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바이킹-74화 (74/116)

밤의 열기 (4)

17. 밤의 열기 Night Fever (4)

“석탄을 태워 물을 끓이고, 그 힘으로 기계를 움직인다고 하셨습니까.”

저의 좁지만 단정한 거처에서 두 귀빈을 맞이한 공학자 테오도로스는, 느긋하면서도 사려 깊은 말투로 반문했다.

“네, 맞아요. 석탄은 이 땅에 넘치도록 많으니까, 잘만 만들면 이 땅의 모든 인력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하하, 말씀을 들으니 옛날 생각이 나는군요.”

“옛날이라고요?”

“예.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건축과 공학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먼 옛날 이교도 문호들이 노래하였던 비극을 체험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일이었으니까요.”

한때의 위대함은 사라질 운명이요, 일개 건축가가 할 수 있는 일은 멸망을 조금이나마 미루는 것뿐.

언제고 바다 너머에서 쳐들어올 지 모르는 투르크인들의 위협만 없다면, 저 웅장한 건물들에게 과거의 영광스러웠던 모습을 완전히 되찾아줄 수 있을 텐데.

황실의 재정이 감당해줄 수만 있다면, 저 위대한 건물들을 최소한의 비용으로 유지할 방도를 고민하면서 터득한 자신만의 지식과 기술로써, 선조들의 위업을 뛰어넘는 건물을 지을 수도 있을 텐데.

하지만 이상이 암만 드높다 한들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마치 조금씩 꾸준히 줄어드는 제국의 영토처럼,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남길지 끊임없이 결단을 내려야만 하는 처지,

“그렇게 포기하고 포기하다 보면, 결국 언젠가는 자랑스러운 삼중성벽도, 웅장한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질 것을 앎에도, 다른 방도는 없으니 차악에 차악만을 택하면서 체념할 수밖에 없었지요¹.”

응접실 겸 거실 겸 서재에 마주 앉은 시그리드와 콘스탄티노스를 향하는 눈빛은, 왠지 두 사람보다는 과거를 반추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 듯했다.

”하지만 이 복된 땅에서는, 사정이 정반대입니다.

쓸 수 있는 연장도, 부릴 수 있는 노동력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열악하지만, 대신 우리 손으로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확신, 그리고 언제고 거기에 덧대어 더욱 낫게 발전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 있지요.”

“그러면 제 발상도...”

증기기관 운을 떼자마자 나온 반응이 이러하였으므로, 시그리드는 은근한 기대를 품고서 조심스레 물었다.

허나 알고 보니 이 모든 건 독설을 위한 밑밥이었다. 지금껏 테오도로스와 마주하고서 진지한 얘기 나눈 적이 없던 시그리드와 콘스탄티노스 황자는, 이 초로의 장인이 성품 꼬인 것으로도 유명하다는 걸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데스포이나 전하의 그 증기기관 발상을 듣고 보니, 실로 오랜만에 제 스승님이 떠올랐습니다. 견습 중에서도 가장 말단이던 제가 건방지게 이것도 새로 짓고 저것도 새로 짓자고 했을 때, 저를 향하던 스승님의 그윽한 눈빛이 아마 이런 뜻이었겠지요.”

“테오도로스 공, 말씀이 심하시구려.”

나름 엄격하고도 근엄한 목소리로 – 변성기만 아니었더라면 살짝 그렇게 들렸을지도 모른다 – 콘스탄티노스 황자가 꾸중하였다.

“아녜요. 괜찮아요.”

시그리드가 저를 변호하고 나서려던 황자를 제지했다.

“다만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이유를 듣고 싶은데요.”

“석탄으로 물을 끓인다? 물론 가능하겠지요. 그 김이 뿜어져나오는 힘으로 뭔가를 한다? 역시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석탄과 증기의 힘으로 기계를 움직여 얻는 이익보다, 석탄을 옮겨오고 기계를 만드는 비용이 더 많이 들 겁니다.”

“만들어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 아닌가요?”

“만들어보지 않고도 족히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물을 끓여 그 힘을 이용한다는 발상은 이미 일천사백년 전에 알렉산드리아의 헤론이 했던 것입니다². 다시 말해 그 뒤로 일천 하고도 사백 년 동안 다른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았을 만큼 실용성이 없다는 뜻이지요.”

