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 속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법 (75)화 (75/107)

무림출도 (6)

“말씀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닙니까?”

연우혁은 살짝 억울한 마음에 항변했다. 천기수사 때문에 모용태까지 연우혁을 경악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만큼 더더욱 억울했다.

“저는 천기수사 님에게 배운 대로 행동했을 뿐입니다!”

“나는 받은 만큼만 지혜를 치러 주라고 말했지, 세가의 공자들을 갖고 놀라고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천기수사는 떨떠름한 시선으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아는 문일지십(聞一知十)의 천재가 있다지만 그 천재도 모용세가 공자들을 다 갖고 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어디 한 번 자세히 말해봐라! 공자들이 얼마나 멍청한지 들어보자꾸나. 여기 벽력신권도 아주 궁금해 할 거다.”

***

연우혁은 일검공자 모용소를 먼저 찾아갔다. 공자들 중 조금이나마 지위가 높은 편인 만큼 가장 먼저 설득하는 게 편했다.

-공자님.

-어서 오시오. 진충비도. 그대의 활약 덕분에 저 마두들을 거의 다 몰아넣을 수 있었소. 특히 흑륵존자는 그대가 아니었다면 잡기 힘들었을 것이오.

-감사합니다. 저는 언제나 일검공자 대협께서 모용세가의 공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해왔었습니다.

-...그렇소?

-예. 사실 흑륵존자의 목도 일검공자께서 베어야 옳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다른 두 공자께서 자리에 멋대로 참석하시는 바람에...

-그런 거였다니!

모용소는 분한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다른 공자들이 와서 듣는 게 이상하다 싶었는데, 이 눈치 빠른 아우들이 끼어든 것이었다.

-부끄럽기 그지없군. 진충비도. 이렇게 말하기 부끄럽지만, 내 아우들은 하나같이 지독하고 비열한 자들이오. 언제 나한테 누명을 씌워도 이상하지 않은 놈들이지.

-예. 밀서가 나왔을 때 혈육을 믿지 않고 누명을 씌우는 모습에 저도 적잖이 실망했습니다.

-그렇지! 어떻게 된 놈들이 그런 상황에서 누명부터 씌운단 말이오?

-공자님.

연우혁은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적당히 신뢰를 쌓았으니 이제 시작할 때였다.

-실은 흑륵존자의 숨통을 끊은 건 냉검공자 모용현입니다.

-...말도 안 돼! 분명 내가 죽였소. 손끝에 느껴졌단 말이오!

모용소는 진심으로 부정했다. 그 자리에서 싸운 사람으로서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 또한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흑륵존자는 교활하고 끈질긴 마두입니다. 이런 마두는 합격진을 상대할 때 가장 위협적인 적을 우선시합니다. 바로 공자님이시지요.

-......

-다들 흑륵존자의 몸뚱아리는 샅샅이 뒤졌지만 저는 놈의 선장(禪杖)을 뒤졌습니다. 이 커다란 지팡이 끝에 금이 가있더군요.

모용소는 자신도 모르게 연우혁의 말에 집중했다. 확실히 이 진충비도는 달라도 뭔가 달랐다. 사람이 아니라 병장기에 주목하다니.

-이건 공자님의 일격을 막아낸 탓에 생긴 금입니다. 흑륵존자는 세 공자님이 달려드는 순간, 일단 공자님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선장을 뻗은 겁니다. 그 탓에 공자님의 공격은 아주 조금 늦었고, 냉검공자가 틈을 타 비열하게 먼저 심장에 검을 꽂은 겁니다.

-빌어먹을!

모용소는 분통을 터뜨렸다.

자신의 무공이 뛰어난 탓에 공을 늦게 차지하게 되다니.

-하지만 공자님. 저는 공자님이 흑륵존자를 죽였다고 생각합니다.

-...?

-생각해보십시오. 완전히 적을 제압한 무인과, 그 제압된 적을 끌고 가서 숨통을 끊은 사람. 어느 누가 그 적을 쓰러뜨린 사람이겠습니까?

-전자지. 그럼 진충비도. 혹시 내 편을...

-예! 말씀드렸듯이 저는 언제나 일검공자 대협께서 모용세가의 공자들 중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고맙소! 진충비도. 반드시 보답하겠소.

-공자님.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공은 아우들과 나누셔야 합니다.

-어째서 말이오? 진충비도 그대가 말한다면 사람들은...

-사람들은 납득하겠지요! 하지만 두 아우 분들은 납득하지 않을 겁니다. 다른 군사를 불러 찾아보겠다고 하면 어쩌시렵니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입니다.

-으음... 같이 나눈다고 해도 놈들이 받아들이겠소?

-다른 아우 분들께는 공자님이 흑륵존자를 죽였지만, 다툼이 오래가는 걸 원하지 않아 양보하겠다고 전하겠습니다. 그러면 그들도 반성하는 게 있을 겁니다.

-과연 그럴지 모르겠소.

