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려보자꾸나 (4)
23. 그려보자꾸나 Imagine (4)
먼 옛날 욘이 해주던 이야기에 따르면, ‘금지된 도시Forbidden City¹’라고도 불린다는 자금성.
유럽의 도시들은 몰라도, 신대륙의 좋은희망 정도라면 거뜬히 그 안에 들어가고도 남을 법한 크기의 궁궐이었다.
대문 뒤에 다시 대문이 이어지며, 갓 올린 누런 기와가 황금마냥 번뜩이는 누각이 사방을 에워싸니, 시그리드조차 조금은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거 어째 불안한데요.”
통역이라는 명목으로 시그리드와 함께 불려가는 처지가 된 정화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소관이 진작에 이야기를 끊었어야 했습니다. 전하 한 분의 목숨만은 위태롭게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들이 예부에서 사실상 연행되다시피 할 때 주변을 가득 메우던 가열찬 대화의 내용을 생각해보면, 불안해하지 않기가 더 어려웠다.
백성을 위하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신대륙에 대한 무역 특혜와 자유무역 허용이라는 조건을 받아들여 달라고 유학자 관료들을 설득하려던 계획이, 어디서부턴가 어긋나 신대륙 연합의 정치제도에 대한 이야기로 빠진 지도 한참이 지났다.
명나라 관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황희에게서 속성 과정으로 배운 고사들을 인용해가며 설명하였는데, 어째 그것이 지나치게 효과를 거두는 듯하였다.
나중에는 정화마저도 거기에 빠져들어서, 정말로 시그리드의 ‘궁궐’이 일반 백성과 다름없는 통나무집이라는 증언을 하기까지 하였다.
그러자 관료들은 더욱 열광하며 그 궁궐의 좌우 너비는 어떠한지, 섬돌 계단은 몇 층으로 하였는지, 처마끝과 서까래는 어떻게 다듬었는지, 난방 대책은 어떻게 되는지를 물었다.
‘너비는 따로 재보진 않았는데, 한 칠십오 피트쯤 될 거에요. 계단 같은 건 따로 없고, 지붕도 그냥 통나무를 그대로 썼으니까 아마 따로 다듬지는 않았을 걸요? 벽난로가 있는 한데, 한겨울에 갑자기 추워지거나 하면 그냥 가죽 외투를 걸치곤 하고요.’
시그리드가 정직하게 대답하니, 이제는 저들이 대명 황제의 충실한 수족 그 이상을 꿈꿔서는 안 되는 처지임을 망각하고서 유학자답게 열광할 뿐이었다².
‘아니, 섬돌이 세 층도 아니요 아예 없다는 말인가?’
‘요임금께서는 날씨가 추울 때 사슴가죽으로 추위를 막으셨는데, 서왕모께서는 물개 가죽으로 막으셨구려!’
딱 그쯤에, 그간 조용히 있던 일꾼들 몇몇이 유학자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말을 끊었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어허, 어찌 잡역부들이 이 좋은 자리의 아름다움에 끼어드는가!’
분위기에 취한 탓에, 백성의 고혈로써 세운 자금성 바로 코앞에서 요임금의 소박한 궁궐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던 호부상서 하원길이 목소리를 높였다.
‘논의의 주제가 정사의 옳고 그름에 닿았습으니, 이제 이 자리의 미추美醜를 가릴 분은 천하에 단 한 분뿐, 바로 저희 미천한 이들이 모시는 황상 폐하십니다.’
‘잡역부’들이 각각 가짜 수염을 뜯어내며, 자루에 ‘동창’ 두 글자가 적힌 검을 내밀어 보이니, 그제야 세 아문의 상서 이하 모든 신료들의 얼굴은 시그리드 머릿결과 같은 색을 띄게 되었다.
‘두 분께서는 따라오시지요. 황상께서 알현을 허하셨습니다.’
그 ‘두 분’이 누구인지는 굳이 물을 것도 없었다. 또한 알현을 허하였다는 말이, 지금 즉시 자금성에 들라는 뜻임도 명명백백하였다.