암만 머릿속에 미래 지식을 가득 담고 있다 한들, 공학 쪽의 실무 경험은 십 년 전 동녘정착지에서 벼락을 불러낸 게 전부였던 시그리드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시그리드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증기기관의 핵심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것뿐. ‘미래의 잉글랜드 사람들은 그걸 잘만 해낼 텐데요’라고 하기에는, 삼백 년의 터울이 너무나 컸다.

그 아이디어를 현실로 옮겨줄 수 있는 사람이, 그런 건 불가능하다고 단언하고 있었다. 눈앞에 뭔가 증거를 보여준다면야 그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겠지만, 애초에 그 증거를 만들어낼 역량을 지닌 사람이 테오도로스 하나뿐이니 어찌 방법이 없었다.

결국 곧 다시 돌아올 테니 부디 심사숙고해달라 말하면서 자리를 뜨는 수밖에.

시그리드가 어떻게 하면 저의 일천한 공학 경험으로 테오도로스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홀로 끙끙대며 검은 책을 뒤적거린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어느 날.

게미스토스 플레톤이 우애의 도시에 나타났다.

플레톤은 헌법 초안 두 개 – 하나는 제 것, 다른 하나는 후스 것 – 를 마련하느라 바빴다. 플레톤 본인은 그냥 제 머릿속에 들어 있는 위대한 플라톤의 국가론과 법률론을 토대로 뭔가를 만들어내면 충분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민자들을 위한 기초교육 교과를 다듬느라 매한가지로 바빴던 후스는 생각이 조금 달랐다.

‘이 헌법은 우리 공동체 모두가 따라야 할 것입니다. 바스크인이든 그린란드인이든, 우리와 함께 살기로 한 원주민이든, 보헤미아인이든, 모두가 말이지요. 이곳저곳 정착지의 식자들에게 보여주고 그 의견을 구하는 쪽이 온당하지 않겠습니까?’

‘식자? 이곳 정착지에 식자라면 나와 그대 외에 또 누가 있단 말이오?’

‘그러면 저희 보헤미아 사람들의 요구를 반영한 초안이라도 먼저 주십시오. 저희끼리라도 미리 검토하는 절차를 밟겠습니다.’

‘되었소. 되었어. 내가 직접 돌아다니면서 의사를 묻겠소. 내 뜻대로 작성한 초안과 그대들의 의사를 반영한 초안, 이 둘을 동시에 본다면 자연스럽게 어느 쪽이 합당한지 비교도 되고 좋겠구만그래.’

후스는 저도 모르는 사이 플레톤의 자존심을 건드려 원하는 바를 이루었고, 플레톤은 저도 모르는 사이 후스에게 이용당한 셈이 되었다.

아무튼 그렇게 우애에 도착해, 다른 정착지 유지들을 만나러 다닐 작정으로 수소문을 했는데, 시그리드가 아직도 여기 머물고 있을 뿐더러, 뭔가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해 끙끙대고 있다는 소문이 귀에 들어왔던 것이다.

“아니, 그걸 그냥 묵묵히 듣고 있었다고? 황자님, 시그리드 전하의 이런 면모는 안 본받으셔도 됩니다.”

봄날 만끽하는 대신, 종이 한 장과 연필 대용품인 숯 한 덩이 붙잡고서 머리 싸매고 있는 시그리드와, 오늘도 어김없이 그 곁에 찰싹 붙어 있는 콘스탄티노스를 찾아온 플레톤이 한 소리를 했다.

“그럼 싫다는 사람한테 어떻게 억지로 강요를 할 수 있겠어요?”

“권력 좋다는 게 다 뭔가. 싫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뭔가를 시킬 수 있는 게 바로 권력이지. 그 권력 얻으려고 팔레올로고스 가문도... 아차차. 황자님, 이 늙은이가 지금 한 말도 마찬가지로 싹 잊으시면 됩니다.”

“들어보세요, 선생님. 저도 제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니까요?”

시그리드가 테오도로스에게 저의 – 아직 명칭도 정해지지 않은 – 직함을 내세워 의사를 관철시키지 않은 까닭은 이러하였다.

