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바이킹-75화 (75/116)

밤의 열기 (5)

17. 밤의 열기 Night Fever (5)

올해도 어김없이 이민 행렬은 이어지고 있었다. 보헤미아인 이민 대기자도 아직 이삼천 명 남짓 남아 있었고, 더구나 ‘하얀 마녀’의 꼬드김에 넘어간 전직 구혼자들이 신대륙 지분을 돈 한 푼 안 내고 날름 얻을 심산으로 영지의 군입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한 덕이었다.

후스파 몫으로 떨어진 보헤미아 교회의 재산 절반. 그 예산을 바닥까지 긁어가며 건조한 노블선 산 니콜라스San Nikolas가 신대륙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이민자들을 새 보금자리에 내려놓기 위함이었다.

선창을 채우고 있는 승객 절반은 보헤미아 사람들이었지만, 나머지 절반은 높으신 분들의 꼬드김과 압박을 못 이겨 졸지에 바다를 건너오게 된 독일의 메클렌부르크 지방 농민들.

바다에 그토록 가까이 살았건만 이런 배를 타고 바다 너머 땅으로 오게 될 줄은 몰랐던 농민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음에도 하나같이 갑판에 올라와 신대륙의 정경을 바라보며 웃고 떠들었다.

반면 바다와 도통 연이 없던 보헤미아 사람들은 그런 독일인들을 촌스럽다 여겨 선실에 그대로 남아 기도를 드릴 뿐이었다. 결코 뱃멀미가 심해서 그런 건 아니라고 보헤미아인들은 주장했다.

아무튼 그렇게 떠들썩하게 해안선 따라 남하하던 도중, 독일 농민들 눈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어? 저 배, 뭔가 이상한데?”

조그만 강 어귀에 멈춰 있는 작은 배 한 척. 그 위에서 허연 김이 모락모락 솟아나고 있었는데, 양옆에 물레방아 같은 것이 달려 있을 뿐 돛도 없고 노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마치 농민들이 저를 봐주길 기다렸다는 양, 굉음이 나더니 갑자기 물레방아 둘이 살아 움직이는 것 아닌가.

“악마다! 악마의 배다!”

해괴망측한 배가 슬금슬금 다가오는 것이, 마치 저들을 노리는 듯했다.

저지 독일어를 알아듣는 바스크 선원들이 좀 조용히 하라며 욕지거리 던지기도 전에, 몇몇 농민들은 아예 무릎 꿇고 성호 그으며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정말로 기도를 올리니 저쪽 배가 뱃머리를 돌려,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었다.

“와! 우리가 악마를 물리쳤다!”

저들의 신앙심으로 악마의 주술을 막았다며 독일 농민들은 기뻐 날뛰고, 촌놈들이 이상한 짓 한다고 궁시렁대던 바스크인들은 그냥 신경을 끄기로 마음을 먹었다.

조금 부르릉대며 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기관 고장으로 강 하구까지 떠밀려온 세계 최초의 증기선이, 사투 끝에 겨우 뱃머리를 돌려 야네크네 철공소로 돌아가는 길이었음을 그 누가 알랴.

미래의 지식과 꺾이지 않는 마음의 힘으로 시대와 기술의 한계를 뛰어넘은 증기선. 그러나 그 증기선이 휘황찬란한 성공을 거두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게 왜 되냐며 공학자 테오도로스가 한탄과 불평 늘어놓은 지 한 오 분쯤 지날 무렵. 증기선의 기관이 고장났다. 증기가 예상보다 많이 누출되는 바람에, 암만 석탄을 태워봤자 충분한 힘이 나오지 않은 것이다.

힘차게 강을 거슬러 올라갔던 증기선이 강물에 떠밀려 원위치로 돌아오고, 겨우 복구한 다음에는 한쪽 수차에 연결된 축이 빠지는 바람에 뱃머리가 반대쪽, 즉 하류 방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 이거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배 위에 타고 있던 테오도로스의 조수들 – 프랑스인과 로마인들이 섞여 있었다 – 이 다급하게 외쳤다.

철공소 사람들에게 뱃일을 물어본들 무슨 답을 얻을 수 있을까. 그나마 항해 경험이 풍부한 축에 드는 시그리드가 기지를 발휘했다.

“하류로 계속 가세요! 지금쯤이면 밀물 때니까, 강어귀는 물살이 느릴 거에요! 거기서 멈춰서 기관을 고친 다음 돌아오면 되지요!”

