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바이킹-76화 (76/116)

음악을 멈출 수는 없다네 (1)

18. 음악을 멈출 수는 없다네 Can’t Stop the Music – 빌리지 피플 (1980)

천조天朝는 아직 천조가 아니며, 대명大明은 아직 그리 위대하지 않았다.

이는 영락제 주체가 소싯적부터 가져왔던 믿음이요, 그 충복 정화 역시 공유하게 된 신념이었다.

그리고 또한 정화는 믿었다. 명이 진정으로 위대해지기 위해서는, 그 옛날 몽골이 만들어낸 교역로. 머나먼 서쪽으로 뻗어나가 수없이 많은 오랑캐 족속을 아우르는 그 교역로만이 답이라고.

이를 위해서는, 이미 곳곳에서 끊어지기 시작한 교역로 곳곳에 사라지기 시작한 몽골의 이름 대신 중화의 이름을 새로 새겨야만 했다.

오랑캐 족속들에게는 그들이 바라는 세상의 모든 부가 중원에 있노라고 속여야만 했으며, 반대로 중화의 사람들에게는 천하 곳곳에서 모여드는 상인들이 실제로는 오직 중화를 흠모하는 뜻으로 찾아온 사신들이라는 거짓을 내세워야 했다.

떳떳하지 못한 권모술수. 천자도, 그 잘난 사대부들도 하지 못하며 오로지 환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 정화는 저의 주군을 위해 이 사상 최대의 사기극을 기꺼이 펼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정화, 할릴 이븐 무함마드는 자신을 만나기 위해 찾아온 베네치아 사절, 프란체스코 포스카리Francesco Foscari를 시종일관 무례하고도 고압적인 태도로 대하였다.

“카타이Cathay¹의 위대한 황제 폐하께서 보내신 사신을 접견하게 되어 참으로 영광입니다.”

“실로 태조 고황제(주원장)께옵서 사이四夷를 일깨워 교화하신 덕은 하늘과 땅을 아우르는구나. 너희 원방遠邦조차 그 영광됨을 안다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그러므로 너희는 마땅히 본관의 명을 받들어야 할 것이다. 본관이 금상 폐하의 명을 받들어 대서양²을 건너고자 하니, 너희는 마땅히 배를 낼지어다.”

미리 언질을 받은 하산조차 생각보다 훨씬 고압적인 말투에 놀랐으니, 몇 번 주춤한 끝에 옮겨지는 그 언사를 들은 포스카리와 중재자로서 동석한 술탄 메흐메트의 반응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말이야 이렇게 하지만, 이곳 샴에 정착한 한인들을 통해 이미 알아야 할 것은 다 들어 기억하고 있었다³.

베네치아는 비록 상인들의 작은 도시지만, 그 부는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무사 첼레비의 개종을 빌미로 들고 일어난 아나톨리아 각지의 제후들을 메흐메트가 빠르게 제압하고 술탄을 자처할 수 있게 된 것도, 그리고 벌써 부유한 레반트 땅까지 영향력을 뻗치게 된 것도, 화약의 힘뿐만은 아니요 베네치아의 물밑 후원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동로마가 멸망 직전일 때는 애써 후원해주더니, 회생하는 기미가 보이자 금방 반대편을 돕고 나서는 베네치아. 가태嘉泰(1201~1205) 연간에는 황금 때문에 동로마를 한 번 멸망시키는, 왕망王莽도 고개 절레절레 저을 짓을 했다던가.

허나 그러한 점이 오히려 지금은 더욱 유용하였으니, 이익을 따라서 움직이는 상인의 나라라면 이익으로써 능히 다룰 수 있기 때문이었다.

“카타이가 실로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임은 저희 또한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카타이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요, 지중해는 가장 존귀한 우리 베네치아 공화국이 세력권으로 삼는 곳입니다.

그리고 저희의 바다를 거치지 않고서는 바다 너머의 신대륙으로 가실 수도 없을 터. 저희에게 경의를 표하실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존중은 해주시길 바랍니다.”

과연 정화의 의도대로, 도발에 솔직하게 반응하는 포스카리였다. 뜻하지 않게 신대륙의 존재를 다시 한 번 확인해준 것은 덤이었다.

