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64화
8층 - Lv. 159 여단 본부(9)
기사들은 와이번과 오우거들이 생각 이상으로 멍청하게 돌격한다는 점에 감사했다.
영주는 현명하게도 자신의 전투력을 과신하지 않았고,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그늘진 뒷골목으로 향했다.
우스운 일이지만 어느 정도 지위가 된다면 뱀파이어 사회가 인간 사회 위에 덧씌워지듯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뱀파이어들은 인간을 숙주로 기생하는 기생충과도 같은 것들이지만, 그렇기에 숙주를 지켜야만 한다.
비상시에 영주의 호위가 붙는 것은 불문율조차 아닌 엄연한 협약이었다.
행여 악용될까 마법에 의한 서약까지 실행되어 중요한 직책들만 알고 있다.
물론 호위기사들은 알았다. 알게 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모를 수가 없기에.
다른 기사들이 안간힘을 쓰며 막아내는 동안 호위대장은 영주를 따라 어둠 속으로 향했다.
"누추한 곳에 귀하신 분이 오셨군요."
맞이하는 이가 있었다. 허름한 폐가에 마치 어둠이 자신의 일부인 마냥 자연스레 기대 서 있는 사람의 그림자였다.
"협정은 유효하다고 알고 있소."
영주는 어딘가 낯익은 목소리라 생각하며 대답했다.
"그 협정 덕에 나라가 우리와 전면전을 벌이진 않고 있으니 지키긴 해야겠지요."
어딘가 귀찮다는 태도, 피로감에 찌든 목소리.
들은 적 있는 목소리였다.
대체 왜?
영주의 의문에 아랑곳하지 않고 뱀파이어는 움직였다.
"이 성에서 우리가 맡은 것은 후퇴 지원입니다. 아시겠지요?"
어둠 속의 얼굴이 드러나기 직전에 영주는 이 목소리가 누구였는지 깨달았다.
"동문 수비대장?"
"인간인 척할 때는 그런 직책이죠. 걱정 마십쇼. 부대장이 저보다 일 더 잘하니까요. 그 녀석은 진심으로 사명감을 가지고 복무하는 타입입니다. 거기에 진짜 인간이지요. 제 후임으로 삼으십쇼."
예상치 못한 일에 호위대장이 검에 손을 얹었다.
뽑으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칼자루가 납덩이라도 달린 듯 무거웠다.
"아무리 놀라셔도 갑자기 칼을 뽑으려고 하시면 되나. 호위대장님."
까딱이는 손끝에서 희미한 마력의 선이 자신의 검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호위대장은 전율했다.
그가 알기로 이 성을 영역으로 삼는 뱀파이어 클랜은 순수한 무투파다.
이런 마법 같은 능력은 없으며 따로 연마하지도 않는다.
나이트 크로우에게 들어 알고 있다.
클랜 마스터급 뱀파이어 로드는 제각기 기묘한 고유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그럼 매일같이 근무 태만에 불성실로 마음의 편지가 올라오던 이 남자가…….
"오우거나 와이번들이 쇠붙이를 쓰는 녀석들이었다면 혼자서 어찌 해보겠는데, 아무리 저라도 저 괴물 떼거지 속은 좀……."
동문 수비대장이, 아니, 프로보이 클랜의 마스터가 친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일단 안전한 곳까지 모셔다드리고 돌아와서 참전해야겠습니다. 무사히 돌아가서 지원군 좀 불러주십쇼."
영주는 머리를 부여잡았으나 그래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 그리하지."
* * *
혼돈의 여신은 파티원을 모두 불러 모았다. 정확히는 소녀를 중심으로 뭉치게 했다.
이 파티의 리더는 당분간 연락이 닿지 않을 것이다.
자리 비운 동안 애지중지하는 파티원들 중 누가 죽기라도 했다간 무슨 말을 들을지 모른다.
그러니 신경 써야 했다.
‘여신님, 그냥 솔직하게 제가 좋다고 하셔도 되는데.’
