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바이킹-86화 (86/116)

빈손에서 빈손만큼 (2)

20. 빈손에서 빈손만큼 Nothing From Nothing (2)

얀 지슈카가 시그리드를 찾아 거리로 나설 무렵에는, 이미 흐느적흐느적 바다로 흘러가는 옥수수 강의 물살은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시그리드는 이곳 우애에 머물 때면, 콘스탄티노스 황자가 거하는,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저택’이라는 말을 간신히 들을 법한 집에서 방 하나를 빌려 묵곤 했다.

황자의 별칭에서 따와 자줏빛 대로Purple Way라 불리는 중심가와 맨 처음 정착할 때 잠시 목책 세웠던 곳이라 장벽 거리Wall street라 칭해지는 길이 교차하는 광장¹에는 주점이 있었다.

지금 그 광장은, 다음에 또 만나자며 기약 없이 술잔 기울이는 연합군 사람들의 취기 그득한 웃음소리로 메워져 있었다.

여기서 긴집사람들 연맹의 땅이나 그 너머 좋은거래로 향할 사람들은 강을 거슬러 올라갈 것이요, 좋은희망이나 따뜻한환영으로 갈 사람들은 다시 배를 타고 북쪽으로 나아갈 것이며, 자크 다르크처럼 이 주변에 집이 있는 사람들은 그들 모두를 떠나보내고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었다.

“헤어진다 한들 또 만날 일 있겠지! 이 세상에 술이 사라지지 않듯 싸움도 사라지지 않으니!”

그 광장에서 거나하게 취해 쩌렁쩌렁 소리지르는 덩치 하나 있으니, 보나마나 라그나르의 아들 스베인이리라.

“암, 그렇고 말고. 다시 만날 그날에도 위대한 일을 이루어, 마침내 우리 모두가 영원히 이야기로써 기억되기를!”

함께 들려오는 투박한 공용어는 – 지슈카가 그새 가는귀를 먹지 않았다면 – 카니엔케하카 전쟁추장 아욘와에스의 목소리. 심난한 마음으로 시그리드네 숙소로 향하던 지슈카는 잠시나마 놀랐다.

그러나 다시금 생각해보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당장 그린란드 연대만 하더라도 한줌 그린란드인들부터 코펜하겐 시정잡배, 지슈카의 보헤미아 용병들, 그리고 어영부영 중간에 합류한 몇몇 독일인 용병까지 민족의 잡탕이었는데도 잘만 돌아가지 않았던가.

함께 전장을 누빈 것이 이번으로 두 번째. 결코 마지막은 아닐 것이다. 지혜나 통찰과는 거리가 다소 있는 스베인과 아욘와에스조차 이를 직감할 정도라면, 다른 이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으리라.

광장에서 남쪽으로 꺾어, 황자의 저택으로 향하는 중에도 지슈카의 외눈에는 이런저런 일상의 모습이 들어왔다.

“잔, 잔! 어디 있니?”

동료들에게 이끌려 술 몇 잔 마셨다가, 집에 돌아온 뒤에 미운 일곱살 딸아이가 아빠 밉다고 집을 나갔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급히 밖으로 나온 자크 다르크라든가.

“무슨 일인가?”

“아, 별일 아닙니다. 딸아이가 사라져서요.”

자크가 에둘러 변명하려 입을 열기 무섭게, 옆집 텃밭에서 앞니 빠진 공용어가 들렸다.

“아빠 미워! 나 몰래 전쟁 나갔다 왔으면서 돌아오자마자 술이나 마시고!”

시그리드가 멋지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그냥 어린 마음에 전쟁이 멋있다고 생각하는지, 아마 자크가 저 몰래 신나게 모험을 하고 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뭐? 너, 당장 안 나올래! 잡히기만 해 봐라...”

그러나 후다닥 달려간 자크는 또 한 번 허탕을 치고야 말았다.