“너희의 소위 지중해가 넓다 한들 경사京師(남경)와 막북漠北의 사이보다 넓겠느냐? 사해四海를 모두 아우르시는 금상 폐하의 명을 받든 본관 앞에서 너희가 고작 짠물 호수 하나의 주인이라 자부하고 있으니, 어찌 가련코도 가소롭지 않으랴?”

이만하면 되었다. 정화는 주변에 손짓하여, 그들이 머물고 있는 방의 창문을 활짝 열게 하였다.

“왼편의 궤짝을 열어라!”

정화가 벌떡 일어나 창가로 향하니, 포스카리와 메흐메트 또한 뒤따랐다.

그리하여 두 사람 모두, 정화가 이곳 다마스쿠스까지 가져온 화물 중 절반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천축 동쪽의 모든 나라는 우리 대명의 번병이다. 그 물산 변변찮은 땅에서 나오는 보잘것없는 향신료가 저 바다 건너에서는 같은 무게의 금보다 더 비싸게 팔린다고 들었다.”

다마스쿠스의 향료 시장을 방불케 할 만큼 턱없이 많은 육두구와 정향. 저것을 아덴에서 이곳까지 옮겨왔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정화의 보선寶船에 실린 부가 어마어마함을 증명하는 징표였다.

“너희가 금상 폐하의 명을 받들지 않는다면, 본관은 저것을 기꺼이 헐값에 풀 것이다. 미스르(이집트)를 드나드는 해적들을 고용하여, 노예를 싣고 오는 대신 향신료를 싣고 가도록 만들면 그만 아니겠느냐?”

상인은 이익에 따라 움직이지만, 천조 대명은 상인의 나라가 아니다.

자신의 논리로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를 마주하였을 때 불현듯 닥치는 두려움. 마침내 그것이 포스카리의 낯빛에 잠시 드러났다.

“너희 베네치아가 도성으로 삼는 섬. 그 작은 섬보다 넓은 궁궐⁴을 금상 폐하께서 연경燕京(북경)에 짓고 계심을 너희는 알고 있느냐? 그러면서도 다시 한 번, 저 막북에 오십만 대군으로 친정親征하시어, 한때 너희 프랑크 족속을 짓밟기도 한 달단(타타르)의 뿌리를 뽑고자 하고 계심을 알고 있느냐?

고작 미스르를 오가는 해적 따위를 움직여 너희 나라의 상인을 제압하는 것 따위는 나 화和가 아덴까지 몰고 온 보선寶船 위의 재물만으로도 해낼 수 있는 일이다⁵.”

정말로 대서양 너머에 불로불사의 비방이 있건 말건, 정화가 알 바는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중화의 이름을 걸고 온 사절이 황당할 만큼 많은 재산을 터무니없는 일에 흩뿌리며 위세를 보인다는 목표, 그것 하나뿐이었다. 지금껏 여러 차례에 걸쳐 수백 척 선단을 거느리고 재물을 흩뿌리고 다닌 것과 마찬가지로.

“허나 너희 소방小邦이 순순히 황명을 받든다면, 그때는 기꺼이 교화의 은덕을 베풀 것이니라.”

정화가 손짓하니, 미처 열리지 않은 오른편 궤짝들이 우르르 열렸다. 그리고 그곳에 넘쳐나는 것은, 바로 비단. 가장 뛰어난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장인들조차 환상의 영역으로 치부할, 파촉 땅에서 가져온 윤기 넘쳐나는 최고급 비단⁶.

“자, 어찌할 것이냐. 이교도와 기꺼이 손을 잡고 거리낌 없이 신의를 배신하는 너희의 알량한 자존심을 위하여 천조에 감히 거역할 것이냐? 아니면 잠시의 노여움을 참고 우리에게 배편을 내어줄 것이냐?”

가장 존엄한 베네치아 공화국의 존엄은, 능히 재물로 사고팔 수 있는 것이었다.