그리하여 그 즉시 서슬 퍼런 동창 환관들에게 이끌려 자금성 장안좌문長安左門에 들었다. 옥과 대리석으로 깐 포석은 끝없이 이어지는 듯하였으나, 모든 길이 그러하듯 언젠가는 종착점에 이르기 마련.
마침내 지금껏 수없이 지나친 것과 별 차이 없는, 화려하고 웅장하되 딱히 두드러지지는 않는 전각에 이르러 두 사람을 인도(혹은 압송)하는 동창 환관의 발걸음이 멈췄다.
“이르렀나이다.”
지금 멈춰선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전각 안쪽의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탁할지언정 가볍지는 않고, 가라앉아 있을지언정 그 바닥은 드러나지 않는 목소리.
“들라 하라.”
대명 천자 영락제의 옥음이었다. 동창 환관들이 두 사람 몸을 수색하려던 차, 다시금 황제가 말했다.
“오늘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어찌 예를 따지랴?”
곧 그대로 되었다.
정화는 소름이 돋는 것을 견뎌내며 조심스레 시그리드에게 그 옥음을 전해주었다. 그 소름 역시 시그리드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황엄이 음모를 꾸미고, 조선 사신 황희와 예부·호부·형부가 공모하였으며, 시그리드와 정화는 그 음모를 파훼하고자 예부에 출두하여 문관들을 잔뜩 홀렸다.
그러나 이제 그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이 되리라.
오직 한 사람의 뜻에 따라.
“그러므로 그대로 들지어다.”
황제의 뜻대로 되었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았건만, 전각 안쪽은 등불로 화려하게 밝혀져 있었다. 큼직한 대청 한가운데, 높은 의자에 앉은 노인이 있었다.
눈은 흐리고 얼굴은 삭았으며, 머리는 시그리드처럼 하얗고 용모는 그 아비 주원장을 닮아 보잘것없었다. 평복하고 저자에 나간다면, 차라리 그를 호위하는 동창이나 금의위 사람이 더욱 제왕다워 보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이 황제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전각의 기둥과 지붕, 바닥과 섬돌, 바깥 자금성의 모든 벽과 관문이 마치 노인과 한 몸인 것처럼, 노인의 위엄은 그 앞에 선 모두를 억누르는 듯하였다.
“짐이 근래 보고 들었던 것 중 가장 즐겁고도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만들어주었으니, 어찌 포상하지 않으리오? 하여, 이처럼 불러들였으니 너 서씨는 두려워 말지어다.”
그러나 황제의 용안은 여전히 무관심할 뿐이요, 목소리에서는 한 방울의 기꺼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
“짐은 네 바라는 바를 모두 이루어줄 것이다.”
“네?”
너무나 의외였기에, 시그리드는 그만 황제의 위압감이고 뭐고 다 잊고 얼 빠진 말투로 반문하고야 말았다.
영겁 같은 찰나 동안, 이 반문을 통역할까 말까 고민하던 정화는 결국 통역을 하고야 말았다.
오랑캐 계집이 무엄하다는 소리가 좌우에서 나올 법도 하였으나, 그 누구도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서 있을 뿐. 앞서 황제가 예법을 따지지 말라 한 것을 불변의 도리처럼 여기기 때문이리라.
“너는 입조라는 허명을 내세워 짐이 내리는 하사품을 얻고, 나아가 중원의 풍족함에 기대어 이익을 얻고자 바다를 건너왔다 하였다. 그렇지 않더냐?”
“그 말씀이 맞기는 한데요...”
“그리고 짐은 그것을 그대로 이루어줄 것이다. 마치 네가 진심으로 천조에 귀의하여 책봉을 받고 국왕의 인을 받은 것과 같이 대하고자 한다.”
입조를 빙자해 자금성 금고를 털고 인삼 장사의 토대까지 마련하겠다는 시그리드의 야심찬 생각. 그것을 훤히 알면서도 아무런 대가 없이 모두 이루어주겠다는 뜻이었다.
