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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 속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법 (73)화 (73/107)

무림출도 (4)

천기수사는 군사 망신이란 망신은 다 시키는 무림 말학 후배에게 자신도 모르게 고함을 쳤다.

무림에 저렇게 능력이 출중하면서도 멍청하게 구는 놈은 또 없을 것이다.

청괴산장의 흑사청요진을 풀어줬으면 이미 제 값을 다 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일검공자의 누명을 대가 없이 풀어주더니 이제는 흑륵존자란 마두 놈을 그냥 바치고 있었다.

“무림의 군사나 책사로 자처하는 자들이 이걸 들으면 네놈의 살점을 씹어 먹을 거다!”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

씩씩대며 한참을 타박하던 천기수사는 간신히 진정을 되찾고 연우혁을 노려보았다.

“그래서? 모용세가 공자들한테 흑륵존자 놈을 잡게 해줬다고? 잠깐. 흑륵존자라면 보통 교활한 놈이 아닐 텐데.”

흑륵존자는 그 무공의 강함만 따지고 보면 천기수사 같은 고수가 기억할 만큼 강하지는 않았지만, 교활한 심성과 끈질긴 조심성, 그리고 사악한 술법으로 악명이 높은 마두였다.

보통 마두들은 급격하게 쌓아올린 고강한 무공을 갖고 있어도 자신의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자멸하기 마련이었지만 흑륵존자 같은 마두는 쉽게 죽지 않았다. 언제든 다시 머리를 내밀고 사파 놈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역할을 했다.

당연히 이런 놈을 잡는 건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모용세가의 공자 놈들은 내공이야 심후해도 아직 젊고 경험 부족한 후기지수들 아닌가. 이런 놈들이 흑륵존자 같은 마두를 잡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흑륵존자가 매수한 자들이 있길래 잡지 않고 내버려뒀습니다. 초조해지면 또 다시 접촉하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상한 대로 흑륵존자가 보낸 부하가 진영에 들어오더군요. 흑륵존자 같은 마두는 말씀하신 대로 조심성이 높고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테니 산장 주변 지형 중 가장 외지고 인적 드문 곳에 대기하다가 확신이 섰을 때만 내려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성격은 다른 마두나 부하한테도 자기 위치를 말하지 않을 테니 위치만 맞춰 급습하면 쉽게 잡지 않겠습니까.”

“...천기수사란 별호는 네가 가져라!”

제갈우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앞에 앉아있는 무림 후배에게 던졌다.

어디서 이런 머리를 타고 난 놈이 굴러왔단 말인가?

“아닙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천기수사한테는 헛소리로 들리겠지만 연우혁은 반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애초에 자신이 아는 사건으로 상대가 굴러들어오는 건 어느 정도 운의 영역이었으니까.

만약 흑륵존자가 매수한 놈들을 불러서 여럿 죽일 살심을 품지 않고 그냥 대화만 하고 돌려보냈다면 연우혁도 흑륵존자가 꾸미는 사건을 아예 몰랐을 가능성이 컸다.

결국 흑륵존자는 자신의 살심에 발목이 잡힌 셈이었다.

“그런 운이면 천하제일인도 죽이겠구나. 하지만 아직 머리를 쓰는 게 부족하다. 천기수사가 아니라 천치수사 정도지.”

“...가르침을 주십시오.”

시시껄렁한 말장난은 못 들은 척 하고 연우혁은 공손하게 말했다.

“너도 머리가 달린 놈이니, 네가 보상 없이 알려준 실수 정도는 이미 눈치 채고 있을 것이다!”

“예. 반성하고 있습니다.”

방금 그렇게 화를 냈는데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이 일은 사실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다. 무림의 군사로서 삯을 받아내는 것 다음으로 중요한 일은 삯을 받아내면서 원한을 사지 않는 일이지.”

‘맞는 말이다.’

연우혁은 깊이 공감했다.

가끔 겁 없는 자들이 무림인에게 과분한 대가를 요구하는 일들이 있었지만 보통 그런 일들의 끝은 좋지 않았다.

지금이야 다급해서 어쩔 수 없이 값을 지불한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사람의 마음이 그대로일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자신의 그릇 이상으로 값을 뜯어낸 자는 그만큼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었다.

“내가 맞춰보마! 흑륵존자를 잡을 방법을 떠올렸을 때 너는 모용세가의 하인에게 말했을 것이다. 그 모용세가의 하인은 셋째인 화검공자 모용렴에게 먼저 보고했을 것이고. 모용렴 그 녀석이 무공이나 독심은 반 수 부족해도 인망은 조금 살 줄 아는 놈이니 말이다. 그에 비해 일검공자 모용소는 아랫사람을 돌보는 면모가 부족하지. 네 보고를 들은 모용렴은 무릎을 치며 이렇게 외쳤을 게 분명하다. 아, 하늘이 나를 도와 저 멍청한 포두를 보냈구나! 은자 몇 푼으로 이렇게 지혜를 빌릴 수 있다니!”