거절하기에 너무나 많은 재물의 소식을 접한 베네치아의 도제와 10인회 전원은, 가용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정화를 빈란디아로 보낼 방법을 물색하는 데 만장일치로 동의했으니, 이로써 자랑스러운 베네치아 해군의 절반이 환관 하나에게 고용되기에 이르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막 고향 바스크 땅으로 돌아오던 노블 선 몇 척도 항구에서 저들을 기다리는 이탈리아 사람들을 마주치게 되었다.

항해를 하다가 뭍에 막히게 되면, 반대편 바닷가에 일일이 조선소를 짓고 새 배를 만드는 대신 그냥 주변의 배들을 몽땅 사버리면 된다는, 실로 기상천외한 방법.

아나왁에서 모아들인 황금으로 태평양 연안 아카풀코Acapulco에 항구와 조선소를 지을지, 시그리드의 겨우 성공만 한 수준인 초기 증기기관에 연구개발 투자를 할지를 두고 갑론을박 벌어지던 좋은희망의 사람들이 듣는다면 경악할 해법이었다.

이 무렵 좋은희망에는 이런 농담이 돌았다.

“요즘 유행하는 우스갯소리랍니다. 들어보시렵니까?”

전직 불량배 한스가 산딸기 술을 홀짝이며 여관 주인 헤니히에게 말을 걸었다.

어지간한 신대륙 사람들이 모두 좋은희망에 모여드는 가을철. 거리에 나가 이런 질문을 던진다고 해 보자.

‘신대륙 연합에서 가장 중요한 민족은 어디 사람들입니까?’

그러면 가장 먼저 보헤미아인들이 반응할 것이다.

‘당연히 우리 보헤미아 사람들이지. 이 땅의 기반 절반은 우리가 일구었고, 머릿수로 보나, 장인들의 솜씨로 보나, 보헤미아 사람들 없이 연합이 유지될 수 있겠소?’

지나가던 독일인 또한 발걸음 멈추고 끼어들 것이다.

‘개척이 시작된 좋은희망은 누구 손으로 세워졌소? 바로 우리 독일 사람들이오. 그리고 보헤미아인들이 그리 잘났다고 하는데, 그래서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은 어느 집안 사람이오?’

야만인들끼리 또 뭔 헛소리 하고 있는가 궁금하여 고개 들이민 로마인은 콧대 뻣뻣하게 세우고 제멋에 겨운 답을 내놓을 것이다.

‘그래서 시그리드 리프트라사 전하를 데스포이나로 임명한 게 누구지요? 딱히 신성하지도, 로마답지도 않은 나라 사람들이던가요?’

그린란드 사람은 말 한 마디 휙 던지고 가던 길 마저 갈 것이다.

‘시그리드 아씨네 댁이 우리 옆집이었소. 그냥 그렇다고.’

프랑스인과 잉글랜드인들은 답하다 말고 저들끼리 싸움이 붙을 것이요, 가만 듣던 바스크 뱃사람은 씩 웃으면서 이렇게 논쟁을 종결지으리라.

‘어디, 돌아갈 때는 헤엄쳐서 가보시지 그러시오.’

얘기가 그 대목에 이르자 헤니히가 사뭇 진지하게 물었다.

“어디서 웃으면 되냐?”

“에이, 누가 독일 사람 아니랄까 봐.”

그러나 돌아오는 건 늘 그렇듯 뚱한 얼굴뿐. 주름이 지고 머리가 샌 것을 제하면 그 옛날 코펜하겐 시절과 다름이 없었다.

“사실 가장 웃긴 건, 이 우스갯소리를 누가 하냐에 따라 결말이 달라진다는 겁니다.”

당장 한스가 이 얘기 들은 건, 큼직한 고래 한 마리 잡아 돌아온 기푸즈코아 사람 프란치스코한테서였다. 그러니까 결말이 바스크 사람의 촌철살인으로 끝나는 것이지, 만약 콜그림에게 들었더라면 시그리드가 어디 사람이냐는 말로 얘기가 끝났을 것이었다.

“다들 배가 불렀지. 어디 프랑스나 잉글랜드 왕국쯤 되는 곳에서 파벌싸움을 한다면 모를까, 아직 인구 이만도 안 되는 우리가 뭔 민족 타령이냐.”

