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65화
8층 - Lv. 159 여단 본부(10)
계약을 마치고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는 이미 머릿속에서 그리고 있었다.
눈앞에 트롤이 들이닥쳐 있어서 깜짝 놀라 0.1초 정도를 낭비한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시야는 이미 공유되어 있다.
잎사귀 요정 사제들은 인공위성마냥 촘촘하게 바람의 정령을 공중에 띄워두었다.
그리고 계약 마법진에 시야를 공유하는 술식을 추가했다.
날뛰는 몽둥이의 모습이 슬로우모션처럼 보인다.
요정이었던 것이 날아가는 모습 또한 아주 느리다.
정령계는 상당히 정신적인 곳이다.
그곳 깊은 곳까지 영혼을 밀어 넣었다 막 돌아온 순간의 나는 육신을 가진 생명이라기보다는 정령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본래는 깊은 명상에서 깨어나는 순간의 각성효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까지 활용해야 한다.
계약을 시작하기 전에 보았던 전장의 조감도는 확장을 멈춘 숲을 트롤들이 거칠게 뚫고 지나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채 반절을 뚫지 못하고 격렬한 요정들의 저항에 발이 묶여 재생을 반복하고 있었다.
트롤들은 멍청하지만 그게 전투적인 지능조차 떨어진다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재생력이 어디까지 통용되는지 알고, 그 완력과 체격을 어찌 활용할지 아는 뛰어난 전사들이라 할 수 있다.
우선 눈앞의 적들부터 포착한다.
계약식이 진행된 공터까지 막 진입한 것이 넷이다.
그 뒤로 따라붙고 있는 것이 아홉.
붙잡은 요정을 먼저 잡아먹을 생각을 하고 있는 녀석이 다섯.
길을 잃었는지 이상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바보들이 셋.
쓰러져 재생을 기다리고 있는 녀석이 둘.
어둠 원소에 잠식된 충격이 컸던 모양인지 멍하니 있는 녀석이 하나.
말을 안 듣는 탈것을 짜증스럽게 두들기는 녀석이 셋이다.
도합 스물일곱 마리의 트롤들이 아직 살아 있다.
기억하던 것보다 열셋은 더 처리했다.
단지 활과 마법만으로 만들어낸 화력이라기에는 차고 넘치는 성과였으나 요정들은 기뻐하지 못하리라.
방금 만들어낸 숲이라 한들, 그루터기 요정들은 나무를 자신들과 동족이라 여긴다.
신의 허락하에 나무라는 이름의 동지들에게 트롤이 열셋이나 죽을 정도의 포화를 쏟아부었으니 아주 끔찍한 기분이었을 터.
심지어 잘 훈련된 정예병사 트롤이었다.
지금 다시 내려다보는 숲은 끔찍하게도 파괴되어 있었다.
요정들의 마법에도, 트롤들의 막무가내 육탄돌격에도.
반면 그랬기에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시야로 적아를 포착하기가 쉬웠다.
공중에 떠 있는 바람 정령의 눈으로 내려다보며 제일 먼저 체크하는 곳은 다친 요정이 있는 곳.
아직 살아 있다면 피탄 지점에서 제외.
죽은 시체라면 그냥 포격.
트롤은 가장 우선적으로 포격.
빠르게 타겟 락온을 마친다.
미궁 후반의 싸움에서는 소수점의 시간조차도 소중하다.
수십 년간 맞춰온 생체 시계가 시간의 경과를 정확하게 알려준다.
아직 1초가 되려면 약간의 시간이 남았다.
정령계에서 빠져나오며 걸린 사고 가속이 점차 꺼져간다.
내 사고에 흐르는 시간의 밀도가 점차 낮아지며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다.
서두르자.
여단 본부의 주둔지는 계약식 이전에 미리 봐둔 대로 감으로 찍었다.
어마어마한 거리가 있긴 하나 대신 주변에 그다지 주의해야 할 것은 없었다.
그저 얼어붙은 대지, 툰드라의 끝자락이라 눈은 듬성듬성 쌓인 평야.
나무 한 그루도, 풀 한 포기도 없는 땅이다.
피해야 할 것이 없으니 오히려 박살 내기 좋다.
락온이랄 것도 없다. 광대한 영역을 한꺼번에 드래그해 지정하는 느낌으로 힘을 투사하게 정한다.
목표지점을 볼 필요도 없고, 완전히 괴멸시킬 필요도 없다. 큰 피해를 주기만 하면 된다.
가용 마력의 90%가량이 여단 본부를 향해 배정되었다.
그리고 성벽의 위, 아직도 날아다니고 있는 와이번들.
이제 1.5초가 흘렀다.
0.5초 정도는 남겨야 한다.
공격의 개시 순간에 역소환이 된다면 그런 등신짓이 또 없다.
그냥 정령의 눈에 보이는 대로, 그것이 와이번인지 첨탑의 장식인지 구분하지 않고 찍어댔다.
사람이 날아다니진 않을 테니 오사의 위험도 없다.