어느 쪽이든 남의 집안일에 관여할 만큼 한가한 지슈카는 아니었으므로. 허둥대는 자크를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꼬맹이가 기만술과 기동의 묘리를 안다는 것이나, 프랑스어로 외쳐도 되었을 도발(?)을 굳이 지슈카도 알아듣는 공용어로 하였다는 것 등등. 어딘가 비범한 구석이 많다는 점은 이미 생각 가득한 지슈카 머릿속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득한 것은, 이 시끌벅적하면서도 평화로운 신대륙의 일상에 대한 단상들.

아직은 넓디넓은 신대륙 동해안에 점점이 크고작은 마을이 흩어져 있는 데 불과했지만, 신대륙 연합이 처음으로 개척한 정착지들은 이미 이렇게 번듯하게 자리를 잡았다.

고작 몇 년 전만 해도 이곳 전체가 숲과 늪지뿐이었다는 것을 도저히 떠올릴 수 없을 만큼.

그런 성공이 가능했던 까닭은, 결국 원주민을 포함해 모든 민족들이 이 땅에서 자유롭게 공존한다는 대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로 의심하고 싸우는 데 들어가는 노력을 온전히 개척에만 쏟을 수 있었고, 역사상 처음으로 마주하는 민족들과도 곧장 교역을 시작할 수 있었으며, 그렇게 신대륙의 황금과 모피, 담배는 그대로 더 많은 개척민과 장인들, 사람들이 저의 손으로 번영을 이룩할 수 있게끔 하는 기회가 되어 돌아왔다.

성과가 빠르게, 눈부시게 누적되는 만큼, 점점 그들이 이루어낸 것에 손을 대려는 이도 늘어날 것이다. 신대륙 안에서든, 밖에서든.

‘따지고 보면 나도 그런 축에 들지 않는가.’

그리고 그들 모두가 꼭 잘못되었다고만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강을 건너면 배를 버려야 하고, 첨탑이 완성되면 비계는 철거해야 하는 법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끄러우면서도 평화로운 우애의 도시의 밤길 거니는 걸음이 썩 무겁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정치자금 받은 사실을 곧이곧대로 전하고자 시그리드를 찾아가기로 작정하고 문턱을 넘었을 때부터 줄곧 그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황자의 저택 – 소박하지만 그럭저럭 잘 지어진 이층집 – 에 들자마자, 지슈카는 언제고 저도 시그리드와 함께 종군하고 싶다면서, 병법을 알려달라 청하는 콘스탄티노스 황자를 만났다.

아직 변성기가 다 지나지 않은 황자의 목소리는 초인종과 비슷하게 기능하였다. 말소리를 들은 시그리드가 알아서 응접실로 나왔다.

“뇌물이라고요?”

“올드캐슬 그이는 성의라고 하더구나.”

시그리드가 나오자마자 지슈카는 올드캐슬이 저를 찾아온 내력을 모조리 털어놓았다.

“따지고 보면 우스운 일이지. 이 땅에서 금은보화를 얻어본들 어디 쓰겠느냐.”

이미 어지간한 정착지에서는 화폐경제가 그럭저럭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는데, 시그리드나 지슈카, 플레톤 같은 저명한 인사들은 오히려 그 흐름에서 뒤떨어져 있었다.

딱히 봉급이나 재산을 신경 쓸 것 없이, 그냥 필요한 것이 있으면 당연히 공공 재산에서 내어주는 정도. 모두 물욕이 딱히 없는 사람들이었기에, 아직껏 딱히 문제가 생기지는 않고 있었다. 설령 부정축재를 하고자 할지라도, 딱히 부정을 저지를 건수가 없기도 했고.

“자네가 그러니까 용병 노릇이나 했던 것 아닌가. 돈이 있으면 항상 쓸 곳은 생기기 마련이야.”

“그런 플레톤 선생도 딱히 치부에 밝진 않으신 것으로 압니다만.”

생각해보면 이 중에서 가장 치부에 밝은 사람은, 적어도 아이슬란드에서 나침반 장사라도 해 보았던 시그리드였다.

“그보다 애초에 왜 여기 계신 겁니까?”

“가르침을 청하는 데스포테스 전하의 초청을 받았으니 어찌 거절할 수 있을까.”