“배가 불렀으니까 그런 것 아닐까요?”

백송고리 용병단의 이름을 제멋대로 훔쳐간 ‘기사단’ 소속 탐험가들에게 못 배운 놈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이것저것 공부하던 한스가, 의외로 날카로운 지적을 던졌다.

“그런가?”

“우리가 이곳에 기반을 닦은 지도 벌써 오 년이 넘었잖아요.”

원래의 역사에 비하면, 훨씬 체계적으로, 그리고 제각각 재주를 지닌 사람들 중심으로 이루어진 신대륙 개척.

올해의 이민자들까지 다 합쳐도 아직 인구 이만을 넘지 않는 신대륙 연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써 따뜻한환영이나 푸른들판, 우애의 도시 등지에 심어진 유럽의 씨앗은 벌써 발아하고 있었다. 아직은 아주 조그만 새싹에 불과했지만, 이대로라면 한 세대 안으로 수풀 하나쯤은 족히 이루게 되리라.

철기의 부재로 아직껏 깊게 갈린 적 없던 주변의 농지는 지력이 넘쳐났으므로, 농장이란 농장마다 매년이 풍년이었다. 이제는 아이슬란드보다 신대륙 어장에서 더 많이 활동하게 된 바스크인들도, 하나같이 개척만 앞바다야말로 진정한 어부의 천국이라고 떠들면서 저들의 수확을 자랑스레 내보이곤 했다.

더구나 철기가 보급되면서 정착지 주변 원주민 부족들도 삶이 풍족해진 것을 체감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아직까지는 저들의 마을 근처에 버섯처럼 늘어나는 정착촌을 은연중 께름칙하게 여길지언정 대놓고 겁박하거나 공격하지는 않는 상황.

그러니 ‘배가 불렀다’ 하는 말이 거칠지언정 딱히 틀렸다 하기도 뭣하였다.

“더구나 내후년 선거도 있고요.”

플레톤이 열심히 저의 헌법과 (역시 자신이 기초를 잡아준) 후스의 헌법을 홍보하고 다닌 덕에, 이제 어지간한 사람들은 정확히 무엇을 두고 선거를 벌이게 될 것인지는 감을 잡게 되었다.

그러니 올해 가을 좋은희망에 모여든 임시의회 대표들을 두고서도 다들 지레짐작을 하곤 했다.

슬슬 구체적으로 어떻게 선거를 치를 것이며, 시그리드나 다른 누군가가(이론상 가능은 한 일이었다) 대통령/지도자/전제군주... etc.의 직위에 오를 때 그 권한은 어떻게 할 것이며, 누가 시그리드를 보좌하여 새 정부를 이끌어나갈지 등등을 논의할 것이라고.

“시그리드 아씨한테 상스런 말 찍찍 내뱉던 놈이 많이 컸구나.”

“칭찬을 할 것 같으면 좀 곱게 하세요. 상냥한 말 하면 어디 쥐라도 나나.”

그렇게 둘이 티격태격하느라, 손님 들어온 것을 제때 눈치채지 못했다.

“하하, 두 분이 사이가 참 좋으십니다그려.”

“중매쟁이 납셨구만.”

합스부르크 가문의 하수인으로 아직껏 신대륙에 남아 있던 아돌프였다. 영지의 고아 소녀들을 모아 신대륙으로 시집을 보내자는 발상이 그 주군 ‘무일푼’ 프리드리히의 승인을 받았던 것이다.

“그래, 오늘은 또 누구 중매를 서주러 왔습니까?”

“한스 씨, 제가 이래 봬도 인스부르크에서는 나름 이름 있는 사람입니다. 매번 그렇게 얕잡아보시면 곤란합니다.”

이 기회에 아예 주군의 눈에 제대로 들겠다는 일념으로, 아돌프는 좋은희망과 푸른들판을 돌아다니며 독일인 정착자들만 만나면 참한 각시한테 장가들 생각 없냐며 묻곤 했다.

심지어 일찍 결혼했으면 손녀딸 볼 나이인 헤니히한테까지 다가와 그런 소리를 하였으니 – 양조장 일 도와주는 과부 이름가르트와 중년의 로맨스를 나누는 사이임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 – 중매쟁이 악명 붙는 것도 억울한 일은 아니었다.

