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관 연우혁 (5)
방에 들어간 태극검존은 ‘끙’ 소리를 내더니 먼저 의자에 앉았다. 그 모습이 마치 늙은 촌부 같아서 믿기 힘들 정도였다.
“뭐하나? 앉게.”
“아. 감사합니다.”
“상단전이 열렸군. 영기가 아주 많이 쌓였고.”
“!”
연우혁은 태극검존의 말에 놀랐다.
아직 진맥을 하거나 가까이서 보지도 않았는데 태극검존은 연우혁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한 것이다.
“제가 처한 상황을 아시는군요!”
“그럼 알지 모르겠나. 나이 들면 생기는 건 주름과 연륜뿐인데. 아마 청허진인 그 친구가 별 도움이 안 되었겠지?”
“아닙니다. 무공만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이건 진심이었다. 청허진인이 해결해주지 못했다 하더라도 현청벽사신공 같은 심법을 전수해준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은혜였으니까.
“심성이 됐구나. 청허진인이 왜 전수해준지 알겠다. 현청벽사신공은 좋은 심법이다. 네 상황과 잘 맞겠지. 귀신 들려서 죽는 건 막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해불택신공하고 같이 익히는 것도 훌륭하다. 아마 너 정도 지모라면 그것도 같이 계산해뒀겠지?”
무공을 이야기하는 태극검존은 어느새 젊은 시절로 돌아와 있었다. 방금까지 늙은이처럼 굴던 건 어디 갔는지 쾌활하고 빠른 속도로 이야기했다.
연우혁은 그 변화에 당황하면서도 일단 대답했다.
“무슨 소리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현청벽사신공을 익히고 나서 하해불택신공을 익힌 게 아니었나?”
“예... 하해불택신공을 먼저 익혔습니다.”
“사파의 심법이란 걸 못 느꼈나?”
“당장 칼 맞아 뒤질 수도 있는 포쾌라서 일단 내공을 쌓고 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
태극검존은 오늘 처음으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무모한 놈이었다.
“두 심법은 잘 어울린다. 현청벽사신공은 영기를 사용해 삿된 침입이 없도록 몸을 굳건하게 하는 심법. 하해불택신공은 삿된 기운까지 끌어들여서 내공으로 만드는 심법. 현청벽사신공이 걸러주는 역할을 하니 서로 상승의 효과가 있는 것이다.”
“!”
연우혁은 놀랐다.
‘그러고 보니 하해불택신공의 부작용을 딱히 느껴본 적이 없었다.’
이제까지는 경지가 낮고 내공이 별로 쌓이지 않아서 불순한 내공을 느끼지 못한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던 것이다.
영안을 갖고 있었음에도 생각하지 못하다니.
“눈앞에 있어도 알지 못하면 보지 못하는 게 있는 법이지.”
태극검존은 무형의 장력을 만들어냈다. 격공장이라는 절정의 수법이었다. 허공에서 아무런 전조도 없이 장력을 격발시키는 고절한 수법에 연우혁은 감탄했다.
“눈이 좋다고 자만하지 말고 언제나 깊게 생각해라.”
“명심하겠습니다.”
“좋아! 슬슬 본론을 꺼내보자. 정 거사 그 친구는 한 수 가르쳐달라고 부탁하더군. 인연도 있고 제법 기특하기에 이렇게 왔다.”
“기특하다면...?”
“무인이 판관 노릇을 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정 거사 같은 자를 아무 대가 없이 도와준다는 건 더 놀라운 일이니까.”
“판관은 원래 백성의 청을...”
“원래란 건 없다. 정파 무인 중 진짜 협객이 얼마나 있겠나? 사파 무인 중 진짜 악인이 얼마나 있겠나? 판관이 아무 대가 없이 청을 들어주는 건 흔치 않은 일이고. 그래서 보답해주고 싶었다. 저 녀석은 나름 어렸을 때부터 봐온 인연이 있으니.”
연우혁의 얼굴에 떠오른 미약한 혼란스러움을 읽었는지 태극검존은 씩 웃으며 말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군. 태극검존하고 인연이 있을 정도의 사람이 왜 이렇게 가난하게 살고 있는지. 맞나?”
“예. 솔직히 놀랐습니다.”
연우혁이 정 거사를 만났을 때 느낀 건, 가문의 명성에 비해 너무 가난하다는 것이었다.
당장 청군 정씨면 한경의 명문가고 지부 어른과도 친분이 있는 가문이라는데 그런 가문이 판관한테 뇌물 하나 주지 못할 만큼 가난하다니?
“간단하다. 벼슬도 안 하고 돈놀이도 안 하니 가난하지.”
명문가가 존중받는 건 그 힘 때문이었다. 명성뿐만이 아니라 재산과 권력들이 합쳐져서 명문가의 힘을 만들었다.
그러나 정 거사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돈놀이가 싫으면 땅이라도 빌려줘야 하는데 그것도 수탈하기 싫다고 한사코 거부했고, 벼슬은 탐관오리들과 어울리기 싫다고 거부했다.
