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막 실종 사건 (4)
반 시진 정도 뛰어다니면서 연우혁은 가짜 흔적 열여덟 개를 잡아냈다. 그 사람 좋던 팽주성도 화를 낼 정도였다.
“이 하인들은 길을 잃었다는 걸 알았으면 가만히 있기라도 할 것이지, 대체 왜 이렇게 돌아다닌단 말인가!”
물론 몇 번이고 잘못된 길로 빠지다 보니 화가 날 수도 있었지만, 연우혁이 보기에는 방금 한 말 때문에 화를 내는 것 같았다.
-우혁 아우! 이건 정말 확실하네. 정 소저의 발자국이야!
-물을 마시려고 잠깐 그쪽으로 갔다가 벌레에 놀란 겁니다.
-......
사람이 민망함을 감출 때에도 화를 내기 마련. 연우혁은 팽주성의 마음을 이해했다.
“원래 산을 돌아다녀 본 경험이 없는 자들은 길을 잃을 때 더 우왕좌왕하기 마련입니다.”
“그래도 그렇지. 나 원 참!”
“거의 다 온 것 같습니다. 흔적이 점점 가까이 나있는 걸 보니...”
연우혁은 말하다가 흔적을 발견하고 눈썹을 찌푸렸다.
‘젠장. 여기까지 오기 전에 찾았어야 했는데.’
지금 앞에 나있는 세 개의 흔적, 발자국과 찢어진 천과 흩어진 신발은 연우혁의 기억이 맞다면 마지막 흔적이었다. 이제 이 다음은 무조건 사라진 사람을 찾을 수 있었다.
문제는 이 흔적이 악랄하기 그지없는 단서라는 점이었다.
무려 매번 해결할 때마다 진짜 정답이 바뀌는 단서!
제대로 된 정답을 찾기 위해서는 각 단서에 남아있는 아주 미세한 흔적을 찾고 바뀌었는지 안 바뀌었는지 확인해야 했다.
게다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여기서 시간을 끌면...
‘아니. 그럴 필요가 없겠군!’
“형님. 형님께서는 왼쪽으로 가주십시오. 적 포쾌. 적 포쾌는 오른쪽으로! 저는 가운데로 가겠습니다.”
“알겠네!”
연우혁을 따라온 둘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바로 움직였다. 이유야 모르겠지만 연우혁이 저렇게 나눠져서 찾으라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땅을 박차고 경공을 펼치며, 연우혁은 몸을 반 바퀴 돌려서 뒤를 쳐다보았다. 기괴한 움직임의 경공이었지만 이렇게 움직여야 더 빠른 탓에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영안이 있어서 뒤를 보지 못하는 문제점은 별 방해가 되지 않았다. 연우혁은 쭉쭉 거리를 벌려가며 영안의 영역을 넓혀갔다.
‘찾았다!’
저 멀리서 명문가의 여식으로 보이는 사람이 넘어져 있었다. 앞에 있는 건 놀랍게도 호랑이였다. 언제라도 덤벼들 것처럼 사납게 으르렁대는 호랑이의 모습에 연우혁은 더욱 속도를 높였다.
‘이래서 싫었는데!’
연우혁이 이번 추적을 빨리 끝내고 싶어했던 것도 이래서였다.
늦어지면 맹수의 습격까지 일어나는 만큼 다른 사건과 달리 조금의 한숨도 돌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달려가던 연우혁의 손끝에 비도가 잡혔다. 탈혼비도가 다시 한 번 날아갈 준비를 끝내고 빛을 발했다.
그 순간 정 소저의 소매 속에서 자모환(子母丸)이 튀어나오더니 호랑이의 미간을 정확하게 맞췄다. 방심하고 있다가 급소를 맞은 호랑이가 울부짖었다.
“!?”
놀라워하면서도 연우혁의 손끝은 정확하게 움직였다. 고작 일류 초입이었지만 이류였을 때와는 감각 자체가 달랐다. 반 갑자를 넘긴 내공이 온몸을 격렬하게 타고 돌며 한 가지 목적만을 향해 움직였다.
오직 극쾌(極快)만을 위한 일초식의 무공!
‘푹’소리와 함께 멈춰 있던 호랑이가 쓰러졌다. 정여혜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누구십니까?!”
연우혁은 아차 싶었다.
‘방금 초식은 설마 살막의 무공인가?’
생각해보니 정여혜의 어머니는 살막 장로의 딸이었으니, 무공을 전수받았어도 놀라울 게 없었다.
경지를 보니 삼류에 불과했지만 살수의 무공이란 건 원래 강함보다 허를 찌르기에 무서운 법. 연우혁은 경계심을 올렸다.
“저는 적...”
“혹시 연 포두십니까?”
‘이런.’
연우혁은 명성이란 게 생각보다 귀찮다는 걸 깨달았다.
적조의 이름을 대며 넘어가려 했는데, 상대가 복장만 보고 바로 연우혁인 걸 깨달은 것이다.
“맞습니다. 정 소저십니까?”
“네. 도, 도와주십시오. 하인들이 갑자기 도망쳐서...”