“저도 이제 장성하였으니, 시그리드 각하가 괜히 구설수에 오르는 것을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즉 과외수업은 핑계고, 시그리드와 자신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음을 증언해줄 사람으로서 플레톤을 불러들였다는 말이었다.

그런 생각을 해낸 자기 자신이 대견한지, 아니면 시그리드가 그 대견함을 알아봐주기를 바라는지, 황자가 의젓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한껏 목소리 깔던 중 새된 목소리가 튀어나오는 바람에 의젓함이 반감되고야 말았지만.

“아무튼 저는 그 뇌물이 몇만 프랑이든, 딱히 욕심이 없습니다. 그 돈은 오히려 그린란드 회사나 시그리드의 손에 들어가 있을 때 더 유용하게 쓰일 수 있겠지요.”

그러나 플레톤의 생각은 달랐다.

“그랬다가는 오히려 우리 모두가 잉글랜드의 해코지를 당하게 될 것일세.”

“어째서 그렇습니까?”

“간단한 이치일세.”

딱히 간단하지는 않은 플레톤의 설명은 이러하였다.

타이노 원주민을 학살하고 투슈판을 불태운 지몬의 악행을 단죄하려는 시그리드. 그러나 잉글랜드의 헨리는 이를 제멋대로, 투슈판에서 교역을 하려면 신대륙 연합에 대가를 지불하라는 의사의 표명으로 받아들인 상황.

“그리고 우리 시그리드가 그런 제의를 거절하자, 올드캐슬 그자는 지슈카 자네에게 갔지. 그렇게라도 저들의 목적, 신대륙과의 교역을 이루고자 한 게야.”

“하지만 저나 아나왁의 다른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유럽인들이 찾아오는 걸 막을 생각은 없는걸요.”

“유럽 군주들 입장에서 생각해보게. 오히려 더 높은 값을 부르고자 튕기는 것이라고 받아들이면 받아들였지, 자네의 그런 말을 곧이곧대로 믿진 않을 게야.”

일찍이 에릭과 지기스문트를 통해 유럽 군주들의 평균적인 인성 수준을 익히 겪은바 있었기에, 시그리드도 플레톤의 말에 수긍하였다.

“말하자면 그 증기기관과 비슷한 것일세. 끓어오르는 증기의 힘을 어딘가로 빼돌리게 되면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고 막아두었다가는 물에 혼입된 불의 프네우마Pneuma가 회오리치며 터지게 되는 것이지.”

은근슬쩍 저의 사원소설 타령을 집어넣는 플레톤이었으나, 시그리드는 플레톤이 아니었기에 그냥 가만히 있었다. 비유가 조금 이상해서 그렇지, 나머지는 이치에 닿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금은으로 매수되지 않는다면 그 다음에는 폭력이나 다른 음험한 술수를 쓸 것이라는 말씀이시군요.”

“바로 그렇습니다, 전하.”

신대륙 연합으로서는 잉글랜드를 함부로 적대할 수 없었다. 특히 그린란드 회사의 무역선이 아이슬란드에서 북해를 종단하든, 영불해협을 통과하든, 함부르크로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잉글랜드 근해를 지날 수밖에 없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기옌 지방을 획득한 뒤 그럴듯한 함대를 꾸려 신대륙까지 보내게 된 지금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므로 설령 지슈카 자네가 뇌물을 받을 생각이 없다 할지라도, 감사히 받는 시늉은 해야 하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서 시그리드를 견제하고, 그 지몬과 요한이라는 두 얼간이들을 방면하려 하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는 것이지.”

“저는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더구나 이 땅에서 선거를 벌이는 데 대체 은화가 무슨 쓰임이 있단 말입니까?”

“아, 그냥 밖에 나가서 가재당 뽑아달라며 은화를 흩뿌리게. 그러면 되는 것 아닌가?”

“그, 선생님. 전에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공화정이랍시고 하는 것이 딱 그런 짓이라고 비판하지 않으셨던지요.”

“흠흠, 황자님. 맥락을 따져주십시오. 전후 맥락 말입니다.”

