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락두절 (2)
7. 연락두절 Communication Breakdown (2)
시그리드가 프라하 시의 성문을 지날 무렵 떨어뜨린 가죽 주머니를 본 리프가, 그것이 주인의 것임을 알고서 낚아챘는지, 아니면 그냥 지나가는 먹잇감이라 여기고서 사냥한 것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시그리드는 전자라고 생각했으므로, 덕분에 리프는 좋아하는 토끼 고기를 실컷 포식할 수 있었다.
“잘 먹고 있으렴. 한스, 부탁할게요.”
“네, 물론입지요, 단장님.”
한스에게 리프를 맡기고서 시그리드는 프라하 시청으로 들어섰다.
앞서 시그리드가 성문 밖의 민병대 진지에서 검은 책에서 꺼내온 또 다른 미래 지식의 조각을 선보이자, 고민에 물들었던 후스의 표정은 금방 펴졌다.
이제는 후스에 이어 시의회¹ 사람들에게 이 지식의 정체를 드러낼 때였다.
“다들 시청에 남아 계셨나 봐요.”
시청을 지키는 말단 직원들의 안내를 받아 안쪽으로 들어가던 시그리드는, 프라하의 요인들이 대동하고 다니는 비서나 보좌관들이 방 밖에 그대로 모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점차 후스의 추종자들을 프라하에서 조용히 떠나보내는 쪽으로 여론이 기울던 시의회. 그러나 설령 후스를 프라하에서 떠나보낸다 하더라도, 지기스문트와 담판을 짓는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렇게 저녁이 다 되도록 차마 파하지 못하고 설왕설래 이어가던 의원들 앞에 시그리드가 모습을 드러내자, 웅성대던 말소리가 일시 끊겼다.
프라하 유력자들의 후스에 대한 입장은 제각각이었지만, 시그리드에 대한 감정은 대체로 우호적이었다. 흑사병을 막아주기도 했거니와 – 그들은 대개 교수들과도 연분이 있었으므로, 그 ‘말비욤’이 마법이 아닌 인간 이성의 산물임을 알고 있었다 – 꼴보기 싫은 독일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준 전적도 있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 우호적인 감정도 프라하 시와 저들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문제를 앞두고서는, 딱 한 번 경청하는 만큼의 값어치에 불과할 터. 그리고 시그리드는 그 한 번의 기회를 살려낼 수 있으리라 자신하고 있었다.
“제가 이렇게 여러분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은, 새로운 제안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서 시그리드는 앞서 리프 덕에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던 그 쇳조각 여럿을 꺼내보였다.
“저게 무엇이오? 나도 좀 봅시다.”
“금속제로군. 납으로 만든 건가?”
시그리드는 잽싸게 방 안을 누비며, 의원들 앞에 조각을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네, 맞아요. 그리고 여기 보시면...”
의원들은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낯익은 쇳조각의 요철을 들여다보았다.
“거꾸로 된 글자 모양이로군.”
“인장처럼 쓰는 물건인 듯한데.”
“맞아요.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대단한 쓰임새를 지니고 있지요.”
시그리드가 끼어들었다. 의원들 앞에 놓여 있던 금속활자를 도로 한데 모은 시그리드는, 미리 준비한 틀에 활자를 끼우고 종이를 꺼내보였다.
“이렇게 이 활자type를 한군데 모은 다음, 종이에 찍어내는 거예요².”
잉크를 찍고, 활자를 꽉 눌러 찍어낸 ‘말비욤’ 일곱 글자를 의원들에게 보여주는 시그리드였다.
“솔직히 말해, 나도 한 번 해 보고 싶긴 하구려.”
“이 사람도 마찬가지요.”
남정네는 머리 굵어진 뒤에도 어린아이같은 구석이 있는지라, 저런 신기한 물건을 보면 저도 한 번씩은 만져보고 싶어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하자면, 어린아이 장난감에 불과하지 않소? 글자를 처음 배우는 아이들을 교육하는 데는 쓸모가 있겠지만.”
“그렇지요. 하지만 이 활자를 많이 만들어내고, 또 많이 찍어낸다면 얘기가 달라진답니다.”
