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 속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법 (74)화 (74/107)

무림출도 (5)

모용세가의 직계쯤 되면 무공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 자존심이 더 강하기 마련이라 외부인에게 필요 이상으로 부탁을 하지 않았다.

하물며 지금처럼 공자들끼리 서로 시비가 붙은 일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자기들끼리 해결을 보거나, 최소한 자기 가문에 머무르는 문객의 지혜를 빌려 해결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바로 연우혁을 부르다니.

이건 세 공자 모두 다 ‘진충비도라면 공정하게 해결해줄 것이다’라고 믿지 않았다면 일어나기 힘든 일이었다.

이것도 대단하다면 대단한 거였지만 연우혁 입장에서는 별로 기쁘지 않았다.

‘이 자식들이 과연 자기 편을 안 들어줬을 때도 날 똑같이 믿어줄지 모르겠는데...’

무림인들의 겉과 속이 다른 행태는 이미 몇 번 봐서 알고 있었다. 만약 한 공자의 편을 들어주면 바로 ‘진충비도, 흑륵존자를 잡아내서 믿었는데 허명이었구나!’하고 발광할지도 몰랐다.

“진충비도. 난 그대가 부럽소.”

“?”

연우혁이 속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착잡해하는 사이, 옆에 있던 무림인 하나가 말을 걸었다.

“나는 청서 출신의 막광이오. 이번 일에는 모용세가가 무인을 모은다고 해서 명성을 떨칠 겸 참가했소. 하지만 별다른 공적을 세우지는 못했소. 마두 놈들의 숫자는 적고 여기 모인 무림인들은 많았으니까. 그리고 모용세가 무인들의 무공은 내 보잘것없는 무공보다 뛰어났으니까. 그러나 진충비도 그대는 다르오. 지혜 하나로 모용세가 무인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난제들을 단칼에 베어버렸으니, 어느 누가 통쾌해하지 않겠소?”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이야!”

“진충비도! 그대가 아니었다면 여기 무인들 중 몇 명은 저 차가운 땅바닥에 드러누워 있었을 거요!”

“모용세가의 공자들이 다투는 것도 어서 따끔하게 훈계해주시오!”

“......”

무림인들은 진충비도의 별호를 외치며 환호했다.

이들에게 진충비도는 단순히 머리 뛰어난 책사나 군사가 아니었다.

이들에게 진충비도는 모용세가나 오대세가의 무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재주 하나로 명성을 떨치는 젊은 무인이었다.

심지어 이제는 모용세가의 무인들까지 사람을 보내서 진충비도의 도움을 부탁하고 있지 않은가.

“진충비도! 진충비도!”

자신의 별호를 외치며 환호하자 연우혁은 착잡함을 삼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고맙습니다, 동도 여러분! 이 진충비도. 반드시 싸움을 말리고 오겠습니다. 지켜봐주십시오!”

저 멀리 천막 안에서 천기수사 쯧쯧거리며 혀를 차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 * *

진검보에서 나온 장인형과 연림량은 연우혁 옆에 붙었다.

진법을 해제한 것도 모자라 흑륵존자의 목까지 손쉽게 따온 재주를 보자, 둘은 눈앞의 포두가 가진 능력을 마음 속 깊이 흠모하게 되었다.

“무엇이든 물어봐주십시오. 대협.”

“흑륵존자를 척살할 때 저희도 함께했으니, 도와드리겠습니다!”

“...고맙소. 어디 한 번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연우혁은 일단 착잡한 마음을 거두고 사건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야 고민도 할 수 있을 테니까.

흑륵존자가 절암봉에 있다는 사실을 들은 세 공자는 각자 휘하의 무인들을 이끌고 절암봉을 포위했다.

뒤늦게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은 흑륵존자는 다급히 반격에 나섰다. 밀교의 환술과 요술, 진법과 강시들이 동원되어서 무인들의 눈을 가리려고 했다.

그러나 흑륵존자는 혼자였고 모용세가의 무인들은 이미 철저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아무리 수작질을 부려도 포위망을 뚫는 건 쉽지 않았다.

강시들이 박살나고 환술과 요술은 흩어졌으며 진법이 불러낸 안개는 약해졌다. 마침내 모용세가의 세 공자는 흑륵존자를 직접 둘러싸고 합격진을 펼쳤다.

-대(大) 모용세가의 핏줄을 이은 무인들이 비겁하게 합공이냐!

-네 혓바닥을 손수 뽑고 싶어 하는 무인이 여럿이라 어쩔 수가 없구나!

“흑륵존자란 마두 놈이 정말 독하긴 독하더군요. 그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도망을 치려고 요술을 부리는데, 주변에 독안개가 자욱해지고... 그러다가 결국 안개가 걷혔는데 놈이 죽어있지 뭡니까. 가슴팍에 제대로 검을 맞고서 말입니다.”

여기까지 들은 연우혁은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

세 무인과 시체 하나.

설마...

“혹시 누가 흑륵존자의 숨통을 끊었는지 확실하지 않은 거요?”

