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를 꿈꾸며 (1)
22. 캘리포니아를 꿈꾸며 California Dreamin' (1) - 마마스 앤 파파스 (1965)
1420년 초, 덴마크 국왕 에릭과 그 인질이자 국빈 겸 비공식 재무장관이 된 샤를은 전장에 나섰다.
덴마크 국왕령과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그리고 유럽 내륙에서 신대륙으로 향하는 창구인 함부르크 시 사이의 어지간한 땅은 모두 국왕 에릭의 영토거나, 아니면 에릭에게 공식적으로 복속되거나 사실상 봉신이 된 영지와 자유도시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어지간하지 않은 땅도 아직 남아 있었으니, 바로 엘베 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펼쳐진 넓은 습지, 디트마르셴Dithmarschen이었다.
이름 그대로 늪지대인 디트마르셴은, 근처의 영주와 주교들 입장에서 굳이 복속시킬 가치는 없는 땅이었다. 풍요로운 농지도 없고, 이름난 금은 광산이나 좋은 항구도 없었으니, 그저 다른 영주들이 손에 넣지만 못하게 견제하면 그만이었다.
그 덕에 디트마르셴의 농민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법에 따라서 스스로 다스릴 뿐, 그 어떤 영주나 왕을 섬기지 않고 저들끼리 살아갈 수 있었다.
허나 이제 디트마르셴 주변에는 그들을 물밑에서 지원해줄 영주가 하나도 남지 않았다. 더구나 별 가치가 없는 땅이라지만 사실 딱 한 가지 자원만은 가지고 있었으므로, 에릭은 기꺼이 디트마르셴 정벌에 나섰다.
“하, 자유로운 농민들의 공동체라. 말이야 좋지. 허나 스스로 지키지도 못하는 공동체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전쟁이 시작된 지 석 달만에 농민들은 그대로 짓밟혔다.
“우리... 아니, 저희는 자비를 구할 뿐입니다, 폐하.”
디트마르셴의 중심지 하이데Heide 읍내의 교회 광장에 모여든 농민 대표들은 그들의 정복자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두려워 말거라. 너희에게 베풀 자비는 충분하고도 남으니.”
늪지대에 익숙한 농민들은, 고작 누비갑옷에 이 빠진 도끼와 창으로 무장한 것이 전부였지만, 의기만은 드높았다.
늪이 그들과 함께하는 한, 그 어떤 기사도 디트마르셴의 평민 군대를 당해낼 수 없으리라. 몇 번이나 슐레스비히와 올덴부르크의 기사들을 패퇴시킨 농민들은 그렇게 떠들곤 했다.
그리고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디트마르셴을 정복한 것은 바로 같은 평민들로 이루어진 덴마크군이었으니까.
“이곳 디트마르셴은 척박한 습지대라, 너희 또한 살기가 어렵다고 들었다. 이에 나는 너희 모두에게 새 터전을 마련해주고자 한다.”
농민들은 그 ‘새 터전’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이 대대로 살아온 이곳 늪지대에서 끌려나가, 생면부지 귀족의 농장과 목장에서 남은 평생을 노역으로 보내야 하는 삶.
영광과 번영을 약속하며 도시들과 부유한 평민들을 제 편으로 끌어들인 에릭 왕에게 반대하던 귀족들은 가장 먼저 탄환의 세례 앞에 스러져갔다.
샤를은 에릭에게, 잔뜩 숨죽이고 있는 남은 귀족들을 회유할 방도를 진언했다. 그들이 더 이상 귀한 족속은 아닐지언정, 부유한 족속으로는 남을 수 있도록, 이미 마르그레테가 제정한 바 있던 농노법을 더욱 강력하게 밀어붙이라는 것이었다.
그 결과, 이제 덴마크의 법에 농노는 없었다. 그저 지주와 ‘공정한 장기계약’을 맺은 소작농만 있을 뿐. 그 차가운 법조문 속에는 관습이니 뭐니 하는 이유로 강요되던 악습은 없었으나, 역시 관습이라는 이유로 그나마 보호되던 권익도 없었다.
‘자유의지’에 따라 평생을 지주를 위해 노역한다는, 날것 그대로의 예속만이 담겨 있을 뿐.
“폐하의 관대함을 찬양할 뿐입니다.”
“에릭 폐하 만세! 덴마크 만세!”