“‘많이’라고 하면 얼마만큼을 말하는 것이오?”
“책 한 권을 찍어낼 만큼요. 제가 찾아보니, 이곳 프라하에는 이미 종이 공방도 있고, 또 포도주를 빚는 데 쓰는 압착기도 있더라고요. 그 둘만 있으면, 필사본 한 권을 베껴내는 품으로 책 수백 권을 찍어낼 수 있답니다.”
세상에 대한 저의 지식을 과신하여, 시그리드의 말을 터무니없는 소리라 치부하려던 이들은, 벌어진 저의 입을 도로 다물었다.
그들의 눈앞에 선 은발의 여인은, 프라하 시에 드리운 검은 죽음의 그림자에 굴복하지 않고, 도리어 죽음이 꽁무니를 빼도록 만든 이였으므로.
그러므로 저 놀라운 주장의 사실 여부 대신, 그것이 참일 경우 벌어질 일들을 논하는 것이 사리에 맞았다.
“실로 놀라운 물건이 아닐 수 없소. 허나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닥친 곤경과 무슨 관련이 있소이까? 그대라면 필시 무언가 혜안을 가지고 이 활자를 우리에게 보여주었으리라 믿소.”
예상한 반응이 마침내 나오자, 시그리드는 방긋 웃으며 저의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했다.
피사 공의회와 그들의 새 교황, 그리고 양위를 선언한 이복형 대신 보헤미아 왕위에 오를 지기스문트.
그들은 겨우 세운 저들의 권위가 도로 위협받는 것을 좌시할 수 없었으므로, 설령 진노하지 않았더라도 진노를 연기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프라하 시민들은, 후스와 함께해도, 후스를 쫓아내도 지기스문트가 저들을 사후에 해코지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어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처지였다.
“그렇지만 이 활자의 힘을 빌리면, 지기스문트가 어떤 억지를 부리려 한들 미리 막을 수 있을 거에요.”
억지deterrence는 이방인 욘이 1983년의 미래를 이야기할 때 빠뜨리지 않는 단어였다. 인류를 몇십 번쯤 파멸로 몰아넣을 수 있는 육만 기의 핵탄두,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은 물론이요 멀리 동쪽의 대명大明도 발끝에 미칠 수 없는 무시무시한 두 세력, NATO와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바로 이 개념에 입각하여 성립한 것이었으니까.
“프라하 시는 고작해야 도시 하나일 뿐이지요. 하지만 온 보헤미아가 우리와 함께하게 된다면 어떨까요?
사람 한둘이 온 도시를 설득하는 데는 며칠, 몇 달이 걸리지만, 백 명의 사람이 동시에 책을 읽는다면 고작 하루이틀이면 충분히 도시 하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거에요.”
굳이 함께 무기를 들고 일어나 달라 촉구할 것도 없었다. 그들이 프라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예의주시하고, 지기스문트가 제멋대로 보헤미아를 다루려 하는 것에 볼멘소리만 내어주어도 족했다.
온 보헤미아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전쟁은, 시그리드뿐 아니라 지기스문트도 결코 바라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그렇게 온 보헤미아의 눈길을 이곳 프라하로 모은다면, 설령 신성로마제국 황제라 할지라도 우리를 함부로 대할 수 없겠지요. 저와 함께 신대륙으로 떠나가고자 하는 이들이 모두 떠난 뒤라 할지라도요.”
헝가리와 보헤미아, 크로아티아의 국왕, 그리고 곧 독일왕까지 겸하게 될 지기스문트에게 프라하 시 하나와의 약조는 언제 어겨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가벼울 것이다. 그러나 프라하가 온 보헤미아를 대신하여 지기스문트와 룩셈부르크 가문의 콧대를 꺾어주는 형국이 된다면, 그때는 지기스문트조차 함부로 프라하와의 약조를 어기지 못할 것이다.
물론 곧 밀려올 지기스문트의 군세를 꺾은 다음의 이야기겠지만, 시그리드는 지슈카가 그 부분은 말끔하게 해결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슈카의 군사적 재능을 잘 알지 못하는 의원들도, 하나둘씩 술렁이기 시작했다.