우애의 도시에 도착한 이민자들은, 거기서 옥수수 강을 따라 살짝 북상하면 펼쳐지는 숲과 들판 곳곳에 정착했다.

대개는 옥수수 강으로 흘러드는 작은 지류들 근처에 터를 잡곤 했는데, 그러다 보니 다들 떠올린 생각이 비슷하였다. 테오도로스가 이곳 사정에 맞추어 단순한 목재 가공만으로도 만들 수 있도록 설계한 수차는, 이미 곳곳의 물레방앗간에서 요긴하게 쓰이고 있었다.

당장 야네크네 철공소에서 지금쯤 열심히 풀무질을 하고 또 갓 나온 선철을 두들겨 쓸모 있는 쇠붙이로 만들어내고 있을 물레방아 역시, 만든 것은 보헤미아 사람들이지만 설계한 것은 테오도로스였다.

매번 이방인 정착지의 물레방앗간에 신세지기 뭣하였던 레나피 부족 사람들은, 저들 마을에서도 옥수수 빻을 수 있게 그런 ‘마키나(기계)’ 하나 놓아달라며 선물 보따리를 바리바리 싸들고 테오도로스를 찾아오곤 했다³.

“그렇게 바쁜 분의 일손을 붙잡고서 증기기관 제작을 강요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다른 마땅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시그리드에게 최악의 상황은, 테오도로스가 의도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건성으로 증기기관을 설계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했다가 증기기관 실험이 실패한다면, 한 번 더 해보자고 설득하기가 지금보다도 더욱 난망할 것이었다.

“그러니까 뭔가 그럴듯한 시안이라도 하나 만들어서, 해봄 직하다는 평을 들어야지요.”

어떻게든 테오도로스가 진심으로 이 일에 임하게끔 만들어야, 실패한다면 실패하는 대로, 성공한다면 성공하는 대로 테오도로스가 계속 증기기관을 붙잡고 더욱 개량하도록 이끌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플레톤은 그저 피식 웃을 뿐.

“참, 볼 때마다 느끼는 게지만 신기한 사람이야. 아니, 독일왕 지기스문트의 관자놀이에 총을 갖다 댈 생각은 거리낌 없이 하는 사람이, 왜 늙다리 장인 하나 두고서 그리 쩔쩔매는가?

내 대현인 플라톤 선생의 족적을 따라가고자 하는 후학으로서, 마땅히 돕고 나서는 수밖에.”

플라톤과 달리 플레톤은 제게 반박하거나 반대하는 자를 후려칠 수 있는 우람한 어깨와 완력은 지니고 있지 않았다.

대신 지니고 있는 것은, 선을 지키면서 상대의 속을 박박 긁는 언변.

“한 가지 물어보겠네. 그 증기기관이라는 것 말일세. 용도가 정확히 무엇인가?”

“힘이 필요한 데는 모두 쓸 수 있는 기관이지요. 그러니까 요긴한 물건이고요. 뭐, 만들 수만 있다면요.”

“그렇다면 수차를 돌리는 데 쓸 수 있는가?”

“그렇지요? 반대로 수차를 돌려서 물 위의 배를 움직일 수도 있을 테고요.”

“흐흐, 잘 되었군. 그렇다면 조금 얘기가 통하겠어.”

저를 믿으라 하고서는, 테오도로스가 머물고 있다는 정착촌 쪽으로 향하는 플레톤이었다.

막 현장 실사를 마치고 지금껏 저의 구상을 충실히 따라준 프랑스인 일꾼들에게 설계도를 건네주던 테오도로스가 불청객을 맞이한 곳은, 옥수수 강에서 살짝 상류로 올라가면 나오는 뷔르템베르크 사람들 – 아직은 선발대 수십 명이 인구의 전부였다 - 의 정착촌이었다.

“아니, 여긴 웬일이십니까.”

“웬일이기는. 자네가 우애와 그 주변에서 실로 공동체의 기둥과 같은 존재임을 누가 모르겠는가? 헌법 얘기를 함께 주고받는 상대로 자네만한 이도 없지.”