다행히 증기선은 그대로 바다로 흘러가는 대신 무사히 철공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한 시간 쯤 뒤에 돌아온 조수들의 증언에 따르면, 딱 하구에 도착할 무렵 또 한 번 기관이 고장나서, 사투 끝에 겨우 복구하곤 뱃머리를 돌려 겨우 복귀할 수 있었다던가.

“그래도 이만하면 증기기관의 잠재력을 확인한 것 아니겠습니까? 지난 보름이 아깝지 않다 하겠습니다.”

처음 증기기관 얘기를 꺼냈을 때 시그리드를 물정 모르는 애송이 취급하며 독설 퍼붓던 것에 비하면 지극히 호의적인 평가였다.

물론 방점은 ‘잠재력’에 찍혀 있었다. 어쨌든 작동하긴 하지만 딱 그뿐이라는 소리.

“조금 더 본격적으로 저 기관들을 양산하고, 그러면서 차차 개량해나가다 보면 실용성도 올라가지 않을까요?”

자신의 어설픈 지식과 테오도로스의 뛰어나지만 시대의 구애를 받는 기술로 구현한, 원시적인 뉴커먼식 증기기관이 진짜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시그리드였다. 와트의 증기기관도 뉴커먼 기관이 개량되고 개량된 끝에 기존의 한계를 초월하며 나타난 결과물이었으니, 딱히 착각이라고만 할 일은 아니었지만.

“저렇게 무거운 데다가 툭하면 고장나는 기관으로는 고작해야 강을 오르내릴 때 쓰는 게 전부입니다. 바다에 나갔다가 파도라도 조금 높게 일면 바로 배가 뒤집히든 두 동강이 나든 하겠지요. 굳이 조선공이 아니라도 이쪽 일을 해본 사람들은 다들 같은 결론을 내릴 겁니다¹.”

겨우 돌아와 닻줄을 단단히 붙들어 맨 배에 올라 기관을 점검하고 온 야네크 노인도 한줄 평을 덧붙였다.

“기관도 기관이지만, 쇠도 문제입니다. 이대로 한두 번만 더 가동했다간 이 실린더인지 뭔지 하는 것부터가 터질지도 모르겠는걸요. 선철로는 어림도 없겠습니다.”

“그럼 강철을 써야 할까요?”

“강철 말씀이십니까? 이 철공소의 설비로는 어렵고, 사람과 자금이 더 필요할 텐데요...”

“하지만 그랬다가는 정말로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질 겁니다.”

이번 실험에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었는지 얼추 알고 있던 테오도로스가 끼어들었다.

무릇 공학자란 시간과 예산을 조금만 더 달라고 하는 데 익숙한 이들이었으니, 그런 테오도로스가 예산 걱정을 할 정도라면 얼추 지출의 규모를 알 만하였다.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면 되겠지요. 더구나 이 증기기관, 조금만 응용하면 다른 쪽으로도 쓸 수 있지 않겠어요? 베틀이랑 연결해서 증기의 힘으로 모직물을 만들 수도 있을 테고, 어쩌면 나중에는 수레도 철길 위에 올려서...”

허나 두 사람에 맞서 증기기관을 변호하는 시그리드조차, 말하는 도중 자신의 이야기 속 모순을 자각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시그리드가 갑자기 조용해지니, 머쓱해진 야네크는 기관을 다시 점검하겠다며 조용히 하직을 고했다.

“전하, 고생 많으셨습니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스럽게 여기시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만, 이것만 해도 실로 대단한 성과 아니겠습니까? 지금은 부족함이 많지만, 잘 기록하여 후대에 남기면 분명 쓸모가 있을 겁니다.”

테오도로스도 그리 시그리드를 다독이곤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렇게 철공소 강둑에는 시무룩한 시그리드와 구경하러 따라온 콘스탄티노스 황자, 별 생각 없는 콜그림, 그렇게 셋만 남았다.

“시그리드, 왜 말을 하다 말았어요? 처음이니까 실수가 많은 거지, 계속 하다보면 나아질 거잖아요.”

콘스탄티노스 황자가 시무룩해진 시그리드를 딴에는 위로한다고 말을 건넸다.

“아, 그게...”

차라리 완전히 실험이 실패했다면, 설계가 부족했다고 단정하곤 다음 도전을 준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험이 그럭저럭 성공하고, 대신 예산 문제라는 훨씬 현실적이면서 도저히 피할 수도 없는 장벽이 나타나버렸다.