플레톤 옆에 아무 사람이나 데려다 놓아도 논쟁이든 강의든 시끄러워지기 마련인데, 지슈카와 콘스탄티노스가 함께 있으니 더욱 시끄러워졌다.

“저기, 우리가 문제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은데요.”

시그리드가 이해하기로, 오지 않을 미래의 미국을 비롯해, 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은 사실 ‘이탈리아 사람들이 공화정이랍시고 하는 짓’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물론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개중에는 가재당을 뽑아달라며 프랑 은화를 뿌리느냐, 코끼리의 당을 뽑아달라며 초록 종이를 흩뿌리냐의 차이처럼 사소한 것도 있었지만, 은근 사소해 보이면서도 사실은 꽤 중요한 차이점도 있었다.

“뇌물이 아니라 선거자금이잖아요. 그러면 선거자금을 선거에 쓰면 그만 아닐까요?”

잉글랜드 특사 존 올드캐슬은 소위 신대륙 연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².

그 애꾸눈 용병대장에게 뇌물을 건네고, 잠시 생각할 시간을 준다는 명목으로 저 따뜻한환영이라는 곳 주변에 정착했다는 롤라드파 동포들을 만나고 온 뒤로, 그러한 인상은 더욱 깊게 굳어졌다.

그래. 이 땅에 본디 귀족이나 영주가 없었으니, 모두가 제 몫의 밭을 일구고 그 땅과 소출을 저의 것으로 삼는다는 것은 그렇다 치자.

허나 그렇다고 해서 평민이 절로 귀족이나 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그저 선거가 어쩌고, 백송고리와 가재가 저쩌고 하면서, 저들의 주제를 한참 벗어나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평민들이 저들 자신을 다스려야만 하는 예외적인 경우도 있었다. 부유한 상인들이 스스로 영주의 충실한 심복임을 증명(금전)함으로써 도시 안에서 자치를 인정받는 경우라던가.

그러나 그런 것도 아니지 않은가.

브리스톨이나 뉴캐슬, 헐Hull 같은 도시 근교에서, 보잘것없는 농부나 장인으로 살던 것이 전부인 자들이, 이 땅에서 엉터리로 배운 얕은 지식을 학문이랍시고 떠들면서 나라 다스리는 올바른 이치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이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 주제넘는 일이었다.

“그 남쪽에서 패악질 벌인 놈들을 때려부순 건 물론 아주 시원한 일이지. 하지만 우리가 매번 그곳까지 가서 못된것들을 붙잡아올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우리가 언제 그들의 보호자를 자처했나? 저쪽에서 우리더러 보호자가 되어달라고 한 적은?”

“꼭 가재당 지지하는 사람이 할 법한 말 같은데.”

“그래, 나는 가재당 지지하네. 그래서 뭐, 어쩌란 말인가?”

“이보게, 자네 신문도 안 보는가? 우리네 밥줄이 저 남쪽 땅에 달려 있는데, 당연히 우리와 교역하면서 서로 돈벌이하는 상대들에게 도움이 필요하면 가서 도와주는 게 우리한테도 이득이 되는 거지.”

“그 ‘우리’가 진짜 우리 모두인가? 저기 읍내 사는 깍쟁이들이야 저들 돈벌이에 도움 되니까 그 남쪽 야만인들을 각별히 여기겠지만, 우린 사정이 다르잖나? 얼마 전에는 아예 야만인 몇몇을 데려다가 도제로 삼은 놈도 있다던데.”

“도제가 아니라 협력하는 사이라고. 신문 좀 읽으라니까? 흑요석 깎는 솜씨로 그 망원경인가 하는 것도 만들었다던데.”

“거 참. 이래서 지인하고 정치 얘기 하면 안 된다니까. 아주 신문 읽는 게 벼슬이야, 벼슬.”

이러한 일들을 ‘높으신 분들께서 알아서 할 일’이라 부르지 않고 ‘정치’로 싸잡아서 부르게 된 것도 모두 야학과 신문의 영향이었다.