「너도 그 녀석한테 못된 것만 배웠다. 좀 더 나를 공경하면 안 되겠니?」
‘그래도 이번엔 아저씨가 위험한 건 아니죠?’
이 질문에는 약간 날이 서 있다.
여신은 뜨끔하였지만 수천 년 동안 신을 한 짬은 어디 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연기를 간파하기에 소녀는 아직 어리다.
「내가 힘 좀 썼지. 자연의 신도 어차피 전쟁의 신과 사이가 좋을 수는 없는 녀석이라.」
뻥을 칠 때는 언제나 진실 속에 숨겨라.
다행스럽게도 상습범인 ‘아저씨’와 달리 여신은 아직 소녀에게 신뢰받고 있었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날아오는 불덩이를 벽을 차고 뛰어올라 피했다.
단검이 날아간다.
이제는 손동작도 잘 보이지 않는다. 가르친 누구와 비교해도 크게 손색이 없는 수준이다.
오우거의 몸에 단검이 박혀봐야 긁힌 상처겠으나 부위에 따라서는 심각해지기도 한다.
귓구멍을 부여잡으며 인상을 찡그리는 오우거는 바닥이 다가옴을 보고 의아함을 느꼈다.
그리곤 쓰러지는 자신의 몸뚱어리에 깔리며 생을 마감했다.
"목이 굵으니까 암습 판정을 내도 깔끔하게 벨 수가 없네요. 빙글빙글 돌리는 거 힘들다. 나도 좀 긴 칼 한 자루 쓸까."
"본래 무기는 한 종류만 고집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양한 것에 두루 소양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항상 무기를 고를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지진 않는다.
"그러는 사냥꾼 아저씨도 맨날 활만 쓰면서."
"저는 둔기와 창도 다룰 줄 압니다."
"그걸로 오우거랑도 싸울 수 있어요?"
"그건 전혀 하고 싶지 않은 일이군요."
"에이, 그 정도밖에 안 되면 다룰 줄 모르는 거죠."
기준이 턱없이 높다. 사냥꾼은 대답하지 않고 웃으며 시위를 당겼다.
막내를 공격하려고 하던 오우거가 눈가에 날아드는 화살에 깜짝 놀라 고개를 튼다.
사냥꾼은 활을 잠깐 위로 던지고 허리춤의 총을 뽑아 방아쇠를 당겼다.
동그란 탄이 날아간다. 현대적인 화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화살보다야 빠르다.
오우거의 눈구멍을 탄이 파고들었다. 괴로워할 시간은 없었다.
머리가 폭발했다.
"모름지기 화력의 문제로다."
사냥꾼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유배자 생활에서 오우거와 트롤 등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순수한 궁수로서의 능력은 자부하고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거대한 괴물들을 어찌할 화력이 늘 부족했다.
장전이 불편하고 연발이 힘들다는 문제가 있지만 실로 마법 같은 화력은 마음에 쏙 들었다.
실제 플린트락처럼 화약을 요하지도 않는다. 재료로 들어간 비늘이 이미 불과 폭발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확실히 장비는 스킬이니 뭐니 하는 것 이전의 문제였다. 궁수는 선제공격의 몇 번 이후에는 극도로 취약해진다.
근접하여 상대 면상에 대고 활을 당기면 내 머리가 먼저 쪼개진다.
가뜩이나 미궁의 괴물들은 인간 이상의 존재다.
특수 화살로도 한계가 찾아오는 시점이 동시에 사냥꾼의 한계였다.
시간대가 팍팍 튀는 미래는 거의 가본 적이 없다.
왕국에서는 일상적으로 들락거린다곤 하나 가본 적이 없으니 모른다.
그럼에도 왕국 이전 구간에서 자체 제작하는 총기는 화력적으로 충분한 위력을 낸다.
어찌 보면 대물 저격총 따위의 순수 물리 총기보다 이런 식으로 마법적 보정이 깃든 총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제작법을 배워둬야겠군. 아주 열심히."