만약 온 보헤미아를 잠재적인 보증인으로 끌어들여, 지기스문트가 무엇을 약속하든 그것을 마음대로 어기지 못하게끔 압박할 수만 있다면...
어째서 그들이 지기스문트를 이길 수 없는지, 어찌하면 덜 얻어맞고 끝낼 수 있을지를 고민하던 이들의 생각이 돌아서기 시작했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이 자리에 앉은 이들 중 가장 열성적으로 후스를 따르는 스트르지브라의 야쿠벡³이 일어나 발언을 청했다.
“여러분 중에는 얀 후스 교수의 주장이 참된 신앙의 길이라 여기는 분도, 이단이라 여기는 분도 계십니다. 그렇지만 우리 중 그 누구도, 시그리드 리프트라사와 그 경이로운 지혜가 우리 곁에 있을 때 우리가 바라는 바를 이루지 못한다면 다시는 이만한 기회가 찾아오지 않으리라는 점은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일말의 이견도 없이,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프라하 시의 유력한 이들로 구성된 시의회는, 시그리드의 제안대로 저들의 주장을 담은 책자를 온 보헤미아에 퍼뜨리고, 그 지지를 기반 삼아 지기스문트에게 대항하는 쪽으로 중론을 모으게 되었다.
프라하 교외의 민병대 진지. 며칠 전 내린 비로 진흙탕이 된 들에서, 그 진흙과 물아일체의 경지를 이룩한 민병대 신병들이 열심히 구르고 있었다.
훈련이 시작되자, 얀 지슈카는 저를 바라보고 모인 신병들의 신뢰에 반드시 보답하겠노라 공언한 뒤 곧장 그들을 굴리기 시작했다.
이는 백송고리 용병단이 고작해야 몇 달의 훈련을 거친 시정잡배와 촌부 모임이었다는 사실에 감명을 받은 얀 지슈카가, 그 훈련 방법 중 취할 만한 것 여럿을 도입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룬발트에서도, 수만 대 수만이 뒤엉킨 혼전이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더라면 많이 위태로웠을 것이오. 우리만의 힘으로 지기스문트의 기사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졸면서도 명령에 따를 수 있을 때까지 숙달하는 수밖에 없지.”
그린란드 연대 출신 보헤미아 용병들이 교관 노릇을 하며, 보헤미아 말의 아름다움으로써 모자란 신병들을 계도하는 것을 참관하던 용병단원들에게 지슈카가 설명해주었다.
“그, 선생님, 혹시 몽둥이는 필요 없으십니까?”
못내 아쉬워하며 불량배 한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여기서 여인네 한 사람이랑 눈이 맞았는데, 저의 연적이 저 진흙탕 속에 구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허나 지슈카가 한스의 속마음을 알아줄 리 없었다.
“말로 갈구는 게 더 효과적이라오. 몽둥이찜질은 여러 번 하면 사람이 상하지만, 욕설은 백 번 들어도 기분만 상하고 말거든.”
한편, 그 진지 옆에는 프라하 최초, 아니, 유럽 최초의 인쇄소가 세워졌다.
말이 거창하지, 그냥 주변의 양조장에서 포도즙 짜는 기계(와인 프레스) 여럿을 가져와서는 개조하고, 프라하의 장인들이 만든 활자와 제지업자들이 만들어내는 종이를 모아 책으로 찍어내는 것에 불과했다.
“그게 ‘불과하다’라는 말로 에둘러 표현할 수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구나.”
시그리드의 계획을 듣고, 대학의 다른 교수들과 함께 저들의 교회 개혁안을 쉬운 보헤미아 말로 풀어서⁴ 짜깁기한 원고를 들고 온 후스가, 인쇄소를 한 바퀴 둘러보고서 남긴 소회였다.
“제가 한 일이라곤 그냥 발상 몇 가지를 전해준 게 다였으니까요. 그마저도 제 머릿속에서 나온 건 아니고요.”
“이 인쇄술이라는 것도 그 욘이라는 이로부터 들은 이야기였나 보구나.”
“네, 맞아요.”
시그리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제 발상에 호응해주신 의원분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고요.”
“네게 그런 달변의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구나.”
