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림 총채주 실종사건 (3)
“...그건 조금 다르지. 야. 그건 조금 다르다.”
“예.”
“...다르다고.”
“알겠습니다.”
적조는 머쓱해져서 술잔만 기울였다. 생각해보니 살막의 무인들도 적조와 이 포두의 내막을 알게 되면 기겁할 것 같았다.
“모용세가 놈이 와서 그렇게 체면을 세워줬으니, 너도 한경 안에서 제법 면목이 서겠군.”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연우혁은 기대감을 숨기기 위해 애쓰며 말했다.
가능성은 그렇게 높지 않았지만, 지금 연우혁은 비어 있는 한경의 판관 자리가 다시 채워지기 전에 앉는 걸 노리고 있었다.
일개 포두가 그런 자리를 노린다면 언감생심 소리를 듣겠지만 연우혁이 세운 공은 일개 포두라고 하기에는 너무 대단했다.
게다가 한경의 정관들에게 계속해서 눈도장을 찍고 있지 않은가.
약간의 행운이 도와준다면 연우혁이 아주 드문 사례의 당사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런 행운에는 명성 높은 세가와의 인연도 들어갔다. 방금 적조의 말에 연우혁이 기대하는 것도 당연했다.
“사실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모용세가의 이름이 있는데 어째서?”
“당문과의 인연이 있었는데 그리 효과가 있진 않았거든요.”
“당연히 당문은 좀 그렇지.”
적조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다른 오대세가와 달리 당문은 인연이 있다고 해서 한경의 관리들한테 대접을 받기 힘들었다.
“일단 거리가 멀지 않나.”
“하긴 거리가 멀면 받은 것도 그만큼 없을 테니...”
“그리고 괴팍하기도 하고.”
“...괴팍은 모든 오대세가들이 다 괴팍하지 않습니까?”
“아니. 당문이 특별하지.”
적조는 냉정했다.
한경 관리들 중에 당문을 두려워하는 놈들은 있어도 당문과 친밀한 관계인 관리는 드물었다.
관리들이 연우혁을 뒤에서 밀어주고 앞에서 끌어주려면 관리들이 신세 진 가문의 입김이 필요했던 것이다.
“지부 어르신이 당문하고 꽤 친하다고 들었는데...”
“그건 그 놈이 이상한 거다. 내가 보기에 그 무골호인 놈은 마교 천마하고도 좋게 지낼 거야. 하지만 모용세가는 확실하다. 나름 입김이 있지.”
연우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조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꽤나 믿음직스러웠던 것이다.
‘고맙습니다. 벽력신권 님.’
자리에 없는 모용태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보내며 연우혁은 나중에 서신이라도 한 통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쿵쿵쿵!
“?”
누군가 저택 문을 다급하게 두드리는 소리에 둘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녁이 넘은데다가 곧 통금이라 돌아다닐 사람도 없었다. 포쾌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이 시간에 포두를 부를 리 없을 테고...
“수상한데. 조심해라.”
“예.”
둘은 자세를 바로잡았다. 무림에서 사는 만큼 보복은 예상하지 못할 때에 찾아올 수 있었다. 언제라도 방심해서는 안 됐다.
“확인해보겠습니다.”
“조심... 엇.”
적조는 확인하겠다고 문 가까이 걸어간 연우혁이 재빨리 정문을 열자 당황했다. 아는 사이가 아니라면 저 치밀한 포두가 허튼 행동을 할 리가 없었다.
“들어오십시오.”
“아는 사이였ㄴ... 아는 사이셨습니까?”
“쌍패부 대협.”
“쌍패부면...”
“녹림의 채주.”
“아.”
너무 사파스러운 별호에 뭐하는 놈인가 당황했던 적조는 뒤늦게 이해했다. 녹림의 채주라면 저런 별호가 어울렸다.
“아니, 녹림 채주는 어떻게?”
“모용세가의 일을 해결해주고 돌아오면서 도움을 줬지. 이 저택을 그걸로 산 거다.”
“허, 녹림 놈들한테서 용케...!”
적조는 녹림의 채주가 저녁 늦게 찾아온 것보다, 녹림 채주 상대로 적지 않은 재물을 뜯어낸 것에 대해 더 놀라워했다.
녹림 놈들만큼 수전노가 또 없었던 것이다.
그런 놈들 상대로 일을 하나 해결해줬다고 이 저택을 살 만한 재물을 구했다니. 정말 귀신 같은 재주였다.
연우혁은 종광을 쳐다보았다. 종광의 얼굴과 의복에는 피가 말라 붙어있었고 눈빛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게다가 혼자가 아니었다.
옆에 있는 무인은...
‘절정의 경지다!’
무공을 숨기고 있었지만 이 자리에 있는 무림인들 중 가장 고강한 경지였다. 적조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가 연우혁의 시선을 보고 위화감을 깨달았는지 몸을 긴장시켰다.
무공의 경지가 잘 느껴지지 않았지만, 지나치게 흔들림 없는 자세에서 느껴지는 불길함이 살수의 본능을 자극한 것이다.