사냥꾼은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수단에 불과한 것에 이렇게 신경을 쓰고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어떤가 하는 회의가 살짝 밀려든 탓이었다.
"시간의 신전……."
* * *
정령이라고 말하면 마치 자의식이 있는 생명체와도 같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미궁의 정령은 제대로 된 자아나 사고가 없는 존재다.
그들은 그 자체로 자연적인 현상이나 다름없다.
태풍이나 가뭄에 자아가 있겠는가?
정령은 마법이 있고 마력이 흐르는 세계기에 생겨난 자연현상과도 같다.
세계의 곳곳에 깃들어 존재하는 에너지의 집합체이며, 원소의 화신이다.
그것들을 계약이라는 형태로 구체화하고, 사역하는 정령사의 자의식을 빌려 어느 정도 자아를 가진 존재로 확립시키는 것이 정령술이다.
그렇기에 우선 정령을 찾아야 한다.
결정화된 원소는 수명을 다하여 죽은 정령이 남긴 시체와도 같은 것이다.
이 정도 크기라면 틀림없이 고위의 정령이 남긴 것이다.
결정을 촉매로 마법진이 가동한다. 무수히 많은 잎사귀 요정들이 둘러앉아 자신의 자리를 찾는다.
나는 마법진의 중심에 앉아 있고, 요정 마법사가 그 곁에 있다.
계약을 진행하는 주체는 나이되 그 부하를 같이 감당하는 것은 요정 마법사, 그리고 그 원동력인 마력을 제공하는 것은 무수히 많은 잎사귀 요정 정령사들이다.
사실 정령왕의 계약을 시도하기에는 불안한 환경이다.
내 기억에는 좀 더 미래의 대륙에서도 이런 행사가 있다면 구름처럼 많은 이들이 몰려와 지켜보곤 했다.
그 과정에서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연구자들, 단순히 정령왕이라는 이름값에 구경하고자 오는 부호들.
정령왕의 계약이란 것은 계약식이라는 이름으로 온 세상에 알려지는 행사다.
지금 상태는 약식 중에서도 약식이다. 결혼식을 청정수 떠놓고 입술 박치기로 때우는 수준.
늘 그렇지만 참으로 이가 자주 없는 세계다. 훌륭한 유배자는 잇몸으로 음식을 씹는 행위에 숙달된 유배자다.
나는 충분히 훌륭하다.
손에 들고 있는 보석이 흔들린다.
나의 정신은 정령계에 진입했다.
정령계는 어찌 보면 거 뭐시냐 디지털 월드? 그런 느낌이다.
시각이나 청각 등 육신의 오감은 무의미해진다.
그저 직관적으로 머리에 때려 박히는 정보의 바다 사이를 헤맬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시각에 의존하기에 받아들이는 정보를 시각화하게 된다.
내 눈에 보이는 정령계는 그래서 온통 정사각형이 가득한 지뢰찾기 게임의 판 같은 곳이었다.
원소들이 온 사방을 맴돈다. 불타고, 번개가 튀며, 땅이 흔들린다. 냉기가 스며 나오는 곳도 있었다.
방향을 정하자, 촉매가 바람의 결정이니 찾아야 할 것도 바람의 정령왕이다.
한 발 한 발, 내딛기 시작한다. 조금이라도 더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향하여.
* * *
펑 하고 작은 폭발이 일었다.
사제는 깜짝 놀라 눈을 치켜떴으나 폭발의 발생지는 계약을 수행 중인 인간이 아닌 옆의 마법사였다.
팔에 불이 붙었다. 물의 정령 몇이 서둘러 날아가 불을 끈다.
남은 상처는 이미 입에 머금고 있을 기적의 샘물에 의해 나아간다.
그리고 다시 한번 번개가 튄다.
이번엔 머리다. 마법사의 몸이 크게 경련한다. 머리카락이 모조리 타버렸다.