시그리드 얼굴에 ‘대체 왜 그러시는 건가요?’가 그대로 쓰여 있었는지, 황제는 처음으로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너희의 그 소박하고도 우스운 술수가 중화에 하등 이익이 되지 않기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너희의 술수대로 베풀어줄 것이니라.
네가 북경에서 저 우스꽝스러운 황엄의 음모를 맞닥뜨리고서 낸 계책이 무엇이든, 그것은 중요치 않다. 네가 바라는 바는 오직 황제가 뜻하였기에 이루어질 것이요, 또한 훗날 교역이 끊어진다면 이 역시 오직 황제의 뜻에 의해서일 것이다.”
시그리드의 이어질 반문을 관화로 옮기고자 기다리던 정화는, 황제의 답변으로부터 무언가 익숙함을 느꼈다.
지금껏 그가 하서양을 주청하였을 때, 바다 너머 오랑캐들로 하여금 대명에 신속케 하겠다는 둥, 먼 서쪽에 나아가 불로불사의 비방을 얻어오겠다는 둥 구구절절이 고하였을 때면, 황제는 이를 큰 고심 없이 곧장 윤허하곤 했다.
바로 그때 정화가 느꼈던 묘한 석연찮음. 그것이 지금도 느껴지고 있었다.
“황상 폐하, 미천한 신 화가 감히 여쭈옵나이다...”
정화 자신도 말하고 나서야 제 입이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다행히 황제는 노여워하지 않고, 오히려 정화가 하고자 하였던 말을 대신 받아주었다.
“그렇다. 화야, 내 너의 뜻을 모르는 줄 알았더냐? 너의 이른바 하서양을 내 윤허한 것도 같은 이치에서였느니라.
나는 얻을 것이 없음을 알면서도 그토록 많은 재물을 누차 바다 위에 흩뿌렸다. 소위 동서양의 오랑캐 나라들이 진심으로 신복하지 않았음을 알면서도, 사절을 자처하는 무리들이 입조할 때마다 그들을 환대하였다.
화 너의 하서양이, 수십 번을 거듭하여도 끝내 사서에 한두 줄 기록되고 끝날 것임을 알았으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를 윤허하였다.”
대체 어째서인가?
황제는 재차 입을 열어 답을 들려주었다. 시그리드를 향하는 것이 아니요, 지금껏 저를 충실히 모셔온 가신, 그 사심마저도 저의 부귀영화가 아닌 대명의 앞날을 위한 것이었던 정화를 위한 답이었다.
“무엇이 아직 족히 위대하지 못한 대명을 참으로 위대하게 만드는지, 그것을 마침내 깨우쳤을 뿐이다.”
내키지 않아하는 정화의 옆구리를 찔러 통역을 들은 시그리드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무런 의미 없는 일에 국력을 허비하는 것이 이 나라를 위대하게 만드는 길이라는 말씀이신가요?”
“과연 총명하구나! 바로 그러하다.”
황제의 입가에 소소하게나마 즐거움이 어린다.
“명년에 짐은 다시금 수십만 대군을 모아 막북으로 친정할 것이다.
달단 수괴 아로태阿魯台, Aruqtai는 그런 둔중한 군대로는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중원 사람들이 알고, 아로태가 알며, 짐 또한 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짐은 수십만 대군을 거느리고 막북으로 향할 것이다. 짐이 누차 하서양을 윤허한 것, 그리고 지금 서씨 너의 무엄한 계책에 그대로 응해주고자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니라³.”
교활한 아로태는 황제의 군사가 북경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오자마자 어딘가로 피신할 것이다.
그리고 깨달으리라. 황제도 이번 원정으로 자신을 잡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는 않고 있다는 것을. 그저 아무 이유 없이, 아무런 목적 없이 수십만 대군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온 초원과 그 너머에 보이기를 바랄 뿐임을.