그러나, 저 차갑고 몰인정한 법조문에 따라 농노가 되는 것이, 유럽의 다른 땅으로 도망쳤다가 그곳에서 농노로 예속되는 것보다는 낫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으므로, 농민들은 눈물 흘리면서도 에릭에게 축수祝壽하였다.
“축하드립니다. 헌데 썩 기쁘진 않으신 듯하군요.”
종군한 행정관들이 하이데 교회로 들어가 인구 기록을 넘겨받는 동안, 그 행정관들의 수장 격인 샤를은 슬쩍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 정도 인구로는, 고작해야 슐레스비히의 애송이 귀족Junker²들에게 분배하면 끝일 테니까.”
“어쨌든 농사지을 인구는 늘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단치히에 지시를 내려서, 이민선이 코펜하겐 앞을 오갈 때 십일조나 바치라고 할까. 해협을 지나는 이민자 열 명 당 하나씩은 덴마크로 넘기라고 말이야.”
“그러면 요가일라가 분노할 겁니다. 신대륙으로 농노가 유출되는 건 괜찮아도 이웃나라에 넘어가는 건 참기 어려울 테니까요.”
“농담이었네, 농담. 하여간 사람이 재미가 없어서...”
그 옛날 마리엔부르크에서 검은 책의 존재를 확인한 이래, 에릭은 단 한 번도 강철과 화약이 세상의 미래임을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린란드 회사의 밀정들을 통해, 꾸준히 그 미래의 편린을 엿볼 수 있는 에릭과 달리, 유럽의 다른 군주들은 그러한 특권을 누릴 수 없었다. 그저 변해가는 세상이 한 발 늦게 따라가려 발버둥치는 수밖에.
신대륙에 발을 뻗치는 잉글랜드와 제노아, 조금 다른 방식으로 신대륙에 지분을 얻은 합스부르크의 프리드리히 – 당장 내년부터 그가 오악사카Oaxaca(와샤칵) 금광에서 기여분만큼 배당금을 받기 시작할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 등등, 시류를 놓치지 않은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천정부지로 치솟는 총포와 화약의 값을 치르는 데 급급했다. 에릭의 손을 잡고 스웨덴산 머스킷으로 무장할 수 있게 된 한자 동맹의 자유도시들과 달리, 보통의 군주들은 그런 연줄을 가지지 못했고, 그저 손에 잡히는 대로 허겁지겁 쥐어짠 재정으로 이 ‘군비경쟁’을 따라갈 뿐이었다.
그리고 1419년 말의 유럽 군주들은, 약 일이백 년 뒤의 후손들과 달리, 아직 체계적으로 재정을 운영할 만한 행정력도, 경험 있는 관료들도 갖추지 못하였다. 그러니 다른 수단에 앞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방도는, 지금껏 늘 해왔던 대로 농노들을 쥐어짜는 것뿐이었다.
“나처럼 평화와 내치에 힘쓰면 되는 것을.”
“부르고뉴의 궁정시인들에게 재밌는 농담을 고안하여 폐하께 진상하라 지시하겠습니다. 농담에서 재미라곤 찾을 수 없으니 심각한 일이로군요.”
그러나 에릭은 저의 농담이 재밌다는 양 큭큭 웃었다.
시그리드가 일으킨 작은 파장으로 인해 온 유럽이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것이 재밌고, 한 발짝 일찍 그 불구덩이 빠져나온 것이 즐거웠다.
그리고 그 불길은 곧 시그리드의 신대륙으로도 뻗쳐나갈 것이요, 그로 말미암아 시그리드가 자신에게 먼저 손을 내밀든, 자신이 유럽 군주들의 대전사가 되어 사랑을 쟁취하든, 저의 품에는 시그리드와 그가 상징하는 힘, 세상을 의지대로 바꿀 수 있는 지식이 들어올 터.
어찌 유쾌하지 않은가?
어리석게도 끝까지 저항하다 처형당한 농노들의 가족들이 오열하고 있었건만, 에릭의 귀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다른 것과 달리, 이 점에 있어서는 에릭의 윤리관을 탓할 수 없을 것이었다.
중세의 너무나도 정직한 민낯, 힘이 있는 자는 그저 원하는 바를 이룰 뿐이요, 힘이 없는 자는 그저 참아야 하는 것을 참아야 하는 이 모습은 비단 이곳 디트마르셴뿐 아니라 온 유럽에서 드러나고 있었으니까.
