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지막 바이킹-94화 (94/116)

캘리포니아를 꿈꾸며 (2)

22. 캘리포니아를 꿈꾸며 California Dreamin' (2)

유럽 땅에서 자행되고 있는 폭정, 그로 인해 신대륙으로 몰려드는 값싼 인력.

각국 언어로 번역된 성경 간행을 앞당겨, 유럽의 윤리의식을 제고함으로써 폭정과 인력의 과다한 유입을 동시에 해결하자는 후스의 제안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에게는 무릎을 탁 치며 그 지혜에 감탄할 법한 묘책이었다.

“설마 시그리드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제발 아니라고 해다오.”

얀 지슈카와 디폴트 등, 그나마 상식적이라고 여겼던 사람들까지 후스의 주장에 고개 끄덕이는 것을 본 플레톤은, 그날 저녁께 시그리드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

“네? 저도 제법 그럴듯한 계획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고작 성경 따위로 어떻게 빈민들을 구제하고 폭정을 종식시킨다는 게냐?”

“그게 서유럽에서는 가능한 일이라니까요?”

왜 유럽의 빈농들은 가파르게 오르는 세금에도 저항 한 번 못해보고 도망을 택했는가? 저항할 명분이 없다기보다는, 그런 명분을 스스로 찾을 방도가 없기 때문이었다¹.

그러나 시그리드는 후스가 내건 기치 하에 모여든 보헤미아의 빈민들을 보았다. 그들의 고통과 설움을 논리로 자아낼 언어만 존재한다면, 지식이 부족할 뿐 어리석지는 않은 유럽의 평범한 사람들은 마침내 빼앗아가기만 하는 통치자들에게 항변할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통치자들이 바보가 아니라면, 그때부터는 적어도 세금을 거두는 만큼 백성들에게 뭔가를 나눠줘야 한다는 것을 깨우치게 될 것이다. 지금 유럽의 정세 하에서, 농민봉기의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곧 주변의 승냥이 같은 이웃들에게 제 목덜미를 드러내는 것과 같은 꼴이었으니.

“아무리 그렇다 쳐도...”

“솔직히 말씀하셔도 좋아요. 후스 선생님이 모든 공을 다 가져가시는 게 싫은 것 아닌가요?”

정곡을 찔렸는지, 플레톤은 갑자기 헛기침을 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근처에는 플레톤이 시그리드에게 언변에서 밀렸음을 증언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사실 처음부터 그럴 의도로 진행한 일은 아니었지만, 마침 헌법을 제정하는 일이 남아 있지 않던가요? 이왕 유럽 군주들에게 밉보일 각오로 하는 일이라면, 헌법을 번듯하게 제정해서 유럽에 경각심을 줄 수도 있겠지요.”

“아, 헌법! 그렇지. 흠흠, 나야 항상 기억하고 있었지.”

“물론 그러셨겠죠.”

선거가 끝나자마자 이 계약직 하인 사태가 터져버리면서, 어느새 몇 년 전부터 꾸준히 논의되었던 안건 중 하나였던 헌법의 건은 뒷전으로 밀려 있었다.

총선에서 백송고리당도, 가재당도 압승을 거두지 못한 탓이 컸다. 당장 계약직 하인을 데려와 광활한 신대륙을 개간한다는 공동의 급선무가 있는 마당에, 굳이 상대편과 타협해가며 헌법을 제정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두 당 사람들이 너무 욕심을 부리지 않고 타협에 응하도록 할 수도 있을 거에요. 나중에 수정할 수 있다는 조항만 포함하면 말이지요.”

“하지만 그랬다가는 아무런 내용 없이 두루뭉술하게 좋은 문구만 가득한 헌법이 생기게 될 걸세.”

“그게 헌법 아닌가요? 그 두루뭉술하게 좋은 것들을 어떻게 현실과 타협해가며 실현할지 논하는 게 헌법 아래에 있는 다른 법들이고요.”

그 옛날 헌법이라는 이야기를 처음 꺼냈을 적 풀어놓았던 헌법의 정의를 재차 부연하는 시그리드였다.

“뭐, 그렇다 치자꾸나. 성경과 헌법이라... 한쪽은 신앙, 다른 한쪽은 이성으로 유럽을 건드린다는 말이로군. 어디서 들어본 얘기 같은데?”

“그런가요?”

“그래, 네가 쓰고 있는 검은 책 주해본 한 구석에 나와 있던 것 같구나.”