처음 시그리드가 그 활자를 보여주며 저의 계획을 설명했을 때부터 성공을 직감한 후스였지만, 이토록 열렬하게 시의회 사람들이 뜻을 모을 줄은 몰랐다.
“제 언변이 뛰어났다기보다는, 그분들도 나름의 욕심이 있었으니까 선뜻 나선 것이겠지요.”
“욕심이라고?”
“네. 그러지 않고서야 고작 말 한두 마디를 듣고서 뜻을 바꾸지는 않았겠지요.
다들 바라는 게 있지요. 누군가는 진심으로 선생님의 말씀을 따르고 있겠지만, 또 누군가는 여기에 편승해 뭔가 다른 요구를 관철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겠지요.
선생님께 완전히 찬동하지는 않아도 교회의 개혁은 필요하다 여기는 이. 보헤미아는 보헤미아인들의 손으로 다스려야 믿는 이. 교회든 제국이든, 보헤미아 바깥의 권세가 제멋대로 보헤미아 안쪽의 사정을 건드리는 데 불만을 품은 이. 이 기회에 뭔가 그럴듯한 이권 하나를 지기스문트 손에서 뜯어내볼까 생각하는 이...
사람이 각양각색인 것처럼 욕심도 각양각색이고, 그 욕심 위에 덧씌우는 이상도 각양각색이니까요.”
항상 세상을 아름답게만 바라볼 줄 알았던 시그리드의 입에서 나오는 현실론에 후스는 적잖이 놀랐다. 그리고 언뜻 냉소가 담겨 있을 법도 한 이야기에서, 오히려 사람 모두에 대한 온정이 느껴진다는 데 또 한 번 놀랐다.
“그렇다면 비단 프라하뿐 아니라 다른 도시에서도 마찬가지겠구나.”
“그렇지요. 그래서 선생님의 원고뿐 아니라 다른 글들도 이것저것 다 집어넣어서 책 한 권을 만들고자 하는 거고요.”
제목은 ‘프라하 사람들의 선언문’이나 ‘오늘날의 시대상에 대한 단상과 촌평 모음집’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 인쇄소 일에 관심을 보이며, 기꺼이 편집을 해주겠다며 나선 프라하의 문인들은 후자가 더 낫다고 평하고 있었는데, 저들 사이에서는 벌써 그 긴 제목을 ‘시대The Times’로 줄여 부르고 있었다.)
“다른 글이라고?”
“어, 못 들으셨나요? 맨 앞에는 프라하 시의회 이름으로 된 선언문이 들어갈 거고요, 그 다음이 선생님 글이에요. 그리고 말비욤 만들 때 신세를 졌던 의대 교수님들이 쓰신 글도 들어갈 거고요.”
보헤미아의 어지간한 도시에는, 후스라고 하면 우선 책을 집어들고 볼 사람들이 더 많기는 했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적지 않았다. 더구나 후스에게 반대하는 이들의 시선을 염려해, 공연한 분란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침묵을 지키는 이들도 꽤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소비주의 사회에서 살다 온 존 윌슨 중령의 지혜를 물려받은 시그리드는, 그런 사람들조차 어쩔 수 없이 책을 집어들 수밖에 없도록 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책 맨 뒤에, ‘흑사병을 막는 방법 – 프라하에서 실제로 검증됨’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면, 그것 하나를 읽기 위해서라도 프라하에서 신기술로 발간된 책자를 집어들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제가 주장한 내용 중에 이치에 닿는 부분과 아직 가설의 영역에 머무는 것, 그리고 말비욤을 만들면서 새롭게 발견된 사실들을 학술적 용어로 정리하는 건 교수님들이 맡아주시기로 했어요. 제가 요구한 건 딱 하나였고요.”
그게 무엇일지, 이 이방인을 프라하에서 가장 먼저 만나본 사람이었던 후스는 얼추 알 것 같았다.
“말비욤. 그 일곱 사람들의 이야기가 수록되는 것이었겠구나.”
“네, 맞아요. 우리가 무엇을 하든, 지기스문트가 또 어떻게 대응하든, 일곱 사람의 이름은 프라하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나선 모두와 함께 보헤미아 전역에서 기억될 거에요.”