늦가을에 출항해 겨울 바다를 헤치고 겨우 런던에 도착한 맨오브워 한 척은 사법재판 결과를 헨리에게 알렸다. 헨리는 지슈카의 ‘찬탈’ 시도가 실패했다는 것에 실망하면서도, 적어도 그가 원수marshal(국방부 장관) 자리를 얻을 만큼 영향력을 확보했다는 데서 위안을 얻었다.
그리하여 이미 신대륙에 가 있던 존 올드캐슬을 시켜, 이번 재판을 통해 묵인된 잉글랜드의 신대륙 진출에 박차를 가할 것을 지시하였으니, 잉글랜드의 빈민과 아일랜드의 조금 더 빈곤한 빈민들로 선창이 가득 찬 배들은 봄이 찾아오자마자 즉시 브리스톨과 포츠머스에서 출항하였다.
“벌써 그런 배 중 한 척이 우애의 도시에 도착해서 보급을 받고 갔소. 거기 타고 있던 빈농 일가 하나가 물정 모르는 척하고 은근슬쩍 빠져나온 덕에 행선지를 알게 되었지.”
이번 일이 비상사태에 해당한다는 데는 장관 모두가 동의하였다. 시그리드가 딱히 소집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건만 모두가 배를 타고 근 열흘을 항해해 좋은희망으로 모인 것은 그 때문이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악어습지 반도 근처까지는 갔을 게요. 듣자하니 폭풍만 쪽 섬들 대신 그쪽 어딘가에 식민지를 개척하려 한다더군.”
우애에서 쾌속선을 타고 온 플레톤이 달갑잖은 소식을 전했다.
“이것 참...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가뜩이나 사람들이 몰려오는 상황에, 잉글랜드까지 신대륙을 개척한다는 소식이 알려지게 되면 더욱 많은 이들이 이 땅에 몰려오겠군요.”
어지간한 식자라면, 이 계약직 하인이라는 게 자칫 잘못하면 고치지 어려운 병폐로 이어질 수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모든 사람들의 행복과 자유를 위한다는 신대륙 연합. 그런 연합의 인구가 늘어나는 것은 당연히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허나 그 늘어나는 인구가 자유인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사실상 예속된 몸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그렇지만 자영농들 중심으로 돌아가는 자급자족 경제를 주장하던 가재당 입장에서는, 보헤미아인 농부들이 농장을 세우고 지주 노릇을 하겠다는 것을 막기가 영 무엇하였다.
‘아무리 그래도 농노는 좀...’이라고 할 것 같으면, 땅은 넓은데 사람이 부족한 실정을 그냥 방치만 하고 있을 것이냐, 저 땅을 그대로 놀리는 것이야말로 잘못 아니겠느냐 하는 반응이 돌아올 게 뻔했다.
“그렇지. 더구나 우리가 이제 와서 막아보려 한들 막지도 못할 일이잖소.”
이 사실상의 농노제에 반대하면서도, 딱히 반대할 근거가 마땅찮은 것은 플레톤도 마찬가지였다. 트집을 잡기도 전에, 자신이 바라는 그럴듯한 이상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일단 사람이 충분히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현실적인 반론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러니 양당 중 어느 쪽도 계약직 하인들의 유입을 막기가 곤란했다. 당수 아돌프부터가 이 인력 알선업에 뛰어든 NSDAP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농노제의 폐단을 논의하기에 앞서, 당장 우리가 소화하기 어려울 만큼의 이민자들이 밀려오는 것을 걱정해야 할 상황이니 그나마 다행이랄까요.”
그것도 사실 딱히 다행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나저나 지슈카 그이는 어디 있소? 시그리드도 안 보이고... 디폴트 그 꺽다리도 없구만.”
재무장관 옌스가 부재중인 이들의 행방을 대신 알렸다.
“두분께서 여기 도착하시기 전에 이민선이 또 도착했습니다. 거기서 내리는 사람들을 통제하느라 아마 늦으시는 것 같습니다.”
“아, 오기 전에 누가 ‘또 들어온다’ 외치더니만. 그거였군.”
“우리도 부둣가로 내려가십시다. 가서 뭐라도 도우시지요.”