수비병들은 대처가 되어있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다. 애초에 신이 엄선한 정예 요정들과는 달리, 인간의 최정예라고하기에는 손색이 있는 병력들이다.
기사들이 분전하고 있으나 그 숫자는 오우거보다도 적다.
아예 성의 상공에 커다란 회오리를 일으킬 여유가 있다면 이럴 필요도 없다.
하지만 빠듯한 지금은 멋지고 화려한 공격보다는 가용 마력의 살상력을 극한까지 짜내야 한다.
의외라면 의외지만 과하지 않을 정도로 출력을 조정할 필요는 없었다.
정령왕치고는 많이 약한 편이다.
전력을 다해도 큰 문제 없다.
마력이 빠르게 떨어진다.
유지에 소모하려고 배정해 둔 마력이 곧 다한다. 공격에 쓸 마력까지 갉아먹으면 주객전도다.
정확히 역소환 0.5초 전에 공격을 명했다.
작은 드래곤이 한순간에 내 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 * *
효율적인 정령의 사역법은 결국 정령이 자율적으로 사고하며 수행할 수 있는 일의 영역이 어디까지냐를 파악하는 법이다.
갓 태어난 정령왕, 게다가 이제 막 계약한 상태라면 스스로 판단할 능력은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술식이라고 해야 할까, 힘의 사용법이라고 해야 할까.
정령왕쯤 되면 그 자체로 스케일이 너무 거대해진다.
내 작은 드래곤이 어찌 움직일지는 하나하나 짚어줘야 한다.
좀 더 세심하게 다듬을 시간이 있다면 좋았을 텐데.
계약에 의해 연결된 정령왕의 공격이 느껴진다.
그 공격은 시야를 공유하고 있는 무수한 바람 정령들의 중계에 의해 내게 인식된다.
0.1초
왕의 품격을 증명하는 막대한 마력이 모여든다.
공격을 준비하기 위해 모여드는 마력과 대기만으로도 시야가 굴절된다.
볼록 렌즈마냥 일그러진 용의 모습은 제대로 식별조차 힘들다.
0.2초
저 멀리 떨어진 폭풍울음 여단의 본부의 주둔지를 향해 셀 수 없이 많은 바람의 포탄이 발사되었다.
0.3초
눈앞의 트롤들, 이제야 눈앞에 나타난 강대한 원소의 화신을 눈치챘다. 시선을 옮기고 있는 녀석들의 가슴팍에 선이 그이기 시작한다.
픽픽하는 소리와 함께 정확히 심장을 꿰뚫는 탄이다.
초고압으로 압축된 공기의 탄은 의외로 궤적이 육안으로도 보인다. 굴절률이 다르기 때문이다.
0.4초
수십 개의 선들이 숲의 상공에서 내리꽂힐 뿐만 아니라 성의 상공을 향해 그어진다.
선이 점점 늘어난다.
수십에서 수백으로, 그리고 수천으로.
온 하늘이 공간 자체가 베어진 것마냥, 압축된 바람의 궤적으로 뒤덮인다.
지금 이 순간 하늘을 올려다보던 이가 있다면 갑자기 하늘에 셀 수 없는 실금이 그어진 것으로 보이리라.
수없이 자잘한 파편으로 깨진 유리창을 통해 하늘을 올려다보는 느낌과 같을 것이다.
그리고 정령왕은 다시 정령계로 돌아갔다.
* * *
소녀는 자신의 몸이 하늘로 빨려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한순간 호흡곤란이 찾아왔다.
엄청난 양의 대기가 어떠한 지점을 중심으로 빨려 들어갔다.
일시적인 진공 상태를 메꾸기 위해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던 공기들이 폭풍이 되어 몰려온다.
소녀는 날아가지 않기 위해 검을 벽에다 박았다.
날이 상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 화가 났지만 별수 없다.
사냥꾼은 막내와 함께 땅에 박은 방패를 붙잡고 버티고 있다.
아저씨가 뭘 한 건가?
「아름답군.」
‘여신님 지금 이거 뭐예요?’
「바람의 정령왕을 이렇게 아름답게 사용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다. 하늘을 봐라.」
올려다본 하늘이 이상했다.
부서진 프리즘처럼 이상한 선들이 하늘을 셀 수 없이 많은 조각으로 분단하고 있다.
하늘이 깨어져 무너지지 않을까 의심케 만드는 광경이었다.
"오……."
감탄을 흘리는 동안 아주 잠깐 지속된 하늘의 이변은 사라졌다.
대기가 빨려 들어가던 중심부로부터 쾅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하늘의 궤적이 모두 사라졌다.
그 대신 펑펑하는 소리와 함께 날아다니고 있던 오우거와 와이번들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다.
비행하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충돌하며 약한 집들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소녀의 눈에 포착된 오우거나 와이번들은 하나같이 신체의 내부에서 무언가 여러 가지가 폭발한 것처럼 끔찍한 모습이었다.
소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두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렸다.