“......”

너무 말도 안 되는 음해에 연우혁은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기뻐한 모용렴은 이제 공을 세우려고 궁리를 했겠지. 흑륵존자의 목을 자른 공이라면 세가에서도 크게 인정을 받을 테니까. 하지만 흑륵존자는 만만한 놈이 아니다. 게다가 모용렴은 아랫사람한테 인망은 있어도 세가의 무인들에게까지 크게 신뢰를 받는 공자는 아니고. 그러면 어떨까? 아하, 당연히 모용렴은 다른 형님한테 같이 잡자고 부탁을 할 수밖에 없겠구나! 첫째 모용소와 같이 공을 세웠다가는 그 차이가 영원히 벌어질 테니, 상대는 당연히 둘째 냉검공자 모용현일 것이다.”

길게 말한 천기수사는 찻잔에 따른 뜨거운 물을 홀짝였다. 이 포두 녀석은 찻잔에 찻잎도 없이 백탕을 마시고 있었다.

“둘째, 셋째에게 은혜를 베풀어준 건 좋은 일이다. 삯이 아깝지만 그건 어쩔 수 없으니 넘어가자꾸나.”

‘아까부터 넘어가자고 하셔놓고 수십 번을 말하셨습니다.’

“하지만 첫째 일검공자는 어떻게 생각할까? 저 포두가 자기만 빼놓고 두 공자한테 은혜를 베풀었다고 원한을 품지 않겠느냐? 아무리 네가 모용소의 누명을 풀어줬다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은 받은 건 잊고 못 받은 것만 앙심을 품는 법이다!”

“저, 천기수사 님.”

“왜 그러느냐?”

“사실 하인한테 말하면 세 공자 중 자기가 충성하는 사람한테만 말할까봐 그냥 세 공자를 한 자리에 모은 다음에 흑륵존자의 위치를 알려줬습니다.”

천기수사는 눈을 부릅떴다. 감탄과 경탄의 부릅뜸이었다.

“너는... 너는...!”

연우혁은 천기수사가 감탄하자 살짝 뿌듯함을 느꼈다.

이건 확실히 칭찬을 받아도 될 만한 세심한 처세술이었던 것이다.

“대가는 머저리처럼 안 챙기는 놈이 처세술은 입신(入神)의 경지에 달했구나!”

“...넘어가신다고 하셨잖습니까.”

연우혁은 결국 참지 못하고 말을 내뱉었다. 천기수사는 무시하고 자기 할 말을 했다.

“잘했다. 이건 정말 영리한 짓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럼 지금 저 함성은 세 놈이 같이 잡은 거겠군. 숨통을 끊은 가장 큰 공이야 한 놈이 세웠겠지만, 다른 놈들은 아쉬워하더라도 너한테는 감사만 표할 것이다.”

그 때 천막 밖에서 헛기침 소리가 났다. 천기수사는 너무 길게 떠들었다고 중얼거리더니 말했다.

“그래, 미안하다. 들어와라!”

“!”

천기수사의 말에 처음 보는 중년의 무림인이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연우혁은 깜짝 놀랐다.

‘절정의 경지다!’

게다가 저번에 상대했던 적면혈뇌 악곤홍보다 더 높으면 높았지 낮지는 않았다. 잘 벼린, 한 자루의 검 같은 무인이었다.

“벽력신권(霹靂神拳) 모용태다. 모용세가의 장로지. 아무리 내가 몰래 들어왔다 하더라도 허락도 없이 다른 세가의 진영에 그냥 들어갈까?”

사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연우혁은 속마음을 숨기고 놀라는 시늉을 했다.

“역시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벽력신권 대협은 제가 뵌 적이 없습니다만, 혹시...”

“네 생각이 맞을 거다! 공자 놈들을 감시하고 있지.”

모용태는 거북하다는 듯이 말했다.

“천기수사 님. 감시가 아니라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아하. 도움이 필요할 때를 대비하시는 거군요.”

“그렇다.”

연우혁이 좋게 말해주자 모용태는 반색했다.

사실 지금 모용세가의 장로가 이 인근에서 대기하는 건 여러 이유가 함께였다.

하나는 공자들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을 때 합류하기 위해서였고...

다른 하나는 공자들을 감시하기 위해서가 맞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감시가 아니라 평가였다. 모용태의 형이자 모용세가의 가주는 세 공자 중 가장 뛰어난 자에게 가주 자리를 물려주고 싶어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면밀한 평가가 필요했다.

벽력신권 모용태가 여기 온 것은 혹시라도 모를 일을 대비한 세가의 무력이자 공자들을 평가하기 위한 심사관이었다.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하지. 진충비도. 소의 누명을 풀어주고 흑륵존자를 잡아낸 그 계책에 감탄했다.”