농민의 아들인 후스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들만 남아있기 뭐하여, 부유한 가문의 자제 플레톤과 국왕의 총신 로데하트의 조카 옌스 또한 쭈뼛대며 일어나, 멀리 남쪽에 펼쳐진 바다를 보았다.
그 와중에도 또 돛대 하나가 수평선 너머로 나타나고 있었다.
누군가는 십 년 계약, 누군가는 십오 년 계약, 누군가는 팔 년 계약.
그러나 몇십 년짜리 계약이든, 농노들에게는 중요치 않았다. 짓밟히는 것과 기만당하는 것이 익숙했던 그들에게, 어차피 당장 눈앞에 있지 않은 것은 항상 저들 의사와 무관하게 바뀔 수 있는 것이기도 했으므로.
그러면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들이 태어나고 자랐던 세상은, 거칠고 냉혹하지만, 그만큼 느슨하기도 하였다. 삶을 촘촘하게 지탱하던, 교회와 귀족들이 짜놓은 질서의 그물은, 비록 그들 모두를 옭아매고 있기는 했지만, 그물눈은 헤싱헤싱하고 씨줄과 날줄은 얄캉하였다.
만약 어느 영주가 모질고 모자라, 곡식은 곡식대로 뜯어가고, 심지어 무시무시한 옛 이야기에나 나올 뿐인 초야권까지 공공연히 입에 올릴 정도라면, 그때는 그냥 이웃의 이웃의 이웃 영지쯤 되는 곳으로 몰래 달아나면 그만이었다.
그러한 일이 일어나면 영주는 정신을 조금 차리고, 도망친 농노의 뒤는 쫓지 않고, 대충 사나흘 거리에 사는 영주는 갑자기 어디선가 영민 하나가 늘어난 데 대해 굳이 깊게 파고들지 않고, 그렇게 세상은 유지되었다.
아니, 그럴 줄만 알았다.
언제부턴가 세상은 미치기 시작했다.
검은 죽음이 휩쓸고 간 뒤, 성직자들은 곧 세상의 종말이 올 것이라 말했건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죽은 자들은 살아나지 않았고, 죽은 자들 몫의 세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전쟁은 전쟁대로 이어졌고, 종말의 나머지 세 기수도 툭하면 나타나 마치 귀족 자제가 마을길 산책하듯 편하게 유럽을 짓밟았다.
그들은 짐작도 할 수 없는 먼 땅에서 기이한 일이 일어나, 갑자기 온 세상의 교회가 십일조만을 요구하고 그 이상의 헌금은 요구하지 않게 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자 영주들은 하나같이, 줄어든 만큼을 제게 내놓으라 하였다.
‘그간 그 정도 부담을 지고도 멀쩡히 살아왔으니, 당연히 헌금이 줄어든 만큼은 바칠 수 있지 않느냐?’
그렇게 영주의 대리인들은 말했다.
‘대체 이렇게 세금을 모아서 어디 쓰시려는 겁니까?’
간혹 용기를 내어 이렇게 묻는 농민도 있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것은 분노나 가소로움이 아닌, 농민들과 마찬가지로 점차 미쳐가는 세상 속에서 제 자리나마 지키고자 하는 자의 지치고 지친 눈빛.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우리 영지가 짓밟히지 않기 위해서는. 군대가 필요하다. 군대를 모으려면 돈이 필요하고. 옛날보다 더 많은 돈이...’
이미 조금씩 전쟁은 비싼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장궁수가 석궁수가 되고, 트레뷰셋이 사석포가 되고... 더 큰 위력을 얻기 위해 더 많은 돈을 흩뿌리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면서, 국가와 영지의 제도는 조금씩 짜임새가 생겼고, 서서히, 그러나 꾸준히 흑사병의 충격에서 회복하던 유럽 사회는 여기에 다시 적응하며 그때그때 새로운 평형을 만들어나갔다.
그러나 이백 년을 뛰어넘은 무기가 갑자기 유럽에 풀려버리면서, 그리고 그 무기가 온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그린란드의 마녀가 입증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이게 다 하얀 마녀 때문이다. 그렇게 알아두어라.’
농민들보다 딱 한두 치 더 식견이 높을 뿐인 대리인은, 어디선가 주워들은 높은 분들의 푸념을 그렇게 제 생각마냥 주워섬겼다.
