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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11화 (11/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11화

2층 - Lv.25 발굴지 초병(3)

최신형 전차의 전투력은 여고생 세 명에 해당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이 경우에는 여고생을 너무 과소평가했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화살 두 발로 제압한 곳은 비교적 외곽의 작은 초소였다.

소녀는 소리 없이 돌입했다.

누군가 감탄했듯 발걸음 소리는 전혀 없었다.

그러면서도 전력 질주에 가까운 속도를 내니 아무도 발견하지 못할 수밖에 없다.

초병들은 의욕이 없었지만 초소는 제법 공들인 흔적이 보인다.

병력들의 병과도 나뉘어져있다. 도끼를 든 근접 전사 외에도 투창을 허리춤에 차고 있는 녀석들도 보였다.

한눈에 보아도 아까 본 녀석들 보다 좀 더 강한 전사들이다.

소녀는 개의치 않았다.

피로한 눈으로 하늘을 응시하는 오크가 있다.

애병일 터인 도끼는 아무렇게나 옆에 늘어뜨려 놓았다. 그렇다한들 무슨 일이 생기면 벼락같이 집어들 수 있는 위치일 것이다.

훅하고 바람 새는 소리가 난다.

피가 흘렀다.

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그릇으로 따르는 것 마냥 조용히 쏟아진다.

미궁에 존재하는 암습 판정이라는 것은 소녀의 마음에 아주 쏙 드는 것이었다.

생물을 베어본 적은 많다.

날붙이로 뼈와 거죽을 깔끔하게 베어내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단지 인식하기 전에 기습하는 것만으로도 절삭력에 불가사의한 보정이 걸린다니 얼마나 편리한가.

오크의 두툼한 목 근육이 종잇장처럼 갈라진다.

갑옷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자신의 야성을 드러내는 것이 미덕인 족속들이다.

애병을 집어들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본능적으로 비명을 지르지만 이미 갈라진 기도는 성대까지 공기를 보내지 못했다.

바깥에서 기척으로 확인한 것은 넷.

그러나 아마 한둘 정도는 더 있을 터이다.

피의 비릿한 냄새는 피 자체의 냄새가 아니다.

피가 흐르고, 피부에 닿아 소녀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화학 작용에 의해 퍼지는 것이 피비린내다.

오크들의 후각이 피 냄새를 감지하기까지는 약간의 여유가 있다.

* * *

미궁은 나를 거의 모든 무기의 달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써본 적 없는 무기는 손에 꼽으며, 클래스로 보자면 정점까지 다다르지 못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대체로 새로운 시작일 때, 그냥 먼저 줍는 무기로 내 클래스를 결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지금은 샷건과 요정의 활.

고민할 필요가 없는 레인저 클래스 직행이다.

다만 순수 레인저 클래스가 이미 파티에 있으며, 동시에 범용성 없이 경직된 육성을 고집할 필요도 없다.

암살자는 레인저와 주 스탯 민첩을 공유하는 사이다.

듀얼 클래스로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냥꾼은 순수 레인저이기에 레벨 업 포인트를 분배할 때마다 근접 무기를 바닥에 내버려 ‘소지하지 않아야’ 했다.

나는 그냥 단검을 여럿 챙긴 채로 찍었다.

어떤 스킬이 나오냐는 랜덤이지만, 소지한 장비를 통해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다.

초반에 구름처럼 쏟아져 나오는 잡다한 패시브를 제외하고 사냥꾼은 [샤프 슈팅]을 얻었다.

석궁에는 스코프가 없지만 겨누고 있는 사냥꾼의 모습은 망원 렌즈를 들여다 보는 스나이퍼와도 같다.

마른 편인 삭막한 중년의 겉모습과는 퍽이나 잘 어울린다.

사냥꾼이라기보다는 어딘가의 청부업자 같은 모양이다.

제법 큰 소음과 함께 볼트가 발사된다. [샤프 슈팅]은 상대하기 까다로운 스킬이다.

적이 사수를 인지하지 못한 상황에서의 피해가 크게 증폭된다. 조준보정 효과도 있다.

아무리 먼 곳이라도 사수를 인지하지 못한 정지 대상이라면 거의 빗나가지 않는다.

정통 레인저라는 것은 결국 게릴라다.

인지 밖에서의 선제공격.

암살자와 크게 다를 것도 없다.

