시 연우혁 밑의 포쾌들은 충성심과 끈기도 범상치 않았다.
이렇게 쫓아올 줄이야!
“대... 대체 무슨 일로...”
“미안하다. 다급한 일이라 어쩔 수 없었다.”
“얼마나 다급한 일이시길래...”
적조는 이를 빠득 갈며 말했다. 혹시라도 보는 눈이 있을까봐 내공을 쓰지 않고 뛰었기에 더 피곤했다.
“이 혁리 소협 때문에 정 소저가 이상한 곳으로 가버렸다.”
“...이런 개새끼가 정신이 나갔나!!”
적조는 눈을 뒤집고 혁리욱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연우혁은 서둘러 말렸다. 일개 포쾌한테 목숨 위협을 받는다는 충격에 혁리욱은 더더욱 혼이 나갔다.
“우혁 동생. 저 포쾌는...”
‘아차.’
“의분(義憤)이 뭔지 아는군그래. 그래! 마치 우혁 아우가 포쾌였을 때를 보는 것 같네.”
“...감사합니다. 빨리 찾으러 가시죠.”
“정, 정 소저를 찾아주십시오.”
혁리욱도 뒤늦게 상황을 깨닫고 애원했다.
“자네는 조용히 하고 있게. 자. 여기서 흔적이...”
사실 팽주성과 적조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사라진 걸 몰랐거나 크게 늦었으면 모를까, 이렇게 흔적을 잡은 이상 찾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팽주성은 세가에서 강호를 돌아다닐 때를 대비해서 추적술을 배웠고, 적조는 살수인 만큼 추적술에 뛰어났던 것이다.
“여기 흔적이 있군.”
“여기 찾았습니다!”
“?”
“?”
팽주성과 적조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여기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수풀이 치워져있지 않나. 사람이 움직여야 이쪽으로 갈 수 있네.”
“여기 발자국이 있고 떨어진 철전이 있습니다. 이게 사람이 건드린 흔적입니다.”
혁리욱은 둘의 대립에 당황했다. 당당하게 나서놓고 왜 이런단 말인가?
“둘 중 뭐가 맞는 겁니까?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자네는 조용히 하라니까. 보게. 여기 나뭇가지가 그냥 부러질 리가...”
“나뭇가지는 짐승도 부술 수 있습니다. 발자국을 보셔야지요.”
“그 발자국은 숫자가 너무 적지 않나? 다른 사람 아닌가?”
그 때 저 멀리서 연우혁이 말했다.
“흔적 찾았습니다! 빨리 오십시오!”
“......”
“......”
***
가끔 모든 우연과 불운이 일을 꼬이게 할 때가 있었다. 바로 정 소저가 사라진 일이 그랬다.
하인들이 길을 잘못 알고 들어간 것부터 시작해서 우왕좌왕하며 한 행동들이 모두 다 추적을 힘들게 만든 것이다.
‘직접 몸으로 뛰니 더 짜증나는군.’
방금 흔적은 단단한 길 위로 나있는데다가 흙먼지가 날아들어서 겉으로 보면 찾기 쉽지 않았다. 머리로 알고 있었는데도 영안으로 간신히 잡아낼 정도였으니 얼마나 희미한 흔적인지 알 수 있었다.
연우혁은 속도를 높이며 말했다.
“그 나뭇가지는 짐승이 건드린 겁니다.”
“하, 하지만 치운 흔적이 있었는데?”
“짐승을 쫓던 사냥꾼입니다. 참고로 저쪽 발자국은 사냥꾼이 낸 겁니다.”
“......”
“......”
두 무림인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혁리욱은 슬슬 여기서 누구한테 부탁해야 하는지 감이 온 것 같았다.
“이보게, 연 포두. 제발 정 소저를 찾아주게! 뭐든지 해줄 테니...”
뻑!
팽주성은 혁리욱을 한 대 쳤다. 혁리욱이 축 늘어지자 팽주성은 멈칫했다.
“음. 혼절시킬 생각은 아니었는데.”
“아주 잘 하셨습니다.”
적조는 매우 흡족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팽주성은 우혁 아우를 섬기는 포쾌의 모습에 속으로 생각했다.
‘우혁 아우 밑에 여러 포쾌들이 있다지만, 그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포쾌로군!’
“이번에야말로 발자국을 찾았네!”
“여기 가마를 내려놓은 흔적이...!”
“둘 다 아닙니다. 발자국은 하인이 물을 뜨러 간 거고, 가마를 내려놓은 건 축이 부러진 겁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팽주성과 적조는 한없이 멍청해진 기분을 느끼며 연우혁의 뒤를 쫓았다. 둘은 서로를 힐끗 쳐다보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친해진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