치유 마법도 관여할 수 없는 영역이다. 정령들의 활동은 몰라도 인위적인 마력이 작용한다면 계약식 자체가 흔들릴 수가 있다.
사제를 포함한 잎사귀 요정들은 숨죽이고 마법진의 중심을 바라보았다.
아주 드문 일이었다.
조용한 잎사귀 요정이라니.
그런 가운데도 조금 떨어진 곳에서 트롤들의 괴성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 * *
마법사는 좀 살살하면 안 되냐고 따지고 싶은 기분을 참았다.
마법의 신의 이 권능은 본디 대마법을 여럿이서 발동시킬 때의 일체감을 위해 존재한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부담하는 식은 아니다. 그것을 기도를 통해 강제적으로 자신이 대부분을 부담하도록 했다.
마법의 신은 아주 높은 확률로 전용 접미인 지식을 달고 나온다. 이번 회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신도의 눈을 통해 정령왕 계약식을 지켜본다는 사실에 만족스러워했고, 기꺼이 그것을 위해 신좌에 저항했다.
몸에 냉기가 감돈다. 요정 마법사는 의식적으로 얼어붙는 몸의 통각을 차단하려 노력하며 생각했다.
왜 이런 일이 되었을꼬?
이미 벌어진 일이 너무 거대하니 그것을 수습하기 위해서 벌어지는 일도 거대해진다.
새로운 서버가 열리고 두 달이 채 되기 전부터 이런 식의 급격한 정세 변화가 일어나는 경우는 처음 보았다.
대다수의 유배자들은 처음에는 휘말릴 뿐이다.
그렇기에 서버 초기의 대륙은 어느 정도 안정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
그것이 일촉즉발의 상황일 수는 있으나 대대적인 전쟁이 벌어질 정도는 아니다.
오늘 여기서 이겨내더라도 이 여파는 널리 퍼져나갈 것이다.
어쩌면 왕국에서 찾아오는 고참들조차 휘말릴지도 모르겠다.
그들 중에서도 [종족 메인스트림]을 찾고 있으나 찾지 못하여 헤매기만 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 * *
약식인 것으로도 모자라 시간제한이라는 제약도 걸려 있다.
혼돈의 여신을 다시 보게 된다면, 아니, 그래 아예 실제로 찾아가서 울 때까지 꿀밤을 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 짓을 하는 것보다 그냥 후퇴한 뒤에 10층을 어찌할지는 그때 생각해 보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물론 성공한다면 여러모로 비장의 패를 하나 더 손에 쥐는 것이긴 하다.
하지만 10층이 어떤 곳인지 아직 모르는데, 단지 짝수 보스층이라는 것만으로 너무 쫄아 있는 거 아닐까?
지금 하고 있는 이 짓거리가 더 힘들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발을 잘못 디뎠다.
물론 내 육신은 정좌한 채 앉아만 있다.
발을 잘못 디뎠다는 것은 시각화되어 인식하는 정보일 뿐.
어둠이 피어난다. 어둠의 원소를 건드렸군. 이건 정신건강에 아주 해로운데.
인상을 팍 썼다.
이것도 넘어가면 옆의 영감님이 버틸까?
* * *
사제는 재빨리 마법사를 끌어내었다. 갑자기 어둠이 뭉클뭉클 피어나더니 이내 쓰러져 버렸다.
오래 사는 만큼 요정들 역시 어둠의 무서움은 안다.
유배자는 더하리라는 것 또한 안다.
요정들이야 부끄러워 죽을 것 같은 기억을 강제로 회상하게 되는 식으로 우울함에 빠질 뿐이다.
하지만 유배자의 기억에는 훨씬 더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것들이 도사리고 있으리라.
그래도 기절한 마법사의 얼굴은 평온하다.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스스로를 기절시켰다. 방법은 모르겠지만 현명한 판단이었을지도 모른다.
번개가 내려친다.
지금까지의 소소한 스파크와는 차원이 다르다.
계약식을 위해 설치된 마법진의 방어가 흔들릴 정도였다.