“더구나 오늘은 다른 일로 찾아뵙게 되었습죠. 마음 맞는 사람들과 뜻을 공유하는 그런 모임을 꾸리고 있습니다. 이름하여 ‘민족과 이웃들에게 신경 쓰는Nationally- and Socially concerned 독일 일꾼들의 모임’이지요. 줄여서 NSDAP라고도 부릅니다.”

오지 않을 미래에, 아돌프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오스트리아 사람이 똑같은 이름의 정당을 만든다는 것을 아는 시그리드가 들었다면 떨떠름해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을 작명 센스였다.

“아주 시간이 썩어넘치는 모양입니다그려.”

“단순한 소일거리가 아닙니다. 이 땅에 건너온 독일 사람들의 권익 증진을 위한 모임이지요.”

“다시 말해 댁들네 귀족 나리들이 보내온 무지렁이들을 하나로 묶어서 우리 시그리드 아씨를 쥐락펴락하겠다는 뜻이구만.”

“왜 그리 말씀을 험하게 하십니까. 시그리드 각하께서는 독일인 이민자들에게도 따뜻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지요. 저희는 그저 그분을 보필할 마음뿐이지요. 예컨대, 이번에 그 뭔 카엘렐인가 하는 야만인이 와서 제의한 안건이라던가...”

“틀라카엘렐? 그 사람 이름이 왜 여기서 나옵니까?”

“저 남쪽 땅에 금은 나오는데 금광 기술자가 없어서 생산량이 달린다지 않습니까? 그쪽에 있어서는 우리 오스트리아 사람들이 최고지요. 보헤미아 광부들이야, 광맥도 못 찾아서 은도 제대로 못 뽑아내는 퇴물들 아닙니까.”

정확히는 이미 룩셈부르크 가문의 통치 아래에서 어지간한 광맥은 다 캔 것이었고, 그 덕에 보헤미아가 신성로마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영지로 발돋움한 것이었으니 선후관계가 뒤바뀐 진술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댁네 주군 가문의 입김이 묻겠지.”

헤니히가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뭐,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독일 사람들은 저들 목소리가 커져서 좋고. 시그리드 각하께서는 저렴한 비용으로 광산업에 능통한 인력을 구할 수 있으니 좋고.”

“뭔 말인지는 알겠는데, 관심 없으니 꺼지쇼. 우리는 이미 시그리드 아씨네 모임 사람들이오.”

시그리드의 정당이 아니라 시그리드네 오목 클럽이었지만, 어쨌든 모임은 모임이었다.

“우리는 시그리드 아씨한테 반대하는 모임이 아니라, 보다 올바르게 보좌하려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언제든 생각 바뀌신다면 말씀 주십시오.”

그러고는 나름 예의바르게 인사하곤 자리 뜨는 아돌프였다. 작년에 음담패설로 주접을 떨다가 헤니히의 도끼날 번뜩이는 것을 보았기에, 제법 진심으로 예절이 배어났다.

“하여튼 기분 나쁜 놈팽이라니까요.”

“신경 꺼라. 저런 놈 떠드는 소리에 사람들이 따르면 얼마나 따르겠냐.”

보헤미아인들을 견제하자는 주장이 이미 한 번 세를 얻었던 것을 편리하게 망각하며 헤니히가 말했다.

시그리드가 처음 검은 책과 그 속 미래 지식의 존재를 밝힌 이래, 임시의회 사람들은 둘로 갈렸다.

가을철에 좋은희망 의회에 참석코자 찾아오는 것 외에는 딱히 의사 표명을 하지 않고, 딱히 미래 지식에 대해 더 깊게 파고들지도 않는 이들이 하나였다.

그저 인망이 조금 있어서 대표 소리를 듣게 된 사람들에게, 미래의 지식이니, 신대륙의 황금이니, 종교개혁이니 하는 소리는 너무나 감당하기 벅차고 두려웠던 것이다.

반면 시그리드의 미래 지식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고, 때때로 조언을 하거나 다른 이들의 요구사항을 전달하는 이들도 있었다.