신대륙 연합 중진들 중 그 책에 이름이 등장하는 사람이 플레톤 저도 아니요, 딱 지슈카 한 사람뿐이라는 데 삐지기도 했던 플레톤이었지만, 결국 자존심보다 호기심이 앞선 바람에 시그리드가 그 주해본을 한 단락 완성할 때마다 제게 보여달라며 재촉하곤 했다.

“뭐였더라, 그 사회주의라는 게 그렇게 퍼진 것 아니냐? 성경 대신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쓰긴 했지만.”

오지 않을 미래의 마르크스가 듣는다면 분개할 법한 비유였지만, 정 그렇게 억울하다면 오백 년쯤 일찍 태어났어야 했을 일이었다.

“사회주의라...”

“아무튼 무슨 말인지는 잘 알겠다. 헌법이라. 한 번 해보지, 뭐. 어차피 나중에 바꿀 수 있다는 조항 하나만 들어가 있으면 괜찮을 것 아니더냐?”

이번에는 오지 않을 미래에서 프랑스 헌법의 초안을 닦았던 국민의회 사람들이 남몰래 고개 끄덕였을 법한 얘기를 하는 플레톤이었다.

플레톤이 별 생각 없이 거론한 사회주의 이야기 때문에 깊은 생각에 빠진 시그리드는, 태어나지도 않은 라파예트 후작이나 마르크스를 떠올릴 일은 없었지만.

그날 해가 지기까지 도착한 이민선만 세 척. 하나같이 유럽의 곤궁한 삶을 벗어나려는 일념으로 그들이 알던 모든 것을 뒤로하고 배에 오른 빈민들로 가득했다.

빈민이라고 죄다 선량한 것은 아닌지라, 지난날 우애의 도시에 기항했던 이민선의 잉글랜드 빈농들이 그러했듯 스리슬쩍 자유민 행세를 하려다 걸리는 사람도 있었다.

‘모아둔 재산으로 뱃삯을 치르고 이민선에 탔습죠. 제 가족들 몫까지 모두 치렀습니다.’

‘그럴 리가? 여기 명단에는 자네가 마사의 포도밭으로 가게 되어 있다고 적혀 있는데. 자네 이름이 가이 브러시Guy Brush 아닌가?’

‘어, 그게, 그러니까... 앗, 저기 보십쇼! 머리 세 개 달린 원숭이입니다²!’

‘뭐? 원숭이? 대체 어디에... 어이! 어디 가는 게냐! 잡아라! 저놈 잡아!’

같은 유럽인들을 사실상 농노로 부려먹겠다는 개척민들이나, 그 계약 덕에 뱃삯 한 푼 안 내고 신대륙에 도착하자마자 도망칠 궁리부터 하는 계약직 하인들이나, 결국 다 같은 욕심과 희망을 가지고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어느 한쪽을 무작정 옹호할 수도, 폄훼할 수도 없으니, 모두의 권익 보호를 위해 힘쓰겠다는 정치인다운 수사로 개척민들과 하인들 양쪽을 다독이는 게 시그리드가 당장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먼저 이권을 손에 넣은 자와 나중에 그것을 빼앗고자 하는 자, 멸시하는 자와 질시하는 자. 이번 사태를 어떻게 해결하든, 언젠가는 이 대립이 다시금 연합을 덮쳐올 것이요, 그 갈등을 해결할 방식에 따라 연합의 모습 또한 바뀌게 될 터였다.

아무 생각 없이 플레톤이 꺼낸 사회주의 이야기에,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멀어지는 좋은희망 항구를 바라보는 시그리드였다.

이민자 유입 사태를 어떻게 처리하든, 유럽 군주들에게 밉보이지 않고 사태를 해결할 길은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물론 에릭에게 부탁하여 함부르크에 찾아오는 빈민들을 죄다 덴마크 융커들의 농노로 삼는다는 식의 해결법도 있기는 했지만, 그런 방법을 거론할 만큼 아직 현실에 찌들지는 않은 신대륙 연합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지금 당장 해야 할 일, 신대륙 연합이 유럽 없이도 번영할 수 있는 새로운 판로를 찾아나서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연합의 호국경으로서 마땅히 전념해야 할 바였다.

정화와 함께 아카풀코로 찾아가, 슬슬 현장에 도착했을 타이노 원주민 인력과 이미 한창 일하고 있을 명나라 사람들을 ‘독려’하고,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태평양을 횡단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자 시그리드는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친애하는 우리의 호국경 각하께 이 새로운 배를 선보일 수 있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 배의 바스크인 선장, 도노스티아Donostia 사람 벨트란이 심각한 눈빛으로 앞날을 고민하는 시그리드에게 찾아와 말을 걸었다.