그러나 평생 기계와 건축에만 매달려온 사람에게, 신대륙 연합을 구성하는 여러 민족 공동체의 자치권과 연합 전체의 권한 중 당연히 후자가 우위에 서야 한다는 둥, 보헤미아인들의 착오는 이미 플라톤이 지적한 민주정의 치명적 결함에서 그 선례를 찾을 수 있다는 둥, 가뜩이나 귀에 안 들어올 소리를 장광설로 늘어놓으니, 테오도로스는 금방 지쳐버렸다.

“... 하여, 당연히 우리는 모든 권한을 지도부에게 넘기되, 정부 수반이 그 권한을 행사함에 있어 적절한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지는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본다네. 그게 내 초안이고, 반면 훨씬 형편없는 보헤미아인들의 주장을 들여다 볼작시면...”

그러다가 뜬금없이,

“그나저나 요새 시그리드 전하가 우애에서 헛수고를 하고 계신다는데, 자네와도 관련이 있다지?”

하였으니, 이미 눈이 반쯤 풀어져 있던 테오도로스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예? 뭐, 그런 일이 있긴 했습니다만...”

“걱정 말게. 내 그분께 조언하여, 쓸데없는 기대는 하지 말고 그냥 좋은희망으로 돌아가시라 잘 말씀드렸다네.”

“쓸데없는 기대라... 틀린 말은 아니지요.”

“암. 암. 우리 사정엔 엄두도 못 내는 일이지.”

똑같은 말도 하는 방법에 따라,자연스레 넘길 수도, 없던 부스럼을 만들어낼 수도 있는 법. 테오도로스가 살짝 거슬려하는 것을 놓치지 않는 플레톤이었다.

“증기의 힘으로 수차를 돌려, 배가 강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게 만든다? 설령 가능하다 할지라도, 지금의 우리로선 어림도 없는 일 아닌가? 당장 촌구석 물레방아 만들어주기도 바쁜데 말이야.”

“말이 조금 심하시군요. 그 증기기관이라는 것은 아예 이치에 닿지 않는 일입니다. 우리 사정이 허락하지 않아 못 만드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아, 그런 것이었나? 미안허이. 우리 로마인들 중에 이런 기계의 이치에 밝은 사람은 몇 없지 않은가. 다들 나처럼 생각하고 있을 텐데, 만약 기회가 된다면 그런 오해를 고쳐주도록 하겠네.”

“그게 참말입니까?”

“입장 바꿔 생각해보게. 다들 시그리드 전하가 총명하다는 건 알고 있지 않나? 그런 분께서, 증기의 힘으로 수차를 움직일 방도를 찾겠노라며 끙끙대고 계신다네. 그러니 다들 자네 재주가 부족하다고 은연중에 생각하게 되겠지.”

신대륙으로 건너오기 전, 동녘정착지에서 겨울 한 철을 보낸 바 있던 – 대부분의 로마 사람들에겐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겨울이었다 – 콘스탄티노폴리스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시그리드가 하늘에서 벼락을 불러냈다는 얘기는 귀에 딱지가 앉히도록 들었다.

애초에 범상한 사람이라면 몇 년 동안 유럽을 뒤흔들며, 신성로마제국과 교회를 저의 뜻대로 쥐락펴락하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니, 잠깐, 수차라고요? 그런 말은 못 들어보았습니다만.”

“그런가? 우애 시에서는 당연히 시그리드 전하께서 자네의 조언을 받아서 그 증기 수차인지 기관인지 하는 걸 만들고 계신다고 여기고들 있는데.”

수차 하면 테오도로스였다. 상식적으로 시그리드가 수차가 들어간 뭔가를 만든다고 하면, 어떻게든 테오도로스의 도움을 받았다고 여기기 마련.

그 결과물이 형편없게 나오리라는 것은 테오도로스 생각에는 기정사실이었다.

“하여튼, 이제라도 오해를 풀었으니 다행일세. 나는 돌아가는 대로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수차를 만드는 건 언감생심이고 설령 테오도로스가 일백 명쯤 있어도 해낼 수 없는 일이니 기대들 품지 말라 전하겠네.”

몰락해가는 도시에서 건축가 겸 공학자 노릇을 한다는 것은, 어지간한 뚝심으로는 불가능한 일.