마녀. 농민들도 하얀 마녀가 누구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하얀 마녀는 벼락으로 기사들을 죽였고, 물로써 그 죽은 기사를 살렸다. 책이라는 것을 찍어내어 교황 하나는 죽였고, 다른 하나는 폐위시켰다. 영주님 위의 영주님 위에 있다는 왕인지 황제인지 하는 분이 십자군을 이끌고 마녀를 물리치러 갔지만, 도리어 마녀를 용서하고 그 편에 서겠노라 하였다.
어떤 이들은 보았다. 몇 년 전 어느 해,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예루살렘 근처에 있다는 곳에서 온 귀한 사람들과 함께, 애꾸눈 용병대장이 이끄는 행렬 머리 위에 마녀의 요물familiar 새가 나는 것을, 그 새 아래에 백발의 마녀가 있는 것을,
또한 어떤 이들은 들었다. 그 마녀가 바다를 건너 이단과 이교도, 기독교인들이 어울려 사는 나라를 만들었다고. 그 나라에서는 사람이 죽지 않고, 굶주리지도 않으며, 전쟁도 없고, 황금은 바라는 대로 챙길 수 있다고 하였다.
‘죄악의 땅 바빌론! 고삐 풀린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추악해질 수 있는지, 그곳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땅에는 겸손이 없으니, 모두가 자신이 왕이요 귀족인 양 굴곤 한답니다.
그 땅에는 중용이 없으니, 모두가 자신의 욕심껏 탐식하며 이교도나 짐승처럼 군다고 합니다.
그 땅에는 용기가 없으니, 백성을 지킬 기사도, 귀족도 없이 그저 우리 신앙의 품에서 도망친 이단자들이 저들끼리 뒹굴 뿐입니다...’
간혹 어떤 성직자들이나 탁발수도사들은 이렇게 떠들기도 했다.
허나 그곳이 정녕 죄악의 땅이라면, 지치고 굶주린 농민들에게는 천국과 같을 것이다. 가난한 농노가 탐식과 오만의 죄를 범할 수 있는 땅. 그러고도 하늘의 심판을 받기 전 지상의 심판을 받지 않을 수 있는 땅.
때마침 바다 건너에서 돌아온 학자들은 저들이 보고 들은 바를 떠들곤 했다. 그것은 술집 주인과 하숙집 여급들에게 전해지고, 다시 그들에게 먹거리를 파는 상인에게, 그 상인에게 헐값으로 식량을 넘기는 농민에게 전해지곤 했다.
그렇게, 꿈꿀 힘도 없던 이들의 머릿속에서 누더기 환상이 짜맞춰졌다. 이미 신대륙 이야기는 퍼질 대로 퍼져 있었고, 함부르크나 단치히에서 배를 탈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신대륙에서 농노지만 농노 아닌 하인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퍼지자마자, 모두가 닷새 굶주렸다가 죽은 말을 발견한 마을 사람들처럼 달려든 것은 그 때문이었다.
“맙소사...”
“그래도 이렇게 이 땅에 찾아오게 되었잖습니까. 이제 우리는 살았습니다.”
“그래요, 이대로 십 년만 살면...”
당장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세상. 어차피 일 년이든 십 년이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까마득한 미래였다.
사실상의 농노 신세로 여생을 보내다 쓰러져 죽는다고 해도 괜찮았다. 그 정도로도 농민들로서는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세상의 북쪽 끝을 거쳐, 고된 항해 끝에 닿은 이 작은 항구에서, 그들을 맞이하는 기묘한 생김새의 처녀에게 저들 사연 털어놓는 농민들은, 그러므로 하나같이 표정이 밝기 이를 데 없었다.
“아이고, 그런데 왜 고우신 분께서 이리 울상을...”
숙연한 표정으로 몰입해서 듣던 시그리드가 눈을 훔쳤다. 아무튼 바닷바람 탓이었다.
“아, 별 것 아니에요.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호국경 각하, 여기 계셨군요.”
암만 보아도 기사인 디폴트가 다가오자, 시그리드에게는 아무런 경계 없이 저들 이야기를 털어놓았던 독일 농민들은 절로 몸이 굳었다.
“임시 숙소가 다 마련되었습니다. 모두 수용한 다음, 내일부터 차례로 목표지로 갈 수 있도록 하면 되겠습니다.”