“호국경 각하께서 하사하신 이름대로 제트Jet라는 이름이 붙은 이 배로 말하자면, 최신 기술을 아낌없이 적용하여 신대륙 실정에 맞게 개발한 범선으로서...”

시키지도 않은 신형 범선 홍보를 굳이 벨트란이 하는 까닭이 무엇인지는 족히 짐작할 수 있었다.

좋은희망의 바스크인 조선소도 이번에 계약직 하인들을 꽤 많이 고용했다. 얼마 전에 오냐즈Oñaz 가문이 내전에서 패배하면서, 그 아래 있던 하급 귀족 – 예컨대 로욜라Loyola 가문 -이나 부농들 중에 영 궁한 지경에 몰린 자들이 적잖았던 것이다.

보나마나 벨트란은 신대륙 바스크인들의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는 기푸즈코아의 미콜라스로부터, 시그리드가 계약직 하인 고용을 영 좋지 않게 본다는 것을 귀띔받은 것일 테다.

시그리드가 뻔히 알고 있는 이 신형 범선 이야기를 굳이 이렇게 미사여구 곁들여가며 설명하는 것도, 저들 조선소가 이렇게나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 부디 저들의 노동력 충원은 문제삼지 말아달라는, 소박한 처세술의 일부이리라.

“여기 돛을 보시면, 노블의 돛과 달리 용골과 같은 방향, 즉 앞뒤 방향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실 겝니다.

이 종범장fore-and-aft rig은 카스티야나 루시타니아(포르투갈)에서도 이제야 막 쓰이고 있는 최신 기술인데, 호국경 각하의 지혜로운 통치 하에서 모두가 재능을 자유롭게 꽃피울 수 있는 이곳 신대륙 연합이기에 이토록 과감하면서도 혁신적인 설계가 가능했지요.”

권력자에 대한 아첨이라는, 구대륙스러운 현상이 이곳에서도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시그리드가 확신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벨트란의 홍보는 이어졌다.

“네, 고마워요. 이 함선의 성능이 어떠한지는 저도 잘 들어 알고 있습니다. 처음 계획했던 것보다도 훨씬 빠르다는 얘기도 들었고요.”

조선소 사람들이 상신한 신형 범선 건조 계획을 통과시키면서, 제트기에서 따온 ‘제트’라는 이름을 붙여준 이가 바로 시그리드였다³.

“아아, 저희 조선소의 모든 일에 이토록 뜨거운 관심을 보내주시니, 선장이자 조선소에 지분을 가진 한 바스크 뱃사람으로서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씀 올리자면...”

그러나 벨트란은 이미 지시받은 바가 있었는지, 아니면 그냥 눈치가 없는 건지, 계속 저의 설명을 이어갔다. 아무 관심 없는 척하며 옆에서 듣고 있는 정화와 하산만 좋은 일이었다.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자 신대륙에 찾아온 사람들이, 마침내 자신의 욕망을 본격적으로 드러내면서 생겨나고 있는 온갖 빛과 그림자.

그 명암 모두를 몸으로 겪고 머릿속으로 계속 떠올리며, 시그리드는 고민 속에서 남쪽으로 향했다.

벨트란의 장담대로, 제트선은 노블보다 훨씬 빠른 속도를 자랑했다.

시그리드 일행은 내려가는 길에 잉글랜드인들이 정착한 악어습지 반도 동해안의 정착지도 망원경으로 정탐하고, 대단한강 하구에 세워진 차바누샤아 노인의 ‘새로운출발’(뉴올리언스) 마을도 잠깐 들린 뒤 마침내 투슈판에 닿았다.

포로로 잡힌 용병들의 무기와 갑주를 처분하여 겨우 그 피해에서 벗어난 투슈판에는, 또 다른 욕심의 산물 여럿이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이전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잘 닦인 길이었다.

길이 편리하면 편리할수록 더 많은 상인과 순례객들이 찾아오기 마련이요, 바다 건너에서 또 이방인들이 쳐들어올 경우 보다 용이하게 도망칠 수 있다는 이치를 – 아무래도 후자가 더 중요했다 – 깨달은 투슈판의 귀족들은, 평민들을 꼬드겨 도로를 내기 시작했다.