그런 사람 앞에서 ‘어차피 안 되는 일이었다’ 운운하면서, 은근슬쩍 사람들이 테오로도스 저의 탓도 할 것임을 암시하니, 결국 테오도로스의 자존심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수차도 제대로 못 만드는 허접한 장인’ 같은 소리가 훗날 저의 이름에 붙는다고 상상하니, 절로 피가 끓어오르는 일.

“빌어먹을. 하필 골라도 왜 수차를 골라서.”

“응? 뭐라 했는가?”

“아, 아닙니다. 재채기가 나오려다 말았습니다.”

재채기 대신 한숨을 한 번 푹 내쉰 테오도로스가 플레톤에게 말했다.

“우애로 돌아가시는 대로 시그리드 전하께 말씀 한 토막만 전해주십시오. 그 증기기관이라는 것, 실패하더라도 체면은 살릴 수 있게 좀 제대로 만들어보자고 말입니다.”

“증기기관을 무조건 만들라니 한심하군. 우리 콘스탄티노폴리스 사람들이 들으면 정신 나갔다 할 것 아냐.”

헬라스 말로 상스럽게 궁시렁대는 소리가 시그리드가 머무는 황자네 집 – 나름 그 격을 맞추려 애쓴 덕에 손님 머무는 방이 마련되어 있었다 – 밖에서 들려왔다.

“아무튼 망신 안 당하려면 하는 수밖에, 빌어먹을. 이 나이 먹고 무슨 짓인지.”

그 말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테오도로스 목소리임은 알아챈 시그리드였다. 플레톤의 우스꽝스러울만큼 사소한 계책이 맞아떨어졌다는 데 감사하며, 지난 며칠간 머리 굴려 만들어낸 증기기관 설계도를 꺼내 책상에 펼쳤다.

“흠흠, 전하, 계십니까?”

예법이 사라진 것은 비단 콘스탄티노스 황자 한 사람만의 얘기가 아니었다. 여인 홀로 있는 방, 그것도 명색이 이 땅의 데스포이나라 불리는 사람의 방에 들어갈 때 갖춰야 할 예법 따위는 어느새 신경 쓰지 않게 된 테오도로스였다.

(이는 비단 테오도로스 한 사람뿐 아니라 신대륙으로 건너온 이들 대부분에게서 조금씩 드러나고 있는 경향이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도 딱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이 증기기관이라는 것을 제 최선을 다해 만들어보기로 작정했습니다. 단, 그렇게 해서 실패한다면 분명하게 밝혀주시길 바랍니다. 제 기술과 지식이 부족한 탓이 아니라,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물론이지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자, 그러면 어디 한 번 그 설계도라는 것을 보여주시지요. 듣자하니 그간 홀로 고심을 많이 하셨다고 했는데...”

그리고 책상 위에 펼쳐진 설계도를 보자마자 테오도로스의 미간이 바로 접혔다.

“이게 뭡니까?”

예법을 잊다 못해, 숫제 저의 미욱한 도제 꾸짖듯 나오는 험한 소리.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데스포이나고 뭣이고,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만큼 어설픈 설계도였으니까.

“아, 그게... 대기압이라고, 우리 주변의 공기가 우리를 누르는 힘이 있거든요. 증기가 피스톤을 들어올렸다가, 식으면서 도로 피스톤이 내려오고. 대기압을 이용해서 하는 건데...”

“그 이치는 헤론의 『기체역학Pneumatica』에도 이미 나와 있습니다! 제가 그걸 모를 줄 아십니까? 한 번 증기가 솟아오른 다음에는 어떻게 식히실 겁니까?”

“네? 그건 생각을 안 해봤는데요... ”

“어휴, 됐습니다. 그건 나중에 하고... 여기 이건 수차라고 그려놓으신 것이지요? 이건 안 됩니다. 기술이고 뭣이고를 떠나서, 진짜로 이건 말이 안 되는 구동 방식이라고요.

차라리 이쪽 축을 이 반대쪽과 연결해서, 이렇게 해야지요. 안 그러면 수차가 돌아가긴커녕 그대로 빠져버릴 겁니다.”

처음에는 갑자기 사람이 바뀐 듯한 테오도로스의 기백에 놀라 어버버 하던 시그리드도, 조금 익숙해지자 적극적으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이곳 실린더의 증기를 밖으로 빼지 않고 냉각시킬 방법을 찾으면 되겠네요?”

