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림 총채주 실종사건 (2)
종광은 뭔 헛수작이냐고 버럭 소리를 지르려다가 뒤에 있는 천기수사를 떠올리고 참았다.
“...그게 무슨 소린가?”
“음.”
연우혁은 막상 설명해야 하자 곤란함을 느꼈다.
‘관모를 쓰고 걸어가는 선비가 있는데 입이 넷 달린 개새끼가 발목을 물어뜯었구나, 호걸은 어느 편에 설 것인가?’란 파자를 연우혁이 풀 수 있었던 건 당연히 실제 사건이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산채의 산적들이 줄줄이 몰살당하기 시작한 사건.
대개 녹림의 산채들은 만일을 대비해 깊은 산속에 배치되어 있었고, 습격이 일어났을 때 막거나 도망가기도 쉬웠다. 이런 산채의 산적들이 일제히 죽어나가는 건 드문 일이었다.
그래서 이 희귀한 사건을 파고들기 시작하면 저 파자가 나왔다.
얼핏 보면 부채주가 총채주를 습격했고, 부채주의 반대편에 있는 자가 소문을 퍼뜨리면서 채주들을 규합하려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 쉬웠지만 이 사건의 내막은 좀 더 복잡했다.
부채주의 반대편에 선, 녹림의 장로들도 만만치 않게 교활했던 것이다.
장로들은 반응을 보이고 움직이는 몇몇 채주들을 습격해서 암살하고 산채를 쓸어버렸다.
대체 왜 자기들의 편에 설 채주들을 습격하나 싶겠지만 장로들은 그 허점을 노렸다. 이런 상황에서 몇몇 채주들이 습격당해서 죽으면 부채주가 누명을 쓸 거라는 걸 잘 알았던 것이다.
반대하는 세력을 끌어 모으는 건 부채주가 누명을 쓴 다음에 해도 됐다. 남은 채주들은 분노해서 순식간에 모여들 테니까.
그러니 이제 이 파자를 해석한 이상, 그 다음에 일어날 일은...
‘녹림 장로들이 반응 보이는 채주들 중 무작위로 몇 군데 골라서 학살하겠지.’
하지만 이걸 그대로 말해줄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장로들이 살수를 연우혁한테 보낼 것이다.
저번에도 그랬지만 이상하게 무림에서는 옆에서 말로 설명해주는 사람이 더 원한을 살 때가 많았다.
“자. 보십시오.”
연우혁은 천기수사가 챙긴 봇짐을 한 번 쳐다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이 눈앞의 산적에게 잘 대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방금 제 말을 듣고 나서 뭘 하려고 하셨습니까? 다른 채주들에게 소문을 퍼뜨리려고 하셨겠지요?”
“어... 어떻게!!”
종광은 경악해서 벌떡 일어났다.
신통력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자기가 경험하게 되자 소름이 돋았다.
“...아니, 당연히 부채주에 반대하는 사람이 낸 소문인데, 다른 채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의중을 떠봐야지요. 종 대협 같은 호걸께서 겁을 먹고 산채에 숨어계시진 않을 것 아닙니까.”
“아... 그렇군!”
종광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또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신통력이라는 게 별 거 아니군그래! 나도 할 수 있겠어.”
“하하.”
천기수사는 먼 산의 봉우리를 쳐다보았다. 산봉우리는 천기수사의 마음도 모르고 독야청청했다.
‘죽여버리고 싶군.’
끼어들지 않기로 했기에 참았지 자기 앞에서 저런 소리 했다면 바로 혓바닥에 바늘이 꽂혔을 것이다.
그리고 천기수사는 지금 연우혁이 왜 추가로 조언을 해주는지 알고 있었다.
방금 천기수사가 재물을 털어간 만큼, 원한을 사지 않기 위함이리라.
아마 십중팔구 종광은 천기수사한테만 원한을 품겠지만 무림의 일이란 건 가끔 예상을 벗어나는 법.
천기수사처럼 세가를 업은 사람이면 모를까, 연우혁 같은 포두는 저런 식으로 처세해서 적을 만들지 않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그래서 천기수사는 방해하지 않고 듣고 있었다.
왜 산채를 비우고 숨어있으라고 한 건지 궁금하기도 했고...
“그런 소문이 돌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녹림도들이 일제히 모여 총채주님의 안위를 확인하고 부채주를 쓸어내겠지!”
“그럼 이제 부채주께서는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소문에 귀를 기울이면서 먼저 움직이려는 채주를 공격할지도 모릅니다.”
“헉!”
종광은 깜짝 놀랐다.
확실히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이게 함정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 과연... 잠깐. 그럼 가만히 입만 다물고 있어도 되는 것 아닌가? 왜 산채를 비우고 숨어있어야 하지?”
천기수사라면 ‘네놈이 비밀을 잘도 다물고 있겠다’라고 할 수 있겠지만, 연우혁은 그럴 수 없었다. 종광이 아무리 비밀을 숨기지 못하고 행동으로 다 드러낼 사람이라 하더라도 좋게 말해줘야 했다.