후스나 플레톤이 대표적인 사례였는데, 그렇다고 보헤미아인들과 로마인들 입장만 들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첫 번째 집단에 속하던 다른 대표들을 설득하여, 최소한 각 민족당 하나씩은 사람을 보내기로 합의를 해두었다.

잉글랜드인 윌리엄 백스터, 프랑스인 자크 다르크 등이 그렇게 한 자리 차지하게 된 이들이었다.

헌데 사람 마음이란 게 기묘하여, 막상 그렇게 사람 몇몇이 뽑혀 높으신 분들과 보다 은밀히 대소사를 논의하는 것을 보게 되자, 저들이 손사래치며 사양했던 것은 까맣게 잊고 저들 ‘안쪽 사람들Inner circle’을 은근히 질투하게 되었다.

안쪽 사람들이 있으면 바깥쪽 사람Outer circle들도 있기 마련. 그렇게 시그리드도, 플레톤이나 후스도 딱히 의도치 않았건만 양원제 비슷한 것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시그리드가 좋은희망에 머물 때 쓰는 거처에 모인 안쪽 사람들은, 원외院外에서 발생한 논쟁 소식을 듣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아돌프라는 놈, 싹수가 노랗구만. 하기야, 그 근본 없는 제국 족속들이 다 그렇지.”

플레톤이 혀를 차자, 독일 대표 디폴트가 헛기침을 했다.

“올해 처음으로 참석한 독일 이주민 대표들은 넘어오기 전부터 이미 함께 움직이기로 작정을 했던 듯합니다. 더구나 푸른들판과 이곳 좋은희망에도 독일인들끼리 뭉치자는 주장에 솔깃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고요.”

임시의회의 의석은 사람 수에 따르는 것이 이미 합의된 원칙. 아직 그 이상의 규칙은 합의된 바 없었으므로, 독일 각지에서 온 이주민들도 올 가을 회합에 대표를 보내왔다.

독일 이주민들도 다들 제 뜻대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기초적인 교육은 받게끔 하자는 계획이 이루어진다면, 그저 고향의 영주들에게 선임된 게 고작일 대표들 중 상당수는 다음 회합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게 되겠지만.

“보헤미아 사람들은 아직까진 제게 뚜렷한 입장을 전하진 않았지만... 다들 소문을 들었는지 은근히 격앙된 듯하였습니다. 이대로라면 정쟁이 일어나겠지요.”

보헤미아 대표인 후스는 민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머릿수로는 여전히 가장 많은 보헤미아 대표들을 후스가 일일이 다룰 수도 없는 노릇. 다른 사람들도 딱히 후스를 탓하진 않았다.

“후... 이것 참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사이 잔주름 늘어난 – 노화보다는 야근이 주범이었다 - 파울 주교가 한숨을 쉬었다.

이대로라면, 후스 말마따나 독일인들은 틀라카엘렐의 제안을 지지하고, 보헤미아인들은 그에 반발하여 시그리드의 증기기관에 투자할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나설 터였다. 석탄이 발견된 것도 지금까지는 환영 주변뿐이었고, 증기기관이 공방에 쓰이게 된다면 이득을 보는 것도 (아직까지는) 보헤미아 사람들이었으니까.

“재원은 한정되어 있고, 결국 어느 한쪽을 취사선택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이제 어느 쪽을 택하든 다른 한쪽의 감정이 상하게 되었군요.”

불과 일이 년 전, 시그리드가 아나왁 땅의 황금을 들고 돌아왔기에 겨우 보류되었던 갈등이 다시 한 번 불거지고 있는 셈이었다.

“언젠가 일어날 일이긴 했잖소.”

하물며 그때에 비해 지금은, 독일인 이민자들이 들어온 탓에 보헤미아인 비중이 상대적으로 더 줄어든 상태.

아직까지는 딱히 삶의 영역이 직접 겹치거나 하지는 않았기에 갈등이 티격태격 언쟁 벌이는 것 이상으로 비화할 일은 없겠지만, 대개 감정의 골이라는 건 한 번 벌어지면 절로 봉합되기는커녕 계속 벌어지기 마련이었다.