겉으로는 어리석은 한인들을 따돌렸노라 저들끼리 축하하면서도, 속으로는 그 힘과 권세를 두려워하고 또 질투할 것이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을, 아무런 실익이 없는 짓을 사람 하나의 뜻에 따라 벌일 수 있기에, 대명은 진정으로 황제의 나라인 것이다.”
중원의 끝없는 물산과 인구를 오직 황제 한 사람의 뜻만으로 움직일 수 있기에, 황제는 세상의 그 어떤 오랑캐 군주들과 달리 이익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리고 이익을 따지지 않을 수 있기에, 대명은 진정으로 위대하다.
영락제는 이것을 천하 만방에 드러내 보이기를 원하였다. 소위 강대하다는 자들이 그 위업을 보고 절망하기를 바라면서.
“고작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숱한 국민들을 괴롭게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이것이야말로 백성을 위하는 길이요, 대명을 위대하게 만드는 길이요, 장차 닥쳐올 난세를 대비하는 길이다.”
멍하니 주군의 말을 듣던 정화가, 미처 사리분별을 하기에 앞서 그대로 시그리드의 질문을 옮겨버리는 우를 범했음에도 영락제는 태연하게 답하였다.
“이렇게 중원의 모든 물력과 권세를 한 사람이 거리낌 없이 휘두르도록 만든다 한들, 죽음을 피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이대로 여러 대를 잇다 보면, 필부보다 못한 자가 고작 주씨의 피를 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용상에 앉는 일도 생길 것이다. 도사나 불승佛僧의 허황된 말에 놀아나는 자도 나올 것이요, 숫제 정무를 폐하고 몇 년씩 구중궁궐 속에 숨어드는 자도 어쩌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토록 모든 권세가 한 사람 손에 모여 있으므로, 어리석은 군주가 대를 걸쳐 나타나지 않는 한 감히 역모를 꾸미는 자는 나오지 않을 것이요, 간혹 현명한 군주가 한 번이라도 나타난다면 그 재주로써 족히 기울던 국운을 되살릴 수 있을 것이다.”
어찌하여 황제의 눈빛이 흐릿했는지, 시그리드는 이제 알 것도 같았다.
그 혼탁함은 사리분별이 어둡기 때문이 아니요, 이 혼란한 세상 자체를 두 눈에 담았기 때문이었다.
예부에서 명나라 관리들을 설득하면서 유교 경전을 가져와 과장하긴 했을지언정, 본심만은 참되었던 시그리드의 언설을 전해들었을 황제는, 언제부턴가 정화가 아닌 시그리드를 직접 응시하며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나라는 망할 것이다. 어쩌면 혼군昏君이 너무나 오래 집정하여 당태종이 살아 돌아온들 되돌릴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군왕의 재목이 정씨나 원씨, 손씨 가운데서 나와 우리 주씨의 뒤를 이을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나라의 이름 또한 제멋대로 바뀔 것이요, 심지어 화하華夏 바깥의 오랑캐가 다시금 변방에서 들어와 황제의 위를 차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짐이 세운 이 제도, 짐이 정비한 이 나라. 한 사람의 손에 모든 권세가 모여, 그 외의 모든 신하들은 감히 저들의 알량한 궁리로 도저히 헤아릴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끔 되는 이 제도만은 끝까지 이어질 것이다.
마지막 주씨 천자로부터 선양을 받든, 비열한 술수로 찬탈을 하든, 뒤이을 자 모두가 짐이 휘둘렀던 것과 같은 권세를 선망할 것이기 때문이니라.
천하를 두셋으로 쪼개고 만족하는 대신, 짐과 같은 권세를 누리고자 개중 가장 뛰어난 자가 모든 재주와 힘을 쏟아 반드시 중원을 하나로 만들고자 할 것이다.”
황제는 시그리드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시그리드 뒤에 있는 모든 것. 이 혼탁한 세상에 뭔가 더 좋은 질서를 세우기를 바라는 모든 서생들과, 그 서생들을 뒷받침하던 죽은 현인들의 사상 모두를 싸잡아 바라보는 것이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를 바랐던 모든 이들. 그들 모두에게 향하는 냉소.