정여혜는 겁먹은 목소리로 떨며 말했다. 그러나 연우혁은 방금 초식을 본 만큼 절대 방심하지 않고 영안을 열었다. 살문의 암기를 물려받은 사람이 호랑이 때문에 저럴 리 없었다.
‘...아니. 젠장.’
놀랍게도 정여혜는 연우혁을 공격해야 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
연우혁은 괜히 팽주성이나 적조가 오기 전에 사고가 터지는 것보다는 미리 선수를 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정 소저. 저를 공격하셔봤자 아무 의미 없습니다. 자당께서 떠나온 곳의 무림인들이 정 소저를 뵙고자 찾아왔습니다.”
“!”
정여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나 정여혜는 순식간에 표정을 수습하더니 말했다.
“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가요. 연 포두. 어머니께서 떠나온 곳이라니요.”
“여기서 이름을 말해도 되겠습니까? 사람은 없지만 혹시 듣는 귀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
정여혜의 표정이 돌변했다. 사람 하나 정도는 쉽게 죽일 법한 싸늘한 모습에 연우혁은 살문 장로의 핏줄이 끊기지는 않았다고 속으로 감탄했다.
“뭘 원하는 거지, 포두?”
“정 소저.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도 그저 협박받았을 뿐입니다.”
연우혁의 말에 정여혜의 눈빛이 조금 풀렸다. 안 그래도 복잡한 상황에서 포두까지 협박꾼이라면 골치가 아팠던 것이다.
“그쪽에서 뭘 원하지? 어머니의 무공?”
“아닙니다. 그쪽은 그저 정 소저를 도와드리고 싶어합니다.”
“뭐라고?”
연우혁은 정여혜의 외조부가 죽었고, 살수들이 유언을 지키려고 한경에 찾아왔다는 사실을 짧게 설명했다. 그걸 들은 정여혜는 기막혀했다.
“다른 목적 없이 살수들이 그냥 유언을 지키려고 찾아왔다고? 그걸 믿으라는 건가?”
‘확실히 이상하게 들리긴 한다.’
직접 살수들한테 들었을 때는 눈치채지 못했는데, 정여혜 입장에서 살막의 살수들이 찾아와 대뜸 도와주겠다고 하면 ‘이 살수들이 뭔 꿍꿍이가 있어서?’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살수들이 갑자기 도와주고 싶다고 말하는 게 훨씬 더 이상한 일 아니겠는가.
‘하지만 내가 알 바 아니지.’
연우혁은 정여혜를 설득할 생각이 없었다.
“정 소저. 저는 그저 협박받아서 연락만 전할 뿐입니다. 정 소저께서 원하지 않으신다면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포두가 별다른 설득이나 회유 없이 담담하게 물러서려고 하자 정여혜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정말로 살수들이 아무 의도 없이 도와주겠다고 찾아온 것이란 말인가?
“...아니. 만나보긴 하겠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보기는 해야지. 저택에라도 찾아오면 문제가 커질 테니까.”
“살수들도 혹여나 폐가 될까봐 저택에 찾아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연우혁은 내친 김에 적조를 좀 더 칭찬해줬다. 정여혜는 그 말에 조금 기분이 풀린 모양이었다.
“그 정도 생각을 할 머리는 있는 모양이네. 애초에 조부님께서는 살수들이 찾아올 때를 대비해서 고수를 식객으로 거두셨어. 별 생각 없이 들어왔다가는 죽었을 거야.”
‘그런 거였군.’
연우혁은 원래 살수들이 찾아갔을 때 왜 난리가 났는지를 깨달았다.
정여혜의 할아버지는 살막과의 인연을 알고 있는 만큼 철저히 대비한 것이다.
“연 포두! 여기 하인 놈들을 붙잡았네.”
“저는 말을 붙잡아왔습니다.”
다른 쪽으로 갔던 팽주성과 적조가 돌아왔다. 그 사이 부쩍 친해진 둘은 서로를 칭찬했다.
“적 포쾌의 재주는 참 뛰어나군.”
“팽 대협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
‘둘이 저렇게 친해도 되나?’
연우혁이 의아해하는 사이 정여혜가 시선을 보냈다. 기회를 만들란 소리였다.
“여기 정 소저께서 마차 없이 뛰다가 다치신 모양입니다. 혹시 말을 탈 수 있으십니까?”
“느리게라면...”
“적 포쾌. 자네가 말을 이끌게.”
연우혁의 말에 적조는 반색하며 감사해했다. 팽주성은 엄한 눈으로 붙잡아 온 하인들을 쳐다보았다.
“자네들 때문에 정 소저는 오늘 죽을 뻔했네. 여기 우혁 아우가 서둘러 쫓아오지 않았다면 말로 하기도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겠지. 그것도 모자라 자기들만 살려고 도망치다니...”
“저, 팽 대협. 저는 괜찮습니다. 이 일은 넘어가주셨으면 합니다.”
정여혜는 가련한 표정으로 말했다. 팽주성은 당혹스러워하며 하인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하지만 이 자들은...”
“부탁드립니다. 저 때문에 이들이 벌 받는 걸 본다면 견디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아, 아씨!”
