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 속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법-92화 (92/107)

판관 연우혁 (6)

‘감히...!’

도관 주인이 의심쩍다는 건 사실 머리가 달린 무인이라면 누구나 짐작하고 있었다.

아무리 옛날 일이라도 두 문파가 도관 하나를 비슷한 시기에 같이 사들이는 건 우연으로 생각하기 힘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당했는지까지 듣게 될 줄이야.

진충비도가 일의 내막을 단숨에 꿰뚫어보는 재주가 마치 젊은 시절의 천기수사 같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괜히 말씀드린 겁니까?”

연우혁은 추수욱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자 의아해하며 물었다. 추수욱은 황급히 부정했다.

“아닙니다. 그 당시 천화회 내에서 놈의 뇌물을 받고 지껄이던 놈들이 생각났을 뿐입니다.”

수상하면 바로 추적에 나서야 하고, 그러지 못하면 언제 새외로 빠져나갈지 모르는 일인데 뇌물을 받은 자들이 ‘정확한 사정을 모르는 상황에서 함부로 죽일 수는 없지 않느냐’ 같은 소리로 시간을 끌었던 것이다.

결국 도인이 속인건지 천화회 무인들이 착각한 건지 알 수 없어서 흐지부지됐는데 이런 내막이 있었다니.

분노를 가라앉힌 추수욱은 헛기침을 하며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판관 어른의 안목이 이렇게 고절하니, 백월비고에 관련된 문제는 그리 걱정할 게 없겠습니다. 판관 어른. 그 괘씸한 도인 놈이 속임수를 썼다는 건 알겠습니다. 이번 일에서 가장 큰 잘못을 저지른 건 그 도인 놈이겠지요. 하지만 그건 이미 옛날 일이고, 판관 어른께서는 문제를 해결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감히 한 말씀을 드리자면, 이런 경우에는 도관을 먼저 산 사람이 그 주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천화회가 도관을 먼저 샀다는 겁니까?”

“예!”

추수욱은 자신이 있었는지 안색이 밝아졌다.

“분명 입하(立夏, 5월 5일) 때 도관을 샀습니다. 문서도 얼마든지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판관 어른. 부디 저희 천화의 억울함을 풀어주십시오! 힘이 없다고 해서 의(義)마저 지켜지지 않는다면 실로 원통할 겁니다!”

연우혁은 추수욱의 말은 적당히 걸러서 들었다.

애초에 천화회가 흑염방에게 밀리는 세력도 아니었다.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도관에 별 관심이 없었던 건 그들도 백월비고의 열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정말 도관에 관심이 있었다면 힘으로라도 되찾으려고 했으리라.

아마 백월비고의 열쇠가 발견되었다는 소문을 듣자 그제야 생각이 나서 한 몫 챙길 생각으로 대기하고 있었을 텐데...

“예. 최선을 다해 확인해보겠습니다.”

***

독망검 서광은 무인으로서의 자존심과 이번 일에 관한 실리 때문에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연우혁은 굳이 절정 고수에게 존대를 받고 싶진 않았기에 편하게 말했다.

“서 대협. 편하게 말씀해주십시오.”

“고... 고맙소.”

“도인이 한 도관을 두 문파에게 판 게 문제의 근원이지만, 지금 해결해야 하는 입장으로서는 결국 누가 가져야 하는가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역시 누가 먼저 샀는지가 중요할 것 같습니다만...”

“그거라면 어렵지 않소! 입하 때 도관을 샀소. 분명 천화회보다 먼저 샀을 것이오.”

‘이런 젠장.’

혹시라도 들킬까봐 철저하게 같은 날에 처리한 도인의 세심함에 연우혁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날짜까지 같으면 어느 편을 들어줄 근거가 없어졌다.

‘사기 사건이 뭐가 있었더라...’

“진충비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오.”

“말해보십시오.”

“천화회 놈들이 한 악행에 대한 증거가 있소.”

‘당신 흑염방 소속이잖아...’

명색이 흑도칠문 중 하나인데 한다는 짓이 상대의 악행을 고발하는 짓이라니.

조금 체면이 없는 짓이었지만 어쩔 수 없기도 했다. 태극검존이 서로 검을 휘두르는 걸 금했으니 이렇게라도 상대를 깎아내려야 하지 않겠는가.

“얼마 전 내 부하 중 하나가 천화회 놈들에게 매수되어서 백월비고의 정보를 넘겼소. 천화회 놈들이 정말로 자신이 있다면 이런 짓을 왜 했겠소?”

누가 먼저 샀는지와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였지만 연우혁은 어떻게 잡아냈는지 궁금해져서 물었다.

“어떻게 잡아내신 겁니까?”

“주연(酒宴)을 즐기는데 패물이 하나 사라졌소. 부하 놈들을 뒤지려고 했는데 한 놈이 몰래 빠져나갔지 뭐요. 패물이야 나중에 찾았는데 그 자리를 그렇게 황급히 빠져나갈 이유가 뭐가 있겠소. 들키면 안 되는 게 품속에 있었던 거지.”

“그 부하 분은 자백하셨습니까?”