“맞습니다! 역시 진충비도 대협다우십니다.”

다 듣기도 전에 예상하는 연우혁의 모습에 두 무인은 기뻐하며 손뼉을 쳤다. 이제 곧 해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나 연우혁은 더욱 더 골치가 아파왔다.

이건...

‘큰일났군.’

혼란스러운 상황 중에 흑륵존자가 죽었는데, 세 공자 중 누가 가장 커다란 공을 세웠는지 알 수가 없다. 어느 누가 흑륵존자에게 치명상을 입혔겠는가?

일검공자의 일격이라고 보기에는 결이 거칠었고, 냉검공자의 일격이라고 보기에는 흔들림이 많았으며, 화검공자의 일격이라고 보기에는 포악함이 엿보였다. 세가의 무인들도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을 꺼내가며 다투고 있을 만큼 알쏭달쏭한 문제였다.

하지만 연우혁은 답을 알았다.

‘흑륵존자 이 놈. 죽을 거면 얌전히 죽을 것이지.’

정답은 흑륵존자 본인의 자진(自盡)이라는 믿기 힘든 답이었다.

포위된 상황에서, 자기가 살아날 방도가 없다는 걸 깨달은 마두의 독심!

평소 모용세가 공자들의 관계를 잘 아는 교활한 마두였기에 가능한 계략이었다. 흑륵존자는 혼란 속에서 세 공자의 검격과 조금씩 닮은 일격을 자기 가슴팍에 찔러 넣은 것이다.

적만 아니었다면 제법 대단한 계략이라고 감탄했을지도 몰랐다. 실제로 연우혁이 아니었다면 이 계략은 통했을 가능성도 높았다. 지금 벌써 공자들끼리 서로 으르렁대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연우혁에게 들킨 이상 그럴 일은 사라진 셈이었다.

문제는 어떻게 말하느냐였다.

‘당신들 셋이 흑륵존자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다고 말한다면 아주 좋아하겠지.’

연우혁은 천기수사가 한 조언을 기억하고 있었다. 답을 찾아주는 것도 좋지만 상대에게 원한을 사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과연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 * *

“과연 괜찮겠습니까?”

벽력신권 모용태는 천기수사에게 손수 차를 타주며 물었다. 사람 없는 포두의 천막은 주변도 조용했다. 무림인들이란 무림인들은 온통 공자들이 있는 쪽에 몰려간 탓이었다.

뒤늦게 심복한테 상황을 전해들은 모용태는 과연 진충비도가 이걸 해결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공자들이 생각보다 훨씬 격렬하게 타협을 거절했던 것이다.

“괜찮겠냐고? 글쎄. 우리 세가도 얼간이들이 많은데 다른 세가의 어린놈들까지는 잘 모르겠군.”

“...공자들을 말한 게 아닙니다. 아시잖습니까.”

천기수사는 묵묵히 차를 홀짝였다.

“그런 질문을 하는 걸 보니 저 포두가 꽤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군.”

“저 재주를 보고 어느 누가 놀라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더 놀란 건 천기수사 님 때문입니다. 무림의 후배에게 이렇게 관심을 가지시는 일이 드무시잖습니까.”

제갈우는 제갈세가의 장로이자 원로로서 그 명성이 무림에 드높은 고수였지만, 그런 것치고 세가에서 입김이 그리 세지는 않았다. 워낙 괴팍한 성격이 발목을 붙잡은 탓이었다.

장로로서 세가의 젊은 무인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훈련을 시켜줘야 하는데 멍청한 놈들과 놀기 싫다며 훌쩍 떠나 무림을 주유하니, 세가의 젊은 무인들과 사이가 소원한 것도 당연했다.

그런데 그런 괴팍한 무인이 세가의 핏줄도 아닌 외인한테 관심을 가지니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몇몇 떠도는 소문에는 제갈세가의 숨겨진 방계가 아니냐는 조심스러운 소문도 있었다.

“그건 네가 군사가 아니라서 모르는 거다.”

“...?”

“군사로서 당연히 갖춰야 할 덕목이 있는 법인데, 그 덕목이 없다면 재주가 있어도 스스로를 다치게 할 뿐이지. 그걸 알려줬을 뿐이다.”

“그게 마음에 든다는 뜻 아닙니까?”

“이래서 천박한 무부(武夫)하고는 대화가 안 통한다는 거다. 군사의 일이 뭔지도 모르지.”

천기수사는 짜증을 냈다.

이 벽력신권이라는 놈이 무림에서 군사가 차지하는 역할과 정당한 대가를 받아내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 뭘 알겠는가?

“저야 어르신만큼 재주가 있지 않으니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 일은 해결이 잘 될 것 같습니까?”

“어렵겠지.”

천기수사는 담담하게 말했다. 고민 없이 말하는 모습에 모용태가 깜짝 놀랄 정도였다.

“어째서 말입니까? 그렇게 재주를 칭찬하셔놓고?”

“이건 재주로 될 일이 아니다.”

차를 호로록 들이킨 천기수사가 입을 열었다.