“이건 정말로 제 이름을 걸고 단언하는 것인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실린더를 밀폐시켜야 할 텐데, 밀폐라는 게 말이 쉽지, 실제로는 어려운 일이니까요. 괜히 자연에 진공이 없는 게 아닙니다. 계속 증기는 밖으로 빠져나갈 테고, 결국에는 실린더 안쪽의 물이 동날 겁니다.”

“그럼 실린더 안쪽을 냉각시킬 겸, 피스톤이 위로 올라갈 때 밸브가 열리도록 만들면 되지 않을까요?”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어, 잠깐? 흠... 생각해볼 만한 발상이로군요. 그렇다면 여기서 이걸...”

그렇게 꼬박 이틀을 지새고 나니, 마침내 뭔가 번듯한 결과물이 나왔다.

오지 않을 미래의 제임스 와트가 구상한 증기기관보다는 한참 부족한, 고작해야 뉴커먼Newcomen 대기압 기관에 가까운 물건. 그러나 그것만 해도 삼백 년을 건너뛴 성과였다.

와트의 증기기관에 대해 대략적인 원리, 그리고 그것이 성공하여 산업혁명으로 이어졌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던 시그리드가, 반대로 필요한 경험과 지식은 가지고 있지만 그뿐이었던 테오도로스와 논의한 끝에 얻어낸 성과.

“자, 이만하면 물이 없어도 돌아가는 수차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냥 물의 힘을 빌어 쓰는 수차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고 비용도 많이 들겠지만요.”

이제 와서, 사실 증기기관을 만드는 게 목적이었고 수차 얘기는 나중에 플레톤이 제멋대로 가져다 붙인 것임을 고백할 수는 없던 시그리드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실험은 언제 하실 겁니까?”

중간에 잠시 격정에 휘몰리긴 했지만, 처음 자신이 발 벗고 나선 목적, 즉 이 실험이 깔끔하게, 즉 자신의 명성과 자존심에 흠집 나지 않는 방식으로 실패하도록 한다는 것을 잊지 않은 테오도로스가 물었다.

“이걸 배에 실어서 작동시켜봐야겠지요? 그러려면 일단 바퀴 달린 배부터 만들어야 할 테고요.”

“배야 주변에 많이 있으니, 살짝 개조만 하면 그만입니다. 오히려 기관의 핵심 부분을 만들어 옮겨오는 게 일이지요.”

그리하여 이 사상 최초의 증기선 실험이 이루어질 곳은, 자연스럽게 야네크네 철공소 앞을 흐르는 강으로 정해졌다.

야네크 노인이야, 그저 의뢰가 들어왔으니 그에 따라 만들 뿐이었다.

근처의 피혁 장인들도, 처음 받아보는 의뢰, 최대한 피스톤과 그 주변 부품들을 밀폐시킬 수 있는 패킹을 만들어달라는 의뢰에 의아해하면서도 그저 따를 뿐이었다.

비용이야, 어느새 비공식적으로 신대륙 연합의 재무부 비슷한 것이 된 그린란드 회사 앞으로 달아두면 그만.

“파울 주교님한테 혼나는 것 아닙니까?”

시그리드와 테오도로스 따라 야네크 철공소로 돌아온 콜그림이, 영수증을 들여다보곤 물었다.

“어... 그건 나중에 생각하는 게 어떨까요?”

딱히 비용 문제는 생각하지 않았던 시그리드가 화제를 돌렸다.

“지금은 눈앞의 일에 집중하기로 해요.”

철공소에 수력을 제공하는 강. 그 강물 위에 두둥실 떠 있는 작은 배 위에는 낯선 화물, 아니, 장비가 장착되어 있었다.

“가동합니다!”

진작에 불은 붙었고, 이제 물만 끓으면 되었다.

테오도로스를 따라온 조수들이, 배 위에 가설한 외륜外輪의 축을 증기기관에 연결했다.

마침내, 증기기관의 피스톤이 위로 팍 솟으면서 김 빠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기술도, 경험도 부족한 현재로서는 제대로 밀폐용기를 만들 수 없었기에 밖으로 김이 새는 것이었지만, 강가에서 지켜보는 시그리드에게는 마치 증기기관의 탄생을 알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리고, 조금씩 움직이며 강물을 밀어내는 외륜.