“그러므로, 내가 세운 이 법도 하에서는, 난세가 다시금 찾아올지언정 한두 세대에 그칠 것이다. 국성國姓(군주의 성씨)이 바뀌고 새 조정이 들어서는 사이에 잠깐이나마 격변이 있어, 백성 열 중 하나가 죽겠지만, 아비가 아들을 묻는 것은 단 한 대로 족할 터.
이보다 나은 제도가 있다고 말하는 자들은 고금에 많았으나, 그러한 말이 이곳 중원의 법도로 세워지면 항상 천하가 어지러워지곤 하였다. 그러므로 짐의 부황이신 태조께서는 맹자를 미워하셨고, 나 또한 유자儒者들을 가볍게 여긴다.
그리고 그 유자들이 제멋대로 떠받들고 있는 너 서씨 또한 마찬가지다.”
시그리드가 바다를 건너오는 동안 품었던 고민. 욕심에 눈을 뜨기 시작한 신대륙 연합이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오지 않을 미래의 사람들이 겪었던 시행착오를 피하면서 어떻게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나가야 할지.
마치 그 고민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것처럼, 영락제는 시그리드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따라서 짐은 네 뜻을 모두 이루어줄 것이다. 중원의 이익이 너의 보잘것없는 나라에 흘러들어가, 이 중원을 그토록 어지럽게 만들었던 모든 일들이 너의 땅에서도 벌어지기를 바라면서.
너의 땅에 제멋대로 요순의 정사를 덧칠하여 바라보는 모든 서생들이 이를 알고 비로소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면서.”
모든 사람의 욕심이 아우성치는 혼란보다는, 한 사람의 욕심만이 홀로 서는 질서가 낫고, 간악하면서도 굳센 다스림이 인자하나 어설픈 다스림보다 낫다는 것.
신대륙을 향한 선망이 무너져내릴 때면, 중원의 선비들도 이 교훈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리라.
황제의 의도를 읽은 시그리드는,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몇 달 전 자금성의 전각에 벼락이 내리쳤을 때, 북경 사람들은 조심스레 희망을 담아 소곤거리곤 했다.
‘비로소 우리 황상께서 사람 죽이기를 멈추시겠구나!’
그 소곤거림을 동창을 통해 모두 전해들은 영락제는, 바야흐로 다시 한 번 살육을 벌일 때가 되었음을 직감하였다.
하늘의 그 어떤 징조도 황제의 권력 앞에서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라면, 사람 몇 천 명쯤은 죽어도 괜찮았다. 황제의 권세가 쇠하게 될 때 고통받을 수억 백성들을 생각하면, 그들을 위해 고작 수천을 죽이는 일은 결코 매정하다 할 수 없는 일.
감히 저의 사랑하던 현비 권씨의 죽음을 두고 몰래 웅얼거리던 괘씸한 궁녀와 환관을 한 이천 명쯤 죽이면 어떨까 생각하던 황제에게, 황엄과 그 일당이라는 더 좋은 제물이 나타났다.
“허나 서왕모가 동쪽 대양을 건너와 입조하는, 전례 없는 상서로운 일이 이루어졌거늘 어찌 형벌로써만 위엄을 세우겠느냐? 휼형恤刑(형벌을 가볍게 함)으로써 이를 기릴 따름이로다.”
금상 황제가 이처럼 효유한 바, 음모의 주범인 황엄과 그에 연루된 사례감의 내관 수십과 그에 연좌된 수백을 죽이는 데 그치고, 조선왕 도裪에게는 글을 내려 황희의 잘못을 알리기로 하였다.
일에 연루된 세 아문의 상서와 시랑들은 견책하는 데 그쳤으며, 요동진수태감 왕언과 여타 쟁쟁한 환관들은 황엄과 공모를 했든 말았든 모조리 삭직하였다. 정화 역시 ‘서왕모가 고변한’ 투슈판에서 벌인 잘못을 빌미삼아 관직을 낮추었다.