애초에 원주민들이 숲이라는 자원에 지분을 지닌 협업자에서 단순히 임금을 받고 석탄을 캐는 노동자로 전락하면서 발생할 갈등을 예방코자 떠올린 게 이 증기기관이었다.

석탄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늘리고, 그만큼 석탄 소비량이 늘어나게 되면, 채광 분야에서 규모의 경제가 이루어져 인부들에게 상대적으로 후한 대우를 해줄 여력이 생겨날 테니까.

어디 그뿐일까? 증기기관을 폭넓게 도입한다면 터무니없이 인구가 적은 신대륙 연합에서, 부족한 노동력으로 훨씬 많은 생산력을 창출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규모의 경제라는, 아직 용어로 정립되진 않았지만 장인들 사이에서는 널리 통용되고 있는 이 개념은 시그리드가 만들어낸 원시적 증기기관의 실용성을 부정하는 논리로도 작용할 수 있었다.

“테오도로스 선생님 말씀마따나, 문제는 비용이랍니다.”

“비용이요? 하지만 기계를 쓰게 되면 그만큼 이익이 발생할 텐데...”

“그렇지만 그보다 손해가 크겠지요. 기관을 만드는 비용이며, 계속 벌어질 크고 작은 고장에 대처하는 비용이며...”

아무리 이 땅에 공장을 세우고 증기기관을 도입한다 해도, 공산품을 구매할 시장 자체가 크지 않으니, 결국 방적이든, 제철이든, 공장을 세워본들 한두 곳이 최대였다. 증기선까지 다 합쳐본들 수십 기가 전부일 테다.

그러므로 증기기관을 꾸준히, 많이 만들어 비용을 낮추고 기술을 발전시킨다는 원 역사 산업혁명의 경로는 지금의 신대륙 연합에겐 닫혀 있었다.

“어쨌든 성공은 성공이니까요, 좋은희망으로 돌아가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해 봐야지요. 다른 건 몰라도, 강을 오르내리는 용도로는 충분히 이 증기선을 쓸 수 있을 테니까요.”

물론 그것만 해도 적잖은 초기 비용이 필요할 테지만, 지금의 신대륙 연합 상황을 고려했을 때 수운에 집중하는 게 일일이 도로를 놓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점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터였다.

당장 신대륙 연합의 생명줄과 다름없는 교역로는, 대서양을 횡단하는 항로 하나를 제외하면 모두 수운에 의지하고 있었다.

거센 물살 때문에 종종 오가는 데 고역을 겪곤 하는 교역의 강, 그만큼은 아니어도 간혹 급류로 고생할 때가 있는 옥수수 강, 그리고 장차 교역로로 개발해야 할 ‘대단한 강’ - 미시시피 강 – 까지, 지금의 문제만 어찌 해결할 수 있다면 증기선은 분명 요긴한 발명이자 수익성 넘치는 투자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었다.

“슬프지만, 돈이 땅을 판다고 나오는 건 아니니까요. 지금으로선 그 정도로 만족해야겠지요. 광부로 전직하게 된 왐파노악 분들한테는 양해를 구하고요.”

아직까지는 노천광이라 하기도 민망한, 땅 파면 나오는 석탄만으로도 석탄 수요가 충족되는 상황. 어둡고 답답한 갱도에서 유입되는 빗물과 지하수에 고통받던 산업혁명 시기 광부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왐파노악 인부들이 일말의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 한들, 그 불안이 당장 갈등으로 비화할 일은 적어도 몇 년 안에는 없을 터.

콘스탄티노스 황자가 지금껏 증기기관에만 주목하느라 시그리드가 놓친 점 하나를 지적해준 것은 그때였다.

“저기, 그런데 돈이 땅 파면 나오지 않나요?”

“네?”

“저 남쪽 땅에 그리도 황금이 많다면서요.”

“엇. 잠깐만요. 그게 그렇게 되나?”

잠깐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본 시그리드는, 목청껏 테오도로스와 야네크 노인을 불렀다.

시제품 증기기관의 형편없는 성능, 툭하면 증기가 새 내가고 기관 전체가 고장나는 경이로운 신뢰성, 그리고 턱없이 비싼 초기 투자 비용까지.

이 모든 문제가 결국 초기 비용 문제로 귀결된다는 것은, 반대로 초반에 엄청난 자본을 투자할 수 있을 경우에는 이 모든 문제를 우회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될 것 같기도 했다.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쉬운 눈치의 황자, 그리고 증기기관 대신 인력으로 수차를 돌리는 형태의 배를 구상하느라 바쁜 테오도로스를 먼저 떠나보낸 시그리드는, 따뜻한환영에 남아 북쪽으로 돌아갈 배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틀라콰나틀록 이단에 시달리던 투슈판 귀족들의 간곡한 청원은 (말로만) 통합된 교회에 강렬한 반향을 일으켰다. 딱히 그 땅에 황금이 많다는 사실 때문은 아니었다. 아무튼 그러했다.