“종 대협. 여긴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한경 한복판에 녹림의 채주께서 돌아다니시면 해를 입으실 수 있습니다.”
“미, 미안하네. 물 좀 주겠나?”
적조는 술을 가져다주었다. 상대를 방심시키고 혀를 가볍게 만들려는 속셈이었다. 종광은 그것도 모르고 감사해하며 꿀꺽꿀꺽 마셨다.
“자네 충고를 듣고 생각했네. 옳은 충고라고.”
“예.”
“그래서 다른 채주들을 만나러 갔지.”
“...잠, 잠깐 기다려주십시오.”
연우혁은 순간 당황했다.
분명 연우혁이 했던 충고는 ‘지금 녹림에 풍랑이 불 테니, 휘말리고 싶지 않으면 머리를 땅에 박고 끝나길 기다려라’ 아니었나?
대체 왜 다른 채주들을 만나러 갔지?
‘내가 말을 이상하게 했었나? 아니다.’
“벗들이 있는데 내버려둘 순 없지 않나.”
친한 채주들한테만 전해주려고 했다는 종광의 말에 연우혁은 아찔해졌다. 뒤에 있던 적조도 어이없어하는 기색이었다.
‘미친놈인가?’
살막에 있었던 만큼 적조는 문파 내 정쟁에 익숙했다. 문파에서 정쟁은 말싸움으로 끝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저런 안일함이라니.
“그, 그렇군요. 종 대협의 우의(友誼)에 감탄했습니다. 그런데 그 상처는...”
“다른 산채에 소식을 전하고 나오는 길에 습격이 있었다.”
종광은 지친 한숨을 내쉬며 설명했다.
세 번째 산채를 방문하고 나올 때, 어떻게 알았는지 산길에 매복한 무인들이 일제히 진법을 구성하고 달려든 것이다.
독하고 사나운 기세에 종광은 이대로 죽는 건가 싶었다. 그 때 나타난 고수가 없었다면 틀림없이 절명했을지도 몰랐다.
“인사드려라. 진충비도. 여기 녹호군(綠虎君) 한기 대협이시다.”
“!”
연우혁도 놀랐고 적조도 놀랐다. 녹호군 한기는 적조도 알 만큼 유명한 무인이었던 것이다.
녹림칠십이채의 총채주를 보필하는 부채주이자, 본인도 절정 고수로서의 무위를 자랑하는 걸물.
“한 대협께서는 장로들이 녹살대를 은밀히 움직이는 걸 보고 내가 습격당할까 걱정됐다고 하시더군. 그래서 뒤를 몰래 따라왔다고.”
“자네가 아니라 그냥 어느 채주든 습격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한기는 점잖게 지적하려고 했지만 종광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덕분에 목숨을 건졌지. 하지만 부채주님 덕분만은 아니다. 이걸 보라고.”
종광은 옷 안에 갖춰 입었던 갑주를 꺼냈다. 갑주 위에는 몇 군데나 깊게 패인 흔적이 있어서 얼마나 격렬한 싸움이 있었는지 짐작케 했다.
“진충비도 네 조언을 듣고 이걸 언제나 입고 다녔다. 하하! 그 멍청한 놈들은 상상도 못했을 거다.”
“그런 조언이 아니라...”
더 이상 참지 못한 적조가 지적하려고 하자 연우혁이 손짓으로 말렸다. 이미 논쟁을 해봤자 별 쓸모가 없다는 걸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종 대협. 감히 여쭙겠습니다. 한 대협께서 들으면 무례한 질문일수도 있습니다만, 부디 허락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괜찮네. 하게.”
한기는 상관없다는 듯이 재촉했다.
“소문만 들었을 때는 부채주께서 총채주를 암습한 것 아닌가 싶었는데, 어떻게 한 대협을 믿으신 겁니까?”
연우혁이야 사건의 내막을 아니까 당황하지 않았다지만 종광 입장에서는 어느 누가 수상하고 위험한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연우혁도 종광이 쓸데없는 행동을 할까 걱정되어서 사건의 내막을 알려주는 대신 숨어있으라고만 하지 않았던가.
“그거야 쉽지.”
“?”
“여기 부채주 님이 내 목숨을 구해주셨잖나. 그런 분이 배신을 할 리가 있나.”
“...그, 그렇군요.”
한기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지만, 영안을 열어놓은 연우혁은 한기가 민망함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포두 앞에서 채주의 멍청함을 자랑해서 기쁠 일이 무엇 있겠는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왜?”
“부채주 님께서 날 구해주고 나신 다음에 물으시더군. 암습을 예상했던 것 같은데 어떻게 예상했냐고. 그래서 내가 대답했지. 나는 녹림에 도는 소문의 뜻을 완전히 알고 있다. 파자 아니냐. 그래서 조심하려고 한다. 잠룡이 비상하고 새가 짹짹 지저귈...”
“...그 뒤는 내가 말하도록 하지.”
한기는 피곤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나섰다.