-반성하진 않더라도 받아는 들이겠지요. 아예 못 얻는 것보다는 일부라도 공을 나눠가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공자님께서 먼저 도량을 보여주셨다는 겁니다. 세가의 어르신들께서는 이 점을 귀하게 여기실 테지요.

-...이해했소. 진충비도! 진충비도는 가히 나의 장자방이오. 만약 내가 가주가 된다면 진충비도를 귀하게 쓰겠소!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저는 대협 같은 분께서 모용세가의 가주가 되는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정파무림의 기치를 어느 분께서 지키시겠습니까!

-진충비도!

-대협!

그 다음 연우혁은 냉검공자 모용현을 찾아갔다.

-공자님. 처음 공자님께서 저를 경계하고 하찮게 여겼을 때, 저는 공자님이야말로 모용세가의 공자들 중 가장 뛰어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마두 맞군.”

“아닙니다.”

“어느 장자방이 주인을 돌아가면서 계책을 바치느냐?”

천기수사는 기가 막혔다. 성질 더럽고 깐깐한 세 공자들한테서 ‘그대가 내 장자방이오!’ 같은 소리를 듣다니.

저런 놈이 혈교 마두가 아니라서 천만다행이었다. 혈교 마두였다면 모용세가는 반 년 쯤 지나서 결딴이 났을 것이다.

“저는 이 일을 하면서 일말의 이득도 보지 못했잖습니까.”

“그게 아쉬운 점이지.”

천기수사는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처세술은 정말 훌륭했지만 그 과정에서 아무것도 받지 못하다니.

하지만 이것까지 뭐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원한을 사지 않고 위기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고, 또 저렇게 구워삶아 놓으면 언제든지 대가를 받을 수 있었다.

모용태도 진상을 다 듣자 생각이 달라졌는지 연우혁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맙다. 진충비도. 셋이 싸움을 멈춘 것은 오로지 네 공이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반드시 보답하겠다. 그리고... 음...”

모용태는 머뭇거렸다. 벽력신권이 저러는 건 보기 드문 모습이었기에 천기수사는 궁금해하며 재촉했다.

“뭔 이야기를 하려는 거냐? 빨리 말해봐라.”

“나중에 모용세가에 방문할 일이 생기면 내 처소로 찾아와라. 공자들은 방문하지 말고.”

“......”

“......”

연우혁과 천기수사가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자 모용태는 다급하게 변명했다.

“공자들이 아직 미숙하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지 그러나. 공자들이 너무 멍청해서 속아 넘어갈까봐 걱정된다고.”

“그게 아닙니다.”

모용태는 저 포두의 성정이 악하거나 교활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공자들이 자기들이 해결해야 할 일들을 저 포두에게 맡길까봐 걱정되었다. 공자들도 자존심이 있다지만, 저 포두의 능력은 그런 자존심도 굽히고 부를 만한 가치가 있었다.

“아니긴 무슨. 이해는 간다. 그런데 젊은 놈들이 다 저렇지 않더냐? 여기 마두 녀석이 교묘한 거지 공자들이 특별히 멍청한 건 아니다.”

“그렇습니까?”

모용태의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공자들이 너무 한심해서 속으로 앓고 있었는데 천기수사가 저렇게 말하니 살짝 마음이 가벼워진 것이다.

“흠. 잠시만. 아니다. 조금 멍청한 건 맞다. 아직 마두 놈들이 남아있는데 싸우는 건 멍청한 게 맞지.”

“...하여간 앞으로 잘 부탁하지.”

모용태는 연우혁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표했다. 세가에 이렇게 뛰어난 젊은 무인이 없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

마두들이 모인 산장의 분위기는 최악에 가까웠다. 흑륵존자가 죽은 뒤부터는 안에서 계책을 세울 놈이 없어진 만큼 더더욱 그랬다.

청수귀마는 어제 도망치려다가 잡힌 마두 세 놈을 손수 효수했다. 하인 놈들도 절반 넘게 도망갔는지 별채 안이 온통 먼지투성이었다.

“모여라, 모여! 이 잡놈들아!”

산장의 마두들은 불안과 두려움을 숨기며 청수귀마 앞에 나타났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상황인 만큼 청수귀마가 어떤 지랄을 할 지 예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오?”

“네놈들에게 기쁜 소식이 있다. 내일 아침! 우린 이 산장을 빠져나갈 거다.”

“!”

마두들은 기뻐하기보다는 당황했다.

예전이면 모를까 진법도 파괴되고 산장 앞까지 포위망이 바짝 완성된 지금은 나가고 싶어도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쥐새끼 하나 도망칠 틈이 없지 않은가.

“모용세가 놈들이 앞까지 있는데 어떻게?”

“힘으로 뚫는다. 다 같이 흩어져서.”

“...?”

마두들은 웅성거렸다. 예상 밖의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누구나 도망이나 탈출은 생각하고 있었다지만 이렇게 무식한 방법은 생각하지 못했다.

시퍼렇게 날을 세운 포위망에 그냥 무작정 뛰어든다고?

“위험하지 않겠소?”