이미 내륙에서는 도로를 내어 통행료를 걷겠다는 ‘무시무시한 음모’가 진행 중이었고, 메시카인들의 세력이 닿는 아나왁 중심부의 호숫가 분지도 아직은 도로의 잔돌을 치우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도로의 정비가 이루어지고 있다 하였다.

“이미 사람이 끄는 와칸(수레)이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목장에서 키우는 말이 늘어나면, 그때는 마차도 흔히 보이게 되겠지요.”

아카풀코로 향할 일꾼들을 인솔하러 찾아왔던 틀라카엘렐은, 타이노 일꾼들과 비슷한 시기에 시그리드가 나타나자 잠깐 당황하긴 했지만 금방 평온을 되찾았다.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애초에 다시 한 번 공석이 된 시와코아틀 – 아마 시그리드로 분장해야만 한다는 직무상 요구사항 탓이 클 것이다 – 자리에 자신이 강제로 앉혀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도시를 비우고 이곳으로 출장을 나온 것이었으니.

“마차라고요?”

“네. 요새 귀족들 사이에서는 부르는 게 값입니다. 네사왈코요틀 전하가 말을 탈 줄 안다는 사실은 온 아나왁에 퍼져서 틀라토아니들과 피필틴(귀족) 모두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데, 정작 공을 들여서 말 타는 재주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드물었거든요. 그러니 마차야말로 모두가 바라는 해법인 셈입니다.”

틀라카엘렐 자신도, 마차 타고 이곳까지 왔더랬다. (영 안색이 좋지 못한 것으로 보아, 도로 사정이 아직 마차가 제대로 다닐 만큼은 되지 못한 듯했다. 그놈의 허세가 무엇인지, 멀미에 시달리면서도 억지로 마차를 계속 타고 왔던 것이리라.)

“잘 된 일이네요. 덕분에 아카풀코까지 가는 길이 한결 수월해지겠어요.”

“아카풀코라. 독촉을 위해 가는 것인지요?”

“독촉까진 아니지만... 아, 생각해보니 독촉 맞겠네요.”

합스부르크의 프리드리히가 보내온 티롤 광부들은 이미 메시카인 안내인들과 함께 왁샤칵의 금광을 탐사하러 내륙 계곡으로 들어갔을 것이었다. 그러니 아카풀코에 지금 남아 있는 이들은, 명나라 사람들과 소수의 바스크 조선공들이 전부일 터.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시그리드와 정화가 나타난다면, 명나라 사람들 입장에서는 독촉이 아닐 수가 없었다. 꼭 시그리드가 입 밖에 내지 않는다 해도, 얼른 인삼을 그득 들고 황제에게 돌아갈 생각에 가득 찬 정화가 알아서 뱃사람들을 닦달해줄 것이었다.

“타이노 일꾼들과 함께 아카풀코로 가게 되면, 작업에 속도가 붙을 거에요. 한동안 그쪽에 머물면서, 가급적 빠르게 아카풀코 항이 제 기능을 다할 수 있게끔 힘을 북돋아줄 생각이랍니다.”

“타이노 일꾼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틀라카엘렐이 살짝 걱정하는 투로 화제를 돌렸다.

시그리드도 혹시나 일꾼들이 너무 조금 모였다던가, 아니면 이곳에 적응을 못 하고 기다리던 중에 벌써 사고를 냈다던가 하는 이야기일까 슬쩍 염려했는데, 나오는 얘기는 영 달랐다.

“이렇게나 많이 모았다고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수의 타이노인 일꾼들. 그리고 일전의 그 뚱한 표정으로 시그리드를 맞이하는 마보였다.

“생각보다 추장들은 그 인삼이라는 약초를 좋아하더군요. 기꺼이 앞다투어 일꾼들을 알선해줍디다.”

장신구를 선물로 주고받으며, 친목과 함께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곤 하던 타이노 추장들에게 인삼이라는 약초는 꿈의 교역품이었다. 한 번 교환한 장신구는 그대로 남의 손에 남기 마련이지만, 약초는 먹어 없애면 그만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넘긴 선물이 다시 다른 추장이 생색 내는 데 쓰일 염려도 없겠다, 살짝 맛만 보아도 뭔가 기묘한 효험이 있는 게 느껴지겠다, 다들 변방의 작은 섬에서 왔다고 알려진 이 마보라는 사내와 신속하게 우정을 맺고자 하였던 것이다.