사냥꾼의 스킬을 머금은 볼트는 오크 하나의 머리를 꿰뚫고도 유효했다.

미리 재어둔 각대로 뒤의 다른 오크의 가슴팍을 추가로 헤집어 놓았다.

동시에 나는 초소 위로 점멸했다.

사냥꾼의 사격과 함께 날아간 단검이다.

[점멸 단검]의 사소한 단점이라면 반드시 단검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모습으로 이동된다는 점이다.

고수를 만나면 점멸함과 동시에 손이 아작난다.

물론 2층에 그런 수준의 녀석이 있다면 말이 안 된다.

오크들이 기겁하여 일어섬과 동시에 단검을 내던진다.

한 놈이 얼굴로 날아오는 단검을 팔뚝으로 받아낸다.

이미 당겨져 있던 요정의 활에서 화살이 날아간다.

거의 영거리 사격, 다른 한 놈의 몸통을 쏴서 무기를 집어 드는 행동을 저지 한다.

화살은 왼손에 두 발을 쥐고 왔다.

즉시 다음 화살이 매겨지고 이번에는 정조준.

도끼를 휘두르려던 세 번째 녀석의 눈에 꽂혔다.

생명력이 질긴 오크라도 뇌에 화살촉이 박히면 즉사한다.

그리고 뒷구르기.

팔뚝에 단검을 꽂은 오크가 크게 몽둥이를 휘둘렀다.

직전까지 내 몸이 있던 공간에 공기가 파열하는 소리가 들린다.

오크 전사 중에서도 상당한 정예병이다. 정면으로 받았다간 무슨 수를 써도 죽는다.

체술도 소용없다. 저런 통나무 같은 장딴지에 다리걸기를 해보아야 나만 다친다.

오크의 팔뚝과 몸에 몇 개의 나이프가 더 꽂힌다.

내가 뒤로 구르며 날린 나이프다.

몽둥이 오크 뒤편에서 배에 화살이 꽂힌 오크가 비명을 질렀다.

나이프 하나가 더 날아가 도끼 자루를 쥐려던 손가락을 뭉갰다.

두터운 근육도 정확하게 관절을 노리는 공격을 보호하지는 못한다.

찰나의 시간을 벌었다.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도망쳤다.

대부분의 오크들이 초병의 의무를 알고 있으며 수행할 의지도 있다.

하지만 웬 인간이 나타나서 자기 동료 하나를 아작 내고, 칼침을 놓았으며, 그리고 그대로 도망간다?

이미 저들의 머릿속에 경보를 울린다는 생각 따위는 없다.

어차피 인간 하나.

죽이면 그만.

딱 [점멸 단검]의 쿨다운 3분을 도망 다닌 후, 나는 점멸했다.

단검을 쥔 모습으로만 점멸한다는 것은 이럴 경우엔 장점이 된다.

몸을 숙인 채 옆으로 나타난 내 모습을 오크는 즉시 발견하지 못했다.

팔뚝에 꽂힌 단검을 그대로 내리그어 팔을 가르고, 배를 갈랐다.

배를 부여잡고 멍해진 전사를 걷어차고 그대로 옆으로 폴짝, 매서운 도끼가 날아들지만 강렬한 공격은 동시에 자신의 눈도 가린다.

빗나간 일격이 초소의 나무 벽에 작렬한다.

피어오르는 톱밥 사이로 화살 한 발이 섬광처럼 지나가고.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게 되었다.

* * *

정확히 넷을 제거하자 초소에 소란이 일었다.

소녀의 생각대로 안쪽에서 휴식 중이던 초병이 더 있었다.

거기에 오크답지 않은 장병기인 장창은 상당히 예상 밖이었다.

장병기에 대응하는 훈련 역시 신물 나도록 했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정면에서 합을 겨루지 않는 것이다.

설사 그럴 능력이 있다하더라도 대거 같은 단병으로는 만용에 불과하다.

가문의 가르침은 그러했다.

그래서 소녀는 정면으로 싸우지 않기로 했다.

대거를 얌전히 홀더에 집어넣는다.

오크는 눈빛을 투지로 불태우면서도 언뜻 의아함을 표했다.

그 의아함이 아무래도 좋다는 돌격으로 변하기 직전에, 소녀의 손이 움직였다.

나이프 투척은 가문에서도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수단 중 하나였다.