스스로 무지와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기를 바라는 이교도들을 위해 바다를 건너온 선교사들은, 지금쯤 인신공양을 행하는 이들과 진심으로 세계의 파멸을 바라는 이들의 가슴 웅장해지는 대결을 보며 혼미해지는 정신을 겨우 부여잡고 있을 것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선교사들과 이런저런 교역품을 싣고 남쪽으로 향했던 배는, 이맘쯤이면 황금과 코코아 콩 – 몇몇 사람들에겐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 더 귀중한 식료품이 되어 있었다 – 을 싣고 돌아올 예정이었다.

그렇게 기다리던 어느날, 환영 시의 부두에서 리프와 여름 햇살을 즐기고 있던 시그리드는 배에서 엉뚱한 사람이 내리는 것을 보았다.

“왜 거기서 나오시는 건가요?”

“저는 배 타면 안 됩니까.”

“그 뜻이 아니잖아요. 엄연히 직책이 있으신 분께서...”

테노치티틀란의 시와코아틀(재상) 틀라카엘렐이 저의 도시는 내버려두고 엉뚱한 북쪽 땅, 우애의 도시에 와 있었던 것이다. 그사이 투슈판에서 공용어를 익혔는지, 네사왈코요틀만은 못해도 그럭저럭 뜻이 통하였다.

“이제는 전직 시와코아틀입니다. 도시의 명운이 교역에 달려 있는데, 시와코아틀의 직위에 있으면 지런저런 제약이 많더군요. 그리하여 틀라토아니께 청원하여 새 직책을 만들었지요.

웨칼피슈케Huaecalpixque² 틀라카엘렐이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아스테카의 대외교역을 총괄하는 직책이지요.”

물론 틀라카엘렐이 시와코아틀 직을 버린 까닭 중에는, 죽어도 시그리드 앞에선 밝히지 않을 이유도 하나 있었다.

시와코아틀이라는 직함은 그저 여신의 이름을 빌렸을 뿐, 실제로 역임하는 것은 다른 관직과 마찬가지로 남성 귀족들이었다.

허나 어쨌든 이름값이 있었으므로 종종 제의를 치를 때 시와코아틀은 여장을 해야 했다.

맨 처음 틀라콰나틀록 교리가 퍼질 때만 해도, 신도들은 자신들이 현실에 강림한 여신의 인도를 받았노라 주장하곤 했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완고한 사제들이나 불신자들을 상대로 떠들 때의 이야기였고, 실제로 시그리드 리프트라사가 현실에 강림한 여신이라고 진지하게 믿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그리드가 평범한 인간이라고 믿는 사람 또한 거의 없었다. 틀라콰나틀록 교리에 따르면 신들은 인간의 벗이자 불의한 세상에 함께 맞서는 전우, 후원자였으므로, 신이 인간에게 가호를 내려주는 것쯤은 충분히 가능하고도 남았다.

‘물론 그분은 우리 같은 사람이긴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신들의 가호를 받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일들을 이뤄낼 수 있었겠습니까?’

따라서 시그리드는 시와코아틀 여신은 아닐지라도 그 여신의 가호를 입은 게 틀림없었고, 이는 그 특이한 용모로도 입증되는 바였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이름뿐인 여장 대신, 졸지에 진짜 여장, 그것도 얼굴과 머리카락에 흰 분칠을 하고 가발까지 써야 할 판국이 된 틀라카엘렐.

때맞추어 테노치티틀란에 왔다가 그 모습을 본 네사왈코요틀은 그 뒤로 석 달을 연이어 틀라카엘렐을 놀렸는데, 이는 이미 시와코아틀 직책만으로는 격변하는 바깥 세상 정세에 대처하기 어렵다고 여기고 있던 틀라카엘렐이 결단을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아무튼 그래서, 좋은희망을 한 번 제 눈으로 볼 작정으로 찾아왔습니다. 마침 각하를 뵙고 논의해야 할 사안도 있었고요. 중간에 잠깐 들린 이곳에서 떡하니 각하를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요.”

“논의할 사안이라고요?”

