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 속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법-78화 (78/107)

녹림 총채주 실종사건 (1)

-너도 빨리 해라.

“......”

전음이 날아오자 연우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는 외쳤다.

“나는 진충비도 연우혁이다! 정파의 무인으로서... 정파의 무인으로서...”

-너희 녹림의 무리들이 선량한 행객들을 핍박하는 걸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구나! 감히 나를 찾다니. 오늘 하늘이 의로운 자의 편인지 불의한 자의 편인지 보여주도록 하겠다!

연우혁이 말을 더듬자 천기수사는 정확하게 조언했다.

녹림 놈들이 왜 진충비도를 찾는지는 모르겠지만 찾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이상 먼저 나서서 주도적으로 협행을 펼치는 게 나았다.

찾기 시작한 다음에 나오면 아무래도 체면이 좀 덜 세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지 않았으면 모를까, 나선 이상 크고 정확하게 자신의 별호와 신분을 밝혀서 무림에 알려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남는 게 없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상인과 보부상들한테서 뭘 얻을 수 있겠는가.

“...하겠다!”

“진충비도! 진충비도가 여기 있었다니!”

“진, 진충비도가 누구여?”

“나 들어봤네. 요즘 한경에 소문이 자자한 명포두 아닌가? 귀신도 모를 난제를 척척 해결한다네. 백성들한테 한 푼도 받지 않고 말이야!”

“...한 푼도?!”

아까 제갈세가의 천기수사와 달리, 연우혁의 별호는 반응이 반으로 나뉘었다.

돌아다니느라 한경의 소문을 들은 보부상들은 알고 있었지만 소문을 듣지 못한 사람들은 뒤늦게 전해 듣고 놀라워했다.

특히 백성들한테 은자를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들 크게 놀랐다.

‘포두가 무공의 고수라는 게 더 놀라워야 하지 않나!’

천기수사는 세태에 탄식하며 쓰러진 산적들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산적들이 급히 무릎을 꿇었다.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천기수사 나으리!”

“오해?”

“예! 저희는 진충비도 소협한테 어떤 해도 끼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저 모셔오란 명령을 들었을 뿐입니다! 무례를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평소 위풍당당한 녹림의 산적들은 시비가 붙어도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일개 산채의 산적이면 모를까 녹림칠십이채의 산적이라면 어느 정도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제갈세가의 장로이자 무림에 수많은 인연을 쌓아둔 괴걸(怪傑)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괜히 녹림칠십이채를 믿고 건방을 떨었다가는 머리통이 으깨지는 수가 생겼다.

산적들을 노려보던 천기수사는 힘을 풀었다.

애초에 정말로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면 점혈하는 대신 살초를 펼쳤을 것이다.

“건방진 놈들. 너희가 정파의 협객을 얼마나 무시하길래 멋대로 납치를 하려고 하느냐?”

“아닙니다, 아닙니다! 저희가 무식한 도둑놈들이라 오해가 있었던 겁니다!”

“네놈들의 우두머리를 불러와라! 얼마나 대단한 일이길래 협객을 납치하려고 하는지 봐야겠다!”

산적들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천기수사의 요구는 과한 요구가 아니었지만, 산적들에게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요구였다.

금오채 채주, 쌍패부 종광은 호락호락한 무인이 아니었다. 천기수사의 제안은 거절하지 못하더라도 그 화는 산적들에게 풀 수 있었다.

산적들은 일어나서 산채로 올라가지도, 그렇다고 천기수사의 제안을 거절하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넙죽 엎드렸다.

그 때 연우혁은 산적들에게 말했다.

“고수가 나타나서 채주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시오.”

“...예?”

“웬 고수가 나타났는데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하면 채주도 책망할 정신이 없을 거요.”

올라가서 곧이곧대로 ‘천기수사가 오랍니다’하면 두세놈은 머리통이 깨질 수 있었지만, 올라가서 ‘웬 고수 놈 하나가 날뜁니다’하면 채주도 다른 생각 할 여를 없이 달려오기부터 할 것이다.

산적들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다.

“기가 막힌 계책입니다!”

“그건 내가 할 소리다.”

천기수사는 연우혁에게 기가 막히다는 듯이 시선을 던졌다.

“산적 놈들을 뭐하러 도와주냐?”

“무슨 일인지 모르는 만큼, 회유해서 나쁠 것 없지 않잖습니까.”

“산적 놈들이 그렇게 쓸만하진 않을 텐데... 뭐, 좋다. 이건 네 일이니 네 의견을 존중하도록 하마.”

산적들은 반으로 나뉘어서 일부는 산채로 올라가고, 남은 일부는 자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을 쫓아냈다.

사람들은 천기수사와 진충비도의 이름을 꼭 퍼뜨리겠다고 다짐하며 떠났다. 천기수사는 퍼뜨릴 소문의 내용까지 구체적으로 정해줬다.

“정말 치밀하시군요.”

“태산은 한 줌 흙도 사양하지 않는 법이지.”