“종 대협. 제가 녹림의 채주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압니다. 종 대협은 채주들 중에 손꼽히게 지혜로운 사람일 겁니다.”
“하, 하하... 그 정도인가?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천기수사는 더러운 말을 들은 귀를 흘러가는 냇물에 씻고 싶어서 미간을 찌푸렸다.
“보십시오. 어느 채주들이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파자를 해석하려고 사람을 불렀겠습니까? 고집을 부리지 않고 지자(知者)의 도움을 받는 것도 역시 지자입니다.”
“과연!”
종광은 감탄했다.
이 젊은 포두를 산채의 부두목으로 두고 싶을 정도였다. 하는 말 하나하나가 아주 달콤했다.
“그리고 이건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종 대협이 파자를 해석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걸 믿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
종광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확실히 이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지혜가 자신의 목을 조르는 올가미가 될 줄이야.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무시무시한 음모와 계략의 무림이었다.
“종 대협께서 잠시 보이지 않으면 그 다음으로 지혜로운 채주들을 먼저 노리지 않겠습니까? 사건이 커지면 무관심하던 채주들도 들고 일어설 테니, 그 때가 바로 잠룡이 비상하고 불비불명(不飛不鳴)하던 새가 날갯짓할 때입니다!”
연우혁은 스스로에게 감탄했다.
진실을 말하지 않고도 이렇게 완벽하게 설득할 수 있다니.
실제로 종광은 매우 깊게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방금 들은 말을 고민하고 있었다.
“한 가지만 더 물어도 되겠나?”
“예.”
“새가 안 날고 안 우는 게 지금 이야기랑 무슨 상관인가?”
“......”
“그만하면 됐다. 가자!”
참지 못한 천기수사가 성질을 냈다. 종광은 살기 넘치는 기세에 그대로 움츠러들었다.
말을 타고 가면서 천기수사는 연우혁에게 물었다.
“이야기가 좀 이상하던데, 원래 하고 싶은 말이 따로 있었던 거냐?”
“예. 아마 녹림 장로들이 산채를 습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뭐?!”
천기수사는 말 위에서 떨어질 뻔했다.
***
한경에 도착해서 천기수사와 갈라진 연우혁은 봇짐을 들고 방가전장의 공 총관에게 찾아갔다.
모용세가에서 받은 보수와 별개로, 종광에게서 뜯어낸 보수는 쓰고 싶은 곳이 있었던 것이다.
“여긴 어떤가?”
“만족스럽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거 참. 자네가 해준 게 얼마인데 이런 곳밖에 찾아주지 못해서 미안하구만. 요즘 한경의 저택이 남는 게 적어서...”
연우혁은 만족스럽게 저택을 쳐다보았다. 낡았지만 깔끔했고 무엇보다 공간이 넉넉했다. 본채나 사랑채 같은 건물도 건물이지만, 가운데 내원 공간이 넉넉해야 수련하기 편했던 것이다.
이제까지 연우혁이 썼던 포쾌들의 숙소나 구역 안가는 편리하고 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당장 마당에 재산을 숨겨놓을 수도 없고.’
영약이나 내단도 중요했지만 이제 슬슬 상관들에게 바쳐야 할 뇌물도 진지하게 준비해놓을 차례였다. 연우혁의 명성이 올라갈수록 한경의 관리들은 ‘그렇게 대단한데 왜 은자 한 푼 못 받았지?’라고 생각할 테니까.
‘...생각하니까 억울하군.’
연우혁은 연줄이 없는 스스로가 분했다.
아는 황족이라도 있으면 ‘한경 관리 놈들이 포두를 수탈합니다’라고 투서를 보내 넣을 텐데.
“좋은 저택을 고르셨습니다. 포두님. 길 끝에 위치한데다가 담벼락이 안을 두텁게 가리고 있어서 무림인이 머물기 좋은 곳이군요.”
적 포쾌가 씩 웃으며 말했다. 연우혁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담벼락이 가리고 있는 건 알겠는데 길 끝은 왜지?”
“적들이 잡으러 올 때 시간을 벌 수 있지 않습니까.”
“......”
무림인이 아니라 살수가 머물 때 좋은 이야기였다. 연우혁은 못 들은 척 무시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문 들었습니다. 모용세가가 마두들을 토벌하는 걸 도우셨다고요.”
“아무도 없으니 편하게 말해도 됩니다.”
“정파보다 사파 놈들 사이에서 소문이 더 돌았더군.”
적조는 역용술을 펼치느라 긴장된 뺨의 근육을 풀어주며 말했다.
“사파 놈들은 어째서?”
“원래 사파 놈들이 그런 건 미리미리 알아두려고 하는 법이지. 언제 자길 죽일지 모르니.”
정파무림에서 소문은 아무래도 어디 출신이냐가 중요했다.