결국 사람의 생사와 상벌은 오로지 황상의 권위에서만 나오게 되었고, 금상을 지금 있는 자리까지 끌어올려 준 공신이라 할 수 있는 환관들은 모조리 토사구팽을 당하였다.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다 잘 풀린 것 아니냐? 심지어 타이간 그 작자까지도 시그리드 네 뜻대로 벌을 받은 셈이고.”
이야기 전해들은 스베인이 물었다.
언뜻 보기에는 그러했다. 대명 천자가 친히 시그리드와 신대륙 사절단의 도착을 ‘전례 없는 상서로운 일’이라 칭해주었고, 국고를 알뜰하게 털어 하사품을 내려주었으며 – 호부상서 하원길은 저의 목숨이 보전된 데 감격하여 차마 황제를 가로막지 못했다 – 시박사가 설치된 세 항구에서 신대륙 연합의 배가 자유롭게 통상할 권한도 허락한 것이다.
그러나 대명의 사서에 따르면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은 며칠 전, 영락제를 직접 알현하는 일도 없었고 예부를 떠나 자금성에 들어갔다 나온 적도 없었던 시그리드는 그날 이후로 표정이 밝지 못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황제의 진정한 의도는 다른 데 있지 않던가.
자금성 코앞에서 감히 다른 세상을, 다른 질서를 꿈꾸었던 이들을 향한 잔인한 탄압. 그들이 환상을 품을 여력조차 남겨주지 않고, 신대륙의 실상을 검열 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주겠다는 그 발상.
더구나 그러한 의도를 제쳐놓고 생각해도, 시그리드로서는 이번 사행의 성과가 크다고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결국 이곳의 관료들이 아니라, 황제 한 사람의 뜻에 의해서 인삼 무역이 인가를 받은 것과 다름없게 되었잖아요.”
잠깐 생각하던 스베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거래에서 몇 년 지내면서, 교역의 이치에 대해서 조금은 알게 되었던 것이다.
어느 한쪽의 변덕이나 호의에 의해 베풀어진 것은, 마치 봄에 내리는 눈과 같았다. 날씨의 변덕에 따라 해가 뜨기만 하면 쉽게 녹아 사라지기 마련이었으니까.
“이번 황제든 다음 황제든, 변덕 한 번 부리면 우리가 얻어낸 게 단숨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단 말이로구나.”
“바로 그렇지요.”
이 ‘오십일개국 사절단’에게 베풀어준 재정이 아까워서라도 계속 무역에 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겠다는 계획도, 이대로라면 성공을 보장할 수 없었다.
이익의 논리에 따라 명나라 조정의 여론을 움직일 수 있다는 전제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거 참, 세상일 쉽지 않구만. 당장은 큰 이익을 얻었지만, 정작 우리가 찾아온 목적 자체는 이루지 못하게 된 셈이라는 말 아니냐.”
스베인이 제 버릇대로 도끼를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도끼로 세상 만사를 해결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일에 도끼는 별 효험이 없었다.
“이대로 돌아간 다음, 이 나라 황제가 변덕을 부리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겠구나. 그리고 이곳의 관리들이 우리한테 품은 저 엉뚱한 환상이 깨지지 않기도 바라야 할 테고.”
둘 다 썩 희망적이지는 않았다.
전자야 말할 것도 없고, 시그리드를 서왕모니 서방요순 – 자신이 동쪽에서 왔다는 게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저를 ‘서쪽에서 왔다’ 부르는 까닭은 도통 알 수 없었다 – 이니 부르는 학자들도 당분간 신대륙 얘기 자체를 피하려 할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씌워진 콩깍지가 세월 앞에서 벗겨지게 되면, 그 다음은 다시 상업 자체를 달갑잖게 보는 유학자들의 시각으로 돌아가게 되리라.
그나마 남아 있던 대화와 설득의 장도, 이번 소란으로 인해 당분간 닫혀버리게 되었으니, 전망이 밝진 않았다.
“어떻게 온 길인데, 그 정도로 만족하고 돌아갈 수는 없지요.”
“하면 어쩌자는 말이니?”