꽤나 깊이 들어갔다. 정령계의 깊숙한 곳, 어느 상위정령을 건드린 것인지도 모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요정의 기나긴 세월 동안 늘어질 대로 늘어지는 시간 감각도 이 순간만큼은 인간 이상으로 팽팽하게 조여졌다.
시간을 세라고 띄워둔 작은 새 모습의 불의 정령이 울음소리를 낸다.
다섯 번.
5분밖에 지나지 않았다고?
몇 날 며칠을 진행할지도 모르는 것이 계약식이다.
정령왕을 찾는 것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새삼스레 신앙이 깊어짐을 느꼈다.
자연의 신이시여 당신께서는 언제나 옳으시군요.
* * *
슬슬 온 사방이 치명적인 수준의 지뢰밭들이다.
이미 수차례 패널티가 터졌지만 치명적인 것들은 나오지 않았다.
악마라도 나타났다가는 바로 파토다. 그런 일이 여태 없어 다행이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꽤 그런 일이 쉽게 일어난다.
최상급 정령들도 드문드문 느껴지기 시작했다.
정령계 어딘가에 도사리고 진입하는 정령사를 노려보는 것들.
바람이 부는 곳으로 향한다.
속도는 조금 늦추었다.
이런 곳에서 빠르게 내달렸다가는 아무도 감당 못 할 재앙이 나타난다.
딱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실수했다.
* * *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공간이 갈라졌다.
정령들이 날아든다.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상급 정령들 넷이 날아가 열리는 공간을 차단한다.
그 사이로 불길이 낼름거린다. 지옥의 아가리가 슬쩍 입을 열었다.
고위 악마는 아니었다. 데빌이나 데몬 같은 것이 나타났다면 닥쳐오는 트롤들 이상으로 문제가 생긴다.
문을 열고 나타나려는 악마를 정령들이 어떻게든 밀어낸다.
공간이 점점 좁혀지고 있다.
더 강한 것이 나타난다면 어떨지 모른다.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 * *
혹시 이 정도면 되는 거 아닐까?
문이 보였다.
바람의 대정령이다.
저 녀석 정도만 되어도 어느 정도 틀어막는 건 문제 없지 않을까?
잠깐 고민한 다음 포기하고 전진했다.
바람을 따라.
바람의 흐름을 좇아.
* * *
숲의 귀퉁이가 마침내 무너져 내렸다. 그루터기 요정들이 계약식이 진행되는 장소까지 후퇴해 왔다.
잎사귀 요정 몇몇이 귀 모양이 다른 동족에게 물었다.
"인간의 성 쪽으로 유인할 수는 없었어?"
"해보았지만 이미 요정 냄새를 맡고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그, 잎사귀 여러분은 향이 좀 강렬하니까요."
"지금 냄새난다는 거야?"
샐쭉해지는 잎사귀 요정의 머리를 누군가 콱 쥐어박는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루터기 여러분. 지금부터는 저희도 합세합니다."
마법진에 흘러든 마력은 이제 여유가 있다. 인간이 정령계에서 전진하는 속도가 느려진 덕이다.
사제는 남은 마력을 쥐어 짜내 상급 정령 여럿을 소환했다.
트롤 하나가 나무 사이로 고개를 내민다.
눈에 얼음 파편이 박히고는 울부짖었다.
그루터기 요정 하나가 마법진을 보았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있는 인간을 보았다.
"어라? 저분은……."
"아시는 분이십니까?"
"네, 저희 마을을 구해주신 분인데."
유배자란 별의별 곳에 다 튀어나오는 법이지.
사제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 * *
마력의 공급이 끊어졌다. 느리게 움직이고 있으니 문제는 없다만, 바깥에 일이 생긴 모양이다.
트롤기병들이 슬슬 도착한 걸까? 자리를 좀 옮겨서 몰래 진행했으면 어땠을까?
아닌가? 그러면 늦어져서 그것대로 문제였을지도.