배의 양옆에서 외륜이 회전을 시작하자, 배 위의 조수가 눈치껏 닻줄을 풀었다.

“아니, 저게 왜 앞으로 나아간단 말인가!”

테오도로스가 한탄하며 발을 굴렀다.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배가 마치 연어라도 된 것마냥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기나긴 인류 역사상, 발명가가 저의 발명품이 작동한다는 사실에 한탄한 것은 아마 이번이 처음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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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 로마의 공학 지식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동로마의 공학 전통은, 놀랍게도 멸망 직전까지 일정 부분 유지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물론 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약탈 등으로, ‘그리스의 불’ 같은 몇몇 유명한 기술은 실전되었지만, 재정의 한계 속에서도 꾸준히 보수·보강되었던 콘스탄티노플의 방벽이나, 발칸 반도를 상실하기 직전에 건축되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교량들은 당대 동로마의 기술적 수준이 결코 퇴보하지 않았음을 보여주지요.

동로마에서 잘 계승된 공학 전통은 비단 웅장한 건축물이나 견고한 아치를 만드는 데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수차 기술이 그 대표적인 사례지요. 동로마의 명장 벨리사리우스가 고트족에게 포위된 로마 시에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테베레 강가에 물레방아 제분소를 만든 사례에서 볼 수 있듯, 로마의 수차를 만들고 응용하는 기술은 동로마에 그대로 전승되었고, 그 뒤로도 한동안 발칸과 아나톨리아의 농업생산량을 뒷받침하였습니다.

2. 고대 그리스의 증기기관이라 알려진 헤론의 ‘증기기관’인 아이올리스의 공Aeolipile은 증기의 힘으로 공을 회전시키는 발명품으로, 실질적인 목적이 있다기보다는 개념 실증을 위한 도구, 혹은 단순한 유흥거리 정도에 불과했다고 전해집니다.

3. 레나피족을 포함해 옥수수 농경에 종사하던 북미 북동부 원주민들은, 주로 말린 옥수수를 빻아서 가루로 만든 다음, 이것을 물에 풀어 죽을 만드는 형태로 옥수수를 주식으로 섭취했습니다. 이들이 물레방아에 혹하는 것도 이 때문이지요.

4. 알렉산드리아의 헤론이 남긴 『공기역학』은 원 역사에서는 르네상스 후기에 번역되어, 16세기 이후에 증기기관에 대한 발상이 유럽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는 데 한 가지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공기역학』은 인위적으로 진공 상태를 만들어낼 수 있을 가능성을 명시적으로 언급하는 등, 르네상스 전까지 유럽인들이 가지고 있던 자연철학 관념에 도전하는 요소 여럿을 포함하고 있었지요.

5. 증기의 힘으로 배를 추진한다는 발상은 18세기 초반부터 등장했습니다. 산업혁명 초기였기에, 와트의 증기기관 대신 한 세대 전의 뉴커먼 증기기관을 이용하는 형태였지요. 특허와 구상만 난무하던 중 마침내 1783년 프랑스에서 처음 만들어진 증기선은, 작중에서와 비슷하게 외륜을 이용하여 추진하는 방식이었고, 뉴커먼 증기기관을 이용했기에 잦은 고장과 비효율에 시달렸습니다.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프랑스의 증기선 발달은 한참 늦어졌지만, 1785년 미국에서 프랑스와는 독립적으로 발명된 증기선 –역시 뉴커먼 엔진을 쓰는 – 은 그럭저럭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787년 델라웨어 강에서 상업적 운행을 시작한 증기선은, 시속 11~13km 속도로 강을 오갈 수 있었지요. 그러나 이미 이 시점의 뉴잉글랜드 지방은 충분히 육상 운송이 발달해 있었고, 증기선은 일반적인 배에 비하면 비용이 많이 들고, 육상 운송에 비하면 느리고 번거롭다는 이중고에 시달렸습니다. 결국 훨씬 효율적인 와트의 증기기관이 널리 쓰이기 전까지 증기선 발달은 지연되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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