“이왕 온 김에 다른 나라에 들려서, 중국 판로가 막혔을 때 대신 우리 인삼을 팔아줄 상대를 구하는 수밖에요.”
“다른 나라? 어디 보자, 그러려면 우리를 배신하기에는 너무 가진 게 없고, 우리 힘이라도 빌려야 할 만큼 아쉬운 게 많은 그런 놈을 우리네 친구로 삼아야 할 텐데, 그런 나라가 근처에 있을까?”
때마침 ‘아아!’ 하고 한탄하는 소리가 담장 너머로 들려와, 시그리드와 스베인 대화를 끊어먹었다.
소리가 난 곳은 회동관 이웃집, 조선 사절단 머무는 처소요, 한탄하는 소리는 두 사람 모두에게 익숙한 황희의 목소리.
필시 제게 내려진 황상의 처분을 전해듣고서 탄식하는 것이리라.
“어, 그러고 보니 조선이 있었지요.”
“조선? 그 나라에서도 인삼이 난다면서? 우리랑 경쟁하는 사이 아니냐?”
“귀한 물건이 나오는 나라끼리 꼭 경쟁해야 하는 건 아니거든요.”
시그리드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검은 책이 펼쳐졌다.
그렇게 사절단의 다음 목적지는 조선으로 정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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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에 대한 정보가 한정적이었던 근세 유럽인들은, 자금성을 곧 마르코 폴로가 묘사했던 쿠빌라이 칸의 상도Xanadu와 동일시했습니다. 도시 하나를 칭할 만큼 크지는 않았던 자금성이 ‘황궁’ 같은 평범한 이름 대신 ‘금지된 도시’로 계속 번역된 데는, 외부인들에게 개방되지 않는 동양의 신비로운 궁전이라는 낭만주의적 이미지도 한몫했습니다. 결국 청이 멸망하고, 북양정부가 이런저런 행사 장소로 자금성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자금성에 대한 유럽인들의 환상도 상당 부분 사라지게 됩니다.
2. 유교 세계관의 전설적 성군 요임금의 궁전에 대해서는 사마천이 묵가 전승을 인용하여 남긴 기록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마루의 높이는 지면에서 삼 척에 불과했고, 섬돌은 돌이 아닌 흙으로 고작 세 층만 지었을 뿐이며, 지붕은 띠풀로, 서까래는 다듬지 않은 참나무로 만들었다고 하지요.
이러한 묵가 전승에 전례와 통치자의 위엄을 강조하는 유가를 반박하기 위한 의도가 담겨 있음이 명백하지만 – 사마천이 이 전승을 정작 오제본기五帝本紀에는 적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 후대의 유학자들은 이 일화를 끌어다 쓰는데 하등 모순을 느끼지 않은 듯합니다.
한편, 고고학적으로 검증된 바에 따르면 14~15세기 경제적으로 보통 수준이던 농민의 가옥 면적은 100~140평방미터 내외였습니다. 작중에서 묘사된 방 세 칸 짜리 시그리드네 집은 아마 이 정도 규모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3. 영락제가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대외 원정은 바로 다섯 차례에 걸친 몽골 친정이었습니다. 15년에 걸친 이 원정들 중 실질적인 전투가 벌어진 것은 맨 앞의 두 차례뿐이었고, 나머지는 작중 영락제가 묘사하는 것처럼 그저 고비 사막 너머를 수십만 대군이 우르르 오가는 정도에 그쳤지요. 영락제가 자신에게 반대하는 신하들을 모조리 투옥시켜가며 추진한 1422년의 4차 원정, 그리고 도중에 영락제의 객사로 끝나고야 만 5차 원정도 모두 이런 허울뿐인 원정이었습니다.
집권 과정에서 드러난 영락제의 군사적 재능을 고려했을 때, 영락제 본인도 이러한 원정이 성공할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이에 따라 오늘날에는 영락제의 의도가 몽골 정벌이 아닌, 통일 중원 왕조의 세력 과시에 있었다는 해석도 제기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