그것이 책의 힘이었다. 종이에 새겨진 글을 사람의 머리로 옮기고, 사람의 머리에 있는 것을 다시 종이에 옮기는 것. 그로써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모든 것을 우회할 수 있는 힘.
거기에 생각이 미친 후스는,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위대한 학자 위클리프의 주장을 새삼스레 되새겼다.
“그거다!”
“네?”
“그거야! 그거면 되겠어!”
지금껏 얌전하기만 하던 후스가 갑자기 박수를 치며 탄성을 내지르자, 시그리드는 깜짝 놀라고 횃대에 앉아 꾸벅꾸벅 졸던 리프는 깜짝 놀라 푸드득 날아올랐다.
“그래. 그렇게라면 신대륙으로 건너가 새로운 출발을 하면서도 동시에 이 땅의 교회를 개혁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고맙구나, 시그리드야!”
한 발 늦게 저의 머릿속에서 이루어진 논리의 비약을 설명할 필요성을 깨달은 후스는, 흥분이 가신 뒤 숨을 고르고 설명했다.
“나는 신대륙으로 떠나야만 한다. 내 진짜 모습, 보잘것없는 일개 인간 이상의 무언가를 내게서 보는 수많은 이들이 이 진지에 모여들어, 기꺼이 기사들에게 맞서겠노라 하고 있지 않으냐. 마치 지난날 성 비투스 대성당을 휩쓸었을 때와 같은 열정에 가득 차서 말이야.
만약 내가 저들과 함께 떠나지 않는다면, 반드시 이 땅에 화근이 남게 되겠지.
하지만, 네 말을 듣고, 또 이 인쇄소를 보다 보니,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는구나.
시그리드 너는, 이곳 프라하에서 각기 다른 꿈을 꾸는 사람들을 그 지식의 힘으로 한데 묶은 것처럼, 신대륙으로 건너갈 때도 온갖 사람들을 하나로 뭉쳐서 함께 갈 테지. 그렇지 않니?”
“네, 맞아요.”
“네 계획대로라면, 아마 그 옛날 성지로 십자군이 나아갔을 때 이상으로 온갖 나라 사람들이 한데 모이게 될 것이다. 너와 함께한다면 유럽에서 구사되는 어지간한 언어를 다 접할 수 있을 테고.”
위클리프의 주장. 성경을 민중의 말로 번역하여, 모두가 복음을 접할 수 있게 하자는, 누군가에게는 소름을 돋게끔 하고 누군가는 저도 모르게 손뼉을 치게끔 만들 번뜩이는 주장.
신대륙으로 나아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모든 나라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모든 나라 말로 된 성경을 각각 만든다. 설령 후스가 그 끝을 보지 못한다 한들, 그와 함께할 사람을 모아 나아간다면 상관 없는 일이었다.
“사람은 한 번 신대륙으로 건너가면 돌아오기 어렵겠지만, 책은 그렇지 않을 테다. 성경이라 한들 예외는 아니겠지.”
광기와 통찰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후스의 눈빛을 본 시그리드는, 성경을 저들 말로 번역한 사람이 미래에 있을/과거에 있었을 것임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무릎 끓고 기도를 올리는 후스의 표정이 너무나 편안하고도 행복해 보였기에, 시그리드도 미래/과거에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마르틴 루터 이야기를 미처 떠올리지 못하고 그 분위기에 휩쓸리고야 말았다.
그 모든 이야기가 피사에 전해지면서, 공의회의 주제는 어느새 교회통합에서 십자군으로 넘어가고야 말았다.
튜튼 기사단의 대표들이 처음 피사에 나타나 도움을 호소할 무렵만 해도, 기사단원들을 제하면 그린란드의 시그리드가 진짜 마녀라고 믿는 이는 없었다.
심지어 요가일라가 배교자라는 기사단의 선동을 곧이곧대로 믿는 가장 강경한 도미니코회 수도사들조차, 시그리드라는 소녀는 멋모르고 바깥세상에 나왔다가 군주들 사이의 복잡다단한 알력에 휘말려 마녀 혐의를 쓴 가련한 사람이라고 내심 여겼다.