“어이쿠, 감사합니다요. 자, 자. 얼른들 가자고.”
그리고는, 바쁘신 분들 시간 뺏지 말고 얼른 움직이자며, 보잘것없는 짐을 남부여대하고서 준비된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제야 시그리드는 이민자들 입국 관리한다고 나왔던 것이 어느새 사정 청취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지난번 첫 번째 이민선 이후로 벌써 세 번째. 매번 나오는 이야기는 비슷하였으나 그만큼 절절하였기에, 늘 이렇게 시간을 끌곤 했다.
“엇,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요. 다른 장관분들은...”
“후스 각하를 비롯해, 다들 일찌감치 부두로 내려와서 일을 돕고들 계십니다.”
악천후로 인해 선단에서 낙오했던 이민선 한 척이 또 막 입항하려던 차였다.
“언뜻 듣기로 다들 사정은 비슷한 모양이더구나. 유럽의 농노보다 신대륙의 사실상 농노가 낫다니, 당연하면서도 안타까운 일이다.”
디폴트 따라 나타난 후스의 평이었다.
“이게 다 교회가 제때 개혁을 이루지 못해 벌어진 일이 아니겠느냐. 사제이자 신학자로서 부끄러움을 면할 수 없구나.”
시그리드와 마찬가지로 독일어에 능통했던지라, 후스 또한 농민들의 하소연을 얻어듣기도 하고 직접 캐묻기도 했던 것이다.
“교회 때문이라고? 그게 무슨 소리요?”
무지렁이들과 교분 나누는 데는 별 관심이 없어, 옌스와 함께 구석에서 적당히 시간 때우다 나온 플레톤이 물었다.
“만약 교회가 지난 일천여 년간 모든 통치자와 피치자들을 진실한 신앙으로 이끌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통치자와 피치자가 모두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옳고 그름을 분간할 수 있을 테니, 교화된 자들은 스스로 올바름을 따를 것이요, 그러지 않은 자들도 상하귀천을 막론하고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하며 제 행실을 가다듬을 테니까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교회의 개혁은 너무나 느리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미 사람들 마음속에서 믿음의 빛이 꺼져가고 있으니,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그래서, 교회를 개혁하겠다고?”
“그렇습니다. 이민자들을 받아주지 않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밀려오는 사람들을 모두 받을 수도 없잖습니까.”
결국 사람의 귀하고 천함은, 사람의 흔하고 드묾에 따라 정해지기 마련. 모든 사람들이 강건한 전사였다면 기사는 귀하지 않았을 것이요, 모든 사람이 하나같이 총명했다면 학자 또한 귀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처럼 계속 일손이 몰려든다면, 신대륙 연합에 싹트기 시작한 정체성은 신대륙의 새로운 악덕으로서 뿌리를 내리게 되리라.
“물론, 그렇게까지 가기 전에 우리 신대륙 연합이 먼저 버티지 못하고 한바탕 내분에 휩싸일 공산이 더 크겠지요.
처음 한두 번이라면 모를까, 이번 같은 이민 대란이 계속 이어진다면 저들의 영민들이 유출되는 것을 참지 못하고 유럽 군주들이 뭔가 제재를 가해올지도 모르고요.”
다들 비슷한 결론을 스스로 내리기에 충분한 지성과 경험을 지닌 사람들이라, 후스의 말에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방법이 떠오르신 건가요? 언뜻 듣기에 교회 개혁이랑 이 이민자 사태는 결이 다른 것 같은데요.”
시그리드 옆에 자연스레 모여든 다른 각료들. 그들을 대표해 시그리드가 물었다.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란다. 오히려, 나와 다른 신앙의 동료들이 이 땅에 온 까닭을 현실로 옮길 때가 된 것이지.”
국가대사를 논하기에는 영 기품이 없는, 부둣가의 한산한 공터. 그러나 기품 없기로는 그들이 회의실로 쓰는 시그리드네 집 거실도 마찬가지였기에, 장관들은 딱히 개의치 않았다. 후스의 다음 말을 숨죽이며 기다릴 뿐.
“이 땅에 온 까닭이라면... 설마?”
“모두가 성경 말씀을 알게 된다면, 그때는 착취당하는 이들도 성경의 가르침으로써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요, 저도 모르고 착취에 동참한 이들도 부끄러움을 알고 약자의 편에 서게 되지 않겠니?”