“감탄했으면 제대로 보상이나 해라!”

“...일이 끝나면 제가 소협에게 따로 보상하겠습니다.”

천기수사는 그제야 만족한듯 입을 다물었다. 모용태는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그렇게 보상을 원하시면 천금을 드릴 테니 세 공자들을 좀 평가해주십시오.”

“!”

연우혁은 천기수사의 높은 명망에 감동했다.

한 줄로 천금을 사다니. 저게 진정한 일자천금(一字千金)의 경지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천기수사는 딱 잘라서 거절했다.

“다른 세가 후계 정하는 일에 발을 들이미는 머저리는 없는 법이다.”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저 혼자 보겠습니다.”

“자기 혼자 보겠다는 놈의 말을 믿는 머저리는 없는 법이다.”

꼬장꼬장한 무림의 늙은 선배를 설득해봤자 답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모용태는 더 이상 부탁하지 않았다. 어차피 크게 기대하지도 않았었다.

“셋의 사이를 걱정해서 배려해준 것도 감탄했다. 혹시 한 가지만 더 부탁해도 되겠나?”

“들어보고 판단하겠습니다!”

“???”

연우혁은 자신이 말하지 않았는데도 자신의 목소리가 나오자 깜짝 놀랐다.

모용태도 그걸 느꼈는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연우혁의 목소리를 흉내 낸 천기수사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왜, 들어보고 판단하면 안 되나?”

“...아닙니다. 별 건 아니다. 이번 산장 토벌이 끝날 때까지 세 공자들을 최대한 싸우지 않게 해줄 수 있겠나? 셋 다 의욕이 넘치는 만큼 세간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검을 휘두를까 두렵군.”

연우혁과 모용태는 동시에 천기수사를 쳐다보았다. 천기수사는 짜증스럽게 일갈했다.

“이 정도는 알아서 판단해라.”

“아. 예. 그럼 노력해보겠습니다.”

대답을 하고 나서 연우혁은 움찔하며 천기수사의 주먹을 쳐다보았다. 다행히 공격은 날아오지 않았다. 이건 받는 게 맞는 모양이었다.

“벽력신권이 약속을 어기는 무인은 아니다. 공을 세우면 그만큼 보상을 할 녀석이지.”

“......”

자기 앞에서 자기 평을 뱉는 천기수사의 모습에 모용태는 불편해했다.

“그리고 흑륵존자까지 죽었으면 저기 마두 놈들은 오래 버티지 못할 거다. 일치단결해서 싸우면 더 버틸 수 있겠지만 애초에 그게 가능하면 마두가 아니지! 재물 때문에 모인 놈들이 그럴 수가 있겠느냐? 이제 세가의 공자들이 싸울 일도 없을 테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이고, 공자님들! 검을 거두십시오!

-검을 거둬주십시오! 밖에서 온 무인들도 보고 있습니다!

-보라고 해라! 냉검공자가 내 공적을 도둑질하려고 했다는 걸 말이다.

-하. 제가 할 이야기입니다. 형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시려고 하시는구려!

“......”

“...그럼 열심히 해봐라!”

연우혁은 무림 선배의 조언이라고 해서 꼭 맞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

‘생각해보니 꼭 들을 필요는 없긴 하다.’

천막을 나오면서 연우혁은 이 싸움을 꼭 자신이 말려야 하나 싶었다.

설마 벽력신권 모용태가 못 말린다고 약속한 보상을 안 줄 리는 없을 테고, 노력했는데 안 되겠다고 하면 어쩌겠는가?

공자들을 내버려둔 다음 자기들끼리 해결하게 하는 게 상책일지도 몰랐다.

‘천기수사 님이 이 계략을 들었어야 했는데.’

자신의 계략에 스스로 감탄하던 연우혁에게 무림인들이 달려왔다.

“진충비도! 진충비도. 빨리 오시오! 공자들이 싸우고 있소!”

“헉! 놀랐습니다! ...그런데 왜 저를?”

“진충비도가 아니면 누가 해결한단 말이오?”

연우혁은 어이가 없었다.

혹시 이 자리에 모인 무림인들은 연우혁이 아니라 모용우혁으로 알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잠깐, 잠깐! 저도 외인입니다. 다툼이 있으면 세가 사람들끼리 해결을 해야지요. 제가 섣불리 작은 명성만을 믿고 끼어들었다가는 비웃음만 살 겁니다. 세가에도 뛰어난 지혜를 가진 문객 분들이 많습니다.”

“공자들도 진충비도가 해결하면 불평하지 않고 받아들이겠다고 했소만...”

“.....”

무림인들의 말에 연우혁은 그냥 흑륵존자까지는 잡게 해주지 말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천기수사 님의 말에 틀림이 없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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