(물론 그 가련하다는 생각이 마녀 혐의를 벗겨주는 쪽으로 작동하지는 않았다. 때로는 더 큰 대의를 위해 사람 하나쯤 무고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시일이 지날수록, 무언가 이상한 소식이 보헤미아 방면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흑사병을 말하기도 망측한 흑마법으로 막아냈다는 소문. 망자의 정수를 채취한 다음 악마의 술법으로 물약을 만들었다고도 하였고, 벌레의 주인인 대악마 바알제붑의 힘을 빌렸다고도 하였다.
합리적인 신학자과 성직자들은 이런 미신적인 뜬소문이야말로 이단의 근원이자 온갖 해악의 원인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던 차, 이단자 후스를 단죄하고 겸사겸사 이 마녀의 뜬소문도 억누르고자 프라하로 떠났던 제르송이, 뜻은 하나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의 정의와 올바른 신앙에 대한 고민만 한 가득 품고서 돌아왔다 (그는 말 그대로 어딘가 구린 냄새를 풍기고 있었는데, 그 원인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는 저의 비상한 기억력을 십분 발휘해, 자신이 프라하에서 겪은 일을 문장 하나 빠뜨리지 않고 사실대로 술회했다.
허나 후스가 이단이지만 여전히 대화의 여지가 있다는 것. 시그리드 역시 저의 혐의를 인정할 기미가 없지만 그 의도만은 선량하다는 것 등등. 제르송이 말한 그 어떤 것보다도 더 강력하게 피사를 뒤흔든 이야기가 있었다.
“‘혼란은 끊어지지 않고, 종말도, 구원도 찾아오지 않는다’라니? 그리고 스스로 하얀 마녀라고 자백까지 했단 말인가?”
지금껏 종말이 닥쳐온다고 사람들을 선동하고 다닌 이단은 많이 접했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던 교회였다. 허나 후자가 훨씬 더 교회에 많은 풍파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몇몇 의기 넘치는 이들은, 마녀 시그리드의 고향이 그린란드라는 사실을 거론하며 덴마크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시그리드가 그린란드 사람이라는 것 외에는 그 ‘백송고리 용병단’에 대해 잘 알려진 바가 없기도 했고, 잉글랜드 사람들이 (웨일스공 헨리의 서한을 받아본 이후) 덴마크를 두둔하고 나섰기에 덴마크 책임론은 흐지부지되고야 말았다.
“오히려 잘된 일이다. 보헤미아의 거만한 도시들을 이 기회에 제압하는 것이다. 프라하는 좋은 본보기가 되겠지.”
당황한 교회가 우선 최후통첩 – 후스에 대한 파문 선고 – 을 프라하로 띄우는 틈을 타, 측근들을 불러모은 지기스문트가 운을 떼었다.
이복형 벤첼의 무능한 통치 속에서, 보헤미아인들은 저들이 마치 룩셈부르크 가문의 주인인 양 착각하기 시작했다.
룩셈부르크 가문이 제국에서 가장 유력한 입지에 오른 것은 물론 보헤미아의 국력 덕분이긴 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주인과 농노의 입지가 바뀌지는 않는 법. 적어도 지기스문트가 아는 세상의 이치는 그러하였다.
그리고 버르장머리 없는 농노⁵는, 때로는 왜 기사가 그들 위에 있는지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법이었다.
“경들 중 아는 이들도 있겠지만, 나는 이미 보헤미아 각지의 도시와 영지에 프라하의 이단과 반란자들과 함께해서는 안 될 것임을 엄중히 경고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들을 돕는 자는 이단과 같은 편으로 간주하겠다는 엄포와 함께.
그러니 이제 남은 것은, 어떻게 본보기를 보일 것인가, 그리고 이것으로서 교회의 권위를 어떻게 우리 제국의 권위로 삼을...”
그러나 곧 복도에서 우당탕 하는 소리가 들려왔기에, 지기스문트의 근엄한 목소리는 끊기고야 말았다.
지기스문트의 눈짓을 받은 시종 하나가 문을 열자, 난장판이 된 복도의 모습이 회의장에 있는 모두의 눈에 들어왔다.
“큰일이오! 큰일! 폐하께 알려야 하니 비키시오!”