신문이라 해봐야 한 달에 한 번 나오는 게 전부요, 야학이라 해봐야 사람들 모아다가 글자와 산수 가르치고, 그들이 모르는 어려운 단어들의 뜻을 가르치고, 신대륙의 여러 부족들 이름과 그 풍습 따위를 한두 번쯤 죽 설명하는 게 전부였지만, 그것만 해도 이렇게 알게모르게 효험이 있던 것이다.

대화의 주제는 대학의 교수들이나 덕망 높은 주교들이, 고담준론 주고받으며 꺼낼 법한 무언가, 아니면 인자하고도 명예로운 군주가 그 후계자를 가르치며 꺼낼 법한 무언가였다.

저 무지렁이들처럼, 석탄 캐면서 농담따먹기하듯 주고받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다가는 정당하게 신의 뜻을 따라 나라의 주권을 손에 쥔 군주 앞에서,

‘댁은 어떻게 왕이 되셨소? 보나마나 인민을 착취해서겠지!’

같은, 천하의 악당 와트 타일러 같은 작자조차 꺼렸을 법한 폭언을 내놓는 작자도 나오게 되리라.

그런 음험하고도 비천한 무리가, 저들의 알량한 욕심 채우는 데만 눈이 먼 채, 왕의 목도 한 번 잘라보겠다며 설치는 꼬락서니가 악몽처럼 올드캐슬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탄압을 피해 다른 롤라드파 사람들과 함께 건너와, 지금은 열심히 성경을 영어로 옮기고 있는 옥스퍼드 대학 출신 학자들은 올드캐슬에게 해명하곤 했다.

“이곳에는 정해진 왕가가 없고, 그저 수많은 민족이 각각 정착촌을 세운 채 서로 협력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어느 한 사람이 군주가 된다면, 이 연합의 절반 이상은 그 군주와는 다른 민족의 사람이겠지요. 유럽과는 사정이 다르지 않습니까?”

허나 그렇다면 각각의 정착촌을 이끌 영주를 두고, 그 영주로 하여금 백성을 보살피며, 그들 모두의 수장이 될 군주를 뽑게끔 하면 될 것이다.

자유니 선거니 하는 것은, 흑사병이 휩쓸고 지나간 뒤 도덕과 윤리가 붕괴한 잉글랜드 땅. 그 땅의 타락한 질서를 더욱 타락시켜, 무질서와 방종을 스스로 불러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차라리 이들이 대양 너머에 스스로 격리된 것이 다행이다. 이런 무리가 유럽에 남아 있었더라면, 반드시 크나큰 재앙의 원인이 되었을 터.”

만약 누군가 그 혼잣말을 들었더라면, 그런 당신이야말로 국왕 헨리를 상대로 음모를 꾸미다가 붙잡히지 않았느냐며 비꼬았겠지만, 올드캐슬은 사뭇 진지하였다.

이 땅에 새롭게 세워지는 체제에 대한 불신과 경멸을 품은 채 돌아온 올드캐슬은, 다행히도 낭보를 접할 수 있었다.

“호국경 각하의 당이 독주하는 것을 막고, 지몬과 요한의 재판 또한 잉글랜드 국왕 폐하께서 바라시는 대로 끝날 수 있도록 만들고자 하오.”

바로 가재당 당수 얀 지슈카가, 자신의 ‘성의’에 응답하여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이 은화는 우리의 목적을 이루는 데 큰 도움이 되겠지.”

“그렇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허나...”

“그간 마음을 정하면서 많이 고민하였소. 들어보시오...”

얀 지슈카가 밝히는 선거자금 활용법은 이러하였다.

“따뜻한환영의 잉글랜드 정착촌을 다녀오셨다니, 올해 가을에 선거가 열린다는 것은 아마 잘 들어 알고 계실 것이오.”

“알다마다요.”

올드캐슬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허나 혼신의 연기를 하는 데 집중하고 있는 지슈카가 알 바는 아니었다.

평생 정직하게 살아온 얀 지슈카에게, 마치 올드캐슬에게 동조하여 시그리드를 실각시킬 음모를 꾸미는 것처럼 가장하는 일은 영 버거웠다.