“가끔 무림에서는 상황 자체가 진상을 밝히지 못하게 만들 때가 있다. 지금이 바로 그렇다. 마두 놈들이 쌩쌩하던 때면 모를까 토벌은 반쯤 끝난 상황. 하늘 아래 무서운 것 없는 공자들이 눈치를 보겠느냐. 내 생각이지만 흑륵존자는 아마 자결했을 것이다.”

“말도 안 됩니다. 무슨!”

모용태는 부정했다.

마두만큼 자기 목숨을 아끼는 이들도 없었고, 흑륵존자는 마두들 중에서도 가장 끈질기고 치밀한 놈이었다.

그런 놈이 왜 자결을 한단 말인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네가 아직 마두 놈들을 덜 상대한 것이다. 흑륵존자 같은 놈은 자기가 죽을 때가 되면 독충처럼 독을 뿌릴 놈이지.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실제로 공자들이 다투고 있지 않느냐?”

“......”

그제야 뒤늦게 이해한 모용태는 흑륵존자의 독심에 놀라고, 그걸 알아차린 천기수사의 지략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이걸 진충비도가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겁니까?”

“아니. 나도 알아차렸으니 진충비도도 알아차렸겠지.”

“그런데 어째서...”

“공자들이 흑륵존자 손에 놀아났다는 걸 인정하겠느냐? 남들 앞에서 이렇게 호언장담을 했는데? 아마 흑륵존자가 수작을 부렸을 거다. 공자들이 자기가 죽였다고 확신하도록 말이다. 진충비도가 사실을 밝혀봤자 공자들은 자존심 때문에 인정하지 않을 거다.”

모용태는 인상을 찌푸렸다.

세가를 책임져야 하는 공자들이 영 미덥지 못하고 어리숙했던 것이다.

“성질 부리지 마라. 세가의 젊은 놈들 중에 그 정도 자존심 부리지 않는 놈은 없으니까.”

“사태가 커지면 제가 가서 막겠습니다.”

“됐다. 내가 갈 생각이었으니. 녀석에게는 좋은 교훈이 되겠지.”

천기수사는 상황이 커지면 직접 나서서 연우혁의 말에 힘을 실어줄 생각이었다.

진충비도의 이름은 무시해도 천기수사의 이름까지는 무시할 수 없을 테니까.

모용세가 쪽에서는 자존심이 상해하겠지만 그건 천기수사가 알 바 아니었다.

“천기수사 님께서는... 아닙니다.”

모용태는 진충비도가 참 마음에 든 것 같다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천기수사의 괴팍한 성격을 봤을 때 괜히 역정을 낼 수도 있었다.

그런 생각도 모르고 천기수사는 말을 이어나갔다.

“녀석은 재주는 뛰어나지만 아직 미숙한 부분들이 있다. 세가 놈들에게 잘못 걸리면 은자 한 푼 받지 못할 수 있지.”

“그러니까 그건 제가 보답하겠다고 말씀드렸...”

“돌아왔습니다.”

연우혁은 천막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둘은 놀라워하며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일은 어떻게 되었나?”

“휴. 잘 해결했습니다.”

“...어떻게?! 그럼 흑륵존자를 죽인 건 누구의 공으로 된 거지?!”

“세 공자께서 같이 나누기로 하셨습니다만...”

모용태는 물론이고 천기수사까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어떻게 그 놈들을 설득했지?”

“음. 조금 부끄러운 일입니다만...”

“흑륵존자가 자결한 게 아니었느냐?”

“알고 계셨습니까? 맞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연우혁은 천기수사의 말에 감탄했다.

연우혁이야 반칙에 가까운 능력으로 전말을 안다지만 천기수사는 혼자만의 추론으로 알아낸 것 아닌가. 실로 대단한 머리였다.

“그건 됐고, 공자들을 어떻게 설득한 거냐? 흑륵존자가 자결했다고 하면 절대 인정하지 않을 놈들인데?”

“아...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연우혁은 그렇게 말하고 슬쩍 모용태를 쳐다보았다. 그 뜻을 알아차린 모용태는 단호하게 말했다.

“어떤 이야기를 듣더라도 절대로 책망하지 않겠네.”

“감사합니다. 벽력신권 대협.”

천기수사는 빨리 말하라는 듯이 재촉했다. 연우혁은 찻물로 목을 좀 축였다. 급하게 돌아다닌 탓에 목이 말랐다.

“아니. 이 찻잎...?!”

“야, 이 염병할...”

“죄송합니다. 너무 비싼 찻잎이라 좀 놀랐습니다. 그, 천기수사 님. 사실 흑륵존자가 자결했다는 건 공자들한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각 공자께 찾아가서 실은 다른 공자가 죽였다고 설득한 다음, 못 본 척 덮어줄 테니까 세 공자가 같이 죽인 걸로 하자고 하니까 다들 흔쾌히 받아들이시더군요.”

“......”

천기수사는 경악해하는 모용태를 보며 조용히 충고했다.

“모용세가 가주가 누가 되든 간에, 저 마두 녀석은 세가에 오지 못하게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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