“비켜라, 이놈아! 내가 더 급하다!”
“다 같은 소식을 들고 온 것 같은데, 그냥 순서 지키십시다. 거 성격은 급해서.”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시종이 지기스문트를 대신해 목소리를 높인 뒤에야 혼란은 잦아들었다.
그제야 하나씩 나아와, 저들이 지기스문트의 명을 받들어 찾아갔던 보헤미아 도시와 영지의 사정을 고하는데, 놀랍게도 내용은 똑같았다.
“다들, 저희에게 이 책을 건네주며 한 번 읽어보라, 폐하께도 전해드리라 하였습니다.”
똑같이 생긴 책 여러 권이 저의 앞에 놓이는 것을 본 지기스문트는, 순간 합리적인 해석 대신 이 또한 마녀의 술수가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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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 역사에서도 후스파 세력은 온건파와 급진파 모두 공화정과 유사한 정치체제를 수립했습니다. 지기스문트와의 타협을 추구했던 온건파는 새로 군주를 모심으로써 지기스문트와의 화해 가능성을 배제해버리는 것을 원치 않았고, 급진파는 요가일라나 비타우타스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시도가 실패하면서 공화정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현실적 한계로 인해 사실상 몇몇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중심으로 통치가 이루어진 급진파와 달리, 프라하의 부유한 시민과 교수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온건파 의회는 전쟁 이후로도 잘 작동하면서 보헤미아 내 후스파 세력을 대변하는 정치 세력으로 한동안 남게 됩니다.
2. 유럽인들이 중국에서 등장한 제지술을 아랍 세계를 통해 접하게 된 것은 아무리 늦어도 13세기 초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이미 양피지 산업이 유럽 전역에 존재하고 있었기에 제지술의 전파는 다분히 느리게 이루어졌지요. 알프스-피레네 이북에 제지소가 세워지게 된 것은 14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였고, 이마저도 한동안은 양피지에 비해 우위를 쉽게 점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추세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은 바로 인쇄술의 도입과 발전이었습니다. 15세기 초부터 목판화가 등장하여 상업 중심지였던 몇몇 대도시에서 널리 쓰였고, 그런 기반 위에서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를 발명함에 따라 전 유럽의 출판업 – 그리고 나아가, 교회를 중심으로 짜여 있던 유럽의 지식 질서 – 은 큰 변화를 맞게 됩니다.
3. 독일식으로 미에스의 야콥이라고도 불리는 스트르지브라의 야쿠벡은 원 역사에서도 프라하의 온건파를 대표해 1420년 프라하 4개조 요구Four Articles of Prague 작성에서 중심적 역할을 수행한 인물입니다. 양형영성체파 교리와 교회의 청빈함, 도덕성 증진, 교회 개혁운동의 자유 등을 주된 내용으로 삼는 이 4개조 요구는, 타보르파 반란을 자체적으로 진압할 수 없던 지기스문트가 이들 온건파에게 손을 벌림에 따라 바젤 공의회에서 부분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4. 후스는 원 역사에서도 위클리프의 저작을 체코어로 번역하는 것을 필두로 많은 체코어 서적을 남겼습니다. 오늘날 체코어 표기에 사용되는 č, š, ř, ž 등의 글자는 후스파에 의해 처음 쓰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대략 이 시기부터 쓰이기 시작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가 남긴 체코어 저작들은, 그 자체로 참신하거나 과격한 주장을 담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코어로 쓰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보헤미아인들로부터 큰 호응을 이끌어냈습니다. 이는 위클리프를 비롯해 당대와 후대의 다른 종교개혁가들이 자국어로 된 저작 – 그리고 종국에는 성경 – 을 저술하는 데 열중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일이었지요.
5.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중세의 농노와 자유도시의 부유한 상인이 하나로 묶이는 것을 선뜻 이해하기 어렵지만, 사회를 이런 세 계급, 즉 기사(군주 포함)와 성직자, 평민으로 나누는 구분법은 근대 초입까지도 유럽에서 널리 통용되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을 촉발하게 된 계기 중 하나로 꼽히는 삼부회三部會의 ‘삼부’ 역시 이런 3계급론에 입각한 것이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