“둘 다 하는 수밖에 없겠네요.”

고민 끝에 시그리드가 말했다.

“시그리드 각하, 그러기에는 재정이 부족합니다.”

공적인 자리였기에 시그리드에게 정중히 말하는 파울 주교였다.

신대륙 연합은 식량 문제에서는 자유로웠지만, 그 이상으로 뭔가를 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부족함이 많았다. 당장 교역품으로 쓰이는 철기조차, 두 곳의 철공소에서 뽑아내는 양이 아직 충분치 않아 부족분을 수입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증기기관 개발과 아나왁 쪽 투자를 병행하려면, 또 다른 쪽에서 지출을 긴축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또 볼멘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고.

“재정이 부족하면 세금을 걷어야지요.”

시그리드의 해법은 이러하였다.

“예?”

대표 없는 곳에서 세금을 걷다 보니 벌어진 게 미국 독립전쟁이라고 시그리드는 배워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대표가 있으니까, 이제는 세금을 걷어도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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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거란Khitan에서 유래한 카타이Cathay는 명말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라틴어 시나Sina가 통용되기 전까지 중국, 보다 정확히는 북중국 일대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쓰였습니다. 지금도 많은 슬라브 및 투르크계 언어에서는 중국을 이런 방식으로 지칭하고 있지요.

2.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에서 서양西洋은 인도양, 혹은 인도양 주변의 크고 작은 나라들을 지칭하는 표현이었습니다. 원 역사에서는 명말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여기에 착안해, 소서양小西洋으로 지칭된 인도양과 대비하여 처음으로 대서양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작중에서는 정화가 대략 한 세기 반 앞서 대서양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지만요.

3. ‘팍스 몽골리카’ 아래서 위구르인들이 한반도까지 이주한 것처럼, 해상 실크로드를 통해 적지 않은 한인들도 중동과 인도, 동남아시아를 오갔으며 몇몇은 현지인과 통혼하거나 아예 현지에 정착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전작의 타고스 박사 / 지아웃딘 알 시니 이야기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4. 베네치아 시의 면적이 협소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자금성보다는 훨씬 넓습니다. 정화의 발언은 아직 공사중인 자금성을 두고 허세를 부린 것에 불과하지요. 물론 이 무렵 천도를 위해 자금성뿐 아니라 북경 전체를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아예 허세라고만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1406년부터 14년간 준비된 북경 천도는 마침내 1421년 영락제가 비빈들과 함께 공식적으로 자금성에 입주(?)하면서 공식화됩니다.

한편 막북 친정은 실제로 이루어진 대원정으로, 정화의 항해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대규모로 벌어졌습니다. 영락제는 다섯 차례에 걸쳐 고비사막 이북(막북)으로 원정을 추진했는데, 이중 제3차 원정부터는 오이라트와 타타르 세력들이 먼저 도망치곤 하여 대규모 무력시위 정도에 그쳤습니다.

5. 정화의 대원정은 당대의 과장과 기록 말소, 그리고 후대의 과장 등이 복잡하게 얽힌 탓에 그 규모를 정확히 추산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중간중간 다른 곳으로 파견되기도 한 분함대까지 합치면 대략 200~300척, 인원으로는 2~3만 명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들은 단순히 항해만 한 것이 아니라, 명의 위세를 떨친다는 명목으로 해적 진압, 현지 정권교체 등 적극적으로 현지 정세에 개입하기도 했지요.

6. 6세기 중반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비단 국산화에 성공한 이래로 양잠과 비단 직조는 남유럽 전역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동로마의 비단 산업은 4차 십자군 당시 입은 피해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했지만, 이탈리아와 남프랑스의 산업은 중세 후기까지도 꾸준히 기술을 발전시키며 성업하고 있었지요.

그 흐름에 큰 지장을 준 것이 바로 14세기 중반의 위기였습니다. 인력 부족과 사치품 시장 붕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던 유럽 비단산업은, 한동안 품질 제고보다는 원가 절감을 지상목표로 삼게 되었지요. 그 결과가 바로 작중 묘사된 ‘파촉산 최고급 비단’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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