이러니 가문의 힘이 남아날 수가 없었다. 명성이야 남아있다지만 그런 명성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중앙에 올라갈지도 모르는 지부 대인이야 나중에 요긴하게 쓸지도 몰라 정 거사를 챙겨준다지만(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친하게 지내는 걸 수도 있었다), 대부분 평생을 한경에서 보낼 관리들이 정 거사를 챙겨줄 이유는 별로 없었다.
잘 해줘봤자 덕 볼 게 뭐가 있다고 대접을 해주겠는가. 친하게 지내봤자 상소문에 욕이나 안 달리면 다행이었다.
“충고해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충고라니. 무슨 충고?”
“친하시다면 뭐라도 자구책을 만들어줘야...”
“내버려둬라. 정 거사에게는 정 거사의 길이 있다. 그리고 그 길이 딱히 틀린 길도 아니지. 저 녀석이 재물을 모으고 권력을 얻는 방법을 모르겠나? 알지만 참는 거다. 한경의 관리들은 아마 정 거사를 멍청하다고 생각하겠지. 돈을 벌 기회도 스스로 마다하고, 벼슬도 스스로 마다하니.”
태극검존은 허허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잘 생각해봐라. 탐욕을 부리다가 서로 싸워서 공멸한 가문이 몇 개더냐? 벼슬에 나갔다가 가문이 멸문한 벼슬아치는 몇 명이고? 그러나 정 거사의 명성은 날이 갈수록 빛날 뿐 더럽혀지진 않을 것이다. 후손들도 이 이치를 안다면 영원히 명예롭겠지. 만약 정 거사가 이렇게 살아오지 않았다면 제갈세가가 매파를 보내고 내가 도우러 왔겠나?”
“!”
연우혁은 솔직히 놀랐다.
솔직히 정 거사가 지나치게 검약한 것 아닌가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볼 수 있다니.
만약 정 거사가 다른 한경의 명문가처럼 적극적으로 축재했다면 태극검존은 정 거사의 서신을 무시했을 것이다. 버렸기에 오히려 얻은 것이다.
“이건 너한테도 적용되는 말이다. 너는 축재할 기회를 버리고 백성들의 청원을 들었으니.”
“제가 딱히 은자를 거절하는 건 아닙니다.”
연우혁은 솔직하게 말했다.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 고수 앞에서는 거짓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차이 없다. 욕심이 없지만 행실은 탐욕스러운 자. 욕심은 많지만 행동은 청빈한 자. 내가 보기엔 후자가 훨씬 더 욕심 없는 사람이다. 대개 사람의 심정이란 건 정(精)과 기(氣)의 영향을 많이 받기에 믿기 힘들다. 때로는 스스로도 속이곤 하지. 욕심이 있다 해서 청백리가 아니겠나? 정 거사도 욕심은 있다. 참을 뿐이겠지.”
“......”
태극검존의 말은 이상하게 연우혁을 생각에 잠기게 만들었다. 반쯤은 무의식적으로, 연우혁은 질문을 던졌다.
“태극검존 님. 최근에 임 대협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연우혁은 녹림대왕 임가적과 그 임가적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초절정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오욕칠정을 버려야 한다니.
“정말 벽을 넘기 위해서는 임 대협의 말이 맞는 겁니까?”
“임가에게는 그 길이 맞을 거다. 그 놈은 녹림에 지나칠 정도로 열정을 쏟았다. 자신의 무공보다 녹림을 더 사랑했지.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달았을 거다. 자신이 벽에 막혔다는 것을.”
태극검존은 말을 하고 나서 손을 뻗었다. 연우혁이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알고 막은 것이었다.
“나는 무당에서 무공을 수련했지만 무당의 일에는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립까지는 무공에 몰두했고 불혹부터는 술법에 관심을 가졌지. 지천명 때는 협행을 다녔다. 평생을 내가 추구하는 도(道)를 위해 살았지 어느 누구를 위해 살지 않았다. 초절정의 경지는 그것뿐이다.”
“......”
자신은 어떻게 하면 되는지 물으려던 연우혁은 태극검존의 말에 압도되었다.
“관로(管輅)가 천기를 누설하면 천벌을 받게 될 줄 알면서도 남두성군과 북두성군의 일에 왜 개입해서 조안의 수명을 늘려주었겠나? 그게 자신의 업이고 신선이 되기 위한 공덕을 쌓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너도 알고 있을 것이다. 네가 쌓은 선업이 영기로 모여 있으니. 계속해서 정진해라. 두려워하지 말고.”
“!”
태극검존의 말은 연우혁이 이제까지 해왔던 생각을 바꾸게 만들었다.
이제까지 연우혁은 상단전에 쌓았던 영기가 골칫덩이라고 생각했었다. 신통력이나 술법은 쓸 수 있다지만 그걸 제외하면 목숨만 위협하는 양날의 검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태극검존은 그 영기야말로 나중에 초절정의 벽을 깰 힘이니 더욱 정진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영기만 더욱 충만해진다면... 지금 가진 내공과 단전만으로 정기신을 하나로 만들 수 있습니까?”