“예. 지난번에 테노치티틀란을 떠나실 때 말씀하셨던, 흑요석 장인을 모아 이곳으로 보내는 건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지난해 도착한 무역선에 실려 있던 바다코끼리 상아도 큰 호응을 얻은 상품이라, 어떻게 더 구해볼 길을 찾아보려 했습니다.”

테노치티틀란-테츠코코-신대륙 연합의 삼각동맹이 내세우는 최고의 교역품은 철기였다.

그로 인해 그린란드 사람인 시그리드조차 큰 관심을 주지 못한 상품이 바로 바다코끼리 상아였다. 맨 처음 시그리드가 빈란드 개척을 주장하면서 내세운 계획의 골자가, 아프리카산 상아와 경쟁해야 하는 유럽 시장 대신 아즈텍 시장을 개척하자는 것이었음을 떠올려보면 격세지감이 드는 일이었다.

“그렇게 상아가 잘 팔리고 있나요?”

“그게, 살짝 죄송한 얘기지만 각하의 이름을 조금 팔았습니다.”

바다 너머에서 온 시와코아틀 여신의 사도 시그리드. 그 시그리드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흰색이었다. 머리도 흰색. 살갗도 흰색. 심지어 데리고 다니던 영물도 흰색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시그리드의 고향에서 온 상아도, 아나왁 땅 어디서도 나지 않는 희귀한 질감을 자랑하는 동시에 아름다운 백색을 띄고 있었다.

그러니 이 상아를 소장하게 되면, 보기에도 좋고 주변에 자신의 세를 과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떻게든 여신으로부터의 좋은 기운도 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것이 바로 아스테카의 기민한 상인들이 채택한 홍보 전략이요, 이 전략을 입안한 자는 바로 시그리드의 외모 탓에 고역을 치른 바 있던 틀라카엘렐이었다.

이 유행이 얼마나 오래 갈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현 시점에서는 바다 건너편 조선만큼이나 흰색을 좋아하는 게 아나왁 사람들일 것이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사실 다른 건입니다. 우리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누런 돌, 황금 때문에 찾아뵙고자 했습니다.”

투슈판에서 테노치티틀란을 오가는 거리만큼 테노치티틀란에서 남쪽으로 가면, 황금의 주 산지인 와샤칵(우하카Oaxaca) 땅이 나왔다.

“우리 땅에서도 황금의 값어치가 조금씩 오르고 있습니다. 특히 각하와 이방인들이 황금을 귀하게 여긴다는 소문이 퍼진 이후로는 더욱 그렇지요.

앞으로 짧으면 이삼 년, 길면 오륙 년 정도는, 어떻게든 철기와 상아를 손에 넣으려는 도시들이 더 많을 테니 지금처럼 황금을 모을 수 있겠지만, 그 다음부터는 와샤칵 땅에서 나오는 금에만 의존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그곳 사람들이라고 헐하게 황금을 넘겨주려 하진 않겠군요.”

“정확하십니다.”

마음 같아서야, 이미 흑요석 칼날 대신 쇠붙이 창날 번뜩이는 테노치티틀란의 군대로 정복해버리고 싶었지만, 틀라카엘렐의 명석한 두뇌는 그렇게 할 경우 군비 지출과 정복지 유지 비용이 훨씬 클 것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쪽의 지배자들에게 협업을 제안하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황금 채굴에 필요한 장비와 밑천을 제공하고, 대신 그곳에서 늘어난 생산량만큼 지분을 챙기는 것이지요.

그리고 더 있습니다.”

와샤칵의 계곡에서 조금만 더 남쪽으로 향하면 나오는 것은, 끝없이 펼쳐진 바다.

“그 바다를 넘으면 우리 아나왁 땅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황금이 풍부한 땅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와샤칵 주변을 탐문하면서 남쪽에서 바다를 건너오는 상인들에 대해서도 수소문해 보았습니다.

고작해야 엉성한 뗏목만이 오가는 정도라고 하더군요. 그쪽 바닷가에는 고기잡이배 머무는 포구가 전부였던 투슈판보다 약간 나은 정도의 항구들밖에 없습니다³.”

시그리드가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그 뗏목도 꽤 대단하다 여겼을 틀라카엘렐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두 눈으로 노블 선을 보고 몇날며칠에 걸쳐 그 배에 몸을 싣기도 했던 틀라카엘렐의 기준은 크게 높아져 있었다.

“그러니까 그곳에 항구를 세우고, 배를 땅 위로 끌고 올라갈 순 없는 노릇이니 조선소도 세우고... 그렇게 하자는 말씀이시군요?”