“거의 일천 명에 가깝다 보니, 이곳에 계속 데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슬슬 벅차게 되고 있었습니다. 지난 한두 달 동안은 도로 공사하는 데 가서 품을 팔았는데, 그것도 이제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더군요.”

틀라카엘렐이 마보 대신 설명해주었다.

그렇다면 굳이 이곳 투슈판에서 시간을 끌 것도 없었다. 여독을 풀 시간도 없이, 시그리드는 마보와 틀라카엘렐, 그리고 졸지에 세상 끄트머리 – 타이노 사람들 생각에, 그들을 둘러싼 바다는 곧 세계 전체였던 것이다 – 너머로 끌려온 타이노 일꾼들을 대동하고 태평양 해안으로 향했다.

“먼저 좋은 소식부터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호국경 각하의 말씀이 옳았습니다.”

현장사무소 소장이라고 할 수 있는 바스크 사람 프란치스코 – 아직도 그린란드 연해에서 고래잡이를 하고 있는 그 프란치스코와는 동명이인이었다 – 가 시그리드를 맞이하자마자 말했다.

“제 얘기가요?”

“예. 연중 순풍이 부는 천혜의 항로가 있을 것이라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언제고 폭풍이 몰아치던 동녘정착지에서, 이런 폭풍이 왜 생기는지 욘에게 물어보았던 덕에 무역풍의 존재를 대략적으로나마 알게 된 시그리드는, 아카풀코에서 그 무역풍을 이용할 수 있을지 확인해보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었다.

“지금 보고 계신 이곳 조선소에서 겨우 먼바다로 나갈 수 있는 조그만 배 한 척을 만들어, 보름 정도 서쪽으로 항해해 보았습니다.

만약 각하의 말씀대로 이곳 아카풀코 주변의 바다에서 바람이 꾸준히 분다면, 그리고 똑같은 바람이 바다 건너편에서도 분다면, 분명 이 바람을 타고 이 태평양을 횡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⁴.”

지금 그들 눈앞에 펼쳐져 있는 대양의 이름은, 시그리드가 언제고 아무 생각 없이 ‘태평양’이라 부른 이래로, 그대로 굳어졌다.

이미 서쪽 대양(대서양)이 있는 판국에, ‘더 서쪽 대양’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는 영 무엇하였고, 그렇다고 몇몇 공용어 익힌 명나라 사람들의 주장대로 ‘동쪽 대양’이라 이름을 붙이자니 유럽에서 보든 신대륙에서 보든 서쪽에 있는 바다를 ‘동쪽’에 있다고 부르는 게 영 이상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쁜 소식도 있습니다.”

“어디, 맞춰볼께요. 일의 진전이 느리다는 건가요?”

“어찌 아셨습니까?”

“어, 그걸 알아보는 데 딱히 엄청난 통찰력이 필요하진 않을 것 같은데요.”

시그리드의 눈앞에는 실로 그림 같은 풍경 한 폭이 펼쳐져 있었다.

맑고 잔잔한 바다, 울창한 정글, 그리고 딱 작은 배 한 척 건조하고 정박하기에 적절한 정도의 조그만 항구.

그리고 그 풍경을 어지럽히고 있는, 어떤 일에서인지 세월아 네월아 드러누워 있는 명나라 사람들.

“아무래도 근로 의욕을 고취시킬 필요가 있을 것 같네요.”

시그리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대륙 반대편에서, 어지러울 만큼 마구 꽃피고 있는 사람의 욕망. 그것을 태평양 해안가에도 전해줄 때였다.

--- *** ---

1. 원 역사의 중세 후기 유럽에서, 농노제 해체는 결코 순조롭게만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흑사병과 전란, 교회의 권위 실추와 전반적인 사회적 혼란 속에서, 영주들은 어떻게든 농노들을 붙잡아놓으려 노력했고, 유럽의 곡물 수출 시장이 성장하면서 농장 경영의 수익성이 제고된 동유럽에서는 이러한 시도가 실제로 성공을 거두어 ‘제2차 농노제second serfdom’라 불리는 농노제 강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지요.

중세 후기에 들어서면서 어느 정도 지식과 여유를 가지게 된 농민층은 관습법에 호소하여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려 노력하기도 했지만, 많은 경우에는 단순히 인근 영지나 자유도시로 도망치는 방법으로 소극적이지만 효과적인 저항을 펼치곤 했습니다. 조직적인 정치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지식과 경험은 농민층 사이에는 거의 부재했기에, 이들이 자발적으로 하나로 뭉쳐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는 많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농민반란은 농민이 아닌 계층(몰락한 하급귀족, 신흥 시민계층, 종교적 지도자 등)의 주도 하에 다수의 농민들이 호응하는 형식으로만 이루어졌지요.