“그건 아니다. 내공을 쌓고 육신을 단련해라. 정과 기가 너무 허약하다.”
“...예.”
살짝 기대했던 연우혁은 시무룩해졌다.
대답을 마친 태극검존은 허공에서 파초선(芭蕉扇)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연우혁을 탁 쳤다.
기묘한 영기의 흐름과 함께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운이 몸에 깃들자 연우혁은 놀랐다.
“자. 이게 한 수다. 분명히 가르쳐줬다.”
“감, 감사합니다?”
이해는 하지 못했지만 연우혁은 일단 감사의 뜻을 밝혔다.
현 무림에서 제일인으로 손꼽히는 몇 안 되는 고수가 이렇게 문답을 해준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은혜였다.
“감사하다고?”
“예? 예.”
“그럼 이제 네가 내 부탁을 하나 들어줄 수 있겠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밖의 서가 놈하고 추가 놈은 아마 자기들끼리 결정을 마치지 못할 테니, 네가 둘의 이야기를 듣고 결정을 내려라. 저런 시시비비를 가리면서 시간을 낭비하기에는 내가 너무 늙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태극검존의 허리가 구부정해졌다. 무공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젊어진 것과 반대로 다시 순식간에 늙어진 것 같았다.
“잠ㄲ...”
연우혁은 당황해서 다시 말하려고 했지만 이미 태극검존은 일어나서 밖으로 나간 뒤였다. 느릿하게 걷는 것 같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거리가 멀어져 있었다.
“잠깐 기다려주십시오!”
뛰쳐나오자 태극검존은 보이지 않고 서광과 추수욱만 남아 있었다. 둘은 당혹스러운 시선으로 연우혁을 쳐다보고 있었다.
연우혁은 그 시선에서 이미 태극검존이 말을 마치고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진충비도. 천화회 놈들의 수작을 너라면 알고 있을 거다. 들어봐라! 이놈들은 비고를 갖고 있지도 않으면서 자기한테...”
서광은 다급하게 말했다. 그러자 추수욱이 말을 끊었다.
“판관 어른! 저희 천화회의 사정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언제가 괜찮으시겠습니까?”
“...!”
서광은 할 말을 잃었다.
탈령장 추수욱이 서광만큼의 고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버금가는 고수였다. 그런 놈이 자기보다 훨씬 배분도 낮은 무림의 후배한테 저렇게 공손하게 굴다니.
‘저런 역겨운 놈 같으니!’
“추 대협의 제안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관청으로...”
“잠깐! 진충비도! 저 놈의 말에 속지 마ㄹ...”
“서 형은 무공은 뛰어나도 예의라고는 조금도 찾을 수 없구려! 한경의 판관에게 저게 무슨 무례인지!”
“이 놈이...?”
서광은 눈에서 불꽃을 튀겨가며 발검하려고 했지만, 추수욱은 씩 웃으며 덤벼보라는 듯이 가만히 서있었다. 만약 서광이 검을 뽑기라도 한다면 크게 다칠 텐데도 어떤 움직임도 취하지 않았다.
그 여유만만한 태도에 서광은 다시 한 번 태극검존의 말을 떠올렸다. 순간 머리에 피가 올라서 분노했었지만, 지금 일은 태극검존의 체면과 관련된 일이었다. 서광이 멋대로 무시할 수는 없었다.
“...연, 연 판관. 나도 흑염방의 사정을 말하고 싶소.”
“예. 서 대협의 제안에도 감사드립니다.”
다행히 연우혁은 서광을 타박하지 않았다. 서광의 얼굴이 밝아졌다. 과연 진충비도가 공명정대하단 소문이 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연우혁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골치 아픈 일이군.’
두 문파 중 어느 누가 백월비고를 가져야 하는가?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납득의 문제였다.
태극검존이 뒤에서 중재를 해준다지만 서로를 납득시키지 못하면 원한이 괜히 연우혁한테까지 흘러올 수 있었다. 태극검존의 이름이 평생 연우혁을 지켜주지는 못할 것 아닌가.
“일단 한 명씩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추 대협. 한 번 말해보십시오.”
“고맙습니다. 판관 어른. 저희 천화회가 백월비고를 갖고 있지 못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분명 백월비고가 있는 도관을 샀는데, 지도에 나와 있는 곳은 전혀 다른 곳이었습니다. 그 탓에 조금 늦었는데...”
“도인이 가짜 지도를 보여준 겁니다.”
“그건 아닙니다. 처음에 분명 지도를 보고 확인까지 했습니다만...”
“시간이 지나면 지워지는 먹이 있습니다. 그걸 섞어서 그린 지도라면 처음에는 정확해도 시간이 지나면 부정확해지지요.”
“......”
젊은 판관을 말로 꼬드겨보려다가 자기들이 도관 주인한테 어떻게 당했는지를 깨달은 추수욱은 입을 떡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