이번에 연우혁이 아무리 공을 세웠어도 결국 모용세가란 이름이 같이 있으면 모용세가가 좀 더 주목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에 비해 사파의 무림인들은 어느 놈이 위협적이고 신경을 써야 하는지를 먼저 확인했다.
“그렇게 심하게는 안 퍼졌겠지요?”
연우혁은 살짝 기대하며 물었다. 정파 사이에서 명성이 퍼지면 어디든 대접을 받았지만 사파 사이에서 명성이 퍼져서 좋을 게 없었다. 경계만 더 살 뿐이었다.
“흑륵존자와 청수귀마를 일개 포두가 죽였다고 퍼졌던데.”
“컥.”
연우혁은 사레가 들려서 맹물을 마당에 뱉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십시오.”
“아니... 소문은 내가 낸 게 아니지. 거기 있던 놈들이 냈는데 왜 나한테 그러는 거냐. 네가 죽인 게 아니었나?”
“같이 죽인 거죠.”
“같이 죽였으면 거기 있던 놈들이 그렇게 소문을 안 냈겠지. 하여간 왜 걱정하는 거냐? 누가 청수귀마나 흑륵존자의 원수를 갚으러 올까 걱정이라도 되는 건가?”
타고난 살수인 적조는 연우혁 정도의 실력이라면 그리 겁을 먹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저 정도면 무림에서 죽일 수 있는 고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심지어 한경 안에서라면 더더욱.
“그보다는 상대를 방심시키지 못하고 경계하게 만드니 그런 겁니다.”
“...누가 살수인지 모르겠군!”
너무 어이없는 연우혁의 말에 적조는 할 말을 잃었다.
어느 무림인 놈이 날로 먹고 싶어해서 자기 명성을 숨긴단 말인가.
“하여간 포두님. 이거나 받으시지. 별 것 아니지만 선물이오.”
적조는 찻잎 단지와 술병 몇 개를 창고에 쌓았다. 영안으로 보니 꽤 괜찮은 물건들이라 연우혁은 놀랐다.
“어디서 나셨습니까?”
“그, 술을 기막히게 잘 알던 친구가 있던데. 오 포쾌였나?”
“아. 그렇긴 합니다.”
“그 포쾌의 술을 좀 갖고 왔다.”
“...부하 분은 어디 가셨습니까?”
“부하? 아. 매파(媒婆) 노릇을 하고 있지.”
“??”
연우혁은 적조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목소리를 낮추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살수의 일을 하러 가신 겁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니다. 진짜 매파 노릇을 하고 있다고.”
“적 대협이야말로 뭔 미친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정 소저 말이다. 정 소저. 정 소저의 서신을 상대에게 전해주고 있다.”
“상대가 누구길래요?”
적조는 뻔한 걸 묻는다는 듯이 대답했다.
“당연히 제갈규지.”
“...아니, 그렇게 너무 억지로 보내면 상대방이 꺼려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속이 보이면...”
“서신은 그놈이 먼저 보내서 답장해주는 거야.”
“......”
연우혁 안에서 제갈규의 평가가 크게 내려갔다. 천기수사가 왜 제갈세가의 젊은 후기지수들을 영 못마땅해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하여간 알겠습니다. 전 여기 술병이나 챙겨서 고관 어르신들을 뵙고 와야겠습니다.”
“뭐? 아니, 마시라고 준 걸 왜 돼지 새끼들을 주냐?”
“그게 다 지혜 아니겠습니까. 한 달 넘게 떠나있었는데 당연히 바쳐야지요.”
“안 그래도 돼! 어차피 모용세가 놈들이 대신 다 해줬는데.”
“뭘 말입니까?”
“?”
적조는 연우혁이 모르자 놀라워했다.
“왜 네가 모르냐? 벽력신권 놈이 사흘 전인가 와서 관리 놈들한테 네 이름으로 은자를 쫙 뿌리던데.”
“......”
연우혁은 벽력신권 모용태의 화끈한 보답에 전율했다.
그리고 아주 조금 아까웠다.
‘...그냥 그걸 내가 챙겼으면 영약이...!’
언젠가 눈치껏 바치긴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바치게 되니 생각보다 많이 괴로웠다.
“뭘 했길래 그런 무시무시한 놈과 인연을 맺은 거냐?”
“세가 내의 일을 좀 도와드렸습니다.”
‘보물 훔쳐서 도망친 하인 놈이라도 잡아줬나?’
“공자들끼리 다투길래 중재를 해드렸거든요.”
이번에는 적조가 마시던 술을 내뿜었다. 연우혁은 유연하게 신법을 펼쳐 술을 피했다.
“아니, 미친 놈인 건 알고 있었는데 진짜 미친 놈이잖아! 어떤 놈이 처음 보는 외인에게 세가 직계의 일을 맡기는 거냐?!”
“적 대협도 살막의 일을 처음 보는 외인에게 부탁하셨잖습니까.”
“......”
적조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