그간 플레톤이 스스로 논쟁을 몰고 다니는 것만 본 사람들은, 항상 플레톤 곁에서 차분하게 딴죽만 거는 후스야말로 플레톤이 예순 평생 일으킨 모든 논쟁보다 더 크나큰 분란을 보헤미아 땅에서 일으킨 바 있음을 망각하기 쉬웠다.
“아직 보헤미아와 잉글랜드, 두 곳의 글로 신약성경을 완역한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지금부터 예산과 시간을 들인다면 곧 독일어와 프랑스어도 가능할 것이다.”
“워워,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성경을 속어俗語vernacular로 옮겨서 펴내시겠다고요?”
명색이 사제인 상무장관 옌스가 끼어들었다. 물론 그 신심은 콜그림이 교회의 신을 믿는 것만큼이나 돈독하였기에, 성경의 번역 자체에 트집을 잡지는 않았지만.
“모르고 계셨소?”
“아니, 알고는 있었지만... 지금 같은 민감한 시기에 그랬다가는 파장이 작지 않을 겁니다.”
옌스의 걱정에 플레톤이 맞장구를 쳤다.
“일리가 있구만. 후스 그대네 사람들은 ‘그럭저럭 봐줄만은 한 이단’ 취급 아니었소? 까딱 잘못하면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이단’으로 다시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지. 특히, 우리 신대륙에 황금이 있다는 게 밝혀진 지금은 더욱 그렇고.”
“저들이 우리를 침공할 것이라고 보십니까?”
국방부 장관 지슈카가 플레톤에게 물었다. 플레톤이 ‘나야 모르지’ 하며 어깨를 으쓱하는 사이, 옌스가 대신 답해주었다.
“굳이 침공할 것도 없이, 우리 그린란드 회사의 모피나 담배를 사들이지 않겠다고만 선언해도 충분한 타격이 될 겁니다. 잉글랜드 같은 경우에는 아예 바닷길을 막고 우리 배를 약탈할지도 모르지요.”
“무역제재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호국경 각하. 흠, 처음 듣는 말인데 꽤 적절한 표현이군요. 아무튼 우리 신대륙 연합 사정을 생각하면 그 정도만 돼도 꽤 큰 타격을 입게 될 겁니다. 황금이 있다고 해 봤자 그걸로 뭘 살 수도 없고, 들고 건너가다가 약탈만 당한다면, 영 곤란하게 되겠지요.
솔직히 말씀드려 저는 신학에는 그리 밝지 않습니다. 쾰른 대학에서도 사실 그쪽엔 별 관심이 없었고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번역한 성경을 출판해서 흩뿌린다면 우리 연합의 번영을 질투하는 모든 군주들에게는 아주 좋은 먹잇감을 던져주는 꼴이 될 겝니다.”
그렇다고 옌스에게 무슨 뾰족한 대안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절망한 농민들이 마지막 희망 하나를 품고서 바다 건너에서 무턱대고 건너오는데, 유럽의 삶이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지게끔 돕는 것 외에 이민의 물결을 늦출 방법은 없었다.
그렇다고 이 물결을 그대로 받아내자니, 당장 삼사 년 내로 계약직 하인들의 인구가 정착민을 추월하게 생겼다는 게 문제였다³.
“보헤미아에서 후스 선생님과 나눈 이야기도 있고... 이제 와서 성경 번역을 그만두라 하는 것도 옳지 못한 일이겠지요.”
결국 옷차림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 이 자리에서 가장 아랫사람처럼 보이는 시그리드가 가장 높은 호국경으로서 결정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각하... 무역제재라고 아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어차피 지금 당장 번역된 성경을 유럽에 풀 것도 아니잖아요. 그 전에 최대한 대비를 해야지요.”
“대비라고요?”
“네. 바다 건너가서 인삼 팔아야죠. 그러면 아무리 유럽의 군주들이 대서양을 꽉 틀어막는다 해봤자 소용이 없게 될 테니까요. 원래 하려고 했던 일인데, 이제 거기에 시간 제한이 걸렸을 뿐이랍니다. 한 삼 년이면 충분할까요?”
이미 계산을 다 마친 시그리드가 차분하고도 태연하게 말했다. 후스와 플레톤은 그래야 시그리드답다는 양 고개를 끄덕이고, 옌스는 두리번거리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때 시간은 대략 오후 2시경이었다.