“그 반대지. 네놈들에게 기쁜 소식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다 같이 흩어져서 도망치면 저 아래 놈들이 누구를 쫓아오겠느냐?”

“!”

그제야 뒤늦게 청수귀마의 말뜻을 이해한 마두들이 놀라워했다.

모용세가의 무인들이 가장 얻고 싶어하는 목은 이번 일을 일으킨 청수귀마의 목이었지, 그 밑의 하찮은 부스러기들이 아니었다.

굴욕적이긴 했지만 마두들에게는 차라리 다행인 일이었다. 청수귀마만 죽으면 그들은 목숨을 건질 확률이 높아졌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할 경우 청수귀마는 더더욱 위험해졌다. 모용세가의 주력들이 모두 다 죽이려고 달려올 것 아닌가.

마두 중 하나가 신중하게 물었다.

“청수귀마 당신이 너무 위험하지 않겠소?”

“오, 말 잘 꺼냈다. 네놈이 나하고 같이 가면 되겠구나.”

“아... 아니. 아니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라, 잡놈들아!”

청수귀마는 탁자를 손으로 박살내며 웃었다. 그리고는 부하에게 남은 술항아리와 소금에 절인 고기를 갖고 오라고 명령했다.

“사내가 한 번 큰 뜻을 품었으면 사소한 것에는 굴하지 않는 법이다. 흑륵존자 그 놈이 어처구니없게 죽었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여길 빠져나가서 모용세가의 낯짝에 먹칠을 해주겠다!”

대마두의 외침에 가슴이 뜨거워진 마두들이 함성을 질렀다. 그들은 술을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외쳤다.

“청수귀마, 어느 누가 당신을 상대하겠소? 모용세가의 새파란 애송이들은 당신의 장법만 보고도 오줌을 싸며 도망칠 거요!”

“말 잘했다! 더 마셔라, 더!”

산장의 마두들은 남은 술과 고기를 아낌없이 마시고 먹어치웠다. 다들 거나하게 취해서 고개도 들지 못하자 청수귀마는 차갑게 눈빛을 빛내며 부하에게 말했다.

“준비해라!”

화르륵!

청수귀마의 부하들은 망설이지 않고 별채에 불을 놓았다. 미리 기름을 부어놓은 탓에 불은 순식간에 타올랐다.

“빠져나오는 놈을 확인할까요?”

“필요없다! 몽혼약 때문에 일어나지도 못할 거다.”

“역시 청수귀마 님이십니다.”

부하들은 실실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청수귀마의 계략은 악독한 마두들도 속아 넘어갈 만큼 대단했다.

산장에 불을 질러 태워 죽인 뒤, 자신은 변장해 하인인 척 내려가 ‘마두들이 자기들끼리 서로 죽였다’라고 한다니.

지금 붙잡혀 있던 하인들은 별채의 불을 보고 기회다 싶어서 사방으로 도망치고 있을 것이다.

더더욱 청수귀마와 부하들이 사이에 끼어들기 좋았다.

“그래!”

청수귀마는 순식간에 출수했다. 허공에 장영이 펼쳐지더니 음산한 내력이 부하들의 가슴뼈를 부수고 내장을 녹였다.

“컥!”

“개자식...!”

“날 원망하지 마라! 무림이란 게 원래 이런 것이니.”

부하들을 타오르는 별채에 던져 넣은 청수귀마는 역용술을 펼치고 귀식단(龜息丹)을 입에 던져 넣었다.

원래는 뱃속에 들어가면 진기의 흐름을 막아버리는 일종의 산공약이었지만, 청수귀마는 의술에 뛰어난 다른 마두에게 훔쳐낸 비방으로 단약을 아주 천천히 녹게 만들었다.

모용세가의 놈들을 속여 넘긴 뒤에는 단을 뱉어서 진기의 흐름을 원활하게 만들면 그만이었다.

역용술은 물론이고 귀식단까지 사용하자 청수귀마는 누가 봐도 겁먹은 하인 같았다. 청수귀마는 어둠을 따라 달렸다. 저 멀리 하인들이 도망치는 게 보이자 청수귀마는 빙그레 웃었다.

“멈춰라!”

“살,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저희는 마두가 아닙니다! 붙잡혀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청수귀마가 외치지 않아도 붙잡혔던 하인들이 알아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무림인들이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마, 마두들끼리 술을 마시다가 싸운 것 같습니다. 시끄럽게 떠들다가 갑자기 불이 났는데...”

“제대로 말해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저희는 멋대로 움직이면 크게 벌을 받아서... 밖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거 빨리 올라가야 하는 거 아닌가? 모용세가에서 그랬잖나. 적들이 빈틈을 보이면 넘어가지 말라고.”

각자 건물에 갇혀 있던 하인들은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청수귀마는 속으로 웃었다.

몇 가지 질문을 하고 풀어줄 줄 알았는데 분위기를 보니 그것도 없을 것 같았다.

“흠. 그래도 혹시 모르니 진충비도께 물어보세.”

“아하. 그러면 되겠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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