2. 게르만 인명 귀도Guido의 영어 버전인 가이Guy는, 가이 포크스Guy Fawkes의 화약 음모 사건(1605) 이전까지 잉글랜드에서도 널리 쓰였던 인명이었습니다. 현대 한국인들이 ‘완용’이나 ‘일성’ 같은 인명을 거의 쓰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로, 1605년 이후에는 거의 쓰이지 않게 되었고, 대신 ‘그놈’, ‘그 녀석’이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면서 오늘날의 보통명사 ‘가이’로 바뀌게 됩니다.

그린란드 바다코끼리 상아 무역의 몰락을 가져온 베네치아의 지중해 무역은, 원숭이나 사자 같은 아프리카 대륙의 동물들이 유럽에도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원숭이는 인간과 닮았으면서도 짐승의 범주에 든다는 점 때문에, 유럽 전역의 교회 미술과 조각 등에서 널리 쓰이는 모티프가 되었지요. 물론 ‘머리 세 개 달린 원숭이’는 그것과는 관련이 없는 패러디지만요.

3. 노블 선에 이어, 이번에는 스쿠너Schooner에 상응하는 신형 범선이 시대를 앞질러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유럽과는 여러모로 달랐던 아메리카 대륙의 항해 환경은, 새로운 형태의 범선들이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특히 17세기에 멕시코 만과 카리브 해에서의 항해를 위해 고안된 버뮤다 리그Bermuda Rig 종범장(세로돛)은 소형 고속 범선에 적합하여 빠르게 퍼졌고, 18세기에는 본디 16세기 후반 네덜란드에서 개발된 스쿠너가 신대륙 실정에 맞게 개량되어 어선과 여객선으로 널리 쓰이게 되었습니다. 스쿠너는 풍향이 일정치 않고 역풍도 자주 부는 연안항해에 특화된 범선이었고, 원 역사의 미국 동해안과 오대호ㅡ 뉴펀들랜드 주변 그랜드 뱅크스 어장에서 공히 널리 쓰였습니다.

4. 적도를 기준으로 위도 30도 이내에서 부는 바람인 무역풍은, 연중 일정한 풍향(남반구에서는 남동풍, 북반구에서는 북동풍)을 유지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형 특성상 중간 기착지가 많고 또 육지와 해양의 상호작용으로 각종 복잡한 기상현상에 노출될 수밖에 없던 인도양 및 동·동남아시아에서는 그 유용성이 제한적이었지만, 대서양과 태평양을 횡단하는 항로에서는 아주 긴요한 특성이었지요.

원 역사에서 무역풍은 15세기 초 포르투갈인들이 청어 어장과 목재를 찾아 점차 대서양으로 나아가면서 처음 발견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모로코 해안을 따라 남하하던 포르투갈 뱃사람들은 마침내 북위 30도선 이남으로 남하했고, 그 덕에 무역풍을 발견하게 된 것이지요. 콜럼버스의 대서양 횡단은 이때 발견된 무역풍에 힘입어 이루어질 수 있었으며, 훗날 마젤란의 세계일주와 마닐라 갈레온의 태평양 횡단 역시 무역풍 덕에 가능했습니다.

한편, 무역풍은 연중 일정한 방향으로 불기는 하지만, 작게는 엘니뇨와 라니냐 같은 주기적 변동, 크게는 전지구적 기후변화에 따라 그 평균풍속이 달라지곤 합니다. 예컨대 아카풀코-마닐라 사이를 오가는 편도 항로는 1590~1620년 사이에는 평균적으로 79일이 소요되었지만, 소빙기가 절정에 달했던 1640~1670년 사이에는 평균 123일이 소요되곤 했지요. 이는 마닐라 갈레온 무역의 수익성에도 큰 악영향을 미쳤는데, 마땅한 중간기착지가 없는 태평양 특성상 항해 시간이 길어진다는 것은 더 큰 배를 건조하고 무역품 대신 더 많은 식수와 식량을 실어야 한다는 것을 뜻했기 때문이었지요. 반대로 생각하면, 이제 막 소빙기 초반에 접어든 작중 시점에서는 17세기에 비해 훨씬 작은 배로, 훨씬 빠르게 태평양을 횡단할 수 있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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