즉 지구 반대편 어느 고을에서는 축시丑時가 끝날 무렵.
유배지 남원의 침소에서, 무언가 자신에게 엄청난 일거리가 던져질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을 받은 황희黃喜는 땀 흥건한 채로 벌떡 일어났는데, 시그리드는 알 턱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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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해 연안의 습지들은 교통이 불편하고 토질이 척박했기에, 중세를 거치면서도 딱히 봉건질서에 편입되지 않고 자치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를 ‘프리지아의 자유Frisian Freedom’이라고도 부르지요. 그러나 중세 말, 농노제가 약화되면서 역설적으로 이들 습지의 자치공동체들은 근처의 권력에 예속되게 됩니다. 중세 말 서유럽의 농노제 약화는 자발적인 변화라기보다는 사회적 혼란과 인구감소, 기후변화로 인한 것이었고,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미약한 행정력을 총동원해 농노제 해체를 막아보려 노력하곤 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늪지의 ‘공짜 농노’들은 매력적인 정복 대상이 되었지요. 그 결과 15세기가 되면, 디트마르셴을 제외한 대부분의 늪지 자치공동체는 정복당하거나 외부와의 투쟁 도중 마을 유지가 영주를 자처하게 되는 등 점차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디트마르셴은 오히려 외부의 침공을 수 차례 물리치면서 본격적인 농민공화국으로 발돋움하는데, 이러한 행운은 절반은 자신들의 노력으로, 절반은 절묘한 입지 덕으로 얻은 것이었습니다. 디트마르셴과 접한 니더작센과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일대의 귀족들은 디트마르셴을 장악하고자 했지만, 바로 그 남쪽에 있는 브레멘과 함부르크의 상인들은 엘베 강 하구 늪지가 한두 귀족의 손에 장악되어 도시에까지 영향이 미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지요. 이에 따라 두 도시의 상인들과 한자 동맹은 물밑에서 꾸준히 디트마르셴을 지원했고, 한자 동맹이 몰락하고 전쟁의 패러다임이 바뀌기 시작한 16세기 초까지 디트마르셴은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2. 엘베강 이동의 독일인 토지귀족을 지칭하는 융커는, 본디 ‘귀족 자제Juncherre (조금 의역하면 ‘도령’)’라는 표현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이들은 중세 동방식민운동을 통해 형성된 대농장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 지역에서는 서유럽과 달리 장자상속이 보편적이었기에 대대로 토지귀족 신분을 유지하며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원 역사에서 이들은 2차대전 패배로 독일이 동프로이센을 상실하기 전까지 세력을 유지하며 프로이센의 지배 계급을 이루면서 독일사에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3. 질병과 학살로 인해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인구가 빠르게 줄어들자, 이를 대체하기 위해 흑인 노예를 들여오기 시작했다는 통념은 절반만 맞습니다. 이는 17세기 시점에서 같은 유럽인들을 사실상 농노로 싸게 부려먹는 쪽이 굳이 서아프리카 해안을 거쳐 흑인 노예를 데려오는 것보다 경쟁력이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소빙기가 절정에 달하고 14세기 말에 비견할 만한 사회적·정치적 혼란이 닥치면서 ‘남아도는’ 인력이 많았던 당대 유럽의 상황도 관련이 있었겠지요.
예컨대 1660년 한 해 동안 영국령 자메이카에 도착한 흑인 노예의 수는 5백 명에 불과했던 반면, 같은 해 백인 하인들은 3천 명이 유입되었습니다. 주로 도시 빈민이나 만만한 아일랜드인, 정치범(당시 잉글랜드는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의 독재 하에 있었습니다)들로 이루어졌던 이들 하인들은, 운 좋게 뉴잉글랜드로 향해 계약 기간을 무사히 보내고 자유민으로 독립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서인도제도의 플랜테이션에서 흑인 노예와 거의 같은 열악한 여건 속에서 혹사당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후 개척이 진행되어 아메리카 대륙 내의 노동력 수요가 백인 하인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짐에 따라, 흑인 노예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더 높아지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까지도 유럽인들이나 동아시아인들이 계약직 하인으로 아메리카 대륙을 밟게 되는 일은 계속 이루어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