“여기 쌍패부 종광은 무공은 제법이지만 심계가 깊거나 하진 않네. 그래서 누군가 조언을 해준 사람이 있지 않을까 싶었지. 캐물었더니 진충비도의 별호를 불더군.”
“여긴 한경이오.”
이들이 왜 찾아온 지 깨달은 적조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종광이 발끈했지만 적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녹림의 일과 엮이느니 여기서 한바탕 무공을 겨룬 뒤 밖으로 도망치는 게 나았던 것이다. 어차피 녹림의 고수들은 여기서 오래 있지 못했다.
“내 무림의 일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포두에게 자기네 산채 일을 해결해달라고 부탁하는 산적이 있다고는 들어본 적이 없소.”
“......”
‘자기는 살막 일 해결해달라고 했으면서!’
연우혁은 뻔뻔한 살막 무인을 쳐다보았지만 적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기는 같잖은 포쾌 놈이 기어오른다고 화를 내지 않았다. 그 모습에서 연우혁은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걸 느꼈다.
과연 녹림칠십이채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고수다운 풍모였다.
“맞는 말이야.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이지. 일단 들어보지 않겠나? 포두한테도 나쁜 일은 아닐 거라고 장담하지.”
“재물입니까?”
기대감 섞인 연우혁의 말에 한기는 그 뜻을 오해했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진충비도가 사사로이 뇌물을 받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왔네. 녹림을 도우면서 녹림의 재물을 받진 않겠지. 급박한 와중에 시험은 이쯤하면 되지 않았나.”
“하지만 부채주 님. 저 포두는 제 산채의 보물을...”
“그건 종광 네 개인의 목숨값 아니더냐. 녹림의 중대사를 해결하는 건 다른 이야기지.”
‘아닌데.’
연우혁은 재물도 환영이라고 하고 싶었지만 한기는 이미 종광을 꾸짖은 뒤였다.
“악검삼마(惡劍三魔)와 오독귀(五毒鬼)를 아는가?”
“예.”
무림의 역사를 훤히 꿰고 있지는 않았지만, 연우혁도 나름 무림에서 지낸 시간이 길어진 만큼 몇몇 자들은 관련이 없어도 주워들어서 알고 있었다.
게다가 악검삼마와 오독귀는 관아와도 상관이 있는 인물이었다.
이들은 무려 십오년 전 조정의 고관을 죽이고 도주한 무림인이었던 것이다.
어지간해서는 관과 무림이 서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지만 가끔 선을 넘는 마두들이 나오기 마련.
당시 악검삼마와 오독귀를 쫓아서 바치기 위해 정과 사를 가리지 않고 무림에서도 추격대가 구성되었다고 했다.
그 후로도 몇몇 군관들이나 금의위가 어디에서 소문을 듣고 급습하기도 했지만, 전부 헛소문이었던 탓에 이제 무림에서도 반쯤 잊혀진 별호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별호가 나오다니.
“그들은 녹림에 있네. 장로들 밑에서 신분을 바꿔서 머무르고 있지. 이건 나밖에 모르는 사실일세. 만약 부탁을 들어준다면 이 자들을 잘 묶어서 관아에 던져놓지. 뇌물은 거절하더라도 이건 괜찮지 않나.”
“거절하셔야 합니다.”
적조는 낮게 속삭였다. 한기 정도의 고수라면 들을 수 있겠지만, 사실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다. 두 녹림도 중 하나라도 발끈하면 그 핑계로 저택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저걸 믿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고, 저 정도 되는 마두를 바친다는 건 그만큼 위험한 일이라는 겁니다.”
한기는 화를 내지도 반박하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하던 말을 계속했다.
“나는 총채주 님을 찾으려고 하네. 지금 장로들의 패악을 막기 위해서는 그것밖에 없으니. 들어보니 진충비도의 지혜가 그렇게 뛰어나다던데 조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겠나. 장로들은 알지 못할 걸세.”
“저것 보십시오.”
적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살수들도 사람 속이는 데에는 재주가 있었지만 산적들도 만만치 않았다.
아무리 연우혁의 재주가 뛰어나도 한참 전에 사라진 녹림의 총채주를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아마 저 한기란 놈도 그걸 기대하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의도는 뻔했다. 조언을 듣겠다는 핑계로 데리고 가서 슬쩍 녹림 내부의 정쟁에 발을 담그게 하는 것이다.
장로들이 연우혁을 부채주의 편으로 인식하면 연우혁도 살기 위해서 계략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저 자와 같이 산채로 들어가서 총채주의 흔적을 뒤지는 순간 늪에 걸어 들어가는 겁니다. 여기서 바로 할 수 있는 조언이 아니면 받아서는 안 됩니다.”
“음. 적 포쾌.”
“예?”
“사실 산채로 안 들어가도 총채주께서 어디 계실지는 짐작이 가긴 하는데.”
쾅!
둘은 깜짝 놀라 시선을 돌렸다. 한기가 앉은 채로 급히 일어나려다가 탁자를 넘어뜨리고 겸연쩍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