「거 손에 묻은 피나 좀 닦지 그러니.」
소녀는 피를 슥슥 옷에 문질러 닦고 다시 눈을 가렸다.
* * *
제자는 한숨을 내쉬며 걸었다.
그의 스승이 구속당한 지도 시간이 많이 지났다.
트동트는 정치적으로 적이 많은 대주술사였다.
오랫동안 폭풍울음 여단에 지낸 짬과 일신의 능력 덕에 무수한 정치적 견제에도 입지를 유지하고 있었을 뿐이다.
봉인된 고대 오크 영웅의 위치를 찾아낸 것이 석 달 전.
그리고 그 봉인을 해방하기 위해 트동트가 이끄는 소규모 부대가 요정들이 사는 숲으로 들어간 것도 두 달 전.
카크리쉬가 사망한 것 또한 그때다.
유배자인 인간 하나 때문에 일이 셀 수도 없이 꼬였다.
여단 최선임 대주술사인 트동트도 제국의 대업의 첫발을 그르친 책임만은 면하지 못했다.
사형 같은 제도는 그린스킨에게 없다.
단지 구류당한 채, 모든 지위를 박탈당하고 기다릴 뿐이다.
최후의 전장을 고를 수 없다는 것은 오크에게 이미 형벌이다.!
그녀의 스승은 이제 곧 주술사나 지휘관이 아닌 전사로서 전장에 나서게 되리라.
그리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할 것이다.
오크가 된 후 인간에게 버려지고 방황할 때 그녀를 거둔 것이 트동트였다.
평소에 퉁명스럽기는 했으나 그 마음이 선의였음은 모르지 않기에.
이제는 착잡함뿐이다.
우리 속의 늙은 오크가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 밥은 그것이냐?"
"예, 스승님."
"요즘 들어 묘하게 깍듯해졌구나. 진작 좀 그럴 것이지."
"……."
트동트가 죽은 새를 철창 사이로 넘겨받는다.
통째로 으적으적 씹어 먹으며 껄껄대는 모습에 제자는 조금 화가 났다.
"그냥 도망치셔도 되는 것 아닙니까?"
"내가 그리하면 너는 어찌하고?"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어차피 오크에 의리……."
"떠돌이 오크가 되어서 어찌 살아가려고 그러느냐. 내 다 생각이 있으니 그냥 기다리거라."
"언제까지 말입니까? 매번 그런 말씀뿐이시고."
트동트는 잠시 씹어 먹던 고기를 내려놓고 말했다. 기묘한 미소가 걸려 있다.
"그보다, 유배자 사냥을 하던 도중 잡혀 온 뱀파이어는 찾아보았느냐? 슬슬 지금쯤일 터인데."
"찾고 자시고 바로 옆입니다."
"으응?"
트동트가 옆을 보았지만 벽이기에 보이지 않는다.
주술을 일으킬 힘은 없다. 주술사의 힘을 가장 잘 봉인해 둘 수 있는 것 또한 다른 주술사들이다.
제자는 트동트의 옆 우리에 놓인 좀 더 작고 엉성한 우리를 보았다.
햇빛을 가리기 위해 아무렇게나 덮여 있는 더러운 천을 들추었다.
열 살이나 될까 싶은 자그마한 소녀 하나가 엎드린 채 미동도 않고 있다.
죽었나 싶어 살피려다가 말았다. 뱀파이어는 언데드다. 언데드는 호흡을 하지 않는다.
"스승님, 그 날 이후로 도무지 알 수 없어지셨습니다."
"오크 주술사이면서 오크가 싫다는 네 녀석도 못지않다."
"저는……."
제자는 ‘인간입니다.’라고 말하려다가 포기했다.
트동트가 말했다.
"그러고 보면 트롤 기병들은 출전했느냐?"
제자는 그 말에 오전에 출발한 괴수들을 떠올렸다.
볼 때마다 저런 것을 상대로 버텨야 하는 인간들에 대한 연민이 피어나려고 했다.
이를 악물고 억눌렀다. 그녀가 해야 할 것은 차라리 복수가 아닐까.
끄덕이는 제자의 모습에 트동트가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여기 계속 있거라."
"평소에는 얼른 가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다른 주술사들의 눈 밖에 난다는 이유에서였다.
트동트가 거둔 유능한 제자는 그럭저럭 늙은 주술사들이 관심을 가지는 대상이었다.
그 스승이 실각했으니 주인이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굳이 이전의 스승과 엮이려 하지 않는다면 다른 기회를 얻을 수 있다.
트동트가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다.
"오늘은 여기 있거라. 네가 없으면 나와 저 옆의 흡혈귀가 죽어버릴 테니."
제자는 뚱한 표정으로 우리 앞에 주저앉았다.
그날 이후로 스승은 정말 알 수 없는 오크가 되었다.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으면서 마치 미래를 안다는 듯이 평온하기만 하다.
트동트가 우리의 창살 사이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저 멀리, 인간의 성이 있는 방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