후, 다른 생각은 하지 말자. 다시 조금씩 전진한다.
이제는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더 이상 칸이 아니다.
못해도 대정령 정도는 되는 수준의 정령들만이 문을 가지고 있다.
온 사방이 문이다.
이쯤에서 결정을 모조리 소모하자.
그렇게 마음먹자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결정화되어 뭉쳐져 있던 바람이 나를 통해 정령계로 다시 흘러든다.
휘몰아치는 바람에 정령들이 웅성이기 시작한다.
그들에게는 아주 맛있는 먹잇감으로 보일 것이다.
바람이 잦아들기 전에 좀 더 깊숙한 곳으로 가는 길을 발견해야 한다.
어디선가 바람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정령들이 웅성인다.
그쪽 방향을 보았다.
이거 페이크군.
저건 그냥 많이 뭉쳐 있어서다.
정령왕이 있다는 게 아니다. 저런 것에 속으면 바로 실패하고 목숨마저 위태롭다.
잠깐, 그러면.
반대로 가봐야겠군.
이 생각은 단순한 느낌.
상급 정령들의 분포가 이상하게 적은 방향이었다.
상급 정령은 아직 계약하지 않은 중급 정령 여럿이 합쳐져 태어난다.
정령왕 역시 마찬가지다.
대정령들이 모여 태어나는 것이 정령왕이다.
이미 다른 원소는 끼어들지도 못할 정도로 바람만이 가득한 이곳에 기이할 정도로 공백이 큰 지대가 있다.
나는 달렸다.
몇 개의 잘못된 길은 그냥 밟았다.
바깥에 악마가 나타나건 심연으로의 추방이 발동하건 일단 정령왕을 붙잡는다면 바로 해결할 수 있다.
온갖 캐스팅 패널티로 몸이 요동치는 것을 느끼며 계속 달린다.
그 끝에, 이제 막 태어난 것 같은 거대한 힘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더 빨리 달렸다. 마력이 급속도로 소모된다.
처음에 5초 정도를 생각했었다.
하지만 마법의 신의 지원이 있고, 수많은 요정들의 지원이 있어 어떻게 9초 정도는 되려나 싶었다.
빠르게 줄어든다.
정령왕을 가동할 수 있을 시간이 3초 간신히 남았다고 생각될 때, 도달했다.
나는 소리쳤다. 아니, 거의 윽박질렀다.
[지금 엄청 급하니까 빨리 대충. 아무 이름이나 받자? 응?]
정령왕이 뭐라고 반응하기도 전에 이름을 불렀다.
[실피드! 실피드 해!]
다시 반응하기도 전에 형태를 구현했다.
[역시 짱 세 보이려면 드래곤이지!]
은빛용의 형태로 변해간다. 신생 정령왕이라 정령으로서의 본능이 미약하다.
좀 약할 거라는 점에서는 아쉽지만 계약이 스피디하다는 점에서는 훌륭하다.
[빨리 물질계로 나가자!]
반항하려는 조짐은 모두 사전에 차단. 이름도 지어줬고 형태도 만들어줬다.
그대로 머리를 들이박았다.
[자 이게 나야. 알겠지? 빨리 계약을 끝내자.]
기세에 떠밀린 것처럼 정령왕이 승낙했다.
정신이 빨려들 듯 육신으로 돌아온다.
무언가 다른 강대한 힘과 함께.
눈을 뜨자 트롤과 공룡들이 보였다.
요정 몇몇이 벌써 곤봉에 맞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거나, 겁에 질려 주저앉은 모습이 보였다.
모두 한순간에 들어온 장면이다.
나는 그 자세 그대로 정령왕을 움직여야 했다.
남은 가동 시간 3초.
좀 멀리 여단 본부의 주둔지까지 조져야 한다. 거기에 뭐가 더 있을지 모른다.
트동트랑 성녀는 거기에 없겠지? 제발.
아이 씨, 있어도 어쩔 수 없고. 그냥 요정에 붙지 뭐.