‘이럴 때 쓰는 말이 맞나?’

***

쌍패부 종광은 가히 녹림의 채주를 맡을 만한 무인이었다.

뛰어난 외공과 강맹한 초식, 휘하 산적들을 휘어잡는 위세, 그리고 살짝 부족한 머리까지.

부족한 머리가 왜 채주한테 필요하냐고 할 수 있겠지만, 의외로 녹림 채주에게는 필요한 능력이었다. 너무 똑똑한 채주는 녹림의 장로들이 경계하거나 의심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종광은 전형적인 녹림칠십이채의 채주였다.

-관모를 쓰고 걸어가는 선비가 있는데 입이 넷 달린 개새끼가 발목을 물어뜯었구나, 호걸은 어느 편에 설 것인가?

“환장하겠다, 환장하겠어! 어떤 놈이 이런 투서를 보내는 거냐!”

종광은 으르렁거리며 함성을 삼켰다.

최근 대(大) 녹림칠십이채의 분위기는 그리 좋지 못했다. 총채주가 두문불출하고 장로들이 연달아 다투는데 분위기가 좋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종광은 이런 일들은 잊어버리고 녹림도의 본분에 집중하고 싶었다. 녹림도들끼리 다툴 시간에 지나가는 행인의 재물을 떳떳하게 모으는 게 훨씬 옳은 일 아니겠는가.

그러나 녹림칠십이채의 탁한 분위기는 종광의 산채까지 건너왔다. 처음에는 소문으로 돌던 유언(流言)이 이제는 아예 투서의 꼴을 갖추고 종광의 산채에 던져질 정도였다.

종광은 자신의 발밑에서 무언가 움직이고 있다는 건 느꼈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어디에 물을 수도 없었다. 종광의 부하들은 하나 같이 종광보다 멍청했던 데다가, 무엇보다 녹림의 채주라면 자신의 약점을 부하한테 드러내지 않는 법이었으니까.

밤에 자다가 부하가 암습해 채주가 바뀌어도 녹림칠십이채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부하 하나 휘어잡지 못하는 채주라면 그 채주 본인의 잘못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게속 고민하던 종광의 귀에 들어온 건 어느 소문이었다.

-최근에 진충비도란 놈이 있다는데 들었나?

-놈이라니! 말 조심해라.

-아는 사이냐?

-친척이 하나 있는데, 배에서 물건을 훔쳤다는 누명을 써서 관아로 끌려갔지. 죽었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진충비도가 나와서 누명을 풀어줬다는군.

-그 누명을 어떻게 풀어줘? 관졸한테 잡혔는데? 은자를 바쳤나?

-아니라니까. 그냥 풀어줬다고.

-그러니까 관아에 끌려갔는데 어떻게... 억!

-야, 이 자식아.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무슨 주둥이가 이렇게 재잘대냐!

산적들의 대화에 흥미를 가진 종광은 부하들을 시켜서 진충비도에 대한 정보를 긁어모았다.

특이하게도 포두로 일하고 있는 무인이었다. 젊은 나이에 명문세가 출신도 아닌데 무공이 제법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특기할 점은 비범한 두뇌였다.

한경의 여러 문제들을 풀어준 것도 모자라 모용세가 놈들까지 불렀다지 않은가.

‘이 놈이다!’

종광은 이 포두가 지금 난관을 물어보기 가장 좋은 인재라고 확신했다.

명문세가가 아니니 녹림의 이야기가 쉽게 새지도 않을 것이고, 채주가 되어서 녹림을 팔아먹었다는 소문도 퍼지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세력도 없는 젊은 놈이라 부르기 쉬웠다. 한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붙잡아서 물어보면 될 것 같았다.

“두, 두목!”

“무슨 일이냐?”

“웬 고수가 날뛰고 있습니다! 도와주셔야 할 거 같습니다!”

“뭐?”

종광은 일단 애병인 도끼를 챙겼다.

어떤 고수인지는 몰라도 일단 내려가서 확인을 해봐야 했다. 만만하고 이길 수 있는 놈이면 싸우고, 아니면 꼬리를 내리고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 했으니.

“가자! 뭐하는 놈이냐? 어디 출신이지?”

“그것이, 잘 모르겠습니다!”

“멍청한 놈!”

종광은 부하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달렸다. 저 언덕 아래에 부하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감히 누가... 헉!”

제갈세가의 장로를 알아본 종광의 눈이 커졌다.

저건 천기수사 아닌가!

***

“요즘 녹림이 혼란스러워서 지혜를 빌리려고 했다? 시시한 이야기였군.”

채주한테 사정을 들은 천기수사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말했다. 종광은 멍청한 부하들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천기수사가 같이 있었으면 그 이야기부터 할 것이지, 멍청하기 그지없는 놈들이었다.

“난 또 혈교 놈들이 무슨 계략이라도 꾸미는 줄 알았네.”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종광은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걸 느꼈다.

혈교와 결탁했다는 혐의는 농으로 주고받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칠십이채가 있다고 하더라도 혈교가 엮이는 순간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의 주력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올 것이다.