그나마 진실을 살짝 부풀리고 뒤틀어 밝히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기에 망정이지, 거기서 더 많이 속임수를 써야 했다면 아마 학교 교과서 읽는 말투가 나왔으리라.

“이 은화는 신대륙에서는 사실 큰 쓰임새가 없소. 유럽에서 도움을 구하는 데 쓰는 편이 더 낫지.”

“그렇기는 하지요. 하면 어떤 도움을 구하실 생각이십니까?”

“유럽의 저명한 학자들, 대학의 교수와 박사들을 모셔오고자 하오.”

주변에 듣는 사람도 없건만, 지슈카는 목소리를 낮추어 은밀하게 속삭였다.

“교수와 박사들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꼭 대학에 적을 두고 있지 않더라도 상관은 없고.”

보통 대학이란 물려받을 영지가 없는 귀족의 막내아들이나 막내에 가까운 아들들이 가는 곳이었지만, 얀 후스처럼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떻게든 위로 올라가보려는 야심찬 젊은이들도 꽤 있었다.

그런 청운의 꿈을 품고 막 학위를 딴 이들에게, 보수를 줄 테니 신대륙에 한 번 왕림해주십사 하는 청이 들어간다면 어지간해서는 거절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들로 하여금 이 땅에서, 정의란 무엇인지를 밝히게끔 만들 생각이외다.

팔켄부르크의 요한에 대한 교회의 입장은 일찌감치 확정되어 있었다.

‘무조건 요한 한 사람의 잘못임. 아무튼 그러함’.

선교사 파견을 자청할 만큼 선량한 이교도들이, 조금 늦게 개종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화형을 남발하려 하였으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

사실 그런 짓을 벌였다는 것 자체보다는, 그런 짓을 벌여놓고서는 정작 패배하여 사로잡힌 신세가 되었다는 게 교회의 중론을 결정짓는 더 확실한 근거기는 했지만.

또한 위트레흐트의 지몬 역시, 학살과 노예의 운명을 피해 탈출한 타이노족 사람이라는 확실한 증인이 있는 이상, 아예 잘못을 하지 않았다 잡아떼기도 애매했다.

그렇지만 신대륙 연합에게 두 사람을 단죄할 명분이나 근거가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였다.

“오오, 그렇군요!”

무지한 백성들을 계몽하여, 허투루 벌린 그 입을 도로 다물게 하는 것이라면 올드캐슬도 찬성이었다. 고작 그런 무가치한 일에 귀한 인력과 은화를 투입하는 것은 아까운 일이지만, 상황이 특수하지 않던가.

“그렇게 여론이 조성되면, 이 사람이 호국경으로 당선될 수도 있을 것이오. 그렇게 되면 바로 그 학자들을 데리고 재판을 열 것이오. 만약 낙선된다 하더라도, 기껏 찾아온 저명한 학자들을 법정 밖에 내버려두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일 테고.”

데려온 학자들로 하여금 지슈카를 지지하는 언설을 내놓게 만드는 것도, 올드캐슬 생각에 당연한 일이었다. 소위 가재당의 주장이 – 그가 보기에 – 훨씬 이치에 더 닿기도 하거니와, 권력을 손에 넣는 자가 법정에도 영향을 미치는 게 합당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주님의 뜻으로, 모든 것이 올바르게 이루어진다면, 우리 모두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이외다.”

이 또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시그리드가 그저 신대륙의 황금에 대한 권리를 더 비싸게 팔기 위해 헨리의 제안을 거절한 것이 아니며, 다 나름의 사정이 있던 것임을 바로 저 학자들이 저들의 논변을 통해 밝혀줄 테니까.

똑같이 재판을 열더라도, 적어도 은화를 흩뿌려야 겨우 모셔올 수 있는 학자들이 자리를 빛내준 자리에서 열리는 재판은 그 자체로 공신력을 지니기 마련이었다.

“그렇지만 신대륙은 아직 너무나 먼 땅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명색이 섬나라인 잉글랜드에서도 그럴진대...”