“역시 잘 아시는군요. 그런데... 혹시 제가 뭔가 잘못 말씀드린 게 있나요?”

시그리드의 표정이 썩 밝지 않은 것을 본 틀라카엘렐이 눈치를 보았다.

“아녜요. 나쁘지 않은 생각이에요.”

제의가 들어온 시점이 나빠서 그렇지. 라는 말은 쏙 빼놓는 시그리드였다.

하필 증기기관에 투자해달라고 임시의회 사람들을 설득하려 마음을 먹었을 때 이런 제안을 들고 올 것은 무어란 말인가.

“실은... 저도 좋은희망에 사람들을 모은 다음 제가 추진하고 있는 계획에 밑천을 좀 보태달라고 청할 생각이었거든요.”

신대륙 연합이 지금까지 올 수 있게 해준 자본. 맨 처음 시그리드가 코펜하겐 상인들에게 모았던 그린란드 회사 초기 투자금과 그 다음에 누적된 영업이익, 그리고 보헤미아 교회에서 받아낸 이주 지원금과 테소소목의 황금까지, 이미 어지간한 밑천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재무 상황에 그리 밝지 않은 콜그림조차 이번 증기선 실험에 들어간 비용을 알게 되자 시그리드를 걱정할 만큼.

아직껏 신대륙 연합에는 세금이랄 게 없고, 그 세금을 걷을 주체조차 불명확했으니, 모든 재정은 교역을 통해 충당해야 하는 상황.

“어, 죄송합니다.”

“아녜요. 어차피 다른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야만 했을 일이었으니까요.”

다음에 좋은희망에 임시의회 사람들이 모인다면, 그들은 처음으로 예산안 의결이라는 논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었다.

이 신대륙 땅의 정치 체제를 민주정으로 하겠노라 마음 먹은 시그리드는, 언젠가는 이런 일을 한 번쯤 겪어야 할 것이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 시점이 지금이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지만.

속으로 은근히, 어딘가에서 정말로 재정 풍족하고 인심 좋은 후원자가 나타나 모든 예산 문제를 해결해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품게 되는 시그리드였다.

태감 정화가 샴(다마스쿠스)에 당도하여, 오스만의 술탄 메흐메트의 소개로 베네치아 상인들을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 리 없었기에 품게 되는 생각이었다.

--- *** ---

1. 이전 화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뉴커먼식 증기기관을 이용한 증기선은 미국을 제외하고는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작중에 서술되었듯, 고장이 잦고 연비가 나쁠 뿐 아니라, 증기기관 자체의 무게로 인해 강을 벗어나는 순간 위태로워졌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상대적으로 육상 교통이 덜 발달하고 수운에 의존하는 경향이 컸던 미국은 이러한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웠습니다. 결국 1803년 미국인 엔지니어 풀턴은 와트의 증기기관을 활용해 훨씬 성능이 개선된 증기선을 만들어내었습니다. 미시시피 강과 오대호 수운에 크게 의존하던 당시 미국에서는 고작 강을 오르내릴 수 있는 정도의 외륜선이라 할지라도 지극히 유용하게 쓰일 수 있던 것이지요.

2. 원 역사의 틀라카엘렐은 네 명의 황제를 거치면서 계속 시와코아틀로 봉직했고, 따라서 그만큼 여러 차례에 걸쳐 여장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가 새로 만들어낸 관직 웨칼피슈케는, 원 역사에서는 아즈텍 제국이 광대한 영토를 정복한 뒤 각지에 배치한 지방 행정관의 명칭이었습니다.

3. 파나마 지협의 밀림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통행이 거의 불가능할 만큼 울창한 것으로 악명이 높습니다. 이에 따라 지금의 페루와 에콰도르 해안 지대에 해당하는 지역에서는, 기원전부터 멕시코 서부 해안을 오가는 해상무역이 발달했습니다. 남미에 자생하는 발사나무를 재료로 하는 이들의 뗏목은,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배를 타고 잉카로 향하던 때에도 열심히 남미와 중미를 오가고 있었지요.

이 발사나무 뗏목은 보기에는 영 엉성하게 생겼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견고하고 심지어 원양항해까지 가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고학자의 탈을 쓴 모험가로 유명한 토르 헤이에르달이, 이스터 섬의 원주민이 남미 원주민이라고 주장하며 (실제로는 폴리네시아인) 이 발사나무 뗏목으로 페루에서 이스터 섬까지 수천 km를 항해했던 적도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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