“안 했소. 뻔뻔한 놈이지. 내가 그렇게 믿었는데 말이오. 언젠가 자백할 염치가 생기면 뇌옥에서 꺼내 그 낯짝을 한 번 봐야지.”

“잘하셨습니다.”

최근 소문이 자자한데다가 백월비고의 열쇠까지 꺼낸 진충비도한테 저런 말을 듣자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는지, 서광은 씩 미소지었다.

“내가 제갈세가 출신인 진충비도만큼은 아니어도 머리를 쓸 줄 알지.”

“...제갈세가 출신 아닙니다.”

“아니었소?! 이런.”

“그리고 잘하셨단 건, 죽이지 않고 뇌옥에 가둔 걸 잘하셨단 겁니다. 정말 첩자였다면 그 자리에서 빠져나온 뒤 바로 천화회로 달려갔지 뭐하러 가만히 있다 잡혔겠습니까? 그 부하 분은 첩자가 아닐 겁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요? 그러면 왜 쥐새끼처럼 자리를 빠져나갔던 거요?”

“제 생각에는 아마 그 부하 분에게 가난한 친족이 많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주연의 음식은 달고 부드러운 게 많으니 친족들에게 가져다주고 싶었겠지요. 다만 음식을 주머니 속에 챙겼다는 게 들키면 보통 수치스러운 게 아닐 테니...”

연우혁의 말에 서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짚이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그 친구에게 노모(老母)가 있긴 한데.”

“가서 확인해보십시오. 친족들이 여전히 가난하게 지내고 있다면 첩자가 아닐 겁니다.”

서광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홱 돌아섰다.

독망검이 경공을 펼쳐서 멀리 사라지고 나서야 연우혁은 뒤늦게 깨달았다.

‘...아차, 백월비고 이야기를 했어야 했는데!’

누가 먼저 샀는지 알아내야 하는데 웬 쓸데없는 사건을 풀어버린 것이다.

***

다음 날 서광은 밝은 얼굴로 관청을 찾아왔다.

“놈이 날 배신한 게 아니었소!”

“축하드립니다.”

“정말 기쁘군. 하긴, 그럴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나도 이번에는 좀 많이 배웠소.”

“그럼 이제 백월비ㄱ...”

“방에서 받는 녹봉으로는 친족들을 다 보살펴줄 수가 없더군. 그래서 오해를 사과할 겸 금고에서 은자를 꺼내 쥐어줬소. 어찌나 기뻐하던지.”

독망검 서광은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믿었던 부하였던 만큼 배신감을 크게 느끼고 있었는데 아니었을 줄이야.

“그럼 백월ㅂ...”

“이 일에 보답하고 싶어서 은을 좀 가져오려다가 저번에 다른 부하 놈이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라서 관뒀소. 대신 개방 놈들에게 찾아가 은자를 맡겼지. 판관의 이름으로 한경의 가난한 사람들한테 좀 뿌려달라고. 내 살면서 거지 놈들한테 돈 준 적은 처음이오.”

“......”

연우혁은 욕이 나오는 걸 순간 참아야 했다.

상대가 자신보다 고수기도 했고 태극검존에게 들었던 말도 있었기에 참을 수 있었다.

‘이 미친 사파 새끼가 왜 안 하던 짓을 하지?’

“그럼 이제 백월비고 이야기를 하고 싶소만...”

“예. 안 그래도 추 대협께서도 곧 오실 겁니다.”

“탈령장 그 놈은 없는 게 이야기하기 더 편할 텐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추수욱이 안으로 들어왔다. 추수욱은 의도적으로 서광을 무시하고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판관 어른. 일에 진척은 좀 있으셨습니까?”

“아. 예.”

“!”

연우혁의 말에 두 무인은 긴장한 표정으로 각오를 다졌다.

‘나는 오는 길에 판관의 이름으로 은자를 뿌렸다. 개인적인 호오로 내게 불이익을 주지는 않을 거다.’

‘독망검은 내내 무례하게 굴었다. 저 자의 손을 들어주지는 않을 거다.’

“음. 흑염방과 천화회 모두 입하 때 도관을 사셨더군요.”

“!!”

둘은 경악해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나중에 가필(加筆)한 거 아닙니까? 어떻게?”

“천화회 놈들은 첩자를 풀어서 우리를 염탐하던 놈들이오. 우리가 산 날짜에 맞춰서 바꾼 거요!”

“두 분 다 진정하십시오. 이런 거래는 문서가 관에도 남아 있는 만큼 가필하기 쉽지 않습니다. 아마 도인이 작정하고 같은 날을 노렸을 겁니다.”

두 무인은 이를 빠득 갈았다. 흑도칠문이 웬 듣도 보도 못한 도인 놈 하나한테 이렇게 농락을 당할 줄이야.

“그, 그러면 어떻게 결정을?”

“음. 두 분. 혹시 두 분께서 타협하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비고 안의 물건을 꼭 혼자서 독점해야만 하는 건 아니잖습니까.”

“절대 그럴 수 없소.”