“저는 그저 외부인의 조언을 한 번 들어보고자 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자세한 사정이 어떻게 되느냐?”

“그... 그건...”

상대가 아무래도 제갈세가의 무인인 만큼 종광은 주저했다.

어떻게 보면 녹림의 약점을 오대세가의 무인에게 함부로 말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걸 알아차린 천기수사는 별로 불쾌해하지 않고 말했다.

“말할 수 없다면 됐다. 자리를 비워줄 테니 한 번 이야기해봐라.”

“감, 감사드립니다!”

“하! 감사하긴 아직 이를 거다.”

종광은 천기수사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녹림의 산적들은 자기보다 더 뛰어난 도적들이 무림에 있다는 걸 상상하지 못하는 것이다.

“큼! 진충비도 소협.”

천기수사가 자리를 비워주자 종광은 헛기침을 했다. 커다란 덩치에서 드러나는 외공과, 그만큼은 못해도 받쳐주는 내공이 과연 녹림의 채주 자리를 괜히 맡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느끼게 해줬다.

“먼저 이걸 좀 봐주게.”

“?”

연우혁은 투서를 받아들었다.

-관모를 쓰고 걸어가는 선비가 있는데 입이 넷 달린 개새끼가 발목을 물어뜯었구나, 호걸은 어느 편에 설 것인가?

“요즘 이런 소문이 도는데,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

“혹시 총채주께서 요즘 은거하고 계십니까?”

“?!”

종광은 깜짝 놀랐다.

소문으로 들었을 때는 좀 과장이나 부풀려진 면모가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직접 경험하니 가슴이 철렁거릴 정도로 놀라웠다.

“녹림에 대해 알고 있었나?”

“몰랐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니라면 어떻게 총채주가...”

“관모(一)를 쓰고 걸어가는 선비(士)는 왕(王) 아닙니까. 입(口)이 넷 달린 개(犬)는 기(器)를 말하는 거고요. 총채주 주변에 기가 들어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부, 부채주 한기!”

“이 소문은 부채주가 총채주를 습격했다는 뜻이 되겠군요. 부채주의 반대편에 서있는 자가 소문을 퍼뜨리면서 채주들이 어디 설 거냐고 묻는 것 아니겠습니까.”

연우혁은 친절하게 설명해주면서 의아해졌다.

“그런데 다른 채주들이 움직임을 안 보였습니까?”

“딱히... 아마 대부분 이해를 못 했을 텐데.”

“......”

연우혁은 소문을 퍼뜨릴 때도 생각보다 신경을 써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채주들이 다 이해를 하지 못하니 끙끙 앓기만 하고 아무도 행동에 나서지 않는 것이다.

아마 이 소문을 퍼뜨린 사람은 지금쯤 뒤늦게라도 소문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퍼뜨리고 있을지 몰랐다.

“과연, 과연. 생각보다 어렵지 않군! 고맙네. 고마워! 이제 알 것 같아.”

종광의 안색이 밝아졌다.

이제야 왜 이런 소문이 돈 지 알 것 같았다.

‘다른 놈들은 전혀 모르고 있겠군.’

종광은 다른 채주 놈들을 방문해서 슬쩍 떠보면서 소문을 해석해줄 생각이었다. 어지간한 놈들은 무슨 소문인지 짐작도 하지 못할 것이다.

“다 끝났나?”

“예. 별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럼 가자.”

그 사이 돌아온 천기수사는 뒤에 녹림 산적 둘과 말 한 마리, 그리고 그 위에 큼지막하게 쌓은 봇짐을 데리고 있었다.

낯익은 모습에 종광은 갑자기 섬뜩해져서 물었다.

“그... 그게 뭡니까?”

“질문에 대한 값이다.”

“잠, 잠깐!!”

종광은 그제야 저 봇짐이 어디서 나온 건지 깨달았다.

저건 산채에서 채주만 아는 비밀장소에 숨겨놓은 패물들이었다!

“저걸 어떻게?!?!”

“지혜가 있다면 찾는 건 어렵지 않지.”

“무슨 짓이십니까!”

“나야말로 묻고 싶군. 뭐 때문에 물어본 건진 몰라도 그만큼 중요한 질문 아니었나? 그런데 지금 보답을 아끼겠단 건가?”

“......”

종광은 산적 출신인 만큼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혈맥이 막히고 울화가 치솟는 기분이었지만, 지금 눈앞의 고수한테 건방지게 굴었다가는 정말로 죽을지도 몰랐다.

강호에 살다보면 저런 고수도 만날 수밖에 없는 법.

“...맞습니다.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 가르침은 값을 받지 않도록 하지.”

‘개자식이!’

연우혁은 종광이 항의를 멈추고 포기하자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저만큼 받았는데 파자만 해석해주고 가기 조금 뭐했던 것이다.

“종 대협.”

“...왜 그러는가?”

“한 가지 조언을 드리자면, 잠시 산채를 비우고 숨어계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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