하인들은 정여혜의 말에 눈물을 글썽거릴 정도로 감격했다. 심지어 팽주성까지 감격했다.
‘아니. 저건...’
연우혁은 왜 이렇게 저 행동들이 낯익나 싶었다. 생각해보니 저건 연우혁이 하는 짓과 비슷한 짓이었다.
적조는 연우혁 옆에서 속삭였다.
“장로는 저승에서도 만족할 거다. 손녀가 저렇게 선량하다니.”
“그 생각은 아직 하지 마시고, 조금 나중에 대화하고 마저 판단하시죠.”
“?”
* * *
“정, 정말 아무런 뜻도 없다.”
“살막의 살수들이 그냥 아무 뜻도 없이 왔다는 걸 믿으라고?”
팽주성을 먼저 보내고 대화할 틈을 만든 정여혜는 싸늘하게 캐물었다. 적조는 어리둥절해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연 포두. 이건...”
“저 보지 마십시오. 제 일 아닙니다.”
“아, 아니. 정말 도와주려고 온 건데...”
“그냥 도와줄 거 없으면 돌아가겠다고 하시죠?”
“어떻게 그러나?”
“상대가 싫다는데 어떡합니까?”
매정한 연우혁의 말에 적조는 어찌할 줄을 몰랐다. 둘을 지켜보던 정여혜는 연우혁에게 말했다.
“연 포두는 살수들한테 협박 받은 것치고는 그렇게 겁을 먹은 것 같지 않은데, 이유가 뭐지?”
“두 분의 일을 돕고 정 거사와 안면을 튼다면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습니다.”
“과연. 한경에 소문이 자자할 만하네.”
정여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다른 포두들과 달리 저 젊은 포두는 능력부터 시작해서 야심까지 남달랐다.
다른 포두들이라면 시키는 일도 허덕이면서 하고 있을 텐데, 혼자서 시키는 일은 물론이고 윗사람들한테 눈도장을 찍고 있지 않은가.
“좋아. 부탁할 게 있긴 해.”
“!”
적조는 반색했다.
“뭐지? 뭘 부탁하고 싶은 거냐?”
“혼약을 맺고 싶은 상대가 있어.”
“......”
생각도 못한 부탁에 적조는 경악했다.
“그걸 내가 어떻게?”
“그거 말고는 부탁할 게 없는데 어떡하란 거야? 도와줄 수 없으면 돌아가던가.”
“아, 아니. 그건...”
상대 살수가 맹세에 집착하는 걸 알아차린 정여혜는 기세가 등등했다.
연우혁은 그러거나 말거나 하품을 하며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할아버지께서는 나를 예뻐하시지. 하지만 다른 친척들을 압도할 정도는 아니야.”
정 거사는 엄격하고 고집 센 사람이었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문의 대소사를 마치 독불장군처럼 처리했다.
그런 정 거사에게 명문가가 아닌 살문 같은 정체불명의 무림 조직 출신 며느리를 데리고 온 아들은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정여혜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둘은 계속 눈치를 받아왔었다. 특히 정여혜의 숙부들이 보내는 견제가 심했다.
정여혜는 이 원한을 잊지 않고 있었다. 반드시 힘을 얻어서 보복할 생각이었다.
“나는 내 재주로 할아버지의 마음을 돌렸지만, 쐐기를 박으려면 화룡점정할 무언가가 필요해.”
“대체 누구길래?”
“바로 제갈세가지.”
“...!”
적조는 경악했다.
하필이면 골라도 제갈세가란 말인가?
“제갈세가의 직계인 제갈규가 이 근처에 와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혼약을 맺을 수 있게 도와줘.”
“무리다. 무리! 차라리 네 숙부를 죽이겠다.”
“숙부들이 갑자기 급사하면 누가 의심을 받겠어? 할아버지가 무슨 백치로 보여?”
“자연스럽게 죽이겠다.”
“자연스럽게 죽이든 부자연스럽게 죽이든 그냥 죽는 것 자체로 의심을 살 거라고. 자꾸 그딴 방법을 지껄일 거면 돕는다는 말은 하지도 마.”
“내가 무슨 재주로 제갈세가와 혼약을 맺게 해준단 말이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제갈세가는 살막과 가장 앙숙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실, 살막이 일방적으로 앙숙이라고 여기는 것에 가까웠다.
평범한 놈이라면 납치나 할 수 있지 제갈규 같은 제갈세가의 무림인은 그런 짓도 할 수 없었다. 적조는 대체 무슨 짓을 해야 할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내가 혼약이라고 말은 했지만 당연히 그것까지 바라진 않아. 자연스럽게 만날 기회를 만들어달란 거야.”
“그건... 그래도 무리다.”
“할 수 있는 게 대체 뭐야? 그럼 꺼지던가!”
“내가 오대세가의 무림인으로 보이냐? 난 살막의 대주다!”
울컥해서 항변한 적조는 연우혁을 보며 말했다.
“연 포두. 대신 좀 말해주게. 제갈세가의 젊은 놈을 데리고 와달라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음. 사실 그건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