“판관 어른! 부당한 말씀입니다. 어떻게 정당한 주인이 도둑하고 같이 물건을 쓸 수 있습니까?”

연우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반반으로 나누라고 했을 때 애초에 들을 사람들이었다면 태극검존이 그냥 반반으로 나누라고 했을 터였다.

다행히 연우혁은 이들을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면 한 가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입하 전날에 도관을 산 분이 한 명 더 계십니다.”

“......”

“......”

두 무인은 무슨 소리인지 몰라 눈만 끔뻑거렸다.

“산 사람도 아마 크게 관심이 없었는지 잊고 있다가 다른 사람한테 넘겼고, 또 그 다른 사람도 별 관심이 없었는지 다른 거래를 할 때 같이 넘겼는데... 하여간, 지금 갖고 계신 분은 이제 저기 옆채에 계시는 궁 판관이십니다. 본인께서는 갖고 계신지도 모릅니다만.”

어제 서광이 신나게 달려가고 나서 연우혁은 뒤늦게 무슨 사건인지 떠올렸다.

둘이 내 도관이니 네 도관이니 다투다가 결국 존재도 모르는 다른 사람이 갖고 있었던 사건!

그러나 이번 사건에는 치명적인 맹점이 있었다.

두 무인 놈을 납득시키려면 서고에 먼지가 켜켜이 쌓인 수많은 장부들 중 그 당시의 거래에 찍은 직인을 찾아내야 했던 것이다.

영안이 있어서 망정이었지 아니었다면 보름 내내 뒤지다가 끝났을지도 몰랐다.

“말... 말도 안 됩니다!”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오?!”

“이거 보십시오.”

연우혁은 낡디 낡은 장부를 하나 꺼내서 내밀었다. 직인이 찍힌 장부에 적힌 내용을 본 두 무인의 얼굴이 납빛으로 변했다.

“그럼 이제 두 분께서 타협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타협하겠소.”

“하겠습니다...”

두 무인은 고개를 푹 떨구고 대답했다.

눈앞의 진충비도와 칼 한 번 맞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무시무시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

“보통 판관이 사파 놈들이 나눠먹는 자리를 직접 감독하러 나오는 겁니까?”

“아니.”

적 포쾌의 말에 연우혁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둘의 뒤에는 흑염방과 천화회 무인들이 눈을 부라리며 서있었다.

-태극검존 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둘이 타협하고 안의 물건을 나누기로 했습니다.

-잘 했구나. 허허. 백월비고까지 따라가서 감시하다니. 자네 같은 명판관이 또 어디 있겠나. 이 늙은이가 보는 눈이 있긴 있어.

-...예? 백월비고까지 따라가서 봐야 합니까?

-그래야지. 저 무부들을 뭘 믿고 맡기겠는가?

태극검존은 거절하려고 해도 한사코 연우혁을 백월비고로 밀어 넣으려고 했다.

당연히 연우혁에게는 거절할 힘이 없었다. 결국 두 무인과 같이 백월비고 안에 들어가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무슨?”

“태극검존 같은 무인이 판관님을 백월비고 안에 보내려는 건 무언가 의도가 있어서 아니겠습니까? 솔직히 저 같아도 저 두 놈들에게는 주기 싫을 겁니다.”

“!”

확실히 그럴듯한 말이었다.

도관의 비고란 건 결국 도가의 무공일 텐데, 흑도칠문의 마두들한테 넘기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터.

‘설마 챙겨 가지고 나오란 건가?’

연우혁의 얼굴에 수심이 어리자 적 포쾌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좋은 기회 아닙니까?”

“결국 두 절정 고수 사이에서 몰래 비급을 훔쳐 갖고 나오란 소리잖나?”

“판관님이면 쉽게 하실 겁니다.”

“......”

너무 어이없는 말을 태연하게 하자, 연우혁은 순간 적 포쾌가 시비를 거나 싶었다.

그러나 적조는 진지했다.

“무슨 자신감으로...”

“진충비도.”

독망검 서광이 먼저 도착해서 연우혁을 불렀다.

“여긴 저번에 말한 내 부하, 팔사편(八蛇鞭) 운영이오.”

“대인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연우혁은 손을 내저었다. 언덕 위에서 도관의 비고 입구가 힐끗 보이자 서광은 문득 생각이 나서 물으려고 했다.

“사실 흑염방에서도 예전에 그 목함을 한 번 열어보려고 했었소.”

흑염방의 군사로는 그 명성이 자자한 흑교서(黑狡鼠) 우거가 있었다. 나름 사파에서는 천기수사와 버금가는 명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흑교서도 저건 열지 못하고 도인 놈이 사기를 쳤다느니 악담을 늘어놓았었는데...

“좀 더 시도하셨으면 분명 열었을 겁니다.”

“아니, 시도도 많이 했소...”

“이런 기관진식에 별 관심 없는 사람이 열려고 했겠지요.”

“......”

흑교서가 들으면 자기 수염을 잡아 뜯을 소리를 태연하게 늘어놓는 젊은 판관의 모습에, 서광은 무림 후기지수 중에 괴인이 하나 나오긴 했다고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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