“그러므로 또 다른 그럴듯한 보상을 제시할 작정이오. 바로 명예지. 그대가 건네준 성의에 힘입어, 런던과 파리의 출판업자를 고용하여 우리 땅에서 펴낸 신문을 그대로 복사하게 할 생각이외다.

즉, 거기에 이름이 실린 학자들은 그만큼 유럽에서 명성을 얻게 되겠지. 어쩌면 더 저명한 학자들이 자극을 받아, 사비로 배편을 구해 재판에 참여하러 올 수도 있는 일이고.”

장담컨대 그렇게 될 것이었다.

학자들이 잉글랜드 왕의 편을 들어주기를 바란다면, 당연히 하이델베르크나 비텐베르크, 볼로냐 대학의 사람이 아니라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사람들을 먼저 불러와야 할 것이요, 그 두 대학 사람들의 언설이 바다 건너까지 전해진다면, 제 손으로 닻줄을 매고 갑판을 쓸 테니 제발 신대륙에 데려다 달라는 파리 대학의 학자들이 속출할 테니까.

“참으로 다행입니다. 경과 같이 사리에 밝으면서도 옳고 그름을 분간할 줄 아는 분이 계시니, 어찌 주님의 보살핌이 아니겠습니까.”

미래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귀한 인력들을 데려와 기껏 시킨다는 일이 선거운동이냐고 놀렸겠지만.

존 올드캐슬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 *** ---

1. 동로마의 황족들 중 황궁에서 태어난 이들, 즉 황제가 재위 중에 태어난 황자와 공주들은 황궁의 최고급 자줏빛 비단을 두른 산실에서 따와 ‘자줏빛 산실에서 태어난 사람’(포르피로게니토스)이라는 별칭을 얻곤 했습니다.

맨하탄에 처음 네덜란드인들이 도착했을 무렵, 이미 맨하탄 섬에는 원주민들이 자주 오가는 길이 나 있었습니다. 섬을 종단하는 이 길은 자연스럽게 섬 남쪽에 자리 잡은 뉴암스테르담 정착지의 중심가가 되었고, 뉴암스테르담이 영국령 뉴욕이 된 뒤 이 대로의 이름은 (성의없게도) ‘널따란 길’, 즉 브로드웨이로 바뀌게 됩니다.

한편, 현실의 월 스트리트는 작중의 월 스트리트와 마찬가지로 본래 방벽이 있던 자리에 난 도로입니다. 1653년 네덜란드령 뉴 암스테르담 시절, 맨하탄 섬 남쪽 끄트머리를 점유하고 있던 개척자들은 방어를 위해 섬을 동서로 관통하는 방벽을 세웠는데, 개척지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17세기 후반에는 방벽이 도시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격이 되어버렸지요.

1699년, 영국령 뉴욕 시는 방벽을 해체하고 그 자리에 – 방벽에서 나온 자재를 재활용해 - 시청을 새로 짓기로 결정했습니다. 이후 이리 호와 허드슨 강을 잇는 운하가 개통되면서 뉴욕이 폭발적인 성장을 하게 되자 자연스럽게 시청 주변인 월 스트리트가 상업과 금융의 중심지로 떠오르게 되었지요.

2. 올드캐슬을 지도자로 추대한 롤라드파는 후스파와 마찬가지로 교회의 개혁과 재산 몰수 등을 주장했지만, 후스파 안에서도 후스가 몸담았던 프라하 대학의 교수들과 부유한 프라하 시민들이 온건파로 기울었던 것처럼 이들 롤라드파의 주장 역시 그렇게까지 급진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물론 교회의 재산 몰수를 주장했고, 헨리 5세가 롤라드파를 탄압하고 있으니 그의 폐위를 목적으로 움직이기는 했지만, 딱 그뿐이었지요.

허망하게 실패한 올드캐슬의 반란 역시, 롤라드파 교리에 심취한 부유층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졌고, 발각 시점에서 올드캐슬이 모은 병력은 고작 일이백 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중에는 기사와 종자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같은 롤라드파인 신대륙 이주민들에게 올드캐슬이 이질감 내지는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이를 반영한 것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