소녀는 이미 능숙했으나 미궁에서 만난 정체불명의 히어로는 더욱 능숙했다.

오라버니보다도, 아니 어쩌면 아버지나 할아버지보다도.

소녀가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던 이유는 남의 동작을 능숙하게 흉내 낼 수 있어서다.

기이할 정도로 뛰어난 나이프 투척을 지켜봐온 결과, 소녀는 이전보다 더 빠르고 은밀한 투척을 학습했다.

묘한 일이었다.

단순히 목표를 향해 정확히 나이프를 던질 뿐인 동작에도 더 나아질 것이 있다.

미궁은 정말로 이상한 곳이다.

소녀의 나이프가 날았다.

오크가 눈치 챈 것은 이미 그것이 눈앞까지 다가온 후였다.

창병은 자루로 그것을 쳐내었다.

그리고 상대가,

작은 암컷 인간이 시야에서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창병이 다시 시야에 적을 담는 일은 없었다.

우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목이 돌아갔다.

"이야, 이게 되네."

던진 나이프와 거의 동등한 속도로 달려서 투척을 방어한 상대의 목을 취한다.

만화에서 봤던 건데 해보니까 된다.

레벨 12. 그리고 [신속] 3스택.

거기에 획득한 액티브 스킬은 순간적인 스프린트인 [대시].

일주일 전의 자신과 비교해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고 느껴진다. 허나 현격한 속도의 차이가 이곳에 있다.

미궁은 정말로, 정말로 이상한 곳이다.

대거를 빼어들고 미소 짓는다.

기척은 있다.

마지막 초병이 방금 전 장면을 보고 있었다.

"자, 네가 마지막이야. 덤벼."

오크는 소녀의 말에 응하지 못했다.

자랑스러운 전사는 그만 도끼를 떨어트렸다.

그리고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어라."

등을 보인 상대의 목숨을 취하는 것은 지금까지 중 가장 쉬웠다.

* * *

초병이 모두 제거되자 일사천리였다.

유적지 안쪽에서 일을 하고 있던 일꾼들은 미처 본진에 소식을 전할 틈도 없이 제거 되었다.

주술사도 하나 있었지만 얼마나 방심을 했는지 햇볕이 잘 드는 바위 위에서 늘어져라 낮잠 중이기에 보내주었다.

"주술이란 건 어떤 거예요?"

소녀가 사냥꾼 몰래 나에게 속삭인다.

"흠, 마법 비슷한 건데 조금 다른 거."

"알아듣게 설명해줘요."

"마법이 마나라는 강에서 물을 바가지로 퍼다 쓰는 거라면 주술은 옆을 파서 지류를 만드는 느낌이랄까."

"와,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그냥 아 그런갑다 해. 나중에 마법을 배울 기회가 있다면 알게 될 걸. 직접 안 해보면 몰라."

소녀가 방긋 방긋 웃는다.

"하긴 마법을 본적이 있어야 말이죠. 그런데 그 설명대로라면 주술이 더 세보이는데요."

"마법보다 제한적이되, 그냥 깡딜은 더 강하지."

"갑자기 별로 보고 싶진 않아지네요. 그 주술이란 거."

"나도 그래."

그러는 동안 사냥꾼은 오크들이 발굴 중이던 유적의 입구를 확인하고 돌아왔다.

"오래 묻혀있었던 모양입니다만. 오크들이 입구를 거의 찾아냈군요. 이미 사람이 통과할 만큼의 공간이 있는데도 더 깔끔하게 파내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흠, 요정의 숲에 있는 유적인데 그린스킨들이 그렇게 다룰 정도라······."

무식하기로 이름 높은 그린스킨이지만 그만큼 미신도 많이 가지고 있다.

아니 뭐, 여기선 그 미신이 주술이라는 이름으로 실체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건 오크에게, 어쩌면 그린스킨 전체에게 중요한 무언가가 이 안에 있다는 이야기다.

그것도 주술적인 의미까지 있는 물건으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그리고, 그런 건 보통 개쩌는 아이템이지."

그린스킨 팩션의 호감도는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곤두박질치겠지만 뭐 어떤가. 경우에 따라서는 유인에도 사용할 수 있다.

좋은 게 좋은 거다.

"자, 그럼 들어가 보자고. 그 전에 스탯 분배하고."

정예오크들이라 그런지 경험치가 짭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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